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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시민이 선택한 정치를 닮는다[김현아의 시티라이프]

전문가 칼럼

위기가 닥치면 정치는 무엇부터 해야 할까. 그 해답을 보여준 사례가 바로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의 전 시장 롭 판 기이젤(Rob van Gijzel)이다. 2008~2016년 시장으로 활동한 그는 취임하자마자 닥친 글로벌 금융위기 상황에서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을 발휘해 아인트호벤을 세계적인 스마트시티로 변모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아인트호벤은 지역경제의 중심이던 필립스 등 대기업이 흔들리며 대규모 실업이 우려됐다. 판 기이젤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주요 기업 CEO들을 긴급히 불러모아 단기 근무제를 도입했다. 단기 근무제는 기업이 정규직 근로자의 근무 시간을 줄여 인건비 부담을 완화하고 고용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제도다. 이는 해고 대신 근로시간 단축을 통해 숙련 인력을 유지하고, 정부의 보조금을 활용해 기업의 부담을 줄는 장점이 있다. 근로자에게는 고용 안정성과 일·생활 균형을 제공한다. 판 기이젤은 이 제도를 통해 아인트호벤 지역의 대량 실업을 방지하고 위기 극복의 발판으로 삼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지식근로자 지원제도도 활용했다. 전문성과 경험을 가진 인재들이 조직 내에서 지속적으로 성과를 창출할 수 있도록 교육‧지식 공유‧성과 보상 체계를 강화했다. 해고 대신 일자리를 나누는 방식으로 고용을 지켜낸 것이다. 이 방안은 훗날 네덜란드 전체로 확산되며 위기 대응의 대표 사례가 됐다. 무엇보다 인상 깊은 점은 시민들을 변화의 주인공으로 세웠다는 것이다. 판 기이젤은 ‘마크트 메’(Maak’t Mee)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예산 사용에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도록 했다. 공원 조성부터 교육 프로그램까지,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실제 정책으로 이어졌다. 버려진 공간은 예술과 공동체 활동으로 되살아났고 스마트시티 기술은 시민들의 제안에서 출발했다. 판 기이젤의 리더십은 위기 앞에서 ▲빠른 결단력 ▲신뢰를 바탕으로 한 협력 ▲그리고 시민을 믿는 용기까지 이 세 가지가 있다면 도시도 사람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이다.피츠버그, 철강 도시에서 기술 도시로 한때 ‘강철의 도시’로 불렸던 미국 피츠버그는 1980년대 철강산업의 붕괴와 함께 깊은 침체에 빠졌다. 불과 3년 사이에 9만5000개의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졌고, 일부 지역의 실업률은 27%를 넘었다. 사람들은 해마다 수만 명씩 도시를 떠났다. 1990년대 초에는 도시 재정이 파탄 직전까지 몰렸다. 바로 이 시점에서 시장으로 취임한 인물이 토마스 J. 머피 주니어(Thomas J. Murphy Jr.)다. 머피 시장은 위기를 도시 재설계의 기회로 삼았다. 그는 긴축이 아닌 투자로 대응했다. 그는 공공과 민간이 협력하는 ‘PPP’(Public-Private Partnership) 모델을 도입해, 총 45억달러에 달하는 민간 투자를 유치했다. 그 중심에는 도시의 핵심 자산이었던 황폐한 철강공장 부지 재개발이 있었다. 그는 이 부지를 매입해 상업·주거 복합단지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이 중 하나인 ‘사우스사이드 웍스’(Southside Works)는 과거 그의 아버지가 근무했던 철강공장을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시킨 사례였다. 인상적인 점은 이 모든 일이 피츠버그가 미국에서 가장 심각한 재정위기 도시로 평가받던 시기에 진행됐다는 사실이다. 그는 시 예산의 25%가 부채 상환에 쓰이던 상황에서 과감히 펜실베니아 주정부의 Act 47 재정위기관리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외부의 엄격한 재정 감시를 수용하는 대신, 장기적 도시 재생을 위한 정책적 자유를 확보했다. 머피는 도시의 하드웨어뿐 아니라 경제 생태계 자체를 바꾸는 데에도 집중했다. 그는 지역의 유명 대학인 카네기멜론대학과 피츠버그대학과 협력해 첨단 기술 기업들을 도시로 끌어들였다. 구글‧애플‧우버 등 글로벌 혁신 기업들이 피츠버그에 연구센터를 설립하며 도시의 경제 구조는 철강에서 기술과 지식 산업으로 급격히 변화했다. 도시의 환경을 더욱 살기 좋게 개선하는 데도 힘썼다. 시민들을 위해 25마일에 이르는 자전거와 보행자 트레일을 강변에 조성하고 도시 전역에 녹지 공간을 확대했다. 처음에는 시민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프로젝트는 도시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대표적인 성과로 평가받았다. 머피 시장은 어려운 결정과 비판을 감내하면서도 긴 호흡으로 도시의 미래를 설계한 것이다.우리가 만나는 미래, 결국 우리가 선택한 정치의 결과두 사례는 모두 위기 속에서 도시의 미래를 재설계한 리더들의 이야기다. 산업 쇠퇴와 경제 불안 속에서도 장기적 관점의 정책을 추진하며 시민 중심의 전환을 이끌었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판 기이젤은 시민 참여와 협력을 바탕으로 한 ‘조율형 리더십’이었다면, 머피는 결단과 추진력 중심의 ‘실행형 리더십’이었다. 전자는 신뢰와 합의, 후자는 속도와 방향성이 강점이었다. 도시를 바꾸고 살린다는 목표는 같았지만 리더십의 성향은 달랐던 것이다. 지금 이 도시들은 그들이 선택한 리더십을 닮은 모습을 띠고 있다. 정치 리더를 선택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가 내리는 정치적 선택이 곧 우리가 살아갈 도시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도시 하나도 이처럼 리더의 철학과 결단에 따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지금 대한민국에 필요한 리더는 누구일까?중요한 것은 정당의 색깔이나 이념보다 실제로 위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인지 판단하는 일이다.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국민을 설득하며 미래를 위해 당장은 인기 없는 결정을 감당할 수 있는 용기있는 후보. 시민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공공과 민간, 중앙과 지방의 역량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후보. 우리는 그런 리더를 선택해야 한다.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는 단순한 정권 교체나 연장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위기 앞에서 어떤 방향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하는 시간이다. 우리 삶의 기반이 되는 도시를 살린 리더십에서 교훈을 얻는다면 멀리 보고 꾸준히 가는 정치인, 분열대신 통합을,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국민은 물론 야당과도 소통하며 국가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리더를 선택하는 일이 중요하다. 내가 던진 한 표가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준다. 우리가 만나는 미래는 결국 오늘 우리가 선택한 정치와 시민 참여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2025.06.01 09:01

4분 소요
동남아시아 이커머스 시장에 진출하려면…”틈새 시장 노려야” [동남아시아 투자 나침반]

전문가 칼럼

인터넷이 우리 생활에 들어온 이후 가장 큰 생활의 변화는 집에서 편하게 물건을 받아볼 수 있는 것일 것이다. 전 세계에서 필요한 물건을 주문할 수도 있고 더 이상 무거운 것들을 들고 먼 거리를 이동할 필요도 없어졌다. 편하게 집에서 앉아서 필요한 물건들을 검색하고 가격을 비교하고 주문하면 끝이다.1990년대 후반 인터넷 망이 깔리기 시작하고 컴퓨터의 보급이 보편화된 지역에서는 그때부터 전자상거래가 활성화되기 시작했지만 동남아시아·아프리카·남미 등은 스마트폰의 보급이 본격화된 2010년 초반에 가서야 그 편리함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지금 동남아시아의 전자상거래는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을까. 필자가 2015년 처음 싱가포르로 이주했을 때 3%가 되지 않았던 전자상거래의 침투율은 현재 20%가 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 일부국가는 30%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남아 전자상거래 기업 일부만 생존 그 흐름에 따라 생겨나기 시작했던 많은 이커머스 업체들은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몇 개만이 남았다. 그중 당시 후발 주자였던 쇼피는 동사의 모회사인 SEA의 2017년 나스닥 상장이후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나머지가 뒤따르고 있다. 전자상거래는 나누자고 한다면 1세대~3세대 모델로 나눌 수 있다. 1세대는 단순 중개 플랫폼이다. 소비자와 판매자를 단순히 연결시켜주고 판매자로부터 일정 수수료를 받는 구조이다. 미국의 이베이, 한국의 G마켓을 생각하면 된다. 2세대는 아마존, 쿠팡과 같은 모델이다. 플랫폼과 더불어 자체 창고와 물류사를 가지고 풀필먼트(Fulfillment)라고 하는 상품의 입고부터 보관· 포장·배송·반품에 이르기까지 고객 주문의 전 과정을 물류 전문 업체가 대행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 모델은 창고, 자체 차량 등 막대한 투자금이 필요하다. 3세대 모델은 소위 커뮤티티형으로 불리는 것으로 공통의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 구매 등을 통해 소비를 주도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업체는 중국의 판둬둬, 틱톡 등이 있다. 2024년 동남아시아 전자상거래 시장에 중요한 전환점이 도래했다. 지난 10여 년간 적자 운영을 이어온 대표 플랫폼들이 마침내 수익성을 달성하였다. 라자다는 2024년 7월 첫 월간 흑자를 기록했고, 쇼피도 2024년 4분기에 흑자전환을 알렸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네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시장의 과잉 경쟁이 정리되며 상위 플랫폼 중심으로 통합이 이뤄졌고, 둘째, 쇼피를 필두로 판매 수수료 인상이 단행되어 수익성이 개선됐다. 셋째, 물류 내재화와 같은 핵심 분야에 집중 투자한 전략이 주효했다. 넷째, 틱톡숍과 테무 같은 신흥 플레이어들의 영향력은 아직 제한적이다. 2017년 싱가포르에 진출한 아마존은 더 이상 이 지역에서 확장의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동남아 전자상거래 1세대 모델 2세대 전환 느려 쇼피와 라자다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전자상거래업체는 1세대 모델이다. 쇼피는 비록 SPX라고 불리는 자체 물류회사를 가지고 있고 여기에 많은 투자를 하기는 하지만 2세대 모델로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대신 연 10%가 넘는 이율을 받는 할부서비스 등 핀텍 분야를 성장의 동력으로 삼고 있다. 쇼피에서 쇼핑을 해보면 1,000원짜리 제품을 사도 몇 개월 할부가 가능하다. 쇼피가 흑자전환에 성공을 한데에는 수수료 인상이 가장 크게 작용을 했다. 쇼피가 처음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당시 강자였던 큐텐, 라자다에 비해 현저히 낮은 판매자 수수료, 무료 배송을 통해 급격히 시장을 장악해 나갔다. 하지만 굳건한 1인자가 된 이후에는 판매자 수수료를 급격히 올리기 시작했고 현재는 광고비를 포함했을 때 판매자로부터 판매가의 약 40%를 가져간다. 광고비는 광고를 하지 않으면 플랫폼에서 노출이 되지 않기 때문에 판매자로서도 지출을 해야만 하는 비용이 되었다. 자체 물류사를 통해 배송은 하지만 여전히 절반이 넘는 물량은 다른 물류사에 위탁을 한다. 쇼피의 압도적인 물량에 물류사들은 매우 낮은 가격으로 배송을 해주고 있으며, 이는 그 물류사들의 수익성 악화로 이어지고 있다. 즉 쇼피는 현재 판매자들과 물류사들의 이익 희생을 바탕으로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당분간 이 구도는 쉽게 흔들릴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징둥이 30% 지분을 가지고 있는 쇼피와 알리바바의 자회사인 라자다는 중국의 상품 및 판매자 소싱에 대한 강력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라자다는 필요할 경우 알리바바로부터 막대한 자금 지원을 받고 있다. 제조업기반이 약해 자체 생산 상품 및 브랜드가 거의 없는 동남아시아에겐 중국의 물건이 없이는 현재로서는 전자상거래의 운영이 쉽지 않다. 벤치마킹을 할 수 있는 중국의 이커머스 시장의 변화에서도 보면 과거 알리바바와 JD가 20년간 시장을 지배하였으나 현재는 2세대 없이 3세대 플레이어들과 시장을 나눠가지고 있다. 현재 동남아시아에서는 틱톡이 빠르게 상승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큰 위협은 되지 않고 있고 현지 관련 스타트업은 보이지가 않는다.한국 기업들에게도 이 흐름은 시사점이 크다. 동남아 진출을 노리는 한국의 스타트업이나 ▲물류 ▲결제 ▲광고 솔루션 기업들은 플랫폼과의 ‘경쟁’이 아닌 ‘틈새’를 찾는 전략이 절실하다. 또한, 수익성과 시장지배력의 역설 속에서, 디지털 경제가 단순한 팽창이 아닌 내실과 생존의 국면에 들어섰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2025.06.01 08:00

4분 소요
“학폭에 아이들이 울고 있다”...중학교 폭력, 고등의 2.5배 증가 [임성호의 입시지계]

전문가 칼럼

지난해 중·고등학교에서 발생한 학교폭력 심의 건수가 전년 대비 큰 폭으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중학교의 폭력 발생 건수와 처분 비율은 고등학교에 비해 3배에 달해 경각심이 요구된다. 대학입시에서 학교폭력 관련 처분은 실질적 감점이나 지원 제한 등 치명적 불이익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학생과 학부모 모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교육부와 관련 기관에 따르면, 2024년 전국 2380개 고등학교에서 학교폭력으로 인해 실제 심의가 진행된 건수는 1만660건으로, 2023년 8604건에 비해 23.8%(2056건) 증가했다. 같은 해 실제 처분 건수는 1만2975건으로, 전년(1만1258건) 대비 15.3%(1717건) 늘어났다. 이는 한 건의 심의에 복수 인원이 포함되고, 중복 처분이 내려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심의 유형별로는 고등학교에서 언어폭력이 31.1%로 가장 많았다. 이어 ▲신체폭력(27.3%) ▲사이버폭력(14.1%) ▲성폭력(11.7%) ▲금품갈취(3.9%) ▲강요(3.9%) ▲따돌림(3.1%) 순으로 집계됐다. 특히 사이버폭력은 전년 대비 52.9% 증가했고, ▲성폭력 46.3% ▲따돌림 34.6% ▲언어폭력 23.5%가 증가하며 전반적인 폭력 양상이 심화되고 있다.고등학교 단계에서 내려진 처분 중에서는 2호 ‘접촉·협박·보복행위 금지’가 27.3%로 가장 많았으며, ▲1호 ‘서면사과’(19.6%) ▲3호 ‘학교봉사’(18.8%) ▲5호 ‘특별교육 이수 또는 심리치료’(18.1%)가 주요 유형이었다. 이 중에서도 3호 학교봉사는 전년 대비 24.1%, 2호는 16.8%, 5호는 16.2% 증가해 경고 수준 이상의 조치가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교폭력…중학교가 ‘진앙지’중학교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2024년 중학교에서 발생한 학교폭력 심의 건수는 2만7624건으로, 고등학교의 2.5배를 넘어섰다. 이는 전년(2만1651건) 대비 27.5%(5973건) 증가한 수치다. 실제 처분 건수는 3만5752건으로 고등학교의 3배 가까이에 달한다. 중학교의 처분 건수 역시 2023년 3만302건에서 18.0%(5450건) 증가했다. 중학교 심의 유형별로는 신체폭력이 30.9%로 가장 많았다. 이어 ▲언어폭력(29.3%) ▲사이버폭력(11.6%) ▲성폭력(9.2%) ▲금품갈취(5.9%) ▲강요(5.1%) ▲따돌림(3.9%) 등이 뒤를 이었다. 이 중 따돌림은 전년 대비 52.4%나 증가했고, ▲사이버폭력 46.1% ▲금품갈취 32.3% ▲강요 30.6% ▲언어폭력 29.9% ▲성폭력 28.4% 등이 증가해 전반적인 심각성이 확인됐다.중학교의 실제 처분 유형으로는 2호 ‘접촉·협박·보복행위 금지’가 29.2%로 가장 많았다. 이어 ▲3호 ‘학교봉사’(20.9%) ▲1호 ‘서면사과’(20.1%) ▲5호 ‘특별교육 이수 또는 심리치료’(13.0%) 등의 순으로 집계됐다.특히 7호 ‘학급교체’는 전년 대비 37.8% 증가했으며, 3호 학교봉사는 24.2%, 1호 서면사과는 19.0%, 4호 사회봉사는 18.0% 늘었다. 퇴학 처분도 1명에서 4명으로 증가하며 엄정한 대응 기조가 이어지고 있다.학교폭력 처분은 대학 입시에서 결정적인 불이익으로 이어진다. 서울대는 1호부터 9호까지 모든 처분에 대해 정시와 수시 전형에서 정성 평가 반영을 명시하고 있다. 연세대와 고려대도 수시 학생부교과전형 등에서 모든 처분에 대해 지원 자체가 제한되거나 감점 처리된다. 정시 전형에서도 연·고대는 물론, ▲성균관대 ▲서강대 ▲한양대 ▲중앙대 ▲경희대 등도 관련 처분 이력을 기준으로 실질적 불이익을 준다. 고교 입시 단계에서는 일부 영재학교에서만 전형 요강상 불이익이 명시돼 있으며, 특목고나 자사고에서는 현재까지 구체적 명시 사항은 확인되지 않았다.학교폭력 발생이 중·고등학교 모두에서 증가세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단순히 입시 불이익 차원을 넘어 학습과 성장 과정 전반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는 상황이다. 특히 갈수록 사회 전반에서 사법적 정의와 윤리의식에 대한 기준이 높아지고 있어, 학교폭력은 단순 청소년기 일탈이 아닌, 사회 진출 이후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025.06.01 07:00

3분 소요
2834점 전부가 위작이었던 희대의 미술품 사기 사건 [백세희의 컬처&로(LAW)]

전문가 칼럼

최근 필자를 찾는 미술품 위작 상담이 늘었다. 위작은 콜렉터를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폭탄이다. 판매자와 구매자의 평판을 모두 갉아먹는 사건인지라 당사자 사이에서 조용히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더라도 규모가 큰 사건은 화제가 되기 마련이다. 미술품 구매자, 즉 콜렉터가 아니더라도 미술시장을 공부하거나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아마도 한 번쯤은 들었을 법한 희대의 사기 사건이 있다. 2005년에 시작돼 무려 12년 동안이나 다툼이 이어지다가 2017년 여름, 대법원의 판결 선고로 종지부를 찍은 ‘화가 이중섭·박수근의 그림 위작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사건 초반에는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지만, 워낙 긴 시간에 걸쳐 공방이 이어지다 보니 사람들의 관심도 점차 희미해져 갔다. 이에 사람들은 결론이 나긴 났는지, 어떻게 났는지, 그 내용은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다. 이번 칼럼에서는 ‘화가 이중섭·박수근의 그림 위작 사건’의 전말을 훑어보고, 이를 배경으로 하여 작품의 진위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지, 즉 미술품의 감정 방법에 대해 살펴보자.이중섭 미발표작 전시회 추진...시작된 위작 재판화가 이중섭의 50주기(2005년)를 기념하기 위해 한국고서연구회의 K 명예회장은 2004년 방송사 SBS에 이중섭의 미발표작 전시회를 제안했다. 그는 일본 도쿄에서 표구점을 운영 중이던 이중섭의 차남 L을 찾아가 자신이 소장하던 이중섭의 그림을 보여줬고, L은 K 회장이 보유한 모든 그림이 진품이 맞다고 SBS에 확인해줬다. 몇 달 뒤, L은 이중섭의 유작이라며 그림 8점을 서울옥션 경매에 내놨는데, 이때 한국미술품감정협회는 이들 그림이 모두 위작이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L은 유족이 50년 동안 보관해왔다는 이중섭의 미발표작 20여 점도 새로 공개했다. 그런데 이 가운데 4점이 K 회장이 SBS에 보여줬던 작품과 같은 것으로 드러나 문제의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다. 한국미술품감정협회는 L이 K 회장으로부터 위작을 넘겨받은 뒤에 이를 진품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며 검찰에 수사를 촉구했다. 이에 L은 위 감정협회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며 지리한 법적 공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감정 결과와 이에 대한 불복이 이어지는 와중에, K 회장은 이중섭과 박수근의 그림을 추가로 공개했다. 그는 자신이 1970년대 초에 인사동 고서점에서 집 1채 값에 달하는 금액으로 이 그림들을 묶음 구입했다고 주장했다. 이때 비로소 박수근의 그림도 등장해 이 사건의 통칭이 ‘화가 이중섭·박수근의 그림 위작 사건’이 됐다.(이는 대법원의 판결문에서도 쓰인 명칭이다) 박수근의 아들 박 모 씨는 K 회장이 공개한 박수근의 그림이 위작이라며 K 회장을 고소했다. K 회장도 박 모 씨와 감정협회를 무고와 명예훼손으로 맞고소하며 사건은 복잡하게 얽혀갔다. 검찰은 2005년 10월에 표본 작품들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감정 의뢰했고, 이들 기관은 표본 작품들을 모두 위작으로 판단했다. 검찰이 본격적으로 K 회장의 집과 사무실을 압수수색한 결과 약 2800여 점에 달하는 이중섭과 박수근의 그림을 찾아냈다. 전문가들의 감정 끝에 압수한 2800여 점의 그림들은 전부 위작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검찰은 2007년 10월 K 회장을 구속 기소하고 신병을 확보하지 못한 일본 국적의 L에게는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1년 반 정도 진행된 재판 끝에 1심 재판부는 2009년 2월 K 회장에게 사기죄, 위조사서명행사죄, 무고죄 등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명했다. K 회장은 이에 불복하여 항소(2심), 상고(3심)를 제기했지만, 항소심 법원과 상고심 법원(대법원) 이를 모두 기각하고 그의 유죄를 확정지었다.(대법원 2017. 7. 18. 선고 2013도1843 판결)법원이 이 사건의 그림 2800여 점 모두가 위작이라고 판단한 근거는 무엇일까? 사실인정은 법관의 전속적인 권한이지만 미술품 감정의 경우처럼 특별한 전문가의 판단이 필요한 때도 종종 있다. 재건축 사건의 경우 보상금 산정의 기준이 되는 시가 감정, 저작권 침해 여부를 판단할 때의 유사성 감정 등이 그 예이다. 이때 법원은 감정인을 위촉하여 그 판단을 구한다. 법관이 감정인의 판단에 구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감정인의 감정 결과가 대부분 사실인정의 기초자료가 됐다. 그래서 법원은 소송의 양 당사자에 중립적인 감정인을 위촉하고자 노력한다. 각각의 당사자가 별개로 감정 신청을 하여 법관이 이를 종합하여 판단하는 경우도 있다. 다시 ‘화가 이중섭·박수근의 그림 위작 사건’으로 돌아오자. 이 사건 판결문에서 법원은 “안목감정, 과학감정 및 자료감정에서 나타난 사항들을 면밀히 종합해 보면 가짜 그림이라고 봄이 타당하고, 피고인도 이를 알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미술품의 진위 여부에 대한 감정은 자료감정과 안목감정이 주를 이루고 작품의 상태에 비추어 가능할 경우 과학감정도 이뤄진다. 하나하나 살펴보자.자료감정과 안목감정의 차이자료감정은 다른 말로 ‘출처조사’라 한다. 말 그대로 해당 작품 소유권의 역사 등을 거래기록, 카탈로그 레조네 등을 통해 증명하는 것이다. 감정에서 작품의 소장 이력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은 기본적이며 필수적인 과정이다. 출판 서적이나 관련 기사 등을 통해 작품에 대한 과거의 기록이 있는지 찾아보고, 그 기록들과 작품 소유자의 소장 경위 등의 진술 사이에 서로 모순되는 점은 없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현재까지는 작가별로 작품 전체를 등록하는 카탈로그 레조네가 법제화돼 있지 않다. 따라서 판매 기록, 전시회와 경매 도록, 작가의 아카이브 등 여타 접근 가능한 기록들과 소장 이력을 종합적으로 분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료감정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법원은 자료감정 결과를 진품 인정의 유일한 증거가 아닌 ‘유력한 증거 중 하나’로 다루곤 한다. ‘화가 이중섭·박수근의 그림 위작 사건’에서 한국미술품감정협회는 출판 자료들을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이중섭의 <물고기와 아이>에 등장하는 두 팔로 물고기를 안고 있는 그림은 1952년 10월 한 잡지와 1955년 이중섭 개인전 포스터와 전시안내장에 사용됐다. 그런데 이 포스터와 안내장의 그림들은 K 회장의 그림과 좌우가 바뀌어 있다. 좌우가 바뀐 그림은 이중섭의 작고 이후 발간된 화집 『한국 현대미술 대표작가 100인 선집』에 수록된 것과 일치하는데, 위 선집에서 좌우가 바뀐 그림이 사용된 이유는 원작을 촬영할 때 제작진이 실수로 원화를 촬영한 도판의 필름을 뒤집어 인쇄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모른 채 위작 화가는 위 선집의 그림을 그대로 모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바로 발표된 출판 서적을 종합하여 판단한 것으로서 자료감정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지금까지 밝혀진 진품의 숫자도 근거가 될 수 있다. 이 사건에서 재판부는 작가들의 작업일지 등을 조사했으며, “진품 수에 비해 피고인이 보유하고 있는 작품의 수가 너무 많은 점”도 그림들이 가짜로 보이는 근거로 들었다.안목감정은 미술 전문가의 지식, 경험, 직관에 기초한 판단이다. 진품 여부를 결정하는 매우 결정적이고 중요한 감정 방법이지만 주관적인 평가이기 때문에 법적인 문제로 들어가면 판사들을 고민에 빠지게 만든다. 전문가가 ‘딱 봤을 때 너무 조악합니다. 아닙니다’라고 말하는데, 이걸 어떻게 판결문에 옮길지 난감하기 때문이다. 안목감정은 스타일적인 관점에서 작품을 검토한다. ▲예술적인 스타일 ▲품질 ▲색채의 사용 ▲화풍 ▲주제와 소재 ▲물감의 종류 ▲물감의 터치 등등을 종합적으로 전문가의 눈으로 보아 판단하는 것이다. 이중섭·박수근 사건에서도 감정협회는 ‘감정 목적물은 선의 필치에서 이중섭 특유의 표현과 속도감이 나타나지 않고, 인체의 특징을 파악하지 못해 조악하게 복제되었다’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 재판부도 20~30년간 두 작가의 작품을 접해온 전문가가 평가하는 안목감정 결과를 활용했다.과학감정은 과학자들에 의해 객관적인 절차를 거치는 방법이다. 작품의 상태가 여러 과학실험 과정을 거칠 수 있을 때 실시한다. 비교적 오래된 작품의 경우에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 ▲세라믹이나 점토로 이뤄진 작품(조각이나 골동품)에 적용 가능한 열발광 분석 ▲유화를 사용한 그림에 화가 특유의 필치를 확인해 볼 수 있는 X선 투사 ▲수정하거나 덧칠한 부분 등을 알 수 있는 자외선과 적외선 사용법 ▲재료를 화학적으로 분석해 화가가 그림을 그렸던 시대와 맞는지 확인해 볼 수 있는 재료 분석 등이 주된 방법이다. 이중섭·박수근 사건의 경우 감정협회는 “이중섭의 그림에는 펄 물감이 사용된 적이 없는데 위작은 펄 물감으로 채색되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도 “이중섭·박수근의 생전에는 없었을 것으로 보이는 물감이 칠해져 있는 것도 있다”고 판시하며, 박수근 화백이 사망한 1965년 이후인 1984년부터 미술용 물감에 들어간 티타늄과 규소 성분을 찾아낸 X선 형광 분석기 확인 결과, 현미경 관찰, 적외선 촬영 등을 활용한 과학감정 결과를 받아들였다. 미술진흥법 시행에 따른 미술품 감정 제도 변화‘화가 이중섭·박수근의 그림 위작 사건’은 작품의 진위 여부를 둘러싼 국내의 다른 사건들에 비하면 비교적 깔끔하게 끝난 편이다. 대중들이 받아들이는 한 편의 드라마로서 그 결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작품 공개 → 가짜인가? → 감정 → 전부 가짜’라는 단순한 서사 때문에 적어도 우리에게는 단순명료한 결말로 느껴진다. 하지만 이중섭의 차남인 L에 대한 처분은 최종적으로 이뤄지지 않았고 뭔가 미심쩍은 것들이 완전히 규명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위작 사건은 작가 본인에게 엄청난 심리적·경제적 타격을 준다. 그뿐만 아니라 국가적 문화 인식 수준을 의심받을 수 있는 중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국내에는 미술품의 감정평가가 공신력 있는 특정 기관이 아닌 여러 화랑 혹은 사설 기관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문제점이 오랫동안 제기되어 왔다. 작가별로 작품 전체를 등록하는 카탈로그 레조네가 법제화된 다른 국가들과 달리 우리의 경우 객관성이 떨어지고 각 기관마다 진위 판정이 서로 다른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국회에서는 국가가 개입하여 특정 기관을 감정연구센터로 지정하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이 여러 차례 발의됐지만, 실제 법률의 제정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그러는 와중에 2024년「미술진흥법」이 제정됐다. 위 법은 미술품 감정업을 하는 자에게 미술품 잠정을 의뢰한 자나 다른 미술 서비스업자로부터 독립하여 공정하게 감정을 하도록 하는 등의 의무를 부여한다. 나아가 통합미술정보시스템의 구축과 운영의 권한을 문화체육관광부장관에게 부여해 정부가 미술품 정보의 객관적인 관리를 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었다.「미술진흥법」은 제정 후 시행된 지 불과 1년이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법이 시장의 위작 문제를 얼마나 줄여줄 수 있을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기존 사설 감정기관에 위반시 처벌 규정도 없는 의무 몇 개를 부여한 것이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라는 목소리도 있고, 통합미술정보시스템이 실제로 언제 구축될지도 미지수라는 걱정도 있다. 하지만 첫술에 배부르길 바랄 수는 없다. 2834점이 모두 위작으로 판명난 이중섭·박수근 그림 위작 사건을 겪고도 수년 동안 아무런 변화도 없던 과거를 돌이켜 보자. 이제야 첫 발을 뗀 미술진흥을 위한 국가의 노력을 관심있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백세희 법률사무소 아트앤 대표변호사

2025.05.3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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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인도주의 리더십의 중심으로 올라설 기회[순화동필]

전문가 칼럼

국제 인도주의 무대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은 꾸준히 성장했다. 한국은 지난해부터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23~2025년 글로벌 펀드(Global Fund)에 1억달러의 기여를 약속하는 등 국제 보건 협력에도 발 빠르게 나서고 있다. 하지만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은 여전히 많다. 분쟁‧기후위기‧감염병 등의 문제가 심화하면서 전 세계 인도주의 현장은 더욱 어려워졌다. 또한 국제사회의 관심과 지원이 닿지 않는 소외된 지역과 위기는 더욱 늘고 있다. 수단은 장기화된 내전 속에 극심한 기근과 콜레라 대유행이 진행됐고 국제사회의 관심에서 멀어진 방글라데시 로힝야 난민캠프에서는 여전히 100만 명 이상의 과밀한 인구가 생활하고 있다.한국의 인도적 지원이 단순한 지원을 넘어 국제사회에서 신뢰받는 리더십으로 이어져야 할 시점이다. 제21대 대통령은 보다 주도적이고 전략적인 인도적 지원 정책을 통해 한국 역할을 공고히 해야한다. 국경없는의사회는 앞으로 선출될 대통령 후보에게 인도적 지원과 글로벌 보건 분야에 관한 5가지 정책 제안을 하려고 한다. 첫째, 인도적 지원 예산은 현장 수요에 기반해 유연하게 배정‧집행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로힝야 난민, 콩고민주공화국 내전과 같이 수많은 소외 재난이 전 세계적으로 지속되고 있다. 이처럼 만성화되고 지원이 턱없이 부족한 지역들에 인도적 지원 예산이 우선적으로 배정돼야 한다는 뜻이다. 예산 배정 시 현장에서의 실제 활동 여부와 인도적 영향력을 기준으로 지원 대상을 국제기구, 민간단체 등 다각적으로 선정해야 한다. 긴급한 상황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도록 재정 집행 구조를 간소화하는 등 기민성을 높이는 제도적 개선도 필요하다.둘째, 한국 정부는 특히 글로벌 보건 분야에 대한 예산을 확대해야 한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국제원조 중단과 유럽 및 서부권 국가들의 대외원조 축소에 따라 아시아 국가들의 글로벌 리더십에 대한 주목이 확대되고 있다. 특히 한국은 바이오 및 AI 산업에서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는 만큼 글로벌 보건 분야에 이니셔티브를 갖고 나선다면 충분히 리더십을 확장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글로벌펀드(Global Fund)나 세계백신면역연합(GAVI)와 같은 글로벌 보건 다자기구에 대한 공여액을 증가한다면 인도주의 위기 해소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글로벌 보건 분야에서의 한국의 영향력 또한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공정·독립·중립 원칙 기반한 전문 민간단체와 소통해야셋째, 정부 부처와 전문 민간단체의 자유로운 상시 소통이 이뤄져야 한다. 공정성‧독립성‧중립성 원칙에 기반한 인도적 지원 전문 민간단체들은 인도적 현장에 대해 누구보다도 신속하고 객관적이며 공신력 있는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이미 영국‧일본‧캐나다 등 여러 나라 외교부는 국경없는의사회와 같은 전문 민간단체와 정기적이고 상시적인 소통을 통해 인도적 지원 및 글로벌 보건 정책을 논의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또한 인도적 지원 전문 민간단체들과의 지속적이고 상시적인 정보 교환을 기반으로 보다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인도적 지원 및 주요 외교 정책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넷째, 정부는 인도적 지원 민간 인력을 양성하고 현장 파견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 제33차 국제개발협력위원회에서 의결된 ‘인도적지원 전략 개정안’을 보면 여섯번째 전략으로 ‘인도적 지원 분야 역량 강화’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현행 여권법은 여행금지국 내 민간 기관 소속 인도주의 활동가 파견을 전면 금지하고 있다. 이런 제한은 결국 민간 인력의 현장 근무 기회 축소와 더불어 장기적으론 민간 전문가 육성에 제약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현행 여행경보제도 개선을 통해 민간 인도적 활동가들에 대한 파견 기회를 보다 확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국은 소외열대질환(Neglected tropical disease‧NTD)에 대한 연구‧개발(R&D) 투자와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소외열대질환이라는 이름이 암시하듯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해 백신‧진단‧치료제 등이 없는 곳이 많다.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매년 전 세계 20만여 명이 뎅기열‧뱀물림 사고‧리슈마편모충증‧노마병 등 NTD로 사망한다. 또 연간 10억명 이상이 NTD로 고통받고 있다. 인도주의적 이유뿐만 아니라 NTD에 대한 투자는 잠재적인 신흥 헬스케어 시장에 대한 진출로 이어질 수 있다. 기존의 감염병 대응 기술과도 기술적 연계성이 높아 관련 산업의 역량 강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은 차기 글로벌 보건 리더로서 보건 공적개발원조(ODA) 프로그램에 NTD 관련 요소를 포함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NTD 관련 치료제나 진단도구 연구개발을 주도해야 한다.한국은 이미 인도적 지원과 글로벌 보건 분야에서 의미 있는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국제사회는 한국의 더 큰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단순한 공여국을 넘어 글로벌 보건과 인도주의 리더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전환점이다. 이런 점에서 차기 대통령은 보다 주도적이고 지속가능한 인도적 지원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국경없는의사회는 한국의 이러한 변화를 기대하며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함께 협력하고자 한다.

2025.05.31 09:01

4분 소요
자영업자도, 나라도 빚더미 [EDITOR’S LETTER]

전문가 칼럼

자영업자들이 나날이 커지는 빚더미 속에서 아우성입니다. 최근 한국신용데이터의 소상공인 동향 리포트에 따르면 지난 1분기 국내 총 개인사업자 대출잔액은 719조2000억원으로, 작년 1분기 말보다 15조원 가량 늘었습니다. 증가한 것이 또 있는데요, 연체액입니다. 대출금도 제대로 갚지 못하면서 1분기 개인사업자 대출 연체금액은 13조2000억원에 달했는데, 이는 지난해 말 11조3000억원에서 16.7%, 지난해 1분기 9조3000억원에서 41.9% 각각 급증한 것입니다. 빚더미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폐업하는 자영업자들도 속출하고 있는데요, 올해 1분기 말 기준으로 개인사업자 대출 보유 사업장 총 361만9000개 중 13.8%인 49만9000개가 문을 닫았습니다. 폐업하고 실업급여를 받은 자영업자만 지난 3월까지 1500명이 넘었는데요, 이는 1분기 기준 역대 최대치입니다. 일부에서는 폐업하고 싶어도 대출 때문에 못 한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중소벤처기업연구원에 따르면 자영업자들이 폐업하면서 평균 1억원이 넘는 빚을 떠안는다는 조사 결과가 나올 정도로 타격이 큰 만큼 어쩔 수 없이 영업을 계속한다는 겁니다. ‘빚 지옥’에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영업자들을 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폐업 자영업자 대상으로 채무 조정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는 차원을 넘어 탕감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의 이재명 후보는 대선 운동 기간에 자영업자 부채 문제에 대해 “단순한 채무 조정을 넘어 실질적인 채무 탕감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코로나 때 다른 나라들은 빚을 져가며 국민을 지원한 반면, 우리는 국민에게 돈을 빌려줬다. 그 결과 자영업자이고, 민간이고 빚쟁이가 됐고, 지금 다 문을 닫고 있다”며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 투입을 강조했습니다.채무 탕감은 자영업자들은 환영할 만한 방책이지만 당장 빚을 성실하게 갚고 있는 채무자와의 형평성과 도덕적 해이 문제가 제기됩니다. 더구나 나랏빚도 문제입니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국가채무는 1175조2000억원으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46.1%를 기록했습니다. 향후에도 국가채무비율은 고령화와 성장 기조 둔화 등의 이유로 빠르게 상승할 전망인데요, 국회예산정책처는 2040년 80%, 2050년 100%를 넘어설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최근 무디스가 미국이 기축통화국임에도 정부 부채와 재정적자 등을 이유로 국가 신용등급을 하향했다며 비기축통화국인 한국은 국가 신용등급 하락 위험에 더 많이 노출돼 있어 나랏빚 증가를 더욱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한국 경제의 체력이 거의 바닥인 상황에서 나랏빚 증가로 국가 신용등급까지 떨어진다면 IMF 사태와 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벼랑 끝에 겨우 매달려 있는 자영업자의 빚 문제를 개별 문제로 봐서는 안 됩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특단의 대책이 나와야 할 때입니다.

2025.05.31 06:00

2분 소요
왜 그들은 실리콘밸리를 떠나는가 [실리콘밸리의 사람들]

전문가 칼럼

“여기가 진짜 혁신의 수도인가요?”실리콘밸리에 처음 도착한 이들이 가장 많이 묻는 말이다. 구글·메타·애플·넷플릭스·엔비디아… 이름만 들어도 아는 회사들이 다 모여 있는 곳. 그러나 막상 현장에 가보면 거리엔 노숙자 텐트가 늘어서 있고, 점심 한 끼가 30달러(약 4만2000원)를 훌쩍 넘는다. 대중교통은 낙후돼 있으며, 밤에는 치안 불안으로 발걸음이 뜸해진다.이곳은 1950~60년대 반도체 산업으로 출발해 ▲닷컴 ▲모바일 ▲AI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기술혁신의 성지였다. 스탠퍼드대를 중심으로 한 인재풀과 ‘빠르게 실패하고 다시 도전하는 문화’가 혁신의 토양이 됐다. 그러나 팬데믹 이후, 그 흐름에 뚜렷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2023년 기준 공실률 30%에 육박2020년부터 2024년까지 샌프란시스코의 인구는 약 87만명에서 약 81만명으로 약 6만4000명(7.3%) 감소했다. 이는 캘리포니아에서 인구 20만 명 이상인 지역 중 가장 큰 감소폭이다. 팬데믹 이후 원격근무 확산으로 많은 기업들이 고비용의 샌프란시스코 오피스를 유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2023년 기준 오피스 공실률이 30%에 육박했다.샌프란시스코의 평균 원룸 월세는 2024년 기준 약 3300달러, 투룸은 약 4500달러로 미국 내 최고 수준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중간 가격 주택을 구입하려면 연소득 26만달러 이상이 필요하며, 이는 2019년보다 30% 이상 오른 수치다. 창업 초기 단계의 스타트업이나 젊은 창업자, 중산층에게 주거비 부담은 매우 큰 현실적 장애물이다. 캘리포니아 주 소득세는 최고 13.3%로 미국 내 가장 높은 수준이다. 여기에 과도한 ▲법인세 ▲고용 규제 ▲교통난 ▲도심 노숙자와 범죄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기업과 인재의 이탈을 가속화하고 있다. 특히 중견 기업이나 급성장 중인 스타트업일수록 캘리포니아의 규제 환경은 부담이다.치안 역시 실리콘밸리를 떠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팬데믹 이후 샌프란시스코는 약국·편의점·소매점 등에서의 조직적 절도 사건이 급증했다. 도심에서 대낮 강도 사건이 일어나도 경찰 대응이 늦거나 소극적인 경우가 많아졌다. 일부 기업은 직원들의 출퇴근 안전 문제로 도심 사무실을 줄이거나 아예 철수하는 선택을 했다.테슬라·오라클·HP 엔터프라이즈(HP Enterprise) 등 대표적인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최근 본사를 텍사스 오스틴, 휴스턴 등으로 이전했다. 이들은 ▲낮은 세금 ▲저렴한 주거비 ▲친기업적 환경을 주요 이유로 꼽았다. 텍사스는 주 소득세가 없고, 물가가 낮으며, 기업 환경도 친시장적이다. 실제로 오스틴은 ‘실리콘 힐스(Silicon Hills)’라 불릴 만큼 테크 기업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신생 테크 허브’로 재편 중플로리다의 마이애미는 금융과 부동산 중심 도시였지만, 최근에는 스타트업과 투자자들이 모이는 ‘신생 테크 허브’로 재편되고 있다. 2023년 기준, 마이애미로 이전한 기술 기업 수는 팬데믹 이전 대비 2배 이상 증가했다. 이들은 저렴한 세금, 높은 생활 만족도, 빠른 정책 대응을 이유로 이주를 선택했다.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주소 이전을 넘어 ‘어디에서 일할 것인가’에 대한 집단적 재설계에 가깝다. 더 많은 기업이 “비싼 곳에서 존재감을 유지할 이유가 없다면, 굳이 남을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하지만 실리콘밸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최근의 AI 열풍은 실리콘밸리에 다시 에너지를 불어넣고 있다. 엔비디아, 오픈AI 등 AI 중심 기업들이 샌프란시스코에 오피스를 확장하고 있다. AI 기업들의 오피스 임대 면적은 170만 평방피트를 넘었다. 2024년 실리콘밸리 지역의 VC 투자액은 약 900억달러로, 미국 전체 투자금의 50% 이상을 차지했다. 이는 2021년 27% 수준에서 다시 반등한 결과다.또한, 글로벌 인재 유입도 다시 활발해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실리콘밸리는 국제 인재가 많은 곳이었지만, 최근 AI 붐과 함께 그 수는 더 늘었다. 2024년 기준 실리콘밸리 인구의 41%가 외국 출신이고, 기술직 종사자의 66%가 이민자다. 특히 인도와 중국 그리고 한국 출신 인재들이 AI와 반도체 분야에서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서울대, 카이스트 출신 인재들이 구글·테슬라·메타 등에서 일하고 있다. 쿠팡이나 뤼튼테크놀로지스 같은 스타트업은 실리콘밸리 네트워크를 통해 미국 시장을 공략 중이다.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도 점점 글로벌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전략을 재편하고 있다.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장소’에 집착하는가?한국 사회는 중앙집중형 구조와 학벌 중심 문화가 뿌리 깊다. 서울이라는 물리적 장소는 오랜 시간 동안 기회와 성공의 상징이었고, 자산 형성도 부동산 중심으로 이뤄져 왔다. 그래서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은 여전히 경력, 재산, 지위와 직결된다.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된 지금조차 우리는 ▲서울 ▲강남 ▲본사에 묶인 사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하지만 실리콘밸리의 변화는 이 고정관념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곳은 더 이상 ‘모여 있는 장소’가 아니다. 전 세계를 연결하는 네트워크이자 사고방식이다. 혁신은 특정 도시에 국한되지 않고, 텔아비브, 방갈로르, 자카르타, 서울 같은 도시들로 복제되고 있다. ‘디지털 실리콘밸리’는 물리적 본사를 넘어 존재한다.이제 중요한 건 물리적 위치가 아니라 연결성과 민첩성이다. 우리는 묻고 고민해야 한다. ‘우리 조직은 아직도 본사 중심, 회의 중심, 보고 중심의 사고에 갇혀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어디에 있든 빠르게 연결되고, 실험하고, 실행할 수 있는 유연한 구조를 갖추고 있는가?’실리콘밸리를 떠나는 사람들은 단순히 도시를 떠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새로운 방식의 일과 삶, 그리고 조직 문화를 선택한 것이다.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명확하다.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그리고 어디에 있든 얼마나 잘 연결되어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미국에 본사를 둔 글로벌 톱 액셀러레이터·VC 2080벤처스의 공동대표다. 글로벌 스타트업과 대기업을 연결하는 오픈이노베이션 전문가이며 '실패하는 Vs 성공하는 기업'의 공동저자다. 실리콘밸리·일본·사우디아라빙 등에서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투자 ▲M&A ▲글로벌 진출 전략을 지원하고 있으며, SpaceX 등의 투자자로도 활동 중이다. 해외 스타트업 두 곳에서 실무를 맡아 성공적인 엑시트를 이끌어낸 바 있다.

2025.05.2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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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건물이 탄소중립의 해결 열쇠다  [스페셜리스트 뷰]

전문가 칼럼

기후변화가 더 이상 먼 미래의 위협이 아닌 현실이 되면서 온실가스 감축은 국가적 과제를 넘어 도시와 개인의 과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매일 생활하는 공간, 바로 ‘건물’이 온실가스 배출의 주범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생각만큼 많지 않다.서울시만 들여다봐도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71%가 건물에서 발생한다. ‘바퀴 달린 것들’(수송)의 비중은 20%에도 미치지 못한다. 건물은 도시의 숨은 온실가스 배출원인 것이다. 이는 서울만의 특수성이 아니다. 뉴욕, 런던, 도쿄 등 대부분의 글로벌 대도시에서도 유사한 패턴을 보이고 있다. 세계의 주요 도시들이 건물 부문 온실가스 감축에 사활을 걸고 있는 이유다. 서울시의 온실가스 배출은 2000년대 후반 이후 감소세를 보이며 2020년에는 2005년 대비 약 13% 감소했다. 언뜻 보기에 긍정적인 성과처럼 보이지만,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상황은 녹록지 않다. 건물 부문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3% 감소에 그쳤고, 상업용 건물은 되레 6%, 공공 건물은 4% 증가했다. 이는 건물 부문 온실가스 감축의 시급성을 보여주는 유의미한 지표다. 서울시의 경우 지난 20년간(2000년~2020년) 건물 연면적이 74%나 증가했고, 현재 전체 건축물의 절반 이상(53.3%)이 30년 이상 된 노후 건축물인 상황이다. 구축 건물의 에너지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노후 건물의 단위면적당 온실가스 배출량은 신축 건물의 갑절 이상이다. 노후화되거나 환경 문제가 있는 건물의 자산가치가 하락하는 ‘브라운 디스카운트’(brown discount)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지점이다. 기후위기 대응의 성패는 이제 우리가 매일 발을 딛는 바로 그 공간에 달려있다. 서울시는 노후 건물의 에너지 효율 개선을 목표로 장기 무이자 융자 지원과 단열 효율성이 높은 제품으로 교체하는 사업을 추진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규제 패러다임 전환으로 건물 온실가스 배출 관리해야 이에 서울시는 ‘건물 온실가스 총량제’를 단계적으로 도입한다. 이 제도는 일정 규모 이상 건축물에 온실가스 배출허용량을 설정하고, 초과 시 에너지 효율을 개선하는 감축 의무를 부과한다. 건물의 총 배출허용량은 단위면적당 배출 기준에 면적을 곱한 값이다. 건축물 용도를 12개 유형(업무시설, 문화 및 집회시설, 숙박시설, 공장, 의료시설 등)으로 분류하고, 유형별로 단위면적당 온실가스 표준배출 기준을 설정해 배출 총량을 관리하는 형태로 운영된다. 건물 에너지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가져올 정책인 셈이다. 기존의 건물 에너지 신고제는 에너지 사용량에 대한 자가진단을 통한 자율감축을 유도한다. 건물 에너지 등급제는 용도와 연면적에 따라 단위면적당 목표에너지 사용량 기준을 설정하고, 건물별로 A부터 E까지 등급을 부여한다. 이를 공개함으로써 에너지 효율화를 유도한다는 취지다. 이와 같은 건물 에너지 신고제와 건물 에너지 등급제는 자율 참여 방식이라 감축 효과가 5% 미만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단순 등급 분류만으로는 온실가스 감축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총량제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구속력 있는 제도로 실효성을 높이는 접근법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총량제가 부동산 시장과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우려도 제기하고 있다. 노후 건물의 경우 에너지 효율 개선에 상당한 비용이 소요되며, 이로 인한 건물주의 부담이 임대료 상승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또한 에너지 효율 개선 공사 중 발생하는 영업 손실과 임차인의 불편도 고려해야 할 요소다. 이러한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단계적 적용과 충분한 지원 제도의 마련이 필수적이다. 2012년 녹색건축물 조성 지원법(약칭 녹색건축법)이 제정되었다. 녹색건축법은 녹색건축물의 조성에 필요한 사항을 정하고, 건축물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과 녹색건축물의 확대를 통하여 녹색성장 실현 및 국민의 복리 향상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서 녹색건축물은 ‘건축물과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고 동시에 쾌적하고 건강한 거주환경을 제공하는 건축물’을 가리킨다. 다만 우리가 유념해야 하는 부분은 건축 및 기획 단계뿐 아니라 실제 운영 단계에서의 에너지 절감이다. 초기에 제아무리 고도의 선진 기법이 적용되어도, 준공 후 건물 운영 과정에서 온실가스 배출량 관리가 정교하게 이뤄지지 않으면 의미가 반감된다. ‘지속가능한’ 녹색건축물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지속가능한’ 관리와 전략이 긴요하다. 성능평가 및 검증(M&V·Measurement&Verification)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규제 측면에서도 신축 규제뿐 아니라, 실제 배출량 기반의 관리제도에 힘을 쏟아야 하는 것과 연결된다. 한국은 2050년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하겠노라 선언했지만, 건물 부문의 감축은 더디기만 하다. 현행 제도는 기업 단위로 관리되어 개별 건물의 특성을 반영하지 못한다. 건물의 수명이 30~50년 이상인 점을 고려하면, 지금 건물 부문의 탄소 배출을 줄이지 않으면 2050년 탄소중립 달성은 요원하다. 게다가 서울시는 당장 2033년까지 서울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2005년(5234만t) 대비 절반(2567만t)으로 줄이겠다고 천명한 형국이다. 지난해 서울시는 ‘서울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계획’을 발표했는데, 건물 온실가스 맞춤형 관리와 교통 수요관리·친환경 차 확대, 청정에너지로의 전환 등을 골자로 한다. 이 계획의 성공을 위해서는 시민 참여와 산업계의 동참이 필수적이며, 행정적 토대 강화와 함께 재정 지원 확대, 기술 혁신 촉진 등 다각적인 지원 체계가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친환경 건물에 붙는 그린 프리미엄...합리적 선택안으로 꼽혀 건물 온실가스 총량제는 기업 경영 측면에서 규제 리스크를 혁신 기회로 전환할 수 있는 전기가 될 것이다. 총량제 도입으로 에너지 효율화 기술, 스마트 빌딩 솔루션, 친환경 건축자재 등 새로운 비즈니스 생태계 형성에 가속도가 붙게 된다. 단열재, 고효율 설비, 재생에너지 시스템, 건물 에너지 관리 시스템(BEMS·Building Energy Management System) 등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관련 산업이 성장할 전망이다. 더불어 에너지 효율 개선은 냉난방 비용 감소로 이어져 건물 이용자의 경제적 부담도 줄여줄 수 있다. 환경 성과가 우수한 부동산이 더 높은 자산가치와 임대료 프리미엄을 누리는 ‘그린 프리미엄(green premium)’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브라운 디스카운트의 반대 개념이다. 거칠게 말하면, 친환경 건물에 웃돈이 붙는 것이다. 환경 친화적으로 조성된 녹색 건물은 이제 단순히 당위적, 윤리적 측면에서만 권장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이고 실리적 측면에서도 합리적인 선택안이 되고 있다. 실제로 글로벌 부동산 컨설팅 기업들의 분석에 따르면, 녹색건축물이 부동산의 입주율, 임대료, 임차인 유지율을 높이고 전반적인 자산 가치를 높이는 경향을 띠고 있음이 드러난다. 가격만 높은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LEED(Leadership in Energy and Environmental Design)와 같은 친환경 건축 인증을 받은 자산은 경기 침체기에서 회복기에 이르기까지 더 나은 성과(시장수익률 상회)를 보여왔다는 것도 입증됐다. 이러한 경제적 이점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이해관계자 의견 수렴과 전문가 의견 청취 과정이 중요하다. 건물 온실가스 총량제가 효과적으로 시행되기 위해서는 제도의 유연성을 확보하는 것에도 신경을 기울여야 할 터이다. 건물은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사용하는 공간이며, 건물에 따라 에너지 이용 형태도 제각각이다. 따라서 각기 다른 니즈와 고충을 섬세하게 분석하고, 이를 제도 설계에 반영함으로써 실행 가능한 감축 목표와 현실적인 이행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맞춤형 접근은 규제의 효과성을 높이는 동시에 이해관계자들의 자발적 참여를 견인하는 발판이 될 것이다. 서울시의 건물 온실가스 총량제 도입은 다른 지자체에도 중요한 선례가 될 터이다. 뉴욕 등 여타 도시의 경험은 서울을 비롯한 국내 다른 도시들에 값진 교훈을 제공할 수 있다. 뉴욕에서 건물 소유주 그룹이 지방법 97조(Local Law 97)에 대해 제기한 소송이 기각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원고 측은 주 정부 규제와 중복된다는 점, 과도한 벌금과 소급 적용으로 부동산 소유자의 권리 침해가 심대하다는 점, 새로운 세금 성격이라는 점 등을 소송의 주된 논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뉴욕주 대법원은 지자체(뉴욕시)가 온실가스 배출을 규제할 수 있는 권한을 폭넓게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벌금의 규모, 방식 또한 입법과 재량의 영역이고, 소급 적용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이슈에 대한 지자체의 정당한 행정으로 해석한 것이다. 탄소중립, 정부·기업·시민의 삼중주 필요성공적인 제도 정착을 위해서는 정부, 기업, 시민의 긴밀한 협력이 필수적이다. 정부는 법적·제도적 기반을 확립하고 인센티브와 페널티를 합리적으로 정비해야 한다. 기업과 건물 소유주는 에너지 효율 개선과 신재생에너지 도입에 적극 나서야 한다. 시민들은 에너지 절약과 친환경 생활 방식으로 탄소중립에 동참해야 한다. 건물 온실가스 총량제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과제도 면밀하게 파악해서 이 제도를 보다 발전적으로 끌고 가기 위해 진력해야 한다. 가장 먼저 제기될 수 있는 문제점은 재정적 부담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대의에 호소하는 슬로건만으로는 해결되는 것이 거의 없다. 감축 수단 도입을 위해서 소요되는 비용, 경우에 따라 건물을 이전하거나 이용 중단을 하면서 야기되는 비용 등을 감안하면 부담이 만만찮다. 친환경 및 에너지 절감에 대한 투자를 회수할 수 있는 기간이 분명치 않기도 하다. 두 번째는 건물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자(stakeholders) 간에 노정되는 입장 차이다. 감축 이행 의무가 건물주에게 부과되는 구조 아래에서는, 테넌트(건물 이용자·임차인)가 감축 노력을 할 유인이 부족하다. 또한 에너지 효율 개선을 위한 투자와 노력의 수혜자는 건물주라기보다는 테넌트이므로, 건물주 입장에서 투자 유인이 더 명확해질 필요가 있다. 세 번째는 기술적·전문적 역량의 부족이다.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건물 에너지 효율화는 고도의 기술과 전문성을 요구하는 분야다. 그러나 국내 건설 및 부동산 산업에서는 이러한 전문 인력과 기술이 아직 충분히 확보되지 못한 상황이다. 특히 중소 건물주나 지방 도시의 경우 이러한 격차가 더 크게 나타날 수 있어,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제도의 내실 있는 운영을 위해서는 다각도의 지원이 필요하다. 보조금, 금융지원 등의 재정적 지원과 기술 지원 및 컨설팅, 교육 지원(전문가 양성 프로그램 운영, 이해관계자 대상 교육 등), 행정 지원 등 비재정적 지원 또한 절실하다. 아울러 제도적 기틀을 다지는 것이 시급하다. 산업통상자원부의 ‘에너지이용합리화법’과 국토교통부의 ‘녹색건축물 조성지원법’ 개정을 통해 총량제 시행의 동력을 더욱 공고히 해야 한다. 지자체의 관리 권한 확대에 방점이 찍혀야 할 것이다. 민간 참여를 유도하는 ‘당근’도 중요하다. 감축 노력을 기울인 건물주에게 용적률 완화, 취득세 감면, 저금리 대출 등 녹색 금융 혜택을 제공하고, 임차인들에게도 전기요금 절감 등 실질적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 아울러 국내에도 건물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건물 커미셔닝(commissioning)을 포함한 종합적인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 건물 커미셔닝은 기후적 요소를 고려하여 건축물의 냉방, 난방, 공조, 조명 등 건축물의 설비 시스템을 최적으로 운영하도록 체계화하는 과정이다. 이는 건물이 최초에 설계 및 계획 의도대로 설치되고 운영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성능을 향상하는 데 중점을 둔다. 해외 사례에 따르면, 커미셔닝을 통해 기존 건물은 전체 에너지의 16%, 신축 건물은 13%의 에너지를 절감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커미셔닝이 설비 관리 측면뿐 아니라,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 달성에도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미국에서는 1989년 미국 난방냉동공조학회(ASHRAE·American Society of Heating, Refrigerating and Air-Conditioning Engineers)가 커미셔닝 가이드라인을 발표했으며, 제도 개정과 관련 활동을 활발하게 추진해 오고 있다. 국내에서도 국내 건축물 특성과 현실적 조건을 입체적으로 고려한 표준 지침을 보다 정교화해야 한다. 이를 건물 온실가스 총량제와 연계한다면 정책의 효용성을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지구보다 빠른 서울의 열기기후변화의 영향은 지구 전체에 고르게 나타나지 않는다. 서울의 평균기온 상승 폭은 지구 평균기온의 상승 폭보다 크게 높다. 1900년대 초반 이후 지구 평균기온은 약 1.5°C 증가했는데, 같은 기간 서울의 평균기온은 약 3°C 증가했다. 서울이 더 빠르게 뜨거워지고 있는 것이다. 건물 온실가스 총량제는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필수 정책이다. 강력한 제도 시행과 민간의 적극적 참여를 통해 서울이 탄소중립 도시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며, 다른 지자체로 확산 시 국가 탄소중립 정책의 기폭제가 될 수 있다. 건물 온실가스 총량제의 성공을 위해서는 정보의 투명성과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이 핵심이다. 건물 에너지 사용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분석할 수 있는 디지털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다. 블록체인, IoT, AI 등 첨단 기술을 활용한 스마트 에너지 관리 시스템은 이러한 정보 투명성의 기초가 될 것이다. 향후 이 분야는 한국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유망 산업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건물 부문 온실가스 배출 관리는 대부분의 지자체에서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반드시 다루어야 하는 영역이다. 근시안적 접근만으로는 건물 부문에서 탄소 배출량을 획기적으로 감축하기 어렵다. 지자체의 탄소중립 목표가 진정성 있는 것이라면, 개별 건물을 대상으로 하는 온실가스 총량제를 검토하고 지역 특성에 맞는 시행 방안을 고안해 도입해 나가야 한다. 서울의 움직임을 넋 놓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건물 온실가스 총량제는 단편적 규제가 아닌 건물 부문의 저탄소 전환을 위한 종합 정책 패키지다. 이를 통해 환경적, 경제적,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창출하는 지속가능한 도시 발전 모델을 구축할 수 있다. 결국 탄소중립 목표 달성의 열쇠는 건물이 쥐고 있다. 기후위기 시대, 건물에서부터 촉발되는 혁신이 우리의 미래를 바꿀 것이다. 현재 서울시의 그린 리모델링 지원 사업은 규모와 대상이 제한적이다. 지원 범위와 규모를 확대하고 절차를 간소화하며, 기술 지원과 컨설팅을 강화해 건물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야 한다. 노후 건축물 리모델링 시 에너지 효율뿐 아니라 내진 보강, 화재 안전, 접근성 개선 등을 함께 고려하는 통합적 접근도 필요하다. 우리가 매일 일하고 생활하는 공간에서 발원하는 변화는 환경 보호의 메시지를 뛰어넘어 도시의 경쟁력과 지속가능성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다. 건물 온실가스 총량제는 이러한 전환의 핵심 정책이다. 도시의 미래와 기업의 성장 동력, 그리고 시민의 삶의 질은 이제 건축 환경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탄소중립 여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기후위기의 시계는 거꾸로 돌아가지 않는다. 우리가 서 있는 건물이 곧 미래를 짓는 토대이다. 도시의 온도를 낮추는 것도, 지구의 미래를 바꾸는 것도 결국 우리의 일상을 지탱하는 건물에서 시작된다. 건물 온실가스 총량제는 규제를 넘어 도시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자, 우리 모두의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공동의 약속이다. 김민석 마스턴투자운용 팀장은_성균관대 박사과정에서 행정학과 정책학을 수학하고, 현재 대체투자 전문 자산운용사인 마스턴투자운용 전략기획부문에 재직 중이다. 대통령 직속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서울에너지공사 시민위원, 국립생태원 국민참여혁신단 국민위원 등을 역임했고, 한국PR협회 ESG이사,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 외부전문가 자문위원, 경기도사회적경제원 외부 전문위원, 경기도 탄소중립 도민추진단 등으로 활동 중이다.

2025.05.2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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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톡 선물하기'의 성공 이야기 [허태윤의 브랜드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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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온라인 이커머스(전자상거래) 시장은 그야말로 살벌한 전쟁터다. 쿠팡은 로켓배송으로, 네이버는 포인트와 검색 알고리즘으로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다만 모두가 '당일배송'을 외치고, '최저가 보상'을 약속하며 광고비 전쟁을 벌이는 이 시장에서 조용하고 확실하게 자신만의 영토를 구축한 플랫폼이 있다. 바로 '카카오톡 선물하기'다."우리는 상품을 파는 게 아니라 마음을 전하는 채널을 만들고 있습니다"라는 문구는 카카오톡 선물하기가 내세운 차별화 전략을 보여준다. 다른 플랫폼들이 '더 싸게', '더 빠르게'를 외칠 때, 카카오는 '더 따뜻하게', '더 의미 있게'를 선택했다. 그리고 이 선택은 성공이었다.'카카오톡 선물하기'는 어떻게 성공했나카카오의 2024년 매출(연결기준)은 전년 대비 4% 증가한 7조8700억원을 기록했다. 영업이익은 523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4% 상승했다. 카카오는 지난해 실적에 대해 "코어 사업인 카카오톡의 톡비즈 광고, 커머스는 30%를 상회하는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다"고 했다. 물론 커머스 사업의 핵심은 카카오톡 선물하기다. 카카오가 치열한 이커머스 전쟁터에서 발견한 블루오션은 바로 '선물하기'라는 틈새시장이었다. 일반적인 이커머스가 '소비자 본인이 필요해서 상품을 구매하는 행위'를 중심으로 한다면, 카카오는 '지인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상대방에게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선물하는 행위'로 커머스를 재정의했다.이는 단순한 포지셔닝 차별화가 아니라 커머스의 본질적 접근 방식을 바꾼 혁신이었다. '구매'와 '거래'보다는 '관계'와 '감성'에 집중한 것이다.선물을 주고받는 행위는 인류의 오래된 문화적 관습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선물하기는 종종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받는 사람의 취향을 고려해야 하고, 예산을 생각해야 하며, 선물을 고르고 포장하고 전달하는 과정도 번거롭다.카카오톡 선물하기는 이 복잡한 과정을 극도로 단순화했다. ▲상품 선택부터 ▲결제 ▲메시지 작성 ▲배송까지 모든 과정이 앱 안에서 몇 번의 터치만으로 가능하다. 이런 편리함은 '선물의 심리적 장벽'을 크게 낮췄다.특히 카카오톡 선물하기는 해외에 거주하는 가족이나 지인에게도 선물이 가능해 거리의 한계까지 뛰어넘는 데 성공했다. 이처럼 카카오톡 선물하기는 단순한 상품 배송을 넘어 가족과 지인간의 소중한 시간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카카오톡 선물하기의 성공 비결 중 하나는 단연 '접근성'이다. 거의 모든 한국인이 사용하는 카카오톡이라는 플랫폼에 선물 서비스를 얹음으로써 별도의 앱 설치나 가입 과정 없이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게 했다.접근성은 단순히 '사용이 쉽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카카오톡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열어보는 앱이다. 사람들은 메시지를 확인하고, 친구들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선물하기' 아이콘을 접하게 된다. 이런 높은 노출 빈도는 구매 전환율을 높이는 핵심 요소다. 또한 카카오톡의 '생일인 친구' 알림 기능은 선물하기의 강력한 촉매제 역할을 한다. 오늘이 누구의 생일인지 자동으로 알려줌으로써 선물할 기회를 놓치지 않게 해준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친구의 생일을 챙길 수 있어 좋고, 카카오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선물 구매로 이어지는 구조인 것이다.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 기술의 발전은 카카오톡 선물하기의 경쟁력을 한층 더 강화했다. 카카오는 사용자의 구매 이력과 검색 패턴, 친구와의 대화 콘텍스트 등 방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개인화된 선물 추천 시스템을 구축했다.정신아 카카오 대표는 "선물하기의 핵심 강점은 개인화된 상품 추천에 있다"고 밝혔다. "단순히 상품 카테고리별 추천이 아니라, 누가 누구에게 어떤 맥락에서 선물하는지까지 고려해 최적의 선물을 제안하는 기술력이 우리의 차별화 포인트다"라고 했다.카카오톡 선물하기의 성공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라는 인간의 본질적 욕구에 주목하고, 그것을 디지털 환경에서 구현해 낸 결과다. 다른 이커머스 플랫폼들이 물리적 가치에 집중할 때, 카카오는 정서적 가치에 집중했다.사업의 '본질적 정의'를 바꾸다카카오톡 선물하기의 사례는 비즈니스의 본질적 재정의가 어떻게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지 보여주는 교과서적 예시다. 기존 시장의 룰을 따라 경쟁하는 대신, 사업의 정의 자체를 바꿈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블루오션을 만들어낸 것이다. '상품 판매'가 아닌 '관계 연결'로, '효율성'이 아닌 '감성'으로, '거래'가 아닌 '소통'으로 사업을 재정의했을 때 경쟁이 없는 새로운 영토가 열렸다.이는 모든 산업에 적용 가능한 통찰이다. 전통적인 사업 모델의 경계를 넘어 고객의 잠재된 니즈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사업을 재정의할 때, 경쟁 없는 새로운 시장이 만들어진다. 카카오톡 선물하기의 혁신은 단순히 IT 기술의 적용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 욕구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업 정의의 근본적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마음을 전하는 기술, 그 혁신의 여정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명확하다. 진정한 혁신은 기존 시장에서 더 나은 성능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사업의 본질적 정의를 바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에 있다는 점이다.허태윤 칼럼니스트(한신대 교수)

2025.05.24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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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의 덫'에 빠진 미국…흔들리는 달러 패권[특파원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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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미국과 중국 특파원이 현지에서 보고 느낀 생생한 경제·산업 분야의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한다. “미국은 달러를 찍어낼 수 있으니 디폴트 걱정은 없다.” 흔히들 생각하는 달러에 대한 ‘신화’다. 하지만 최근 국채금리 급등과 미국 신용등급 강등, 연방정부의 재정적자 확대 흐름은 이같은 ‘신화’에 균열을 내고 있다. 달러가 여전히 세계 기축통화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 기반인 재정 건전성과 시장 신뢰에 의문이 커지면서 ‘달러 패권’이 흔들리고 있다.미국은 전 세계에서 자국 통화로 이론상 무제한의 국채를 발행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다. 이는 달러가 국제무역의 88%, 글로벌 외환보유고의 59%를 차지하는 기축통화이기 때문이다. 미국 국채는 글로벌 중앙은행과 기관투자자들에게 여전히 ‘안전자산’으로 간주되며, 달러는 결제통화와 준비통화로 막강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국채 발행→ 연준 매입→ 달러 공급’ 매커니즘이 작동하며 미국 정부는 막대한 재정적자를 안고도 국채 발행을 통해 비교적 손쉽게 자금을 조달해 왔다.달러 공급 매커니즘 고장…급증하는 연방정부 부채 탓이 시스템은 전적으로 시장의 신뢰를 전제로 작동한다. 경제학자들은 “신뢰를 잃는 순간, 달러의 절대적인 수요도 흔들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과거에는 ‘달러가 있으니 갚을 수 있다’는 신뢰가 미국 국채의 금리를 안정시켰지만, 지금은 그 신뢰가 흔들리는 것이다. 이 신뢰를 흔드는 가장 큰 요인은 급증하는 연방정부 부채다. 미 재무부에 따르면 현재 누적 연방 부채는 36조2000억달러(약 5경730조원)에 달한다. 2019년 23조달러 수준이던 부채는 코로나 팬데믹 대응 과정에서 급증하며 5~6년 만에 13조달러 이상 증가했다. 2035년에는 59조20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미국 국내총생산(GDP) 대비 120% 수준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고치다. 팬데믹 대응을 위한 대규모 부양책과 세수 감소, 정치적 교착으로 인한 지출 통제가 부채 증가를 부채질했다.더 큰 문제는 부채의 이자 부담이다. 미국 정부는 지난해에만 1조1300억 달러를 이자 상환에 지출했다. 이는 불과 몇 년 만에 두 배로 증가한 수치다. 이자 부담이 급증하면서 ‘이자 지불을 위한 국채 발행’이라는 악순환에 빠질 위험도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부채규모는 더욱 커지고 이자지출은 다시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어느 순간에는 국가가 부채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으로 악화할 수 있는 상황이 오게 된다.미 의회예산국(CBO)과 책임있는 연방예산위원회(CRFB)는 미국의 연방정부 부채가 GDP 대비 2024년 123.2%에서 2035년 134.8%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같은 기간 순이자 지출은 세입 대비 17.6%에서 21.8%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부채 증가 속도가 GDP 성장률을 크게 앞지르고 있다는 점이다. 향후 10년간 미국 실질 GDP는 연평균 1.8% 내외 성장에 그칠 것으로 보이지만, 총부채는 연 5~6% 수준으로 늘어날 것으로 관측된다. 현실화하면 미국의 재정 통제 능력에 대한 시장의 의구심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이런 구조가 지속되면 시장은 국채에 대해 더 높은 수익률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미국이 재정 적자·부채 감당에 실패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 투자자들은 내 돈을 떼일 위험이 있으니 더 높은 수익률(프리미엄)를 요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미국이 부채 감당에 실패할 가능성이 커질수록 국채금리는 오르게 되고 이는 기업과 가계의 차입 비용을 증가시켜 실물경제 전반에 부담을 줄 것이라는 해석이다. 미 정부 입장에서는 국채금리가 치솟으면 부채 이자비용이 더욱 불어나는 상황을 맞게 된다. 현재 36조달러에 이르는 연방 부채 규모를 감안하면, 금리가 0.5%포인트만 상승해도 산술적으로 새 국채를 발행할 때 미국 정부의 연간 이자 부담은 1800억달러(약 252조원) 늘어난다.달러 패권에도 그림자가 드리운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미국 자산에 대한 신뢰를 잃는다면,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는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달러에 대한 신뢰 약화는 자본유출과 외환시장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 최근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가 미국의 신용등급을 최고등급인 ‘Aaa’에서 ‘Aa1’으로 강등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무디스는 “재정적자와 정치적 불확실성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구조적 리스크”라며 “정치가 재정 정책에 대한 예측 가능성과 일관성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꼬집었다.재정악화에도 밀어부치는 감세안…3.3조달러 부채 늘어그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은 대규모 감세안을 다시 꺼내 들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Make America Great Again) 구호 아래, 관세·감세·규제완화라는 ‘엔진’을 통해 성장과 세수를 끌어올리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이 구상은 부채 구조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현재 하원 공화당이 추진 중인 ‘크고 아름다운 법안(Big Beautiful Bill)’은 2017년 감세 연장을 포함해 총 3조3000억달러(약 4544조원)에 달하는 추가 부채를 야기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여기에는 ▲팁·초과근무 소득에 대한 면세 ▲자동차 대출 이자비용의 비과세 ▲노인 세액공제 신설 등이 포함돼 있다. 뉴욕‧뉴저지‧캘리포니아 등 고세율 지역구 의원들의 요구가 반영된 SALT(주 및 지방세 공제) 한도 상향 등의 내용도 담겨 있다.트럼프 행정부는 재정 적자 확대를 관세수입과 정부 지출 효율화, 그리고 감세를 통한 경제활성화로 보완하겠다고 설명하지만, 전문가들은 “현재 구조상 부족분을 메우기엔 역부족”이라고 입을 모은다. 수십 년간 반복된 감세가 성장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은 검증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세수 감소와 부채 증가로 이어졌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미국의 달러 패권은 단순한 통화 발행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안정된 재정 ▲강한 생산성 ▲정치적 일관성, 그리고 ▲글로벌 투자자들의 신뢰 위에 구축된 체제다. 이 네 가지가 동시에 흔들릴 때 달러는 더 이상 ‘무적’이 아닐 수 있다.

2025.05.24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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