전문가 칼럼
하이엔드 시계, 최고의 기술은 우주를 향한다 [이윤정의 언베일]
- 무한 기술 경쟁 돌입…신소재·구조 등 공동 개발
장인 손끝에서 완성…인간·기술 조화 ‘끝판왕’
[이윤정 작가·노블레스 전 편집장] 하이엔드(최고급) 시계의 가치는 장인의 손길과 복잡한 기계식 무브먼트에서 비롯된다. 수백개의 부품이 맞물려 오차를 최소화하는 정밀함은 하이엔드 워치 메이킹의 상징이었다.
하이엔드 시계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시절, 스위스의 한 시계 브랜드 출장에 동행한 저널리스트는 “시계는 자동차와 같아서 기계공학을 알면 훨씬 이해하기 쉽다”고 말해 필자의 기를 죽이기도 했다.
설계부터 제작까지…IWC, 우주 비행용 시계 선봬
기술에 기반을 둔 하이엔드 시계는 경쟁이 심화하면서 기술력의 수준도 나날이 진화했다. 주요 시계 브랜드는 ▲우주 탐사 ▲항공우주 산업 ▲모터스포츠 ▲신소재 공학 등 최첨단 기술을 시계에 담아내며 무한 경쟁에 돌입한 지 오래다.
1969년 인류가 처음 달에 착륙할 당시 우주 비행사가 착용한 오메가 시계는 오메가뿐 아니라 시계 산업 전체에 놀라움을 줬다. 오메가가 지금까지도 혁신적인 기술의 상징으로 대표되는 이유다.
꿈으로만 여겼던 상업용 우주 탐사와 여행이 가시화되면서 시계 산업에서도 우주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지금까지 우주를 위한 시계는 지상용으로 제작된 것을 항공시계로 개조한 게 대부분이었다.
최근에는 우주 비행에 필요한 특정 요구 사항을 위해 처음부터 설계된 시계를 내놓는 상황이다. 올해 IWC 샤프하우젠(IWC Schaffhausen, 이하 IWC)이 소개한 ‘파일럿 벤처러 버티컬 드라이브’(Pilot’s Venturer Vertical Drive)는 유인 우주 비행과 우주에서의 시간 측정이라는 목적을 위해 처음부터 설계 및 제작됐다.
파일럿 벤처러 버티컬 드라이브는 장갑을 착용한 우주비행사도 손쉽게 시계를 조작할 수 있도록 크라운 대신 혁신적인 회전 베젤 시스템을 적용했다. 가벼운 화이트 산화지르코늄 세라믹과 세라타늄 소재로 제작해 내구성과 온도 변화에 대한 저항성을 높였다. 세라타늄은 티타늄의 가벼움과 구조적 안정성에 세라믹의 높은 경도와 스크래치 저항성을 결합한 소재다.
IWC의 브랜드 파트너이자 차세대 우주정거장을 개발 중인 미국 우주개발 기업 바스트(Vast)의 엄격한 테스트를 거친 파일럿 벤처러 버티컬 드라이브는 세계 최초의 상업용 우주정거장이 될 헤븐-1(Heaven-1)으로의 비행을 위해 바스트의 우주 비행 인증도 획득했다.
파일럿 벤처러 버티컬 드라이브는 IWC의 브랜드 파트너인 미국 우주개발 기업 바스트(Vast)의 테스트를 거쳐 차세대 상업용 우주정거장 헤븐-1(Heaven-1) 비행을 위한 우주 비행 인증도 획득했다.
크리스 그레인저-헤어 IWC 최고경영자(CEO)는 “IWC의 엔지니어링 부서인 XPL이 파일럿 벤처러 버티컬 드라이브를 개발할 때 단순히 기존의 시계를 우주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니다”며 “우주비행사를 위한 툴 워치(tool watch)라면 ▲기능성 ▲조작의 용이성 ▲시간 표시 ▲소재 구현의 측면에서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 백지상태부터 정의해 나온 시계”라고 강조한다.
리차드 밀, 시계에 ‘항공우주 산업·F1 기술’ 적용
신소재 기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브랜드로 리차드 밀(Richard Mille)을 빼놓을 수 없다. ‘손목 위의 레이싱 머신’이라는 별명을 가진 리차드 밀은 항공우주 산업과 포뮬러 원(F1) 기술을 적극적으로 시계 제작에 도입한 브랜드다.
새로운 RM 55-01 매뉴얼 와인딩은 5g 미만의 초경량 칼리버 RMUL4를 탑재했다. 오토매틱 무브먼트에는 필수적인 로터가 없는 수동 와인딩 시스템을 채택해 빛이 무브먼트 사이를 자유롭게 통과하며 스켈레톤 무브먼트의 매력을 한껏 발산한다.
특기할 만한 소재는 베이스 플레이트에 사용된 5등급의 티타늄으로, 항공우주 산업에서 널리 사용되는 신소재다. 5등급의 티타늄 소재는 리차드 밀의 시계에 전반적으로 사용되는 소재지만, 이 소재를 가공하는 건 여전히 큰 도전이다. 소재의 경도가 높은 데다 리차드 밀의 엄격한 기준 때문에 초기 작업인 절삭부터 난제다.
흥미로운 부분은 이러한 기술 경쟁이 단순히 ‘비싼 시계’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시간을 측정하는 도구에서 시작된 기계식 시계는 인류가 도전하는 극한의 환경을 함께 탐험하는 기술 플랫폼으로 진화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많은 브랜드가 ▲항공우주 기업 ▲자동차 제조사 ▲F1팀 ▲연구기관 등과 공동 개발을 통해 새로운 소재와 구조를 시험 중이다. 오메가는 여전히 미 항공우주국(NASA)의 달 탐사 역사와 함께 우주 시계의 상징적 위치를 이어가고 있다. 위블로는 사파이어 크리스털과 컬러 세라믹 가공 기술을 발전시키는 중이다.
필자는 스위스의 하이엔드 시계 워크숍에 방문할 기회가 많았다. 먼지 한 점도 용납하지 않는 깔끔하고 최첨단의 설비를 자랑하는 워크숍에 가면 하얀 가운을 입은 장인들이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수많은 브랜드 워크숍 책임자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의 고민이 “숙련된 장인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점에 놀라곤 한다. 가장 최신의 기술을 실제로 시계로 구현하는 건 결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다.
우주로 향하는 기술력을 갖췄지만 여전히 사람의 손으로 제한된 수량만 고집하는 하이엔드 시계. 인간과 기술의 조화를 이보다 잘 설명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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