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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광고모델 시대, 성패를 가르는 단 하나의 질문은 [허태윤의 브랜드스토리]

전문가 칼럼

지난해 여름, 미국 패션잡지 보그에 낯선 얼굴 하나가 실렸다. 이름은 비비안. 금발에 흠 잡을 데 없는 미소, 완벽한 비율을 가진 이 여성은 미국 패션 브랜드 게스의 광고 모델이었다. 그런데 이 모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인공지능이 그려낸 얼굴이었다. 광고가 공개되자마자 SNS에는 분노에 가까운 댓글이 쏟아졌다. "우리는 이제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과 내 얼굴을 비교해야 하냐"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는 정반대의 반응을 얻은 인공지능(AI) 광고가 있었다. 영어교육 브랜드 야나두가 만든 짧은 영상 속에는 어눌한 발음으로 "give me coffee"라 말하는 할아버지가 등장한다. 카페에서 저렇게 말하면 무례하게 들릴 수 있다는 걸, 이 어색한 AI 할아버지가 우스꽝스럽게 짚어준다. 이 영상은 놀림받기는커녕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웃음과 함께 널리 퍼졌다. 같은 기술, 같은 시기, 정반대의 운명. 무엇이 갈랐을까.AI, 이미 캐스팅 디렉터의 첫 번째 선택지먼저 분명히 해둘 게 있다. AI 광고 모델은 이제 '쓸까 말까'를 고민하는 대상이 아니다. 이미 대세가 됐다. 강원도의 한 리조트는 최근 서양 판타지풍 캐릭터가 등장하는 로맨스 드라마를 유튜브에 연재했는데, 등장인물이 전부 AI로 만들어졌는데도 '신이 빚은 얼굴'이라는 호평 속에 두 편 합쳐 100만 조회수를 넘겼다. 국내 패션 브랜드들의 움직임은 더 과감하다. 한 캐주얼 브랜드는 이번 시즌 백인·흑인·동양인에 성별과 연령까지 다양화한 열두 명의 AI 모델을 동시에 선보였고, 또 다른 브랜드는 아예 전속 AI 모델을 데려다 시즌 화보를 맡겼다. 사람 모델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규모와 속도다.이유는 단순하다. 유명 모델 한 명을 쓰려면 계약금부터 촬영 스태프, 장소 대여까지 최소 몇천만원, 톱스타라면 억단위가 든다. 게다가 사람 모델은 예측 불가능한 위험을 함께 안고 온다. 최근 몇 년 사이 국내에서도 배우들이 각종 사생활 논란에 휘말리면서, 광고주가 뒤늦게 계약을 해지하고 손해배상 소송까지 벌이는 일이 잇따랐다. 반면 AI는 스캔들도, 지각도, 나이 드는 일도 없다. 시장조사기관 마켓엔마켓은 산업·유통·엔터테인먼트 전반에서 쓰이는 AI 아바타 시장이 2025년 약 1조원에서 2032년 8조원 규모로, 매년 33%씩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이 흐름은 대기업보다 오히려 자본이 얇은 스몰 브랜드에 더 절실하다. 수억원대 모델료가 부담스러운 중소기업 입장에서 AI 모델은 사업을 키울 수 있는 매력적인 지렛대다. 대기업이라도 작은 브랜드를 많이 가지고 있는 편의점 GS25는 가상 아이돌과 협업한 빵·과자 시리즈로 130만 개 넘게 팔았고, 한 대형마트는 가상 걸그룹과 만든 과자를 온라인 공개 3분 만에 완판시켰다. 사람 모델을 쓸 여유가 없던 작은 브랜드일수록, AI는 매출로 직결되는 무기가 되고 있다.문제는 AI를 쓰느냐가 아니라, 어떤 배역을 맡기느냐다. 비비안과 야나두 할아버지의 차이를 다시 들여다보면 답이 보인다. 흔히 "너무 완벽해서 게스가 실패했고, 어설퍼서 야나두가 성공했다"고들 말하지만 사실 그게 핵심이 아니다. 완성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는 드라마의 주연 자리에 앉았고 하나는 조연 자리에 머물렀다는 차이다.광고업계는 브랜드를 대표하는 모델을 흔히 '앰버서더', 즉 대사(大使)라 부른다. 국가를 대표해 파견되는 외교관처럼, 앰버서더는 브랜드의 정체성과 가치를 자기 존재로 체현하는 자리다. 게스는 비비안에게 바로 이 앰버서더, 극으로 치면 주연 배우 역할을 맡겼다. 보그라는 무대는 오랫동안 "이런 모습이 아름답다"는 기준을 제시해온 자리였고, 주연은 그 기준을 자기 몸으로 짊어진다. 관객은 주연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자신과 견준다. 그런데 그 주연 자리에, 애초에 도달할 수조차 없는 존재하지 않는 얼굴을 앉혀버렸다. 사람들이 화가 난 건 얼굴이 가짜라서가 아니라, 브랜드를 대표해야 할 주연이 비교조차 성립하지 않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AI에게 대본은 주되, 주인공 자리는 내주지 마라반면 야나두는 AI 할아버지에게 주연 자리를 준 적이 없다. 그 얼굴은 조연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오해받을 수 있어요"라는 메시지가 잘 전달되도록 돕는 역할일 뿐, 극을 이끌거나 브랜드를 대표하지 않았다. 좋은 조연은 관객의 시선을 자기가 아니라 이야기 쪽으로 돌린다. 야나두의 AI 캐릭터가 정확히 그랬다.같은 실수는 해외에서도 반복됐다. 2024년 크리스마스 시즌, 코카콜라는 30년 가까이 이어온 자사의 상징적인 크리스마스 광고를 통째로 AI에게 맡겼다. 눈 내리는 마을, 트럭을 몰고 오는 산타, 이 모든 장면이 AI가 그린 그림이었다. 결과는 싸늘했다. "AI가 산타를 죽였다"는 조롱까지 나왔다. 이 캠페인 속 산타는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라, 30년간 코카콜라라는 브랜드 그 자체를 대표해온 주연이었다. 그 자리를 AI에게 맡긴 것이 화근이었다.반대로 앞서 언급한 리조트의 AI 드라마, GS25의 협업 캐릭터, 대형마트의 가상 걸그룹은 모두 조연의 자리에 머물렀다는 공통점이 있다. 리조트 드라마 속 인물은 브랜드의 정체성이 아니라 로맨스라는 이야기를 실어 나르는 조연이었고, 편의점과 마트의 가상 캐릭터들은 브랜드 그 자체가 아니라 특정 상품과 잠깐 손잡은 조연이었다. 아무도 이 조연들에게 브랜드를 대표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았기에,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았다.그렇다면 지갑이 얇은 브랜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AI에게 앰버서더, 즉 주연 자리를 맡기지 않으면 된다. 값비싼 톱모델이 서 있던 그 자리를 AI로 억지로 대체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대신 정보를 쉽게 설명하고, 재미있게 웃기고, 이야기를 실어 나르는 조연의 자리를 찾아가면 된다. 그 자리에서는 AI든 사람이든 큰 차이가 없다.다만 조연으로 쓸 때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원칙은 있다. 올해 6월부터 공정거래위원회는 AI로 만든 광고에는 이를 분명히 표기하도록 심사 지침을 바꿨다. 실제 사람이 아닌 존재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만큼 그 메시지에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기만 광고로 흐를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AI를 조연으로 쓰더라도, 그 조연이 누구인지는 관객에게 정직하게 알려야 한다.AI 광고 모델은 이제 대세가 됐다. 이 흐름을 거스를 수 있는 브랜드는 많지 않다. 다만 다음 광고를 준비하기 전에 딱 한 가지만 스스로 물어보면 된다. 이 AI에게, 나는 지금 주연 자리를 내주려 하는가, 조연 자리를 맡기려 하는가.

2026.08.30 10:00

4분 소요
‘★’하나에 예약·가격이 달라진다…‘맛집 권력’은 누가 만드나

전문가 칼럼

맛있는 식당을 찾는 방법은 많다. ▲포털 검색 ▲블로그 ▲유튜브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지인의 추천 등이다. 유명한 식당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그곳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보가 많아질수록 역설적으로 어느 식당을 믿어야 할 것인지는 더 어려운 문제가 됐다. ‘맛집’이라는 이름 아래 광고와 콘텐츠, 개인적 취향과 일시적 유행이 뒤섞이기 때문이다.그래서 미식 가이드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미식 가이드로는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미쉐린 가이드’와 사용자 빅데이터와 전문가 평가를 결합한 ‘식신’, 국내 최초의 본격적인 레스토랑 평가서로 자리 잡은 ‘블루리본 서베이’ 등을 꼽을 수 있다. 좋은 식당을 가려낸다는 목표는 같지만 평가 방법은 상당히 다르다. 어느 하나가 절대적으로 옳다기보다 ‘전문가의 눈’과 ‘평가단의 집단지성’이라는 서로 다른 렌즈로 대한민국의 미식 지도를 그리고 있는 셈이다.타이어 회사가 만든 세계 최고 미식 권력미쉐린 가이드는 프랑스 타이어 회사 미쉐린이 자동차 여행을 활성화하기 위해 1900년 운전자들에게 무료로 나눠준 여행 안내서에서 출발했다. 주유소와 정비소, 호텔, 식당 정보를 실어 자동차 여행을 늘리고 궁극적으로 타이어 소비를 확대하려는 목적이었다. 이후 1926년 별 제도가 도입됐고 1931년 현재와 같은 1~3스타 체계로 발전했다.오늘날 미쉐린에서 ▲별 하나는 훌륭한 요리를 제공하는 레스토랑 ▲별 두 개는 일부러 찾아갈 가치가 있는 뛰어난 요리 ▲별 세 개는 그 식당의 음식을 맛보기 위해 특별히 여행할 가치가 있는 탁월한 요리를 뜻한다. 미쉐린은 ▲재료의 품질과 맛의 조화 ▲조리 기술의 완성도 ▲요리에 드러나는 개성 ▲시간과 메뉴 전반에 걸친 일관성을 평가한다고 설명한다.한국에서는 2016년 ‘미쉐린 가이드 서울 2017’이 처음 발표됐고 2024년 부산으로 영역을 넓혔다. 미쉐린 공식 자료상 2026년은 한국 진출 10주년에 해당한다. 현재 미쉐린 공식 사이트에는 한국의 스타 레스토랑 39곳이 올라와 있다.미쉐린의 등장은 한국 미식계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서울과 부산의 레스토랑들이 세계 미식 여행자의 지도에 올라가기 시작했고, 한식 파인다이닝은 국제적인 평가의 언어를 획득했다. 한국적 식재료와 발효, 장, 제철 음식, 궁중음식 등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식당들은 세계 미식계에서 한국 음식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문화적 창구가 되고 있다.하지만 미쉐린이 대한민국 전체의 미식 지도를 대표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미쉐린의 한국 평가 대상은 서울과 부산에 집중돼 있다. 광주와 대구·대전·제주·전주·강릉을 비롯한 전국 수많은 지역의 식당들은 애초에 같은 평가 무대에 올라와 있지 않다.전문 평가원이 모든 지역과 골목의 식당을 찾아가는 데에는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 반면 수많은 이용자의 선택은 전국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오랜 기간 동네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노포와 지방의 숨은 고수, 특정 메뉴 하나를 수십 년 지켜온 전문점도 대중의 평가 속에서는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커진다.결국 맛에는 단 하나의 정답이 없다. 평가 방식이 다른 가이드가 존재하기 때문에 소비자는 서로 비교하며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선택할 수 있다. SNS가 만든 맛집, 별이 만든 권위미식 가이드와 함께 오늘날 맛집을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힘은 SNS와 알고리즘이다.사람들이 길게 늘어선 식당을 보면 ‘저렇게 기다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줄이 길다는 사실이 음식의 맛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훌륭한 음식이 줄을 서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방송과 유튜브, SNS 마케팅이 줄을 만들 때도 있다.요즘 맛집은 입소문만으로 탄생하지 않는다. ▲유튜브 영상 ▲방송 프로그램 ▲숏폼 등이 평범했던 식당을 하루아침에 ‘성지’로 만들기도 한다. 소비자는 음식을 먹기도 전에 ‘유명한 식당’이라는 이미지를 먼저 소비한다.여기에는 밴드왜건 효과도 작용한다. 많은 사람이 선택한 것을 좋은 것으로 판단하는 심리다. 어렵게 예약하고 오랫동안 줄을 선 뒤에는 매몰 비용 효과도 생긴다. 기대만큼 맛있지 않아도 “이 정도 기다렸으니 분명 괜찮은 곳일 것”이라고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기 쉽다.그래서 좋은 미식 가이드는 단순히 ‘지금 가장 유명한 곳’을 보여주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화제성과 광고, 일시적 유행을 걷어내고 실제로 방문했을 때 만족할 가능성이 높은 곳을 골라내야 한다.문제는 가이드의 권위가 커질수록 별 하나의 힘도 지나치게 커진다는 것이다. 별을 받으면 예약 전화가 폭주하고 해외여행객이 몰려온다. 식당의 가격과 브랜드 가치가 올라가고 셰프의 경력까지 달라진다. 반대로 별을 잃으면 단순한 한 해의 평가가 아니라 셰프의 실패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프랑스의 유명 셰프 세바스티앙 브라는 2017년 자신의 레스토랑 르 쉬케가 20년 가까이 유지하던 미쉐린 3스타 평가에서 제외해 달라고 요청했다. 매일 내보내는 수백 접시 가운데 어느 접시를 익명의 평가원이 먹게 될지 모른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요리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미쉐린은 결국 2018년 가이드에서 식당을 제외했다.미식 가이드가 셰프에게 주는 압박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 프랑스 셰프 베르나르 루아조다. 그는 자신의 레스토랑에서 미쉐린 3스타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2003년 경쟁 미식 가이드인 고미요가 그의 점수를 낮췄고, 미쉐린에서도 별 하나를 잃을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심리적·경영적 압박을 받던 그는 결국 52세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그는 사망 당시에도 미쉐린 3스타를 유지하고 있었고 개인적·경영적 요인을 포함한 복합적인 배경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죽음은 미식 가이드의 평가가 한 사람의 삶과 사업에 어느 정도까지 무게를 가질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별은 본래 소비자에게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기호다. 그러나 어느 순간 셰프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훈장이 되고, 투자자와 언론에는 식당의 경제적 가치를 결정하는 숫자가 되며, 직원들에게는 매일 실수해서는 안 되는 압박으로 바뀔 수 있다. 평가받지 않을 권리는 있는가미쉐린을 둘러싼 오랜 논쟁은 평가 과정의 비밀주의다. 평가원의 익명성은 외부 청탁을 차단하고 공정성을 지키기 위한 장치이지만 누가, 언제, 몇 번 방문했고 어떤 판단 과정을 거쳤는지를 외부에서 검증하기 어렵게 만든다.한국에서도 미쉐린 서울판 출범 이후 공정성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2017년 국내 보도에서는 한국관광공사가 서울 가이드 발간과 관련해 미쉐린 측에 수년에 걸쳐 약 20억원을 지급하기로 한 계약이 알려졌다. 관광 마케팅 비용을 받는 가이드가 평가의 독립성을 완전히 유지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미쉐린은 사업·마케팅 협력과 레스토랑 평가는 별개이며 선정 과정은 독립적으로 운영된다는 태도를 유지해 왔다.2019년에는 이른바 ‘미쉐린 브로커’ 의혹이 불거졌다. 한식당 ‘윤가명가’의 윤경숙 대표는 어니스트 싱어가 미쉐린 별 획득을 위한 컨설팅을 제안하며 상당한 비용을 요구했다고 주장했다. 미쉐린은 싱어가 자사 직원이나 공식 관계자가 아니며 별 선정과 관련해 레스토랑으로부터 어떠한 금전도 받지 않는다고 부인했다.한국에서 미쉐린의 권위에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인물은 ‘리스토란테 에오’의 어윤권 셰프다. 한때 미쉐린 1스타를 받았던 그는 서울판 선정의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했고,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레스토랑이 가이드에 등재됐다며 미쉐린 트래블 파트너를 고소했다.검찰은 사건을 각하했지만 논쟁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남겼다. 식당에는 평가받지 않을 권리가 있는가. 미쉐린은 가이드가 셰프를 위한 상장이 아니라 소비자를 위한 독립적인 정보이므로 식당의 동의 없이도 평가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2018년 국정감사에서는 ‘미쉐린 가이드 서울 2018’에서 오탈자와 번역 오류, 사실관계 오류 등을 포함해 130건의 문제가 발견됐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미 폐업한 식당이 가이드에 남아 있었고, 광장시장의 유명한 육회골목을 영문판에서 부정적인 의미의 ‘infamous’(악명 높은)로 표현한 사례도 있었다.그렇다고 대중의 선택이 언제나 정답인 것도 아니다. 대중을 기반으로 한 가이드는 다수의 경험을 반영한다는 강점이 있지만 인기와 맛은 완전히 같은 개념이 아니다. 이미 유명한 식당일수록 더 많은 평가가 쌓이고 다시 상위에 노출될 가능성이 커진다. 광고성 리뷰와 조직적인 평가, 일시적인 방송 효과까지 더해지면 결과가 왜곡될 수도 있다.전문가에게도 편견이 있고 대중에게도 쏠림이 있다. 소수 전문가 방식의 약점은 폐쇄성이고 대중 평가 방식의 약점은 인기 편향이다. 평가단 방식 역시 특정 취향이 집단화할 가능성을 완전히 피하기 어렵다. 가장 좋은 미식 생태계는 하나의 가이드가 지배하는 구조가 아니라 서로 다른 방법의 가이드가 경쟁하고 검증하는 구조에 가깝다. 별은 목적지 아닌 이정표여야 한다미식 가이드의 그림자가 존재한다고 해서 가이드 자체의 가치를 부정할 수는 없다. 좋은 미식 가이드는 소비자의 탐색 비용을 줄여준다. 처음 가는 도시에서 수천 개의 음식점 가운데 실패할 확률을 낮춰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미식 가이드는 좋은 식당을 세상에 발견시키기도 한다. 막대한 광고비를 쓸 수 없는 작은 식당이나 지방의 노포, 한 분야를 수십 년 지켜온 장인이 객관적인 평가를 통해 이름을 알릴 수 있다. 방송과 SNS의 유행을 타지 않더라도 꾸준한 맛과 품질이 인정받는 길을 만들어준다.무엇보다 미식 가이드는 음식이라는 문화 자산을 세계에 알리는 강력한 매체다. 김치와 불고기에 머물던 외국인의 한식 인식은 이제 발효와 장, 제철 식재료, 사찰음식과 궁중음식, 현대 한식 파인다이닝으로 넓어지고 있다. 세계의 미식 여행객들이 서울과 부산을 찾는 데에도 국제적인 미식 가이드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전국 단위의 국내 가이드는 서울 중심의 미식 담론을 지방으로 확장할 수 있다. 각 지역의 맛을 꾸준히 기록하는 일은 관광을 넘어 지역 음식문화의 보존과도 연결된다.미식 가이드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한 가지 원칙은 더욱 중요해진다. 가이드는 음식의 최종 판결문이 아니라 소비자의 선택을 돕는 이정표여야 한다.세상의 모든 사람이 같은 맛을 좋아하지 않는다. 미쉐린 3스타라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최고의 식당일 수 없고, 수많은 사람이 찾는 식당이라고 해서 나에게 반드시 맛있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가이드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골목의 작은 식당이 누군가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최고의 식당일 수도 있다.앞으로 미식 가이드가 신뢰를 얻으려면 평가 방법은 더욱 정교하고 투명해져야 한다. 전문가의 전문성은 존중하되 권위주의에 빠지지 않아야 하고, 대중의 경험을 활용하되 인기 순위를 맛의 절대 기준으로 착각해서도 안 된다.별은 셰프를 옥죄는 족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별 때문에 식당의 본질이 바뀌어서도 안 된다. 별을 받기 위해 요리하는 것이 아니라 손님에게 좋은 한 끼를 제공하기 위해 요리한 결과가 별이어야 한다.소비자 역시 별과 조회 수, 대기 줄을 맹신하기보다 자신의 미각으로 마지막 판단을 내려야 한다. 좋은 미식 가이드는 “여기가 정답”이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대신 “이곳에는 한번 가볼 만한 이유가 있다”고 이야기한다.결국 미식 가이드가 비춰야 할 가장 밝은 별은 가이드북 표지나 식당 문 앞에 붙은 별이 아니다. 오랫동안 좋은 음식을 만들기 위해 주방을 지켜온 사람들과 그 음식을 먹고 다시 찾아오는 손님들이 만들어낸 신뢰가 진짜 별이다.그 신뢰를 제대로 찾아내고 기록하는 것. 그것이 대한민국 미식 가이드가 앞으로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일 것이다. 필자는 연세대 대학원에서 컴퓨터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난 2010년부터 푸드테크 기업 식신을 이끌고 있으며 한국푸드테크협회 회장과 한국푸드테크협의회 공동회장을 지냈다. 중앙대 산업창업경영대학원과 건국대 정보통신대학원에서 겸임교수로 활동했다.

2026.08.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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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의 속도는 부지가 아니라 절차에서 나온다[김현아의 시티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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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공원에 집을 지어도 되는가. 서울시가 지난 8월 20일부터 나흘간 시민 1000명에게 물었더니 반대가 63.9%, 찬성이 32.0%였다. 성별이나 연령, 거주 권역을 어떻게 나누어도 반대가 60%를 넘었다. 반대 이유로 꼽힌 것은 “단기적인 주택난 해소를 위해 미래 세대가 이용할 공원을 훼손하는 근시안적 정책”이라는 응답으로 81.2%였다. 시민들은 이 문제를 주택 문제가 아니라 도심 녹지를 어느 세대의 몫으로 남길 것인가의 문제로 보고 있었다. 공원을 헐어 그 자리에 집을 짓는 것에 대한 논란이 우리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국도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다. 다만 그들이 손대는 곳은 도심 공원이 아니라 도시 외곽 그린벨트다. 영국 노동당 정부는 2024년 집권 직후 국가계획정책체계(NPPF)를 개정해 보전 기능을 사실상 상실한 그린벨트를 ‘그레이벨트’(Grey Belt)로 재분류하고, 주택 목표를 채우지 못하는 지자체는 이 땅을 개발에 쓸 수 있게 했다. 임기 5년 내 150만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린벨트 정책까지 포함한 계획체계 전반을 손보기로 한 것이다. 우리 정부가 8·13 대책에서 수도권 그린벨트를 풀어 23만호를 신속 공급하겠다고 밝힌 것과 발상의 뿌리가 다르지 않다.최악의 주택위기, 150만호 공약이 나온 이유2024년 집권한 노동당은 스스로 “역대 최악의 주택위기를 물려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과장이 아니다. 2025년 잉글랜드의 중위 주택가격은 30만 파운드로 상용근로자 중위연봉의 7.6배였다. 2000년만 해도 4배 남짓이던 것이 20여 년 만에 두 배 가까이 벌어졌고, 런던은 10.6배다. 임대료도 기록을 새로 쓰고 있다. 2026년 7월까지 1년간 잉글랜드의 평균 월세는 3.8% 올라 1451파운드, 런던은 2317파운드가 됐다. 가장 심각한 지표는 2025년 말 현재 임시거처에 머무는 가구가 13만4210가구에 달했고 그 안에서 지내는 부양아동도 17만6130명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실제 늘어난 주택(신축+용도전환-멸실)은 정부가 필요하다고 보는 연 30만호에 못 미친다. 그래서 노동당은 150만호 주택공급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규모로만 보면 우리의 어떤 공급대책과 견주어도 작지 않다. 여기에 더해 공급의 속도를 높이기 위한 인허가 제도도 계속 손보고 있다.우리나라에서 주택공급 정책은 정권에 따라 그 부침이 가장 심한 분야 중 하나다. 도심의 재개발·재건축을 활성화하자는 측과 유휴부지나 도시 외곽의 신도시 개발을 주장하는 측이 늘 팽팽하게 맞선다. 그러나 어떤 쪽이든 모두 과거보다 사업 진행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과거 문재인정부에서 추진됐던 3기 신도시(2019년)가 7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진행 중인 것만 봐도 과거보다 신도시 공급의 속도가 늦어진 것은 분명하다. 서울시가 지방정부 차원에서 ‘신속-통합기획’을 추진하면서 재개발·재건축 사업 초기 단계의 소요 기간을 대폭 줄였지만, 중앙정부가 주도권을 쥔 세제와 금융, 규제지역 지정이 엇박자를 내거나, 조합원들 간의 갈등과 건설자재비·임금 상승 같은 비제도적 요인이 겹치면 아무리 인허가 기간을 줄여도 착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용산공원도 다르지 않다. 부지가 정해진다 해도 토양정화와 협의에 걸리는 시간이 결코 짧지 않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공급확대 정책의 핵심은 새로운 부지가 아니라, 기존에 추진되고 있는 사업들의 속도를 높이는 일이다. 그런 측면에서 부지를 정하는 데 정치적 자본을 쓸 것인지, 아니면 실질적인 공급의 속도를 높이는 데 쓸 것인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영국 노동당은 진보정당이면서도 공급 규제 완화를 주택공급의 도구로 선택했다. 수요억제와 수요관리에 정치적 자산을 쏟고 있는 우리와 사뭇 다른 접근이다.이동을 밀어준 쪽, 붙들어 맨 쪽…영국과 우리의 수요 정책영국 노동당은 원래 주택공급에 적극적인 정당이었다. 전후 영국의 카운슬 하우징, 즉 지방정부가 직접 짓고 직접 운영하는 공공임대주택의 대량 건설이 노동당의 오랜 전통이었다. 2019년 총선에서도 해마다 10만호의 카운슬 하우스를 짓겠다고 공약했고, 당시 주택 분야를 맡았던 인사는 “시장이 해내지 못했다”며 국가가 더 직접 통제하겠다고 말했다. 반면 영국 보수당은 국민들의 자가보유를 촉진하는 정책을 강조했다. 대처 정부의 주택구입권(Right to Buy)은 카운슬 하우스에 살던 세입자가 그 집을 할인된 가격으로 사서 자가로 옮겨가게 했고, 2013년의 헬프투바이(Help to Buy)는 신축주택 구입자에게 집값의 20%(런던은 최대 40%)를 지분대출로 빌려줬다. 물론 이 정책들은 부작용(주택구입권의 경우 공공임대주택 재고 감소)과 비판이 있었지만, 세입자가 자가로 옮겨가도록 돕는 정책이었다.우리나라의 수요 정책은 반대편에 서 있다. ‘1가구 1주택 실거주’를 사실상 규범으로 삼고 그 이외의 이동과 점유에는 무거운 세금과 대출 규제를 적용한다. 영국이 이동을 밀어주다 부작용을 낳았다면, 우리는 이동을 붙들어 매면서 부작용을 만들고 있다.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자. 공공임대 공급확대를 주장해왔던 노동당이 규제 완화를 함께 집어든 데는 이유가 있다. 영국은 땅이 없어서 집을 못 짓는 나라가 아니다. 국토의 대부분은 여전히 농지와 임야로 남아 있다. 모자란 것은 땅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면서 동시에 법적으로 개발이 허용된 땅이다. 1947년 도시농촌계획법 이후 잉글랜드의 계획체계는 개발을 원칙적으로 막아두고 개별 심사로 예외를 허용하는 방식으로 작동해왔다. 택지 부족이 규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해법은 재정이 아니라 규칙에 있다.누가 결정하는가, 권한을 옮긴다는 것지난해 12월 왕실재가를 받은 ‘계획·인프라법’(Planning and Infrastructure Act 2025)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법은 전국 단위 위임체계(national scheme of delegation)를 새로 도입해 주택 공급의 속도를 높이려 한다. 그동안 영국의 지방계획청은 어떤 인허가를 공무원 전결로 처리하고 어떤 것을 계획위원회로 올릴지 각자 정해왔다. 계획위원회는 선출직 지방의원으로 구성되고, 사업 하나하나를 건별로 심사해 승인 여부를 예측하기 어렵게 만드는 구조였다. 개정법은 정부가 하위 법령으로 위원회에 올릴 수 있는 신청의 범위를 제한하고 나머지는 훈련받은 전문 계획공무원이 결정하게 하는 근거를 마련했다. 위원 자격도 까다로워져 사전 교육을 이수해야 자리에 앉을 수 있다. 야당은 선출되지 않은 공무원이 지역의 일을 결정하게 된다고 반박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정부가 부지를 찾는 대신 결정의 위치를 옮겨 속도를 얻으려 했다는 점이다.정부가 기대하는 것은 민간의 움직임이다. 사회·저렴주택 프로그램에 재정을 쏟는 영국도 그 돈으로 지을 수 있는 주택은 전체 목표 150만호의 20%에 그친다. 나머지 80%는 민간이 지어야 한다.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는 영국 정부의 논리가 여기서 나온다. 공공이 재정과 시행을 함께 떠안는 우리 방식과는 무게중심이 다르다.최근 우리 안에서도 인허가 권한을 옮기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정부와 여당은 주택 공급의 속도를 높이겠다며 500가구 이하 소규모 재개발·재건축의 정비구역 지정 권한을 서울시에서 구청장에게 넘기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서울시는 8월 24일 브리핑에서 난개발과 특혜 시비를 이유로 반대 입장을 밝혔다. 재개발·재건축의 편익은 해당 구역과 자치구에 떨어지지만, 교통 혼잡과 학교 수용, 기반시설 부담은 생활권 전체가 나눠 진다. 결정권을 편익이 귀속되는 단위에 두면 판단은 빨라지지만 비용은 다른 곳으로 넘어간다. 영국의 권한 조정과는 정반대 방향이다. 신속한 주택공급을 위해서 규제를 풀 것인지 재정을 넣을 것인지, 부지를 찾을 것인지 절차를 고칠 것인지는 진보와 보수라는 진영을 따라 갈리지 않는다. 앞선 회에서 본 미국의 초당적 입법도, 영국 노동당의 규제 완화도 결국 같은 이야기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지을 것인가에만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닐까. 영국이 바꾼 것은 부지가 아니라 결정의 규칙이었다.(다음편에 계속)

2026.08.2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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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호황만 믿었다간…원화 약세가 드러낸 한국 증시의 ‘약한 고리’

전문가 칼럼

한국 주식시장과 원화의 가치는 대부분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8년과 2022년으로, 당시 KOSPI지수가 급락할 때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이 폭등한 것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났던 이유는 한국 원화가 ‘위험자산’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수출 비중이 워낙 커 글로벌 경기 여건이 조금만 나빠져도 큰 타격을 받는 데다, 1997년 외환위기로 기존 투자자들이 큰 피해를 입은 탓이다.즉 글로벌 경기가 나빠지면 한국 기업의 실적 전망이 악화돼 주식이 팔리고, 동시에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가면서 원화 가치도 하락하는 일이 반복됐다. 한국 주식과 원화가 동시에 약세를 보이는 구조다.‘한국 주식과 원화 가치의 동조화’ 흐름은 글로벌 분산 투자의 매력을 높이는 계기로 작용했다. 국민연금이 2001년 0.1%에 불과하던 해외 자산 투자 비중을 2007년 10.6%까지 높인 데 이어, 2021년 43.8%까지 조정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는 셈이다. 예를 들어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충격으로 KOSPI지수가 크게 하락했을 때, 달러 등 해외자산을 보유한 덕에 국민연금의 손실은 -8.2%에 그쳤다.해외자산 분산투자의 효과는 주가 움직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위기 때 원화 가치가 떨어지면 달러로 표시된 해외자산의 원화 환산가치는 오르기 때문이다. 국내 주식 하락과 원화 약세가 동시에 나타나는 한국 투자자에게 해외자산이 일종의 완충장치 역할을 하는 이유다. 주가는 뛰는데 원화는 약세…무슨 일이 벌어졌나그런데 2025년부터 흥미로운 현상이 관측되기 시작했다. 주식시장이 가파른 상승세를 기록하는 동안 환율 역시 1500원 수준까지 폭등한 것이다. 이른바 ‘반도체 슈퍼 사이클’ 덕분에 강력한 기업실적 개선이 나타났는데, 왜 환율이 상승한 것일까.가장 직접적으로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2026년 상반기에 1062억8000만달러의 한국 주식 순매도를 단행한 것이 환율 상승 요인으로 작용했다. 외국인이 한국 주식을 팔고 난 다음, 이 돈을 외환시장에서 달러로 환전하는 과정에서 ‘달러 수요’가 늘어난 것이다.더 나아가 국내 주식시장의 랠리에도 불구하고, 국내 투자자들의 해외 주식 매수가 상반기에만 485억6000만달러에 이른 것도 환율 상승 요인으로 작용했다.결국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을 움직이는 힘이 달라진 셈이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기업이익이 개선되면서 국내 주가는 상승했지만, 자금의 흐름만 놓고 보면 외국인은 한국 주식을 팔아 달러로 바꾸고 국내 투자자는 해외주식을 사기 위해 달러를 찾았다. 주가 상승과 원화 약세라는 과거와 다른 조합이 나타난 배경이다.이 대목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제기된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대규모 매도에 나선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여러 요인이 영향을 미쳤겠지만, 한국 증시에 대한 신뢰 수준이 매우 낮은 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KOSPI지수가 2400포인트 전후에서 바닥을 형성한 후, 2026년 6월 9300포인트까지 상승하면서 강력한 ‘차익 실현’ 욕구를 자극한 것이다.2028년까지 삼성전자 등 반도체 기업의 실적 개선 흐름이 지속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임에도 외국인 투자자들은 미래 실적 전망에 대해 믿음을 보여주지 않는 셈이다.기업의 이익이 늘어난다고 해서 반드시 주가가 같은 폭으로 오르는 것은 아니다. 투자자가 앞으로 벌어들일 이익을 얼마나 높은 가격에 사줄 것인가는 기업에 대한 신뢰와 주주환원, 지배구조 등에 따라 달라진다. 결국 한국 기업이 많은 돈을 버는 것과 한국 주식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실적만 좋아선 부족하다…결국 문제는 ‘신뢰’더 나아가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주 중시 경영’으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증거를 찾기 힘든 것도 문제로 작용했다. 예를 들어 2025년 12월 결산 법인의 배당금은 35조원에 불과해 시가 배당수익률은 1%에도 미치지 못했다.물론 2026년 한국 기업들이 거대한 이익을 기록했기에 앞으로 주주 보상 수준이 높아질 가능성이 높다. 다만 기업들의 태도 변화가 이어질 것인지에 대해서는 낙관하기 힘들다.대표적인 사례가 SK하이닉스의 낸드 사업을 담당하는 솔리다임의 기업공개(IPO) 추진이다. 미국 등 글로벌 주식시장에서는 ‘모자회사’의 동시 상장을 발견하기 힘들지만, 한국은 ‘자회사 중복 상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이런 구조가 지속되면 기업실적이 개선되더라도 해외 투자자금이 국내에 장기간 머물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렵다. 한국 기업의 이익 증가가 국내 주식에 대한 장기투자와 외화 유입으로 이어져야 원화에 대한 구조적인 수요도 함께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이런 면을 감안할 때 ‘위험자산’으로서 한국 원화의 위상은 앞으로도 크게 바뀌기 어려울 전망이다. 단기적으로는 외국인 투자자의 공격적인 매도세가 진정되고 일본 엔화의 가치가 상승하니 환율 하락 흐름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지만, 이 기세가 앞으로 계속되기는 쉽지 않다는 이야기다.따라서 국내 위험자산에 올인하기보다 미국 달러나 일본 엔 등 다양한 선진국 통화에 분산 투자하는 전략은 여전히 유효할 것으로 기대된다.홍춘욱 프리즘투자자문 대표

2026.08.2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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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준비됐다…500조 퇴직연금, 문제는 따로 있다[스페셜리스트 뷰]

전문가 칼럼

얼마 전 지인이 스마트폰을 내밀며 물었다. “인공지능(AI)이 내 퇴직연금을 알아서 굴려준다는데, 믿어도 되는 건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기술적으로는 “된다”고 답할 수 있지만 “믿어도 되느냐”는 질문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앞으로 더 무거워질 것이다. AI가 이제 조언을 넘어 ′실행’의 영역으로 들어서고 있기 때문이다.자산관리 운영체제 바뀌고 있어 AI가 금융을 바꾸고 있다는 말은 이제 새롭지도 않다. 신용평가·이상거래 탐지·콜센터 상담까지 AI는 이미 금융의 뒷단에서 조용히 일해 왔다. 달라진 것은 AI가 ‘앞단’으로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알고리즘이 포트폴리오를 짜고 운용까지 대신하는 글로벌 로보어드바이저 운용자산(AUM)은 2020년 975억달러에서 2024년 1조8000억달러로 4년 만에 약 18배 불어났고, 2029년에는 2조 4000억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국내에서도 한 대형 증권사의 연금 로보어드바이저가 출시 3년 만에 평가금액 약 3조9000억 원을 넘어섰다. 업계에서는 자산운용 뿐 아니라 PB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지속적인 고객관리까지 하나의 운영체제 위에서 통합되는 ‘AI 자산관리 OS’라는 개념까지 등장했다.이 변화가 가장 절실한 영역이 역설적이게도 퇴직연금이다.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의 ‘2025년 퇴직연금 투자 백서’에 따르면 2025년 말 퇴직연금 적립금은 501조4000억원으로, 400조원 돌파 1년 만에 약 70조원(16.1%)이 더 불어났다. 연간 수익률도 6.47%로 제도 도입 이래 최고치였다.여기까지만 보면 성공 스토리다. 그러나 평균의 뒤편은 다르다. 가입자의 절반은 여전히 2%대 수익률로 물가상승률(2.1%)을 겨우 방어했다. 수익률 상위 10%는 적립금의 84%를 실적배당형에 투자해 19.5%를 벌었고, 하위 10%는 적립금의 74%를 원리금보장형에 사실상 방치해 0.5%에 그쳤다. 같은 제도 안에서 39배의 격차다. 전체 적립금의 75.4%가 원리금보장형에 잠들어 있고, 이를 깨우겠다던 디폴트옵션조차 적립금의 85% 이상이 예금 중심 안정형에 몰리며 수익률이 3.7%에 그쳤다.여기서 정면으로 답해야 할 질문이 있다. 그 빈자리를 왜 하필 AI로 채워야 하는가. 기술이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30년 노후자금을 맡길 수는 없다. 답은 기술 예찬이 아니라 문제의 성격에서 찾아야 한다. AI가 대안인 이유 세 가지연금 부진의 원인을 뜯어보면 셋 다 인간의 구조적 한계로 수렴한다. 첫째는 주의력의 한계다. 가입자 대부분은 자기 연금 계좌를 1년에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는다. 나쁜 선택을 해서가 아니라 아무 선택도 하지 않아서 하위 10%의 수익률 0.5%가 만들어진다. 둘째는 감정의 한계다. 계좌를 들여다보는 소수마저 시장이 급등하면 뒤늦게 사고 급락하면 공포에 판다. 글로벌 펀드평가사 모닝스타의 ‘Mind the Gap’ 연구가 매년 확인하듯, 투자자가 실제 손에 쥐는 수익률은 그 펀드 자체의 수익률보다 연 1%포인트 이상 낮다. 상품이 아니라 사고파는 타이밍, 즉 사람의 행동이 수익률을 갉아먹는 것이다. 셋째는 확장의 한계다. 사람 프라이빗뱅커(PB) 한 명이 밀착 관리할 수 있는 고객은 물리적으로 수십 명이다. 그래서 개인맞춤 자산관리는 지금껏 고액 자산가의 전유물이었다. 평범한 직장인 수백만 명의 연금 계좌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AI의 비교우위는 정확히 이 세 지점에 있다. ▲지치지 않는 상시 모니터링은 ‘무관심’을, ▲감정 없는 리밸런싱은 ‘공포와 탐욕’을 ▲낮은 비용의 개인화는 ‘확장 불가’를 각각 대체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론이 아니다. 인간의 한계가 병목이던 다른 산업들에서 AI는 이미 결과로 검증됐다.운전은 인간의 ‘부주의’ 병목인 영역이다. 미국 고속도로안전보험협회(IIHS)가 웨이모 자율주행의 미국 4개 도시 실주행 기록을 분석한 결과 같은 거리를 달렸을 때 사고 확률이 인간 운전자보다 68% 낮았다. 웨이모의 자체 안전 보고서 기준으로는 보행자 부상 사고가 92%, 교차로 사고가 96% 적었다. 고객센터 상담은 사람마다 실력 차이가 큰 영역이다. 미국 스탠퍼드대와 MIT 연구진이 한 기업의 상담사 5000여 명에게 AI 도우미를 붙여준 실험에서 상담 처리 능력은 평균 14% 올랐는데 주목할 대목은 그 내용이다. 베테랑 상담사는 거의 변화가 없었지만 갓 입사한 초보 상담사는 34%나 향상되며 몇 달 만에 베테랑 수준을 따라잡았다. AI가 잘하는 사람을 더 잘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뒤처진 사람을 끌어올린 것이다. 제조 현장은 베테랑의 ‘경험’이 품질의 편차를 만들던 영역이다. 포스코는 수십 년 장인의 감에 의존하던 용광로 작업을 AI에 학습시켜 세계경제포럼의 ‘등대공장’에 국내 최초로 선정됐다. 산업도 기술도 다르지만 공통점은 하나다. 인간의 주의력 · 숙련도가 병목인 영역에서 AI에게 위임은 상위권의 실력을 깎는 ‘평균의 하향’이 아니라, 사고당하고 뒤처지고 방치되던 다수를 끌어올리는 ‘하한선의 상향’으로 작동했다는 것이다.그리고 금융은 이미 내부에 자체 증거를 갖고 있다. 은퇴 시점에 맞춰 자산배분을 자동 조정하는 타깃데이트펀드(TDF·Target Date Fund)의 수익률 13.7%와 예금형 디폴트옵션의 3.7%. 정교한 AI도 아닌, 초보적인 ‘위임’만으로 이미 4배 가까운 격차가 확인된 것이다. 미국의 적격디폴트투자상품(QDIA·Qualified Default Investment Alternative)는 바로 이 자동화된 위임을 제도의 기본값으로 만들어 미국의 대표적인 확정기여형 퇴직연금 제도인 401k를 연 10%대 수익률로 끌어올렸다. 즉 AI에게 연금을 맡기자는 주장은 검증되지 않은 도박이 아니라, 이미 작동이 확인된 자동화를 개인 맞춤형으로 확장하자는 제안이다. 운전은 매일 하기에 부주의가 곧바로 드러나지만, 연금은 30년을 방치해도 아무 경고음이 울리지 않는다. 주의력의 병목이 가장 깊고, 그래서 위임의 개선 폭이 가장 큰 곳. 그곳이 바로 500조원의 퇴직연금이다.조언하는 AI에서 실행하는 AI로이 ‘주의력의 공백’을 겨냥해 금융 AI의 다음 단계가 시작됐다. 2025년 3월 출시된 퇴직연금 로보어드바이저 일임서비스는 검증된 알고리즘이 가입자 대신 IRP 적립금 운용을 지시한다. 한국의 금융사에서 AI가 ‘조언자’를 넘어 ‘대리인’의 자리에 앉은 첫 사례다. 이것은 서막이다. 금융위원회도 지난 7월 융권 AX 현장 간담회에서 상품 추천부터 결제까지 AI가 수행하는 방안을 검토 의제에 올렸다. KB금융그룹은 그룹 59개 업무 영역에 300여 개의 AI 에이전트 도입을 천명했다. 신한금융은 ‘1인 1 AI 에이전트’를, NH농협은행은 ‘에이전틱 AI 뱅크’를 각각 추진하고 있다. 조언하는 AI에서 일임받은 AI를 거쳐, 고객분석부터 상품탐색 · 상품비교 · 추천 · 운용까지 전 과정을 수행하는 에이전트로 변하고 있다. 금융 AI의 진화 방향은 이미 정해졌다.그런데 같은 날 간담회에서 함께 발표된 ‘금융분야 인공지능 가이드라인’ 개정안을 펼쳐 보면 이 진화가 제도적으로는 어디까지 와 있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개정 가이드라인은 생성형 AI와 AI 에이전트라는 신기술의 등장, 그리고 올해 1월 시행된 인공지능기본법을 반영해 7대 원칙을 제시했다. 그중 세 번째가 ▲보조수단성 원칙이다. 원문의 표현은 이렇다. “현 단계에서 인공지능은 업무의 보조수단이므로 최종 의사결정과 그에 따른 책임은 임직원이 수행함.” 나아가 대출심사처럼 개인의 권리·의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고영향 · 고위험 AI는 사람의 승인 없이는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없는 ‘휴먼 인 더 루프’(HITL) 방식으로만 운영하도록 했다. ▲긴급정지 기능(킬 스위치) ▲재정의(오버라이드) 권한 ▲사람의 관리 · 감독을 필수 장치로 명시했다.여기서 현재 시점의 간극이 정확히 측정된다. 시장과 기술은 3단계 ‘실행하는 AI’를 향해 달려가는데 제도는 AI를 아직 ‘보조수단’의 자리, 즉 최종 결정권이 없는 자리에 앉혀 두고 있는 것이다.오해는 말자. 초고성능 AI가 사람의 의도를 벗어나는 사례까지 확인되는 지금, 보조수단성 원칙은 현시점에서 합리적인 안전장치다. 주목할 것은 이 원칙 스스로가 ‘현 단계에서’라는 단서를 달고 있다는 점이다. 제도 스스로 이것이 영구적 원칙이 아니라 잠정적 단계임을 인정한 셈이다. 정작 그 단서가 언제, 어떤 조건이 충족되면 풀리는지에 대한 로드맵은 없다. 여기에 이 가이드라인이 법적 강제력이 없는 자율규제라는 점까지 겹치면, 실행하는 AI 시대의 규칙은 사실상 백지 위에 있다.문제는 이 진화를 우리 제도와 금융사가 감당할 준비가 됐느냐다. 나는 두 가지가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하나는 규제의 철학이고, 다른 하나는 금융사의 체질이다. 규제의 철학 ‘먼저 열고 결과로 관리하라’한국 금융규제의 오랜 문법은 ‘위험해 보이면 일단 막는다’였다. 선의에서 출발한 문법이지만 그 성적표가 바로 앞서 본 숫자들이다. 반면 우리보다 먼저 같은 고민을 한 나라들은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먼저 열어주고, 결과를 관리하는 길이다.교과서와 같은 사례를 보여주는 곳이 미국이다. 미국은 2006년 ‘적격디폴트옵션’(QDIA) 제도를 도입하면서 디폴트 상품에서 원리금보장형을 아예 제외했다. 허용 대상은 TDF·밸런스펀드 등 투자상품뿐이었고 대신 사업자에게 투자손실에 대한 면책을 부여해 적극적 운용의 길을 열어줬다. 결과는 극적이다. 한국의 퇴직연금 DC형은 원리금보장형 비중이 압도적인 반면 미국 DC형 퇴직연금은 대부분이 투자상품으로 운용된다. TDF가 기본 투자상품으로 자리 잡은 것이 401k 수익률을 끌어올렸다는 것이 미국 연구기관(EBRI)의 평가다. 미국 노동부에 따르면 401k의 5년(2019~2023) 평균 수익률은 연 10.12%, 20년(2001~2020) 연평균으로도 8.6%다. 가입자 7000만명, 운용자산 10조달러의 시장에서 ‘연금 백만장자’가 흔한 단어가 된 배경이다.호주는 ‘개방 후 관리’의 다른 반쪽, 즉 관리의 모범을 보여준다. 호주의 디폴트옵션 ‘마이슈퍼’(MySuper)에는 원리금보장형이 아예 없고, 자산의 70%가 주식 등 성장자산에 배분된다.대신 감독당국(APRA)이 매년 성과평가를 실시해 기준에 미달한 저성과 기금을 시장에서 퇴출시킨다. 문은 활짝 열되, 성과로 책임을 묻는 것이다. 그 결과 호주 슈퍼애뉴에이션은 2024년 11.1%의 수익률을 기록했고 5년 평균 6.7%를 유지하고 있다. 영국의 공적 퇴직연금 기금 NEST도 최근 5년 평균 8.4%다. 한국의 5년 연환산 수익률 2.35%와 비교하면, 이것은 운용 실력의 격차가 아니라 규제 철학의 격차다.이 철학의 차이는 AI 시대에 그대로 재연되고 있다. 다행히 방향 전환의 신호는 있다. 금융당국은 ‘킬러 규제’'로 꼽혀 온 망분리 완화에 착수했다. 지난 7월 AX 간담회에서는 “기술 발전을 막을 수 없다면 리스크를 최소화하며 포섭할 제도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영국 금융행위감독청(FCA)이 2016년 세계 최초의 규제 샌드박스를 만들어 ‘해보게 한 뒤 감독하는’ 방식으로 핀테크 주도권을 쥐었던 경로를 뒤늦게나마 따라가는 셈이다. 그러나 속도와 폭이 아쉽다. 개인형 퇴직연금(IRP) 로보어드바이저 일임의 연 900만원 한도가 상징적이다. 130조 원을 넘어선 IRP 시장에서 900만원은 개방이 아니라 개방의 시늉에 가깝다. 실행하는 AI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더 촘촘한 사전 차단막이 아니라, 더 넓은 문과 더 엄정한 성적표다. 디폴트옵션에 원리금보장형을 끼워 넣어 제도의 취지를 무력화시킨 실패를, AI 제도 설계에서 반복할 여유가 없다.판매의 금융에서 성과의 금융으로 전환해야 그런데 문을 열어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열린 문으로 달릴 주체 즉 금융사의 체질이 바뀌지 않으면 개방은 또 다른 판매 채널 하나를 더하는 데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불편한 질문을 하나 던져야 한다. “가입자 절반이 2%대 수익률에 갇혀 있던 지난 20년 동안 금융사는 무엇을 했는가.”냉정히 말해 원리금보장형 75.4%라는 숫자는 가입자에게는 손해였지만 금융사에게는 손해가 아니었다. 퇴직연금 수수료는 수익률과 무관하게 적립금에 비례해 걷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퇴직연금 사업자들의 수수료 수익은 전년보다 10% 이상 늘며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수수료율을 낮췄다지만 적립금이라는 모수가 커지면서 금융사가 가져가는 금액은 오히려 불어나는 착시 구조다. 낮은 수익률을 감내하는 가입자도 매년 꼬박꼬박 수수료를 부담한다. 가입자가 자신이 낸 수수료 총액을 파악하기조차 어렵다. 공시가 금액이 아닌 ‘총비용부담률’이라는 비율 중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계열사 상품을 우선 태우는 오랜 관행과 지점 창구의 판매 실적 중심의 핵심 성과 지표( KPI)까지 겹치면 그림이 완성된다. 2024년 홍콩 H지수 ELS 대규모 손실 사태에서 확인했듯, 고객의 이해보다 판매 목표가 앞서는 문화는 결국 대규모 배상과 신뢰 붕괴라는 청구서로 돌아왔다. 성장하는 것은 시장이었고, 정체된 것은 가입자의 노후였다. 그 사이의 이익은 판매자의 몫이었다. 이것이 한국 자산관리 산업의 고착화된 균형이다.실행하는 AI의 시대는 이 균형을 지탱해 온 전제, 즉 ‘고객은 비교하지 못하고, 옮기지 않는다’는 전제를 무너뜨린다. 고객의 에이전트는 지치지 않고 전 금융사의 수수료·성과·이해상충 여부를 비교하며, 더 나은 조건을 찾으면 망설임 없이 갈아탄다. 미국에서 QDIA가 TDF라는 승자를 만들고, 호주에서 성과평가가 저성과 기금을 도태시켰다. 한국에서는 AI 가 시장의 심판자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 심판대 위에서 ▲판매량 KPI ▲계열사 몰아주기 ▲비율 뒤에 숨긴 수수료 등은 무장해제될 것이다. 금융사에 남은 선택지는 사실상 하나다. 심판이 오기 전에 스스로 바꾸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세 가지다. 첫째 보상 구조를 바꿔야 한다. 적립금 규모가 아니라 고객 수익률에 연동되는 수수료 체계로 옮겨가고 연간 수수료를 가입자가 체감할 수 있는 ‘금액’으로 공시해야 한다. 둘째 평가 지표를 바꿔야 한다. 직원과 조직의 KPI를 판매액에서 고객 계좌의 성과와 유지율로 전환해야 한다. 셋째 선반을 바꿔야 한다. 자사 · 계열 상품 우선주의를 버리고, 타사 상품이라도 고객에게 유리하면 담는 오픈 아키텍처로 가야 한다. 뼈아픈 주문이지만, 에이전트가 모든 것을 비교하는 시대에 이것은 윤리가 아니라 생존 전략이다. 고객의 이익과 회사의 이익이 정렬되지 않은 금융사부터, 에이전트의 선택지에서 지워질 것이다.AI는 분명 금융의 엔진을 바꾸고 있다. 그러나 엔진의 성능은 어느 문이 열려 있고 핸들이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규제는 문이다. 막아서 지키는 시대는 끝났고, 열어주되 결과로 관리하는 나라들이 연금 백만장자를 만들었다. 금융사의 관행은 핸들이다. 판매자의 이익을 향해 꺾여 있던 핸들을 고객의 수익률 쪽으로 돌리지 않으면 그 일은 머지않아 고객의 AI 에이전트가 대신하게 될 것이다.내 지인의 질문에 대한 나의 답도 이제 이렇다. “AI는 준비됐다. 남은 것은 문을 여는 규제와, 핸들을 꺾는 금융사다.” 500조원의 노후자금 앞에서, 먼저 바뀌는 쪽이 다음 20년의 승자가 될 것이다. 필자는 AI 자산관리 회사 콴텍의 창업자 및 대표이사다. 증권사 고유자산을 운용하는 프랍트레이더를 거쳐 AI로 초개인화된 자산관리를 제공하는 콴텍을 설립했다. 금융위원회 퇴직연금 혁신금융 기업으로 선정되어 다수의 은행 및 증권사에 AI 퇴직연금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2026.08.22 07:00

10분 소요
창업자가 외면하는 멘토링…멘토는 많고 멘토링은 없다 [최화준의 스타트업 인사이트]

전문가 칼럼

‘멘토링’의 시대다. 불확실성이 일상화된 오늘날, 수많은 이들이 멘토를 찾아 인생의 지혜를 구한다. 미지의 영역에서 불확실성을 기회로 바꿔야 하는 스타트업 창업자들에게 멘토의 존재는 더욱 간절하다. 멘토링은 공식적인 제도를 넘어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매우 보편적이고 익숙한 소통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선배 창업가나 산업 전문가와의 만남은 시행착오를 줄이고 성장의 속도를 높이는 귀중한 계기가 된다. 그렇기에 공공과 민간을 막론하고 모든 창업 보육 프로그램에서 멘토링은 결코 빠지지 않는 핵심 지원 사업으로 꼽힌다.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의 멘토링은 그동안 정부의 정책 자금 및 공공 인프라와 강력하게 결합된 공공 주도형 모델로 운영되어 왔다. 예비·초기창업자 지원 사업 대부분은 사업화 자금 제공과 멘토링 이수를 의무적으로 묶은 패키지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처럼 공공 영역이 주도하는 국내 생태계에서 멘토링은 비재무적 지원 제도의 핵심 축을 담당해 온 것이 사실이다.정서적 버팀목과 생태계의 ‘불편한 진실’하지만 현장에서 체감하는 멘토링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본래 멘토링은 단순한 비즈니스 지식 전달을 넘어 깊은 정서적 지원을 내포한다. 창업 초기 극심한 불확실성에 노출된 창업자들은 깊은 외로움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겪는다. 학술 연구에 따르면 멘토링의 가장 의미 있는 효과 역시 경청과 공감을 바탕으로 한 ‘정서적 지원’이며, 이는 곧 스타트업의 생존율과 성과로 직결된다. 선배 창업가의 실패 경험 공유와 산업 전문가의 인적 네트워크 연결은 멘토링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자산이다.반면 멘토링의 실질적 효과가 미미하다는 지적 역시 충분한 근거를 갖는다. 공공 예산 집행과 맞물린 멘토링 제도가 자금 수령을 위한 형식적 요건으로 변질되었다는 비판은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생태계 안팎에서는 창업자의 성장보다 멘토링 수당 자체를 목적으로 활동하는 이른바 ‘생계형 멘토’들에 대한 눈총이 따갑다. 역량의 미스매치도 심각하다. 급변하는 시장 트렌드에 뒤처지거나 스타트업 생태계의 문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멘토가 자문을 제공하면서, 도리어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격으로 창업자에게 혼란만 가중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멘토링의 효과에 대한 논란과 멘토의 자질 문제 논의는 주기적으로 등장했지만, 이상하리만치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려는 시도는 적었다. 생태계의 여러 이해관계자가 멘토링 수당과 행정 실적이라는 이해관계로 얽혀있기 때문일 것이다. 창업자가 외면하는 멘토링 제도는 모두가 알면서도 쉽게 터놓지 못했던 스타트업 생태계의 대표적인 ‘불편한 진실’이었다. 이제는 오래도록 정체되어 온 공공 주도 멘토링 시스템에 근본적인 변화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민간 자율성·엄격한 검증체계로 전환해야 우선, 민간 주도의 해외 멘토링 운영 방식을 국내 생태계에 참고할 필요가 있다. 해외의 주요 창업 선도국들은 민간 행위자들이 자율적으로 멘토링 제도를 주도한다.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정부는 직접적인 자금 지원이나 간섭 대신 판을 깔아주는 환경 조성에 집중한다. 창업 기획자나 대학은 단발성 컨설팅을 지양하고, 아이디어 발굴부터 스케일업까지 이어지는 연속적인 다단계 멘토링 체계를 구축한다. 벤처캐피털과 창업기획자 역시 의무적인 정기 면담 대신 선배 창업가가 같은 공간에 상주하며 상시 조언을 건네는 자율적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동시에 타운홀 미팅과 같은 집단 면담의 자리를 마련해 자연스럽게 어려움과 해결책을 커뮤니티가 함께 고민하도록 유도한다. 멘토링의 효과를 집단과 공유하는 것이다.멘토링 제도의 개선과 함께 멘토의 자질을 정기적으로 진단하고 검증하는 보완책도 필요하다. 아무리 멘토링 제도가 선진화되어 있더라도, 정작 멘토의 자질이 미흡하다면 멘토링의 실질적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 최신 시장 트렌드와 생태계 이해도를 정밀하게 평가하고, 고도화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한편, 형식적으로 임하는 멘토를 선별해내는 검증 프로세스가 필요하다. 정신과 의사나 상담사들이 정기적인 ‘수퍼비전(supervision)’과 상호 검증을 통해 전문가 집단의 수준을 엄격히 유지하듯, 창업 멘토 역시 주기적인 상호 평가와 검증 체계를 통해 자질과 품질을 담보해야 한다.스타트업 멘토링이 공공 사업의 요건을 채우기 위한 단순 행정 절차나 보여주기식 실적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멘토링의 본질은 창업자가 직면한 고립감과 불확실성을 함께 헤쳐 나가며 실질적인 질적 성장을 돕는 데 있다. 공공 영역은 도자가 아닌 든든한 조력자로서 판을 깔아주고, 민간의 창의성과 자율성이 멘토링 현장에 작동하게 해야 한다. 멘토와 멘티가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팀처럼 협력하는 ‘창업자 중심’의 멘토링 제도가 창업생태계에 자리잡을 때, 창업자는 자생력을 기르고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는 한 단계 더 발전할 것이다. 필자는 전남대 경영대학 교수로 창업생태계와 창업실패를 연구하고 있다. 다국적 기업과 창업생태계 현장을 모두 경험하고 연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창업생태계를 가까이 하면서 창업자들과 유연하고 창의적인 시각을 공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26.08.16 08:00

3분 소요
정치는 갈라져도, 주택공급에는 한마음[김현아의 시티라이프]

전문가 칼럼

얼마전 한 여당 의원이 페이스북에 올린 아이디어 하나가 정치권 전체를 뒤흔들었다. 폐기되는 시내버스를 개조해 대학가 청년들의 임시 주거공간으로 쓰자는 일명 ‘폐버스 하우스’ 제안이었다. 청년들은 분노했고 정치권에서는 여야가 동시에 ‘기괴하다’며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주택가격 안정을 위해 세금으로 수요를 누르면서 공급을 늘리겠다는 두 개의 페달을 동시에 밟는 정부 앞에서, 정치권의 상상력은 '버스 개조'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초당적 합의라는 낯선 사건주택공급이 시급한 건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도 집값 폭등으로 정치권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2020년 이후 미국 집값은 54% 뛰었고 세입자 가구의 절반 가까운 2270만 가구가 소득의 30% 이상을 주거비로 쓰고 있다(하버드대 JCHS 기준). 집값과 임대료에 대출금리와 보험료까지 한꺼번에 오르는 상황은 공화당 지지자와 민주당 지지자를 가리지 않았다. 이 위기의식이 정치적 앙숙을 한 테이블에 앉혔다. 공화당 팀 스콧 상원 은행주택도시위원장과 민주당 엘리자베스 워런 간사가 공동 초안을 짰고, 발의된 법안 60여 개를 하나로 묶어 상원에서는 85 대 5, 하원에서는 358 대 32의 압도적 지지 속에 이 법을 통과시켰다. 하원이 독자 수정안을 얹어 상원과 이견이 생기자 백악관이 직접 나서 공화당 의원들을 압박했을 만큼, 진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400쪽에 달하는 이 법은 1990년 이후 최대 규모의 연방 주택입법으로 평가받는 '21세기 로드 투 하우징법(21st Century ROAD to Housing Act, 2026년 7월 11일 시행)'이다. ROAD는 '아메리칸 드림의 기회를 되살린다(Renewing Opportunity in the American Dream)'는 뜻의 약자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법이 예산을 한 푼도 늘리지 않고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의회예산국(CBO)은 이 법이 재정적자를 늘리지 않는다는 공식 비용추계를 내놓았다. 새 예산 없이 기존 제도와 절차를 손보는 데 초점을 맞춰 규제 완화 중심으로 60여 개 조항을 완성했다는 뜻이다.규제를 걷어내는 것이 공급이다이 법의 핵심은 ‘규제 완화’다. 대표적인 것이 ‘포인트 액세스 블록’(point-access block), 단일계단형 아파트를 허용한 것이다. 한국은 화재 안전을 이유로 일정 규모 이상 건축물이면 반드시 계단을 두 개 이상 두도록 하는데, 이 법은 HUD(연방주택도시개발부)로 하여금 단일계단 6층 건물의 표준 설계기준을 마련하고 안전성을 검증하는 시범사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도록 했다. 계단을 줄인 만큼 건축면적이 늘어난다. 표준화된 사전설계도면(패턴북) 제공해 지자체가 매번 새로 도면을 검토하지 않고 사전 승인된 안을 그대로 쓸 수 있다. 건축허가 기간이 대폭 줄어드는 것이다. 토지이용 규제도 손을 댔다. HUD가 지자체 조닝·용도지역의 모범사례 기준을 마련하고, 인허가 간소화를 추진하는 주·지방정부에 재정을 지원하는 인센티브 방식을 도입했다. 소규모·도심 재개발은 환경영향평가(NEPA) 절차를 대폭 줄여 역시 공급의 속도를 높였다. 공장 조립형 모듈러 주택 규제도 영구 섀시(바퀴 달린 하부 골조) 부착 의무를 없애고, 모듈러 사업자의 금융 장벽 완화와 표준 건축기준 연구까지 HUD에 지시했다.규제완화 다음은 돈이다. 미국의 대도시와 카운티에 내려보내는 포괄보조금 CDBG(Community Development Block Grant)는 한국의 보통교부세처럼 지방정부가 자율적으로 쓰는 예산이다. 2029년부터는 배분액을 주택 증가율과 연동시켜 규제완화에 소극적인 곳은 덜 받게 하고, 앞장선 곳은 매년 2억 달러 ‘혁신기금’이라는 당근을 받게 된다. 다세대주택(5호 이상의 아파트) 건설 대출의 보증한도도 현실화했다. 낡은 공공주택을 민간자본으로 고칠 수 있게 임대지원(RAD) 전환 프로그램의 상한을 10만호 늘리고 제도 시한도 없앴다. 대형 기관투자자의 단독주택 매집 제한도 350호 이상 보유한 투자자의 기존 매입만 금지하고 신축 임대사업과 상장리츠는 제외해, 시장 기능은 살리면서 왜곡만 손봤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세금과 대출 규제로 수요를 틀어막은 채 공급정책 역시 민간이나 규제완화보다는 공공중심의 추가택지 확보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로드 투 하우징법을 관통하는 원칙과 정확히 반대편에 있다.민간이 앞장서고 공공은 조력자이 법에서 연방정부의 역할은 시행자가 아니라 규칙을 다시 쓰고 돈줄로 유도하는 조력자다. 집은 처음부터 끝까지 민간이 짓는다. 물론 민간이 한다고 다 잘되는 건 아니다. 속도가 당장 빨라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공공 혼자보다 민간과 손잡을 때 시너지가 더 클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 주는 시사점이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LH가 공공택지를 민간에 매각하지 않고 직접시행, 건설사들은 단순 시공을 맡는 ‘민간참여사업’으로 주택을 공급하겠다고 한다. 이때 민간은 사업 주도자가 아니라 공공이 짠 판 안에서 브랜드와 시공력을 대는 협력사에 불과하다. 그런데 공공주택사업의 주역이 될 LH는 정작 부채 문제와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조직 개편을 검토 중이다. 주택공급의 역할이 공공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사이, 그 무게를 감당할 주체의 조직과 재무구조부터 손봐야 하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다.이번 미국의 입법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계단 하나 자재 하나 예산 한 줄까지 촘촘히 엮어 규제를 걷어내는 일을 여야가 함께 해냈다는 사실이다. 주택 공급을 늘리는 것은 순간의 기발한 발상이 아니라 정부와 여야의 지루한 합의의 결과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정부도 국회도 이런 합의를 위한 시간은 보이지 않고, 말로만 비판하고 변명하는 ‘요란한 정치의 시간’만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주택공급 정책이 제대로 수립되고 시행되기 위해서는 다른 국가들의 성공·실패 사례를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에서 규제완화와 협치를 배웠다면 영국은 다소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다. (다음 편에 계속)

2026.08.15 10:00

4분 소요
홈플러스·고려아연 사태가 던진 경고…‘사모펀드 경영’의 위험성 [스페셜리스트뷰]

전문가 칼럼

1988년 뉴욕 자본시장은 거세게 요동쳤다. 거대 사모펀드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가 당시로서는 사상 최고액인 250억달러를 투자해 담배·식품 공룡 기업인 RJR 나비스코를 삼켰기 때문이다. 인수 자금의 대부분은 고위험 채권인 정크본드(Junk Bond)와 차입금으로 충당됐다. 이 거래를 생생하게 다룬 논픽션(실화) ‘문 앞의 야만인들’(Barbarians at the Gate)은 이후 40년 가까이 차입매수(LBO)의 원형이자 약탈적 금융공학이 가져올 위험에 대한 대표적 경고문으로 인용돼 왔다. 기업의 미래 현금 흐름과 자산을 담보로 오늘의 승부를 건 뒤 청구서는 피인수 기업과 노동자에게 넘기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38년이 흐른 2026년 현재 서울 자본시장에서도 똑같은 파국이 반복되는 모습이다. 한국의 사모펀드(PEF)인 MBK파트너스가 인수한 홈플러스는 파산 및 청산 위기(회생절차 폐지 위기)에 놓였다가 메리츠금융그룹으로부터 2000억원 규모의 긴급운영자금(DIP)을 조달하며 극적으로 회생절차를 재개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홈플러스의 대주주인 MBK와 김병주 MBK파트너스 회장이 연대보증을 서는 조건이 붙었다. 사모펀드가 과도한 부채로 기업을 인수한 뒤 알짜 자산을 처분해 단기 이익을 챙기고 부실의 짐은 채권자와 노동자, 협력사에 넘긴다는 사회적 비판이 다시 거세지고 있다. 약 1만2000명의 직원과 4600여개 협력업체의 생계가 담보로 잡힌 현 상황은 사모펀드에 의한 기업 경영이 왜 위험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모펀드가 지닌 경영의 득과 실을 명확히 진단하기 위해서는 ▲미국 자본시장에서 사모펀드가 태동한 역사적 맥락과 구조적 결함 ▲한국 사모펀드의 성장 과정 및 폐단 ▲홈플러스와 고려아연 등 최근 사례가 시사하는 경고를 다각도로 분석해야 한다. 금융당국은 이를 방치할 경우 발생할 시스템적 위험을 막기 위한 뼈아픈 규제 정책 개혁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기업가치 제고’ 목적…경영 전문성 부족 문제 1960~1970년대 미국의 주요 대기업은 무분별한 사업 다각화 추진으로 극심한 효율성 저하를 겪었다. 당시 전문경영인들은 주주가치 제고보다는 자신의 세력 확장과 권력 유지에 몰두했고, 주주와 경영진 간의 대리인 문제는 심화했다. 기업의 비효율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저평가된 기업을 인수해 과감한 구조조정과 경영 효율화, 경영진 인센티브 정렬 등을 거쳐 기업가치를 올린 뒤 매각한다”는 명목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사모펀드다. 1976년 잭 콜버그와 헨리 크라비스, 조지 로버츠가 설립한 KKR이 대표적이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후 한국의 부실기업과 은행이 대거 매물로 나왔으나 국내 자본력이 부족해 ▲칼라일 ▲뉴브리지캐피탈 ▲론스타 등 해외 사모펀드가 유수의 국부 자산을 헐값에 인수했다. 지난 2003년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 및 매각 과정에서 불거진 대규모 시세 차익 유출, 먹튀 논란, 조세 회피 등은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다. 정부와 금융당국은 “해외 먹튀 자본에 맞설 토종 자본을 육성하고, 국내 기업 구조조정을 자율적으로 해결하자”는 명분을 내세우게 됐다. 지난 2004년 12월 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이 개정되면서 2005년부터 ‘경영참여형 사모펀드’ 제도가 공식 시행됐다. 의결권 있는 지분 10% 이상을 취득해 경영에 직접 참여하고 기업가치를 제고한 후 회수하라는 취지였다. 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이 개정·시행된 이후 등장한 국내 사모펀드 중 하나가 2005년 설립된 MBK다. 이후 ▲VIG파트너스 ▲한앤컴퍼니 ▲IMM PE 등 토종 대형 PEF가 대거 등장하며 시장이 급성장했다. MBK는 운용자산 45조원 규모의 동아시아 최대 사모펀드로 거듭났다. 코웨이, ING생명 등의 매각에 성공하며 ‘인수합병(M&A)의 귀재’라는 평판을 얻기도 했다. ‘토종 자본 육성을 통한 기업가치 제고’라는 명분 뒤에는 미국식 사모펀드의 가장 약탈적인 금융공학 폐단이 그대로 이식돼 있었다. 사모펀드는 본질적으로 기업의 장기적 영속성보다는 펀드 만기 내 매각(Exit)을 통한 수익률(IRR) 달성이 최우선 목표기 때문이다. 사모펀드는 경영 전문 기관이 아니다. 인수한 업종이나 산업 분야의 전문성은 더더욱 결여됐다. 사모펀드가 기업의 경영권을 잡고 직접 경영에 나설 때 위험한 이유는 홈플러스 사태와 고려아연 사태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MBK가 지난 2015년 영국 테스코로부터 홈플러스를 인수한 방식은 전형적인 LBO이자 부동산 갭투자 구조다. 총인수 금액 7조2000억원 가운데 자기자본은 3조2000억원에 불과했다. 나머지 4조원은 인수금융 등 온전히 홈플러스가 떠안아야 할 빚이었다. 인수 후 MBK의 경영 전략은 철저히 재무적 현금 추출에 맞춰졌다. 지난 2016년부터 2023년까지 알짜 점포와 물류센터 등 4조1130억원 규모의 유형자산을 매각했다. 같은 기간 신규 재투자는 매각액의 6분의 1 수준인 7081억원에 그쳤다. 점포를 판 뒤 다시 빌려 쓰는 ‘세일앤리스백’(Sale & Lease Back·매각 후 재임대) 방식은 단기 현금을 확보해 빚을 갚는 데 쓰였다. 홈플러스는 매년 수천억원대의 고정 임차료 부담을 떠안게 됐다. 전자상거래(이커머스) 중심의 유통 환경 변화에 대응할 신규 설비투자(CAPEX) 투자가 블라인드 처리된 상황에서 고정비 부담만 늘어나자 부채 비율은 2955% 수준까지 치솟았다. 금융 천재의 완벽한 재무 계산기가 도리어 기업의 기초 체력을 완전히 고갈시킨 셈이다. 홈플러스 사태의 가장 심각한 지점은 비대칭적 리스크 구조다. 최대 채권자인 메리츠금융 측 지적에 따르면 MBK의 홈플러스 투자 펀드(3호 펀드)는 홈플러스의 경영 악화 및 파산 위기 속에서도 1조2000억원가량의 수익을 올렸고, 별도의 관리·성과 보수를 수취했다. MBK 측은 지분 가치 소멸과 투자금 손실을 주장하지만, 피인수 기업이 빚더미에 앉아 청산 위기에 내몰리는 와중에도 펀드 단계에서 거액의 보수와 수익을 먼저 챙길 수 있는 제도적 빈틈은 사모펀드 경영의 지독한 도덕적 해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MBK 인수 기업, 평균 ROE 3년 새 2.3%p ↓ MBK와 영풍이 벌인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은 홈플러스 사태의 판박이이자 위험도가 훨씬 높은 사건이다. MBK는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도 2조원 이상을 LBO 방식으로 빌려 투입했다. 업종에 대한 이해나 장기적 산업 비전 없이 오직 금융 자본의 힘과 부채 레버리지를 활용해 한국의 대표적 세계 1위 비철금속 제련 기업의 경영권을 위협한 것이다. MBK와 영풍은 경영권도 이사회도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미국 현지에서 고려아연의 핵심 사업인 ‘프로젝트 크루서블’ 관련 투자 리셉션을 열고 사업 주체를 자처하는 등 파행적 행보를 보였다. 국내에서는 노조 면담을 일방적으로 취소하면서 해외에서는 경영권 장악을 전제로 행동하는 모습은 사모펀드가 얼마나 경영 정당성과 절차적 타당성을 무시하는지 보여준다. 고려아연은 단순 유통업을 넘어 국가 기간산업이자 미래 첨단 산업(배터리 소재·제련 기술)의 핵심 생태계다. 유통 기업인 홈플러스마저 자산 파편화와 임차료 폭탄으로 무너뜨린 사모펀드가 대규모 연구개발(R&D)과 장기 설비투자가 필수적인 국가 기간산업을 인수할 경우 홈플러스보다 훨씬 심각한 국가적 파국을 초래할 것이라는 경고가 나온다. 기업분석연구소 리더스인덱스가 국내 5대 사모펀드 인수 기업의 실적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MBK가 인수한 기업의 평균 자기자본이익률(ROE)은 인수 첫해 7.0%에서 3년 후 4.8%로 2.3%포인트(p) 떨어졌다. 국내 주요 PEF 중 가장 낮은 수준이다. 같은 기간 IMM인베스트먼트 인수 기업의 평균 ROE가 40%p 넘게 상승한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학술 연구(김&박, 2018 등)에서도 사모펀드가 인수한 기업은 전략적 투자자(SI)가 인수한 기업에 비해 CAPEX 및 R&D 투자 비율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영화엔지니어링 ▲딜라이브 ▲네파 등 MBK의 주요 실패 사례에서도 인수 대금의 절반 이상을 차입으로 조달하고, 상환 부담이 장기 투자 여력을 잠식해 기업을 고사시키는 동일한 패턴이 반복된다. 사모펀드는 본질적으로 경영 전문성이 부족하다. 유통부터 제련, 바이오까지 넘나드는 문어발식 인수는 전문성 없이 단지 금융공학적 차익만을 노린 행태다. 등기임원을 PEF 인사로 채운 채 알짜 자산 매각에만 골몰하는 사모펀드 경영은 기업의 영속성을 파괴할 수밖에 없다. 금융감독원은 최근 MBK에 직무 정지를 포함한 중징계안을 의결했다. 기관 전용 사모펀드 운용사(GP)를 겨냥한 국내 첫 중징계로서 의미가 있으나, 여전히 특정 불건전 영업 행위에 국한된 단발성 처방에 불과하다. 사모펀드가 차입금 상환 부담을 피인수 기업에 전가하는 LBO 구조 자체를 제어할 법제적 안전장치는 공백 상태다. ‘LBO 부채 상한제’ 도입 등 제도 정비 필요미국은 토이저러스 파산 등을 계기로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이 발의한 ‘월가 약탈 방지법’(Stop Wall Street Looting Act)을 통해 PEF 운용사의 인수 부채 연대책임과 채권자·노동자 보호 등의 제도화를 시도했다. 한국 금융당국도 즉각적인 규제 정책 개혁에 나서야 한다. 먼저 인수 자금 중 차입금(인수 금융)의 비율을 30~40% 이하 등 일정 수준으로 제한하는 ‘LBO 부채 상한제’를 도입해야 한다. 인수 주체가 아닌 피인수 기업의 자산과 부동산을 담보로 제공하거나 차입금 상환 의무를 피인수 기업에 전가하는 행위를 법률로 금지해야 한다. 사모펀드가 ▲국가 기간산업 ▲핵심 기술 보유 기업 ▲대규모 고용 창출 기업 등을 인수할 경우 해당 사모펀드 운용사의 산업 전문성 및 장기 경영 계획에 대한 엄격한 사전 적격성 심사를 의무화해야 한다. 단지 자금 조달력만 갖춘 투기적 자본이 국가 핵심 생태계를 위협하는 행위를 사전 차단하기 위해서다. 인수 후 추가 대출을 통해 운용사(GP)가 과도한 특별배당을 수취하는 행위도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 피인수 기업이 유동성 위기나 파산에 직면할 경우 GP가 이전에 수취한 관리 및 성과 보수를 환수(Claw back)하거나 GP에게 연대책임을 묻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 도덕적 해이를 근절해야 한다. 사모펀드의 최소 보유 기간을 5~8년 이상으로 유도하고, 장기 보유 및 R&D·인프라 재투자 비율에 맞춰 세제 혜택 및 규제를 차등화해야 한다. 연기금 등 출자자(LP)가 위탁 운용사를 선정할 때 단순 과거 내부수익률(IRR) 수치뿐 아니라 ▲고용 유지 ▲R&D 투자 ▲노사 관계 등 환경·사회·지배구조(ESG) 비재무 지표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도록 모범 기준을 확립해야 한다.한국 자본시장은 오랫동안 단기적인 ‘자본 효율성’만을 최고의 가치로 신봉해 왔다. 기업의 영속성을 결정짓는 요소는 단기 상각전영업이익(EBITDA) 수치가 아니라 ▲브랜드 가치 ▲기술력 ▲숙련된 인력 등 비재무적 자산이다. 사모펀드가 이를 무시한 채 금융공학으로 껍데기만 남기는 경영을 계속한다면 홈플러스의 파국은 고려아연을 넘어 한국 산업 전반으로 번져 나갈 것이다.사모펀드는 본래 시장의 불합리한 가치를 바로잡고 혁신을 자극하는 ‘메기’ 역할을 해야 한다. 지금의 사모펀드는 분쟁 현장을 배회하며 차익만 노리는 ‘하이에나’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금융 자본과 산업 자본의 태생적 호흡 차이를 인지하고, 과도한 레버리지 차단과 산업 전문성 심사 등 한국 산업 구조에 맞는 엄격한 제도적 안전장치를 세워야 할 시점이다. 이제 자본은 “얼마나 빨리 투자금을 회수할지”가 아니라 “어떻게 기업의 장기적 가치를 키울 것인가”에 답해야 한다. 금융당국과 자본시장이 뼈를 깎는 제도 혁신에 나서지 않는다면, 38년 전 뉴욕의 ‘야만인들’이 남긴 경고는 2026년 한국 경제 전체의 비극으로 현실화할 것이다. 필자는 기업분석연구소 리더스인덱스 대표이사다. LG이노텍과 CEO스코어를 거쳐 인사 데이터 분석에 특화한 리더스인덱스를 설립했다. 미래포럼 30%클럽 기획위원과 여성가족부 정책자문위원을 지냈으며, 2019년 여성가족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2026.08.09 09:00

8분 소요
회의실 자리만 바꿔왔다…이사회 개혁이 놓친 것들 [대신경제연구소 ESG인사이트]

ESG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가 내놓은 대규모기업집단 지배구조 분석은 한 가지 불편한 숫자를 담고 있었다. 이사회에 올라온 안건의 99% 이상이 원안 그대로 통과됐고, 원안대로 통과되지 않은 안건의 비율은 최근 5년 가운데 가장 낮은 0.38%였다. 더 눈여겨볼 대목은 그 뒤에 있다. 사외이사 비율이 높을수록 원안 가결률이 조금은 낮아지는 경향이 확인됐지만, 사외이사가 이사회의 4분의 3을 넘는 회사조차 원안 가결률이 95%를 웃돌았다. 독립적인 이사를 아무리 많이 앉혀도, 회의실에서 반대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다.이 숫자를 이사들의 나태나 무능으로 읽는 것은 손쉽지만 정확하지 않다. 이사회가 경영진을 제대로 견제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이사가 판단에 필요한 정보를 쥐고 있어야 하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회의에서 입을 열 수 있어야 하며, 그 발언이 흩어지지 않고 살아 있는 토론으로 이어져야 한다. 정보가 있는가, 발언할 수 있는가, 그리고 토론이 되는가. 셋 중 하나라도 무너지면 이사회는 아무리 독립적인 인물로 채워도 침묵하는 방이 된다. 앞의 99%라는 숫자는 바로 그 침묵의 크기다.문제는 지난 수년간 우리 사회가 이사회 제도 개선에 쏟은 에너지가 이 조건들 중 어느 것도 겨냥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사외이사의 비율과 이사의 독립성 요건, 감사위원을 뽑는 방식. 논의는 온통 ‘누가 회의실에 앉는가’에 집중됐다. 지배구조라는 집의 하드웨어, 곧 이사회의 구성은 부지런히 손봤다. 하지만 그 집을 실제로 돌아가게 하는 소프트웨어, 곧 회의의 진행 방식과 이사에게 정보가 흘러드는 통로는 논의의 바깥에 남겨졌다. 좌석은 다 채웠는데 그 자리에서 오가야 할 말은 오가지 않는 것이다.이사들은 왜 회의실에서 입을 닫는가최근 나온 연구들은 바로 이 방 안의 풍경을 파고든다. 네덜란드 학자 마릴리케 엥버스가 2026년 발표한 논문 ‘Behind Closed Doors’는 실제 이사회 회의를 녹음하고, 참석 이사 전원을 따로 인터뷰해 회의실의 실상을 추적했다. 겉보기에 아무 갈등 없이 매끄럽게 끝난 회의를 두고, 이사들은 저마다 “사실 그때 이런 점이 걸렸다”고 털어놓았다. 문제의식은 있었으나, 아무도 그 자리에서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엥버스는 이 침묵이 소심한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고 말한다. 침묵은 ‘지금 말할 자리가 아니다’ ‘문제를 제기하면 관계가 상한다’ ‘말해도 결론은 바뀌지 않는다 등의 계산에 따라 작동하는 학습된 관행이었다. 더 뼈아픈 지적은 그 다음이다. 회의를 효율적으로 만들겠다며 짜 놓은 절차, 곧 촘촘한 안건과 빠듯한 시간과 위원회 분업이야말로 무엇을 말할 수 있고 없는지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효율을 위한 장치가 도리어 침묵을 조장하는 셈이다.이사회 현장을 직접 촬영해 관찰한 연구도 같은 곳을 가리킨다. 이탈리아와 호주 연구진이 조건이 비슷한 두 공기업의 이사회를 비교했더니, 짧고 잦은 회의를 시간에 쫓겨 진행한 쪽에서는 안건마다 이사의 34%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반면 여유 있는 회의에서 의장이 발언권을 고루 돌린 쪽에서는 침묵한 이사가 15%에 그쳤다. 두 이사회를 가른 것은 이사 개개인의 자질이 아니라 회의 시간과 의장의 진행 방식, 곧 회의의 설계였다.좌석을 채우는 개혁에서 회의를 바꾸는 개혁으로여기서 한국 기업을 위한 첫 번째 과제가 나온다. 이사들이 입을 열고 그 발언이 토론으로 이어지도록, 회의를 이끄는 사람의 역할을 다시 세워야 한다. 대표이사와 의장을 분리하는 일은 중요한 출발점이지만 어디까지나 출발점일 뿐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의장이 발언권을 고루 나누고, 이견이 오가는 데 주저함이 없도록 회의를 운영하는 진행자가 되는 일이다. 개별 이사의 독립성이나 전문성만이 아니라, 반대 의견이 안전하게 오가는 회의 문화를 갖추었는지를 이사회 평가의 핵심 지표로 삼아야 한다.두 번째 과제는 남은 조건, 곧 ‘정보가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발언권을 아무리 고르게 나눠줘도, 이사가 사안을 파악하지 못하면 던질 질문 자체가 없다. 미국 학자 스티븐 보이비 등은 2016년 연구에서 상시 감시가 구조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여러 회사를 겸임하며 1년에 몇 차례 모이는 사외이사가 거대하고 복잡한 기업의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해 경영진을 실시간으로 감독하기란 애초에 무리라는 것이다. 우리 현실도 다르지 않다. 상장사가 내는 기업지배구조보고서에는 사외이사에게 정보와 자원을 충분히 제공하는지, 이를 전담할 인력을 두었는지를 적도록 되어 있지만 그 서술의 상당수는 형식에 그친다. 이사에게 감시 의무를 무겁게 얹으면서 정작 그 의무를 수행할 정보와 시간을 주었는지는 묻지 않은 것이다. 방향은 분명하다. 안건 자료가 회의 직전에 던져지듯 배포되어서는 이사가 사안을 파고들 여지가 없다. 이사들이 내용을 검토하고 미리 질문을 벼릴 수 있도록, 자료는 시간적 여유를 두고 사전에 전달돼야 한다.결국 엥버스가 던진 물음으로 돌아온다. 이사들은 하나같이 “우리 이사회는 모든 것을 투명하게 논의한다”고 말하지만, 실제 회의실을 지배하는 것은 그 말이 아니라 침묵이다. 우리가 표방하는 이사회와 실제로 작동하는 이사회 사이의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지난 수년의 개혁은 회의실의 자리를 새로 채웠다. 이제 남은 과제는 그 자리에 앉은 이사가 판단할 정보를 손에 쥐고 입을 열 수 있으며, 그 발언이 살아 있는 토론으로 이어지게 하는 일이다. 누구를 앉힐지를 넘어, '그들이 어떻게 일하게 할지'를 물어야 한다. 개혁의 시선은 이제 회의실 문 안으로, 이사회의 회의 진행표와 자료 봉투 위로 옮겨가야 한다.

2026.08.0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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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을 금융으로 정의하다 [허태윤의 브랜드스토리]

전문가 칼럼

지난 7월 16일, 미국 언론이 일제히 한 백악관 직원의 이름을 보도했다. 가브리엘 페레즈. 트럼프 대통령이 연설할 때 원고를 화면에 띄우는 텔레프롬프터 담당자다. 10년 가까이 대통령 곁에서 연설 원고를 누구보다 먼저 읽어온 그는 그 원고로 돈을 걸었다. 미국의 예측시장 플랫폼 칼시(Kalshi)에는 대통령이 연설에서 특정 단어를 말할지에 베팅하는 상품이 있다. "트럼프가 오늘 연설에서 '가짜 뉴스'를 언급할까?" 같은 것이다. 페레즈는 석 달간 12건이 넘는 연설에 베팅해 10만 달러, 약 1억4000만 원을 챙겼다가 적발돼 무급 휴직 처분을 받았다. 주식시장으로 치면 내부정보를 이용한 불법 거래인 셈이다.한국 독자에게는 사건의 부도덕성보다 대통령의 연설에 언급되는 말에 돈을 거는 시장이 있다는 사실이 더 생소할 수 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돈을 거는 시장이라니. 그런데 이 시장은 불법 도박도 아니고 베팅 회사도 아니다. '칼시'라는 이름의 이 기업의 정체는 '참여형 정보 플랫폼'이다. 이용자의 관심과 판단이 축적되면 데이터가 되고, 데이터가 모이면 여론조사보다 정확한 '집단지성의 가격표'가 된다. 칼시가 스스로를 베팅 회사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정확한 뉴스의 출처"라고 정의하는 근거다. 이렇게 성장한 회사의 기업가치는 현재 220억 달러, 우리 돈 30조 원이 넘는다. 창업 8년 차의 스타트업이다.발레리나와 트레이더가 세운 거래소칼시는 2018년 MIT 동창 두 사람이 세웠다. 골드만삭스에서 파생상품을 다루던 타렉 만수르와 발레리나 출신으로 수학을 전공한 뒤 헤지펀드에서 일했던 루아나 로페스 라라. 두 사람을 묶은 것은 '불확실성'에 대한 집착이었다. 세상의 모든 미래는 불확실한데 왜 그 불확실성을 사고파는 시장은 없는가.플랫폼의 구조는 단순하다. "연준이 다음 회의에서 금리를 내릴까?",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은 이 영화가 받을까?", "이번 주말 뉴욕에 눈이 올까?" 세상의 온갖 질문이 상품으로 올라오고 이용자는 '예'와 '아니오' 계약을 사고판다. 맞히면 계약 하나가 1달러의 가치를 갖게 되고, 틀리면 휴지가 된다. 묘미는 가격에 있다. '예' 계약이 70센트에 거래된다면 시장은 그 일이 일어날 확률을 70%로 본다는 뜻이다. 주가가 기업의 가치를 반영하듯 이 가격은 미래에 대한 대중의 판단을 실시간으로 반영한다. 문제는 이 사업의 이름이었다. 결과에 돈을 걸고 맞히면 따고, 틀리면 잃는다. 이 행위를 부르는 오래된 이름은 도박이다.여기서 두 창업자는 실리콘밸리의 문법을 배반한다. 우버와 에어비앤비가 증명해 온 성공 공식은 '일단 저지르고 나중에 허가받는' 것이었다. 실제로 경쟁사 폴리마켓은 그 길을 갔다. 칼시는 반대를 택했다. 제품을 하나도 내놓지 않은 채 2년 넘게 미국 금융당국인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라라는 훗날 "승인을 받지 못하면 회사는 그냥 제로가 되는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매출 없는 스타트업이 규제 승인 하나에 회사의 생사를 건 셈이다.무모해 보이는 이 선택의 바닥에는 업에 대한 정의가 깔려 있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사업을 베팅업이 아니라 금융업으로 규정했다. 1848년 시카고에서 곡물 선물이 탄생한 이래 금융시장은 농산물에서 원자재로, 다시 금리와 환율로 거래 대상을 넓혀 왔는데 정보화 시대의 다음 거래 대상은 '사건' 그 자체라는 논리였다. 스스로를 베팅 업체가 아닌 '거래소'로, 상품을 '이벤트 계약'으로, 이용자를 '트레이더'로 명명한 것도 그 정의의 연장이었다. 그래서 이들이 찾아간 곳도 도박 당국이 아니라 금융당국이었다.2020년 11월 CFTC는 칼시를 최초의 이벤트 계약 정식 거래소로 승인했다. 도박과 금융을 가른 것은 기술이 아니었다. 업의 본질을 무엇으로 정의하고 그 정의를 누구에게 승인받을 것인가의 문제였다. 칼시의 확신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선거 베팅 승인을 거부하는 CFTC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 2024년 항소법원에서 이겼다. 자신을 규제하는 당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승소한 회사. 그 직후 치러진 미국 대선에서 예측시장은 여론조사가 놓친 흐름을 먼저 가격에 반영하며 전국적인 유명세를 얻었다. CNN은 뉴스 화면에 칼시의 실시간 확률을 띄우기 시작했고, 메타는 유사한 예측 앱 개발에 뛰어들었다. 업의 정의(定義)가 기업의 운명을 가른다물론 이 정의는 지금도 시험대에 있다. 칼시 거래의 대부분은 사실상 스포츠 베팅이고, 미국의 여러 주 정부는 이를 불법 도박이라며 소송을 진행 중이다. '금융'이라는 간판과 '도박'이라는 실체 사이의 긴장은 여전히 팽팽하다.그래서 페레즈 사건이 흥미롭다. 그를 잡아낸 것은 FBI도, 백악관 감찰도 아닌 칼시 자신이었다. 자체 감시 시스템이 비정상적인 베팅을 포착했고 계좌를 추적해 규제당국에 넘겼다. 생각해 보면 도박판에는 내부자 거래라는 죄목이 없다. 내부자 거래를 적발하고 처벌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곳이 감시와 규율이 작동하는 금융시장이라는 증거다. 백악관발 스캔들이라는 최악의 뉴스 앞에서 칼시는 8년 전 스스로 내린 업의 정의를 행동으로 증명한 셈이다.업의 정의가 기업의 운명을 가른 것은 칼시가 처음이 아니다. 100년 전 미국 대륙의 지배자는 철도회사였다. 그러나 자동차와 비행기가 등장하자 이들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시어도어 레빗은 1960년 발표한 논문 '마케팅 근시안'에서 몰락의 원인을 수요 감소가 아니라 정의의 실패에서 찾았다. 철도회사들은 스스로를 '철도업'으로 규정했다. 고객이 산 것은 철도가 아니라 '이동'이었는데도 말이다. 스스로를 운송업으로 정의했더라면 자동차와 항공기는 위협이 아니라 사업의 기회였을 것이다. 철도는 업을 좁게 정의해 눈앞에 다가온 시대를 놓쳤고, 칼시는 업을 새롭게 정의해 없던 산업을 만들었다.한국에서는 사행행위 규제로 인해 이런 시장이 열리기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나 칼시가 남긴 질문은 예측시장 너머에 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파는 회사인가. 그 답을 간판이 아니라 위기의 순간 행동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도박을 금융으로 바꾼 것도, 대륙의 지배자를 무너뜨린 것도 결국 업을 정의하는 그 한 줄이었다.

2026.08.0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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