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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멈춘 시장, 더 깊어진 불안과 분노[김현아의 시티라이프]

전문가 칼럼

10월 15일, 정부가 발표한 세 번째 부동산 대책은 시장에 대한 일종의 봉쇄령이었다. 서울과 경기 12개 지역을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하고, 고가주택 대출 한도를 절반으로 줄였으며, 전세대출도 막혔다. 정부는 이를 “투기 수요 억제”라 설명했지만, 현장에서 대책은 투기수요와 실수요자를 구별하지 않았다. 집을 사려던 신혼부부는 대출 승인이 취소됐고, 전세 만기를 앞둔 세입자는 갑자기 계약을 포기해야 했다. 부동산 앱의 거래창에는 ‘거래보류’, ‘계약취소’ 문구가 잇따랐다. 이들은 투기꾼이 아니라 몇년 동안 저축한 돈으로 내 집마련을 하기위해 부족분을 대출로 충당하려던 일반 시민이다. 이제 집을 사거나 빌릴때 대출을 이용하는건 상식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 어디에도 대출없이 자기자본으로 집을 사는 나라는 없다. 그런데 가뜩이나 집값이 비싼 서울과 경기 일부 지역의 대출을 막은 것이다. 정부대책으로 가장 먼저 멈춰 선 것은 평범한 시민의 일상이었다.정책은 때로 강제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강제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공감 가능한 명분이 필요하다. 지금의 서울 집값 상승은 단순한 투기가 아니라 구조적 결과다. 일자리와 교육, 교통, 문화, 인프라가 집중된 도시의 가치가 그대로 가격에 반영된 것이다. 사람들은 서울에서 부동산을 통해 돈을 벌고 싶은 것이 아니라, 서울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비싼 집을 감수한다. 그래서 인구 감소시기에도 서울의 집값이 유지되는 것이다. 아니 서울을 대체하는 그 어느것도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서울의 집값이 더 오르는 것이다. 이 근본적인 사실을 무시한 채 거래를 통제하는 것은 결과를 원인으로 착각한 처방이다.실수요자들의 좌절, 현실과 시장을 모르는 말말말정부가 시장을 ‘잠시’ 멈추게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러나 멈춤의 시간마다 사람들은 더 불안해졌다. 대출을 옥죄고 세금을 늘려도 결국 ‘거래를 포기하는 건 서민이고 실수요자’들이다. 서울의 대출을 옥죌때마다 서울 주택의 구매자들은 현금부자와 외국인들로 채워졌고, 부자들의 자녀에 대한 주택증여는 늘었다. 높아진 세금은 전세주택을 월세로 전환시키면서 세입자의 임대료에 그대로 전가됐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문재인 정부 당시 드러났던 가까운 과거의 일이다. 그런데도 동일한 정책이 더 빠르게, 더 강하게 반복되고 있다. 진짜 국민들을 분노케하는 것은 정책의 내용보다 그것을 설명하는 정책 당국자의 ‘말’이다. 부동산 정책의 실직적인 책임자라고 볼 수 있는 국토교통부의 차관은 “지금은 집을 사지 말고 돈을 모아 나중에 사라”고 말했다. 과거 “모두가 강남에 살 필요는 없다”, “실제 거주하고 있는 주택을 제외하고는 모두 처분하라”고 했던 정당의 정치인과 관료들이 모두 강남에 집을 보유하고, 거주주택이 아닌 주택을 보유하고 있다. 정부가 집을 사지 말라고 했던 그 시기에 집을 산 사람은 모두 자산가치가 상승했지만 정부를 믿고 기다렸던 사람들은 내집마련이 더 요원해졌다. 그 ‘나중’은 영영 오지 않았다. 조세정책 책임자는 “보유세를 높이면 버티지 못하고 팔게 될 것”이라 했다. 여당과 대통령실은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고 있지만 국민들 입장에선 ‘겁박’이긴 마찬가지다.통제에도 품격이 필요하다루즈벨트 대통령은 1933년 대공황 당시 ‘뱅커스 할리데이’(Bank Holiday)를 선포했다. 당시 미국은 은행 도산이 연쇄적으로 번지던 시기였다. 루즈벨트는 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는 법률, 즉 1917년 적국거래법(Trading with the Enemy Act) 제5조 (b) 항에 근거해 모든 은행을 4일간 일시 폐쇄했다. 이후 긴급법(Emergency Banking Relief Act)을 의회가 통과시키면서 은행의 건전성을 신속히 점검했고, 건전하다고 판정된 은행부터 영업을 재개했다. 그는 이 조치를 ‘휴일’이라 불렀다. 국민에게 “이건 위기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기 위한 점검의 시간”이라고 설득했기 때문이다. 이 비상조치는 단순한 통제가 아니라 명분·절차·사후 책임이 모두 갖춰진 행정적 신뢰 회복의 모델이었다. 문제는 지금의 한국 정부가 그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는 점이다. 10·15 대책의 핵심인 토지거래허가구역 지정은 법적으로 지자체장의 권한이다. 그러나 서울시는 발표 하루 전날에야 일방적인 통보를 받았다. 정책의 폭력성은 때로 불가피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폭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명분이 있어야 하고, 절차가 투명해야 하며, 사후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이번 대책은 이 세 가지 모두가 결여됐다. 더 큰 문제는 거래를 멈춘 이후다. 정부가 멈춘 시장을 언제, 어떻게 다시 움직일지에 대한 청사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루즈벨트가 4일의 ‘휴일’을 통해 신뢰를 회복했다면, 우리는 1년 가까운 ‘정지 상태’ 속에서도 불신만 깊어지고 있다. 불가피한 멈춤이라면 그 시간 동안 무엇을 고칠지, 어떤 질서로 회복할지를 제시했어야 했다. 그러나 정부는 결과만 통제하고, 과정과 방향은 비워뒀다. 아무런 책임도, 설계도 없었다.서울 집값이 여전히 비싸지만, 그 안에는 단순한 콘크리트가 아니라 ‘기회의 농도’가 있다. 외곽으로 가면 집은 싸지만 일자리와 교육, 의료 접근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편한 삶 대신 비싼 삶을 택한다. 그 선택은 욕심이 아니라 생존의 전략이다.근본적인 해법은 서울의 집값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서울 밖의 선택지를 키우는 일이다. 수도권 외곽과 지방의 주거환경, 교통, 일자리 인프라가 서울 수준으로 개선된다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동한다. 그러나 신도시들은 30년째 자족기능을 갖추지 못하고, 광역교통망은 약속으로만 진행중이다. 지역의 삶이 서울의 대체제가 되지 못하는 한, 서울의 집값은 어떤 규제에도 다시 오른다. 서울이 아닌 곳에서도 살아볼 만한 이유를 만들지 못한다면, 이번 대책은 또 다른 위기의 예고편일 뿐이다.집값이 아니라 삶의 지리를 바꾸는 것, 그것이 진짜 부동산 정책이다.

2025.10.25 11:00

4분 소요
2028학년도 대입 대전환…‘학교 수업의 힘’ 커진다 [임성호의 입시지계]

전문가 칼럼

2028학년도 대학입시가 수능·내신 제도 전면 개편과 고교학점제 시행으로 대입 역사상 가장 큰 변화를 맞이한다. 수능에서는 문·이과 구분이 완전히 사라지고, 수학은 사실상 인문계 범위 안에서 출제된다. 사회탐구(사탐)와 과학탐구(과탐) 과목도 구분 없이 모두 두 과목을 응시해야 하며, 출제 범위는 고1 수준의 통합사회·통합과학으로 좁혀진다. 시험 범위가 줄면서 수험생 부담은 줄지만, 전공별 학업 역량을 수능만으로 정확히 평가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도 함께 제기된다.이번 개편은 단순한 과목 조정이 아니라 수능과 내신, 그리고 고교학점제가 동시에 맞물리는 구조적 변화다. 대학별 수시·정시 전형계획은 통상 수험생이 고2가 되는 해 4월 말에 확정되지만, 현 고1이 적용받는 2028학년도 입시는 변화 폭이 워낙 커 주요 대학들이 이미 전형 일부를 앞당겨 발표하고 있다.정시에서 내신으로서울대가 최근 공개한 2028학년도 전형계획의 핵심은 ‘정시에서의 내신 비중 확대’다. 서울대 정시는 일반전형 기준으로 1단계와 2단계로 나뉜다. 1단계에서는 수능 성적으로 선발하며, 지금까지는 표준점수를 기준으로 모집정원의 2배수를 뽑았다. 하지만 2028학년도부터는 선발 인원을 3배수로 늘리고, 평가 방식도 표준점수에서 등급 점수로 바꾼다.수능 성적은 등급·백분위·표준점수 등 세 가지 방식으로 발표된다. 등급은 9등급제로 구분되고, 백분위는 100점 만점으로 산출된다. 표준점수는 난이도에 따라 보정되는 수치로, 복잡한 계산식을 거쳐 산정된다. 이론상 만점은 200점이지만 실제 최고점은 150점 안팎에서 형성된다. 한 문제 차이로 점수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변별력은 표준점수가 가장 높고, 다음이 백분위, 그 다음이 등급 순이다.이런 점을 고려하면 서울대가 1단계 평가에서 표준점수 대신 등급 점수를 적용하기로 한 것은 사실상 수능의 영향력을 줄이는 조치로 해석된다. 현재는 수능 80%, 내신 20% 비율로 2단계 합격자를 선발하지만, 2028학년도부터는 수능을 백분위 점수로 전환하고 반영 비율도 수능 60%, 내신 40%로 조정된다. 내신 비중이 외형상 대폭 확대되는 셈이다.다만 내신 40%가 어떤 방식으로 반영될지는 아직 구체적으로 공개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학교 내신 상위 10% 이내에 들지 못한 학생들은 수능을 잘 보더라도 서울대 정시 합격 문턱을 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또한 내신 평가 방식이 9등급제에서 5등급제로 전환되면서, 전 과목에서 상위 10% 이내에 속하는 ‘1등급’ 학생이 약 7,000명 수준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경우 서울대 지원자는 대부분 1등급권에서 경쟁하게 된다. 동일 등급 내 학생들 사이에서는 고교학점제 이수과목이나 세부능력 특기사항 등 서류 평가가 변별 요소로 작용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수능 백분위 점수가 당락을 결정짓는 요인이 될 가능성도 있다. 서울대 입시 전략은 혼돈이처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전형이 시행되는 만큼, 수험생이 서울대 입시 전략을 세우기란 쉽지 않다. 기존 입시 결과를 참고할 통계자료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2028학년도 대입은 예측 불가능성 자체가 리스크”라는 평가가 나온다.한편 내신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학생들의 전략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서울대는 이미 2023학년도부터 정시에서 내신을 반영하고 있다. 그 첫해에는 내신 반영 부담으로 검정고시 출신 합격자가 2022학년도 33명에서 22명으로 줄었지만, 2024학년도에는 32명, 2025학년도에는 36명으로 다시 늘었다. 이는 내신 반영이 불리하더라도 수능 고득점자라면 충분히 합격권에 진입할 수 있다는 의미다.따라서 2028학년도에도 내신 비중이 커지더라도 수능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학생들이 대거 탈락할 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실제 서울대 입시 추세를 보면, 여전히 수능의 영향력이 최종 당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입시 전문가들은 서울대 정시 1단계 통과를 위해선 ▲국어 ▲영어 ▲수학 ▲사탐 ▲과탐 ▲한국사 등 6개 영역 평균 1.6등급 수준이 필요할 것으로 전망한다. 이는 서울대뿐 아니라 ▲의대 ▲치대 ▲한의대 ▲약대 등 주요 모집단위의 경쟁률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추정치다.내신이 40% 반영되는 2단계에서는 고교 내신 5등급 체제를 기준으로 1.2등급 이내 학생들 간의 치열한 접전이 예상된다. 현재 내신 9등급제에서는 상위 4%가 1등급이지만, 2028학년도부터는 상위 10%까지 1등급으로 분류돼 1등급 인원이 두 배 이상 늘어난다. 그만큼 내신 1등급권 내에서의 미세한 차이가 합격을 가를 수 있다.결국 서울대 정시에서는 내신 1등급 학생들 간에도 수능 백분위 점수의 세밀한 차이가 당락을 좌우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교육계에서는 “학교 수업의 충실도와 수능 실력을 동시에 요구하는 이중 경쟁체제가 만들어질 것”이라며 “수험생과 학교 모두 준비 전략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하는 시점”이라고 입을 모은다.

2025.10.25 10:00

3분 소요
일시적 공간이 만드는 영구적 가치 [순화동필]

전문가 칼럼

팝업스토어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지난해 국내에서만 1700개 이상의 팝업스토어가 문을 열었다. 성수동 연무장길에서는 한 매장 건너 하나씩 팝업스토어를 마주칠 정도로 붐빈다. 더현대서울에서는 단일 팝업스토어가 10일 만에 34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네이버 검색량도 최근 3년 사이 무려 800%나 급증했다. 이제 거의 모든 기업과 브랜드가 팝업스토어 실행을 고민하며, 그 효과를 직접 체감하고 있다.그러나 단순히 ‘열면 성공하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 SNS 후기를 살펴보면 “이제 지겹다” “기대보다 밋밋하다” “허무했다”는 반응도 적지 않다. 수천만 원을 투입하고도 기대했던 매출은커녕 브랜드 이미지에 손상을 입는 사례도 속출한다. 그렇다면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팝업스토어의 결정적 요인은 무엇일까.일시적 공간의 역설적 힘팝업스토어의 진짜 힘은 어디에 있을까. 본래 매장은 이미 고객과의 오프라인 접점 역할을 해왔다. 그럼에도 팝업스토어가 특별한 이유는 ‘한정된 시간, 한정된 공간, 한정된 경험’이 만들어내는 긴장감 때문이다. 이 제약이 오히려 브랜드에게는 무한한 실험의 자유를 제공한다. 오래 유지되어야 하는 매장의 제약에서 벗어나, 브랜드의 철학과 정체성을 트렌드에 맞춰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실험실이 되는 것이다.성공적인 팝업스토어들은 공통점을 지닌다. 단순한 판매 공간이 아니라 ‘경험의 무대’로 설계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G-DRAGON의 앨범 발매 기념 팝업은 더현대서울의 세 개 층을 통째로 사용해 오랜 공백을 뛰어넘는 아티스트의 세계관을 현실에 구현했다. 방문객은 단순히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가 아니라, 아티스트의 감성과 메시지를 온몸으로 체험하는 참여자가 됐다.팝업스토어의 효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면 명확한 KPI(핵심성과지표) 설정이 필요하다.목표가 불분명하면 대부분 실패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팝업스토어를 한 번 여는 데 최소 수천만 원에서 많게는 수억 원이 투입되지만, 온라인 마케팅만큼의 노출 도달이나 투자 대비 수익(ROI)을 달성하기는 쉽지 않다.팝업스토어의 가치를 단순히 판매금액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 브랜드 인지도 상승, 고객 경험 만족도, 소셜미디어 확산 효과, 장기적 고객 관계 강화 등 다양한 요소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실제로 성공적인 사례들은 이런 복합적인 목표를 달성하고 있다.한 신생 뷰티 브랜드의 경우, 제한된 예산으로 목표 방문객 수의 308%를 달성했고, 매출 목표도 133%를 초과했다. 핵심은 명확한 타깃 설정과 그들의 니즈를 반영한 경험 설계였다.흥미로운 점은 예산 규모와 성공이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9000만원을 들인 아식스 팝업과 3억원대 예산을 투입한 다른 팝업 모두 각자의 목표에 맞는 성과를 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쓰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전략적으로 쓰느냐”였다. 팝업스토어 성공의 여섯 가지 법칙모든 마케팅이 그렇듯, 보장된 성공은 없다. 그러나 수백 건의 사례를 분석해보면 실패 확률을 줄이는 법칙은 존재한다. 하나는 명확한 목적과 타깃 설정이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겠다”는 접근은 실패로 이어진다. 구체적인 페르소나를 설정하고, 그들만을 위한 경험을 설계해야 한다.위치와 타이밍의 전략적 선택도 중요하다. 단순히 유동인구가 많은 곳보다, 타깃 고객이 자연스럽게 머무는 장소를 찾아야 한다. 예컨대 윌슨의 테니스 라켓 팝업은 ‘코리아 오픈’ 기간 중 올림픽공원에서 진행돼 높은 시너지를 냈다.차별화된 브랜드 경험을 설계할 필요도 있다. 방문객이 “다녀왔다”가 아니라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적정 예산 설정을 명확히 해야한다. 많은 예산을 쓴다고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목적에 맞는 최적 규모를 찾아야 한다.다음은 디지털 연계 전략이다. 팝업스토어는 오프라인 경험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온라인 확산과 지속적인 관계 유지를 염두에 둬야 한다. 또 고객 중심의 현장 운영도 필수다. 완벽한 공간 디자인도 현장 경험이 나쁘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결국 팝업스토어의 성공은 “예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의 서사를 얼마나 진정성 있게 전달하느냐”에 달려 있다.브랜드 DNA에 맞는 전략이 필요하다물론 모든 브랜드에 똑같은 팝업 전략이 통하는 것은 아니다. ▲인지도 ▲예산 ▲목적 ▲카테고리에 따라 접근법이 달라져야 한다. 인지도가 높고 예산이 충분한 브랜드는 플래그십형 팝업스토어로 브랜드의 총체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반면 신생 브랜드는 캠페인형 팝업스토어를 통해 인지도 확산에 집중하는 것이 효과적이다.팬덤 기반 콘텐츠 브랜드는 세계관 구현에 초점을 맞추고, 굿즈 판매를 통해 높은 매출을 기대할 수 있다. 테크 브랜드는 기능성과 혁신성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구조가 바람직하다. 이처럼 브랜드의 특성과 시기, 타깃층에 맞는 전략적 설계가 필수적이다.팝업스토어 열풍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다. 이는 소비자들의 소비 패턴 변화인 소유보다 경험, 대량보다 한정, 획일보다 개성을 중시하는 시대정신을 반영한 결과다. 경험 소비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단순 유통 중심의 오프라인 매장은 줄고, 브랜드 메시지를 체험할 수 있는 팝업과 전시 중심의 공간은 늘어나고 있다. 팝업스토어는 오프라인 유통의 진화 방향을 보여준다.다만 지금의 무분별한 팝업스토어 난립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진정한 가치를 전달하지 못하는 팝업은 시장에서 도태될 것이다. 살아남는 것은 브랜드 본질을 명확히 드러내고, 고객에게 감동을 주는 진정성 있는 팝업스토어뿐이다.앞으로의 팝업스토어는 더 정교해질 전망이다. 데이터 기반 고객 분석, AI를 활용한 개인화된 경험, 메타버스와 연계한 하이브리드 공간 등 기술과 감성의 융합이 가속화될 것이다.팝업스토어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은 결국 ‘진정성’이다. 브랜드가 진정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고객에게 제공하고자 하는 가치가 명확해야 한다. 화려한 인테리어나 인기 장소보다 중요한 것은 브랜드와 고객 사이의 진정한 연결이다.팝업스토어는 분명 효과적인 도구다. 하지만 그 효과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철저한 기획과 전략적 사고, 그리고 고객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일시적인 공간이 영구적인 브랜드 가치로 확장될 수 있다.오늘도 수많은 브랜드가 새로운 팝업스토어를 준비하고 있다. 결국 질문은 하나로 귀결된다.“당신의 팝업스토어는 고객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명확하다면, 그 팝업스토어는 이미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리스페이스는 2024년 연 매출 100억 원을 달성하며 국내 팝업스토어 업계의 선두주자로 자리 잡았다. 현재 약 70명의 인력이 연간 50~60여 개의 팝업스토어와 전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기획부터 운영까지 전 과정을 내부에서 처리하는 풀 인하우스(Full In-House)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리스페이스는 이를 통해 브랜드와 소비자 간 깊은 연결을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다. 필자는 연세대학교 재학중 리스페이스를 창업했다. 정주영 창업경진대회를 입상하고 연세대학교 창업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12년 동안 리스페이스를 운영했고, 2022년부터 본격적으로 회사를 성장시켰다. 지난해에는 40개 이상의 팝업스토어를 열고, 연매출 100억 이상을 달성하는 등 팝업스토어 분야를 선두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2025.10.25 09:00

5분 소요
AI 허브로 진화하는 싱가포르, 한국 기업의 전략적 교두보 되나 [동남아시아 투자 나침반]

전문가 칼럼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에서 운영하는 코리아스타트업센터(K-Startup Center Singapore)는 ‘싱가포르 인공지능(AI) 정부정책 및 주요 산업별 AI 기술동향’이라는 보고서를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관련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발간하였으며, 이번에는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싱가포르 AI 정책 및 한국 기업의 진출 전략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싱가포르가 AI 강국을 향해 속도를 높이고 있다. 2023년 발표된 National AI Strategy 2.0(NAIS 2.0)은 “공익을 위한 AI(AI for the Public Good)”라는 비전을 내세우며, 단순한 기술 도입을 넘어 윤리와 신뢰를 기반으로 한 글로벌 AI 허브로 도약하겠다는 전략을 분명히 했다. 디지털 경제가 이미 GDP의 17.7%를 차지하는 싱가포르는 2030년까지 AI 시장 규모만 약 160억 달러(22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작은 도시국가가 동남아 전체 AI 확산의 실험장이자 교두보로 주목받는 이유다. 이 전략은 단순히 기술 경쟁력 확보를 넘어서, 국제 사회에서 싱가포르가 ‘신뢰할 수 있는 AI 국가’로 자리매김하려는 포석으로도 볼 수 있다.정부 주도의 강력한 생태계싱가포르 AI 생태계의 가장 큰 특징은 정부의 정책 주도와 민간 혁신의 결합이다. GovTech, IMDA, A STAR 같은 공공기관이 테스트베드 역할을 하며, AI Verify와 같은 신뢰성 검증 툴킷으로 기업의 윤리적 기준 준수를 지원한다. 호프스태터가 ‘괴델, 에셔, 바흐’에서 강조한 ‘기묘한 고리’(Strange Loop)처럼, 싱가포르의 AI 생태계도 정부 정책–산업–규제의 상호작용 속에서 반복적 순환을 이루며 점점 더 고차원적인 혁신을 만들어낸다. 단순한 정책의 나열이 아니라, 서로를 비추고 강화하는 루프 구조가 새로운 창의성을 낳고 있는 셈이다. ▲의료∙바이오 헬스 ▲핀테크 ▲공공 행정 ▲스마트 모빌리티 ▲스마트 제조 ▲에듀테크 ▲ 인프라 등 7대 분야를 AI 주요 사업군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의료와 공공 행정은 정부 주도의 강력한 수요 창출로 고성장을 보이고 있고, 핀테크는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혁신과 리스크 관리가 병행되고 있으며, 경쟁이 치열하고 이미 시장이 성숙기에 접어들어 폭발적 성장보다는 고도화 중심으로 전환중이다. 스마트 제조·모빌리티 분야는 아직 초기 단계지만 성장 잠재력이 크다. 정부는 AI 인재 양성에도 집중하고 있으며, 대학과 연구기관, 민간 기업이 공동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해 2026년까지 1만 5000명의 AI 전문 인력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글로벌 기업과 현지 산업의 교차점싱싱가포르는 AI 생태계 확장을 위해 향후 5년간 10억 SGD(1조1000억원) 이상을 투자한다. GPU 기반 데이터센터 확충, 국제 공동 프로젝트, 전문 인재 육성이 핵심이다. 이 과정에서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글로벌 기업이 AI 인프라를 제공하고, 현지 스타트업은 특화 영역에서 혁신을 주도한다. 바흐의 푸가가 단순한 선율의 반복 속에서 복잡한 음악적 구조를 만들어내듯, 싱가포르의 AI 정책도 각 산업에서 단편적 혁신을 쌓아 올려 점차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복합적 질서를 형성하고 있다. AI는 여전히 규칙 기반 알고리즘의 집합이지만, 그 적용 범위가 넓어질수록 인간의 창의성에 가까운 산출을 흉내 내며 산업에 깊이 스며들고 있다.한국 기업에 싱가포르는 단순한 시장이 아니라 동남아 진출의 교두보다. 첫째, 공공 테스트베드를 활용한 실증 경험은 곧 신뢰 자산으로 전환되어, 베트남·말레이시아 등 인근 시장 확장의 발판이 된다. 둘째, 자연어처리(NLP), 의료 영상, 예지정비 같은 틈새 분야에서 특화 기술을 적용하면 차별화를 이룰 수 있다. 셋째, 정부와 글로벌 빅테크가 주도하는 협력 구조 속에서 파트너십 중심 접근이 필수적이다. 독자적 진출보다는 공동 프로젝트 참여가 성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괴델이 보여준 정리처럼, 어떤 체계도 스스로를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AI 역시 기술 그 자체로는 자기완결적이지 않다. 싱가포르가 ‘공익을 위한 AI’를 내세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기술이 사회적 맥락, 윤리적 틀과 결합할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성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나라·큰 실험실…한국 기업이 배워야 할 것들 싱가포르는 국토는 작지만, AI 정책·규제·산업을 아우르는 거대한 실험실로 기능하고 있다. 윤리적 기준과 신뢰를 강조하는 이 시장은 단순한 기술 판매처가 아니라 혁신 모델을 검증하고 확산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 에셔의 그림 속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처럼, AI는 반복과 규칙을 기반으로 끝없이 확장된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적 창의성과 동일한지는 여전히 열려 있는 질문이다. 한국 기업이 자사의 기술을 싱가포르 특화 분야에 접목하고, 글로벌 네트워크와 함께 이 ‘기묘한 고리’에 참여한다면, 동남아 AI 시장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2025.10.19 09:00

4분 소요
만화 ‘검정고무신’은 왜 불공정계약의 대명사가 됐나[백세희의 컬처&로(LAW)]

전문가 칼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검정고무신’이라는 단어는 노스텔지어를 자극하는 아련하고 따뜻한 느낌을 줬다. 2023년 3월 만화 ‘검정고무신’의 원작자 고(故) 이우영 작가가 스스로 세상을 등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안타깝게도 이제 ‘검정고무신’은 저작권 분쟁과 불공정계약의 대명사가 되어 버린 것 같다.‘검정고무신’은 1992년부터 2006년까지 만화 잡지 에 연재된 작품이다. 이 작가가 군 복무 중이던 1992년 무렵에는 동생인 이우진 작가가 그림을 그렸다. 만화는 단행본으로 45권이나 만들어졌고 애니메이션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60년대 서울에서 살아가는 어린이 기영과 청소년 기철, 그리고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코믹하면서도 정감있게 묘사해 지금까지도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런 애틋한 만화가 어쩌다가 창작자에게 좌절과 고통을 주게 된 것일까. 원인은 잘못된 계약에 있다. 작가의 신뢰는 쉽게 배반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를 되돌리는 길은 가시밭길을 걷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다.‘비극의 시작’이 된 출판사의 제안2007년 H출판사 측(이하 ‘출판사’)에서 이 작가 측(이하 ‘이 작가’)에 소위 ‘사업권’을 설정하는 계약의 체결을 제안했다. 사업권설정계약은 몇 차례 정리를 거쳐 2008년 6월 다시 체결됐다. 이 계약이 바로 작가를 옭아매는 핵심이다. 위 사업권설정계약은 ‘검정고무신’ 및 그에 파생된 모든 2차적 사업권을 출판사가 갖고 수익을 분배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사업을 하려면 캐릭터에 대한 지분이 필요하다고 작가를 설득해 출판사 대표가 9개 캐릭터의 공동저작권자 등록을 마치기도 했다.2010년에는 이른바 ‘양도각서’도 작성했다. ‘검정고무신’ 작품 활동과 관련된 업무는 출판사를 통해 진행해야 하고, 작가의 개인적인 계약에 대해서는 계약금 3배 상당의 위약금을 지불하는 것은 물론이고, 출판사에 저작권 침해로 인한 형사고소 및 합의 권한을 위임하는 내용이다.이를 바탕으로 출판사는 2015년 TV 애니메이션 ‘검정고무신 시즌4’를 제작해 방영했다. 이 외에도 출판사는 캐릭터를 이용해 여러 종류의 만화를 계속 출판했고, 이 작가 역시 출판사의 관여 없이 독자적으로 몇몇 웹사이트에 만화를 공급하고 책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출판사는 이 작가가 만화를 계속 만들어낸 것을 문제 삼고 2019년 11월 이 작가 측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출판사의 사업권에 따라 만화 및 그 2차적저작물의 제작·사용·배포는 오로지 출판사만이 할 수 있는데, 이 작가가 이를 어기고 자신이 직접 만화를 제작·배포한 것이 계약 위반이라는 것이다. 거액의 위약금을 배상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이 작가는 계약은 모두 무효라고 항변했다. 저작권 법리에 대한 이해와 거래 경험이 부족한 만화가로서는 ‘검정고무신’을 이용해 수익을 나누자는 출판사의 진의가 사실은 모든 권리를 다 내어놓으라는 것인 줄도 모르고 경솔하게 계약에 이르렀다는 주장이다. 나아가 위 계약들은 예술의 자유를 현저하게 제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무효라 주장했다. 피고가 되어 대응할 수밖에 없었던 이 작가에게 재판 과정은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2023년 3월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재판은 남겨진 가족들이 이어받았다. 같은 해 11월 약 4년의 재판 끝에 드디어 1심 판결이 나왔다.1심 법원은 작가를 옭아매는 이 사건 계약들은 효력이 없다고 선언했다. 사업화설정계약 및 양도각서가 현저히 불공평해서 처음부터 무효라고 본 것일까? 그렇지 않다. 법원은 계약은 모두 유효하다고 보았다. 출판사의 의도대로 쓰인 문구는 그대로 효력을 인정받았다. 모든 사업권은 출판사가 갖는 것이고, 작가가 이를 어겨 얻은 이익은 모두 위약금 산정의 기초 금액이 된다. 민법 제103조와 제104조를 위반하여 무효라는 작가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계약은 효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다만 법원은 출판사의 일방적인 수익분배 조건 설정, 진행 및 분배 과정, 작가에 대한 출판사의 형사고소 사실을 기초로 당사자의 신뢰관계는 파괴됐다고 보았다. 일정 기간 반복적으로 급부가 이루어지는 ‘계속적 계약’은 기초가 되는 신뢰관계가 파괴되면 일방 당사자가 계약을 해지함으로써 장래에 향하여 효력을 소멸시킬 수 있다. 이에 따라 법원은 2019년 10월 이 작가의 해지의 의사표지로 계약은 모두 해지된 것으로 판단했다. 결국 작가를 옭아매던 계약은 2019년 10월 이전까지는 유효한 것이고, 판결을 선고하는 시점에는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계약 해지 이후의 출판사의 ‘검정고무신’ 이용은 이 작가의 저작권을 침해한 것이 된다. 이런 이유로 판결은 계약들의 “효력이 존재하지 아니함을 확인”하고, 출판사는 캐릭터를 표시한 “창작물 및 이에 대한 포장지, 포장용기, 선전광고물을 생산, 판매, 반포, 공중송신, 수출, 전시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선언한 것이다.잘못된 언론 보도 : 불공정계약으로 무효? 다만 위 해지 시점 이전에는 출판사가 권리를 유효하게 보유하는 것이고, 이 작가가 이를 일부 침해한 점을 인정해 유족들이 출판사에게 손해배상금으로 7500만원 상당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항소심에서 판결이 뒤집혔다. 2025년 8월 28일 항소심 법원은 1심과는 달리 오히려 출판사가 이 작가의 유족에게 4000여만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언론은 드디어 불공정한 계약이 무효가 됐다고 대서특필했다. 일부 변호사도 인터뷰를 통해 민법 제104조가 적용돼 계약이 처음부터 무효가 된 것이라 설명했다.필자도 항소심 판결문을 직접 읽어보기 전까지는 언론 보도, 전문가 인터뷰 및 칼럼을 믿었다. 하지만 사실은 이와 달랐다. 항소심 법원이 계약을 무효로 돌린 게 전혀 아니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항소심이 드디어 ‘검정고무신’ 계약을 불공정계약으로서 무효로 인정한 것이라는 말은 판결문을 읽어보지도 않고 누군가의 잘못된 설명을 무비판적으로 따라 옮긴 것에 불과했다. 항소심의 판단은 기본적으로 1심 판단과 동일하다. 계약은 처음부터 무효인 것이 아니다. 단지 2019년 10월 이 작가의 해지의 의사표시로 인해 장래를 향해 효력이 없어진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1심과 달리 유족들이 오히려 4000만원을 배상받게 된 것일까? 이는 소송 기술적인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1심에서 작가는 출판사의 저작권 침해 사실을 주장하면서도 그에 따른 ‘손해배상’은 청구하지 않았다. 출판사의 이용은 금지하지만, 돈을 내놓으라고는 하지 않은 것이다. 법원은 당사자의 청구를 넘어서는 판단은 할 수 없다. 그러니 출판사의 손해액만이 판결 주문에 등장한 것이다.2심에서 비로소 이 작가의 손해배상 청구가 추가되고 구체적인 금액이 등장한다. 재판부가 계산해보니, 양 당사자의 손해액이 각각 얼마이고 그 채권·채무를 대등액에서 소멸, 즉 상계를 하니 이 작가 측에 4000만원의 채권이 남게 된 것이다. 쉽게 말해, 서로 잘못한 것을 더하고 빼면 출판사가 돈을 뱉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검정고무신’이 우리에게 남긴 것항소심에서 정의가 실현된 줄 알았는데…. 조금은 맥 빠지는 결론이다. 필자도 이게 맞나 싶어 눈을 비벼가며 60쪽에 달하는 항소심 판결문을 훑었다. ‘검정고무신’ 판결은 개인 창작자의 손을 들어주며 계약의 무효를 선언하지 못했다. 곪을 대로 곪은 계약이 스스로 버티지 못하고 해지돼야 비로소 그 구속력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이었다. 계약의 구속력이란 이렇게 무섭다. 하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 것만은 아니다. 이 작가가 쏘아 올린 공은 창작자를 보호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저작권위원회는 창작에 관여하지 않은 출판사의 공동저작권자 등록을 직권으로 말소하며 선례를 만들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공정거래위원회는 만화 분야 표준계약서를 개정하고 불공정 약관에 대한 대대적인 시정조치를 감행했다. ‘검정고무신’이 만든 변화의 시작이다. 올바른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기 위해서는 판결을 왜곡 없이 냉정하게 분석해 현실을 인식하고, 창작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실질적인 방법을 계속 연구해야만 한다. ‘검정고무신’이 우리에게 남긴 과제를 잊지 말자.백세희 법률사무소 아트앤 대표변호사

2025.10.1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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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중 넘어 혐중, 그리고 돌아온 도쿄 한류 1번지 [EDITOR’S LETTER]

전문가 칼럼

“중국인을 무비자로 입국시키는 게 맞는 건가요? 범죄자들까지 자유롭게 들어오는 거 아닌가요?” “중국인 무비자 입국 시점에 대전 국가정보자원관리원(국정자원)에서 불이 났어요. 서로 관계가 있는 게 아닐까요?”최근 만난 20대 여대생과 50대 전업주부의 말입니다. 두 사람 모두 정부가 지난 9월 29일부터 내년 6월까지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도록 한 데 대해 우려와 반감을 보였습니다. 이들은 정부가 사전 점검으로 인터폴 수배·불법체류 전력자를 걸러낸다고 했지만 의심을 거두지 않았고, 국정자원 화재가 무비자 입국 개시 전인 9월 26일 발생했음에도 연관설을 믿는 모습이었습니다. 중국에 대한 반감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이제는 일부 정치권과 극우에서뿐 아니라 일반 국민 정서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연구원이 한국리서치에 의뢰한 조사(지난 6월, 성인 남녀 1509명) 결과에 따르면 한국 국민의 66.3%가 ‘중국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갖고 있다’고 응답했는데, 작년 8월 조사 때보다 2.5%p 상승했습니다. 중국에 대한 비호감 정서는 정치적 성향, 성별, 연령대를 불문하고 나타났는데, 진보 성향 응답자 63.8%, 보수 성향자 70.5%가 비호감이라고 했습니다. 성별로는 남성이 67.7%, 여성이 64.8%가, 연령대로는 ▲20대 80.0% ▲30대 70.2% ▲40대 72.5% ▲50대 62.0% ▲60대 60.2% ▲70세 이상 53.9%가 각각 중국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중국인의 국민성과 행동이 비호감이기 때문에 ▲정치체제가 공산당 일당 지배체제이기 때문에 ▲중국의 경제적 강압과 보복 때문에 ▲코로나19와 미세먼지 등 중국의 환경 문제 등 다양했습니다. 반중 정서가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최근 혐중 시위까지 등장했는데, 시위대는 중국인이 많은 명동과 대림동, 여의도 등 서울 도심에서 ‘차이나 아웃’, ‘천멸중공’(하늘이 중국 공산당을 멸할 것)과 같은 구호를 외치거나 혐오 발언·욕설까지 하며 적대감을 드러냈습니다. 일부 정치권에서는 반중 정서를 자극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데, 국민의힘이 중국인의 의료·선거·부동산 등 ‘3대 쇼핑’ 방지법을 당론으로 추진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인데요, 반중 정서가 극단으로 치닫는 모양새입니다. 수출주도국인 우리로서는 중국과의 교역에 악재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중국은 2003년부터 지금까지 22년간 최대 수출 상대국인데요, 코로나19와 미중 갈등 등으로 비중은 낮아졌지만 여전히 전체 수출액 중 20% 내외(2024년 19.5%)로 1위입니다. 또 중국에서 사업을 하는 우리 기업은 삼성전자를 비롯해 약 3만개가 넘습니다. 결코 멀리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이재명 정부는 여러 요인으로 멀어진 중국과의 관계 회복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데, 반중을 넘어 혐중 정서 확산은 큰 걸림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국민 정서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불순한 의도로 가짜뉴스를 앞세워 반중·혐중 정서를 부추기는 행위는 방치해선 안 됩니다. 일본 도쿄의 한류 1번지 신오쿠보는 혐한 시위로 한국 관련 점포의 폐업이 속출하며 지역 경제가 큰 타격을 입었는데요, ‘헤이트 스피치’(혐오 발언)를 막기 위한 노력 끝에 점포 수가 사상 최다 수준으로 회복했다고 합니다.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이 요구되는 이유입니다.

2025.10.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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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멸종시대’가 만든 새로운 욕망[허태윤의 브랜드 스토리]

전문가 칼럼

모두가 타이핑하는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잉크와 종이가 주는 감각적 경험, 손글씨가 주는 시각적 즐거움을 잃어버렸다. 이제 영어 필기체를 제대로 쓸 줄 아는 미국 청소년은 드물어졌다. 중국도 '제필망자’(提筆忘字·펜을 들었는데 글자가 생각나지 않는다)란 말이 보편화됐다. 미국의 문화비평가이자 역사학자인 크리스틴 로젠은 저서 '경험의 멸종'에서 이러한 현상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손글씨는 인쇄된 글자가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는 그의 말은 우리가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지를 정확히 보여준다.디지털과 인공지능이 사람의 경험을 대신해주는 시대다. 우리는 여행을 가지 않아도 유튜브로 세계를 누비고, 요리를 하지 않아도 레시피 영상으로 요리사가 된 기분을 느낀다. 콘서트에 가지 않아도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고, 친구를 만나지 않아도 메신저로 대화한다. 간접 경험이 실제 경험보다 더 우선시되는 시대, 로젠이 말한 '경험의 멸종'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반전이 일어나고 있다. 직접 경험에 대한 갈증이 새로운 욕망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제품과 브랜드는 새로운 기회를 만들고 있다.술자리마저 심심해진 시대의 역설친구들과 술자리에 모였지만 각자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풍경.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 됐다. 하이네켄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보링모드’(Boring Mode) 캠페인에서 하이네켄은 특별한 스마트폰 케이스 ‘플립퍼’(Flipper)를 개발했다. '건배'라는 말이 나오면 스마트폰이 자동으로 뒤집어지는 장치다. 강제로 스마트폰을 내려놓게 만들어 사람들이 서로의 눈을 마주보고 진짜 대화를 나누도록 유도한 것이다. 단순하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친구들과 ‘치어스’를 외치며 맥주를 마시는 시간이 진짜 관계를 만드는 소중한 시간임을.21세기 최고의 록밴드로 불리는 콜드플레이의 공연에서도 직접 경험의 가치를 읽을 수 있다. 그들의 콘서트에서 관객들에게 스마트폰을 끄도록 요청하고, 대신 LED(발광 다이오드) 자이로밴드 팔찌를 나눠줬다. 노래에 맞춰 관객의 위치에 따라 다른 색의 조명이 팔찌에서 빛을 발했다. 관객들은 스마트폰 화면 너머로 공연을 보는 대신, 자신이 직접, 공연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했다. 수만명의 관객이 하나의 거대한 캔버스가 돼 빛의 향연을 만들어냈다. 영상으로 남기기 위한 관람이 아닌, 몸으로 느끼는 진짜 경험이었다.요즘 도심 곳곳에서 팝업스토어를 쉽게 만날 수 있다. 단순히 제품을 파는 공간이 아니다. 향기를 맡고 질감을 느끼고, 사진을 찍고 때로는 직접 만들어보는 복합 체험 공간이다. 온라인 쇼핑이 편리함의 극치를 달리는 시대에, 사람들은 오히려 불편함을 감수하고 오프라인 공간을 찾는다. 왜일까. 클릭 한 번으로 얻을 수 없는 감각적 경험, 그 '진짜' 느낌을 원하기 때문이다.런닝 열풍도 같은 맥락이다. 게임 속 아바타가 달리는 것이 아니라, 내 두 발로 땅을 밟고 달리는 것. 땀이 흐르고, 심장이 뛰고, 바람이 피부를 스치는 그 생생한 감각. 디지털을 통한 간접 체험의 대명사인 온라인 게임 열풍에 대한 반작용이 런닝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국내 마라톤 대회 참가 인원은 매년 증가하고 있으며, 러닝 크루 문화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돈으로 살 수 없는 경험이 있다. 그 외의 모든 것에는 마스터카드가 있다.” 20년 이상 이어진 이 슬로건만큼 마스터카드를 잘 설명하는 말이 있을까.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CMO(최고 마케팅 책임자)’로 알려진 마스터 카드의 라자만나르는 “소비자는 더 이상 브랜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죠. 그래서 우리는 스토리텔링에서 스토리메이킹으로 전환했습니다”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브랜드 혼자 떠들지 말고, 소비자가 브랜드 스토리를 직접 경험하게 하라는 것이다.그는 기존의 유명한 ‘프라이스리스’(Priceless) 캠페인을 경험 플랫폼으로 발전시켰다. '값을 매길 수 없는 도시' '값을 매길 수 없는 놀라움' '값을 매길 수 없는 대의명분' '값을 매길 수 없는 특별함'이라는 네 가지 경험 카테고리를 만든 것이다.'값을 매길 수 없는 도시'는 그 도시에서만 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코코 샤넬의 파리 탐험' 투어 프로그램이 있다. 샤넬 부티크와 창시자 코코 샤넬이 살았던 동네를 둘러보는 투어다. 오직 마스터카드 소지자만 예약할 수 있다. 폐장 후의 루브르 박물관 투어, 미쉐린 셰프의 프라이빗 디너 같은 콘텐츠도 독점 제공한다.이런 경험 속에서 고객들은 자신이 브랜드의 일부가 되어 ‘돈으로 살수 없는’ 소중한 브랜드 경험을 하는 것이다.조 러브스(Jo Loves)는 붓으로 바르는 향수로 유명하다. 18ml 용량의 얇고 긴 병을 손에 쥐고 아래쪽을 펌핑하면, 반대편 끝에 달린 검은색 붓에 젤 형태의 향수가 묻어 나온다. 수채화를 그리듯 팔목과 귀밑에 쓱쓱 바르면 된다. 요가 매트 같은 곳에도 발라 향을 남길 수 있다.조 러브스는 영국의 향수 디자이너 조 말론이 만든 두 번째 브랜드다. 그는 이미 '조 말론 런던'이라는 거대한 성공을 이뤄낸 인물이다. 하지만 2013년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처음 2~3년은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조 러브스를 조 말론의 아류라고 생각했다. 말론은 전략을 바꿨다. 조 말론 런던의 주요 고객이 30대 여성이었다면, 조 러브스는 Z세대를 공략했다. 인스타그래머블한 제품과 흥미로운 고객 경험을 기획했다.그리고 런던 매장에 '향기 타파스 바’를 만들었다. 타파스는 스페인음식으로 작은 접시에 담긴 맛보기 음식이란 의미인데, 향기를 경험하게 하는 바인 셈이다. 매장 안 작은 바 자리에서 고객은 3단계 향기 타파스를 체험한다. 타파스지만 먹는 게 아니다. 모두 향을 맡는 것이다. 원하는 향을 고르면, 먼저 타진(향수를 따뜻한 증기로 시향하는 특별한 시향 프로그램)으로 증기를 내 향을 맡게 해준다. 그 다음엔 칵테일 셰이커에 향을 넣고 흔들어 '향 거품'을 낸다. 이 거품은 마티니 잔에 담아 고객이 향을 맡도록 한다. 붓으로 거품을 찍어 고객의 손에 발라주기도 한다.타파스 바를 경험한 고객의 제품 구매율은 거의 100%라고 한다. 고객들은 "생애 처음 접하는 브랜드 경험", "후각을 최대로 느낄 수 있는 환상적 경험"이라고 리뷰를 남겼다.‘경험의 멸종시대’ 브랜드 전략이러한 사례들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몸을 움직이거나, 손을 쓰고, 맛을 보거나, 향기를 맡는 것처럼 최소한 한 가지 이상의 감각을 자극하는 경험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클릭 한 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시대에, 오히려 '불편한' 직접 경험이 새로운 가치가 됐다.손글씨가 그러했듯, 우리는 디지털의 편리함 속에서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상실이 새로운 갈망을 만들어낸다. 화면 너머가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오감으로 느끼고 싶다는 욕망. 기록하기보다 경험하고 싶다는 욕구.기업과 브랜드에게 이것은 위기이자 기회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아무리 인공지능이 똑똑해져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발로 땅을 밟는 감각, 손으로 무언가를 쓰는 경험, 직접 맡는 향기, 눈을 마주치며 나누는 대화. 이러한 원초적 경험의 가치를 이해하고, 그것을 브랜드의 핵심 가치로 제공할 수 있는 기업이 앞으로의 시장을 이끌어갈 것이다. '경험의 멸종' 시대, 역설적이게도 진짜 경험은 그 어느 때보다 귀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 희소성이야말로 새로운 시장을 여는 열쇠다.

2025.10.1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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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일자리 정책의 실종, 노동약자의 비애 [이근면의 시사라떼]

전문가 칼럼

대기업 공채는 이제 역사 속 단어로 바뀌었다. 기업 저마다 신규 채용을 줄이겠다는 이야기만이 넘쳐난다. 여기에 AI는 일자리를 줄이는 역량이 점점 커지고 있다. 설상가상 고용 정책보다 노동 정책이 시대의 담론이다. 노란봉투법이나 4.5일제 근무제도니 하며 노동 기득권에 대한 논의만 무성하다. 그 어디에도 청년 세대는 정치와 정책에서 관심이 사라진 듯하다. 내 일자리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결국 청년 일자리 정책이 실종됐다. 기득권 노조와 경직된 노동시장은 청년과 비정규직 같은 노동 약자의 기회를 빼앗고 기업의 신성장 동력마저 가로막고 있다. 좋은 일자리는 해외로 빠져나가고 남은 것은 닫힌 노동시장과 희망을 잃은 청년뿐이다. 청년 없는 일자리 정책, 그것이 오늘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비애다.일자리 담론이 사라진다한때 대통령이 직접 청와대 상황판을 통해 일자리 지표를 점검하던 시절이 있었다. 공공 일자리, 청년 고용 의무제, 스타트업 지원 등 성과와 한계를 떠나 청년 일자리는 정책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성장과 복지, 제도 개혁 같은 거대 담론은 여전히 강조되지만 정작 청년이 체감할 수 있는 일자리 대책은 공백 상태다.고용노동부를 단순히 ‘노동부’로 바꾸려는 논의가 상징적이다. 이는 고용 정책을 사실상 축소하고 노동조건 관리에 치중하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정부가 일자리 문제를 민간에 떠넘기고 스스로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불신이 커질 수밖에 없다. 청년 일자리 문제는 단순한 민간 의존형 정책으로 풀 수 없으며 국가의 전략적 개입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한 구조적 과제라는 점을 망각한 것이다.대기업 노조, 기득권의 벽청년 일자리가 줄어드는 또 다른 이유는 노동시장의 기득권 구조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는 높은 임금과 고용 안정을 누리지만, 그 결과 청년의 진입 기회는 좁아졌다. 신규 채용은 줄고, 기존 조합원의 기득권은 강화되는 ‘닫힌 노동시장’이 형성된 것이다.결국 청년들은 스펙을 쌓아도 대기업 문턱을 넘지 못하고,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으로 내몰린다. 더 큰 문제는 이 구조가 기업의 혁신 투자를 가로막는다는 점이다. 신산업 전환과 구조 재편에 필요한 인력 조정이 불가능해지면서 기업은 신성장 동력을 국내에서 찾기보다 해외로 옮긴다. 청년 일자리가 국내에서 줄어드는 악순환이다. 여기에 정규직 중심의 과보호는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심화시키고, 청년과 비정규직이 ‘을 중의 을’로 남게 만드는 사회적 불평등의 구조를 고착화시킨다.좋은 일자리 해외로 빠져나가삼성, SK, LG, 현대차 등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들이 앞다투어 미국에 수백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하고 있다. 보조금과 세제 혜택이 결정적 요인이라지만, 그 이면에는 한국 노동시장의 경직성과 노사 갈등 리스크가 깔려 있다. 미국은 비교적 유연한 노동시장과 예측 가능한 규제 환경을 제공한다. 반면 한국은 고용 유연성이 낮고, 노조 갈등이 잦다.그 결과, 좋은 일자리가 한국을 떠나고 있다. 고임금·숙련 직무가 미국 현장으로 이동하면서 한국 청년은 글로벌 기업의 본국 청년보다 불리한 출발선에 서게 된다. 더구나 생산라인만 해외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협력업체·부품사·기술 엔지니어까지 연쇄적으로 빠져나가면서 국내 고용 생태계 자체가 위축된다. 장기적으로는 산업경쟁력의 기반을 잃고, 청년의 기회는 더욱 협소해지는 구조적 위기로 이어진다.정부의 편향된 시각더 심각한 문제는 정부의 시각이다. 특정 정권은 ‘노동자 보호’를 명분으로 기득권 노조를 사실상 방치하고 다른 정권은 기업 편향으로 흘러 노동권을 위협한다. 어느 쪽이든 균형을 잃은 정책은 결과적으로 청년의 일자리를 줄이는 방향으로 귀결된다.정부의 책무는 분명하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청년 고용 여력을 넓히되 동시에 청년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제도적 안전망을 보장하는 것이다. 세제와 인프라, 인재 양성은 기본이고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풀고 기득권 구조를 완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여기에 더해 정부는 정책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일자리 대책이 원점에서 흔들리면, 기업도 청년도 미래를 신뢰할 수 없다. 예측 가능성과 지속성이야말로 청년 일자리 정책의 기본 토대다.노동시장 청년이 중심이 되어야앞으로의 노동정책은 기득권 유지가 아니라 미래 세대의 기회 확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청년과 비정규직 대표가 노사 협의체에 참여하도록 제도화하고 신규 고용을 늘리는 기업에 세제 혜택과 인센티브를 주어야 한다. 동시에 해고와 전환배치를 합리화하되, 재취업과 직업훈련을 강화하는 ‘플렉시큐리티’ 모델을 도입해야 한다.특히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기업은 더 유연하게 투자하고, 노조는 청년 고용 확대에 협력하며, 정부는 청년의 사회안전망을 보강해야 한다. 청년이 중심이 되는 노동시장을 설계하는 것이야말로 국가 생존의 전제 조건이다.지금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위기는 일 할 곳을 못 찾는 40만 명의 청년 일자리 문제이다. 하물며 생산 가능 인구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결국 이들에게 일자리를 찾아주는 과제만이 국가의 미래와 활력을 약속한다. 다시 국정의 중심에 놓지 않는다면, 저출산·고령화, 성장 둔화라는 거대한 파고를 막아낼 방법은 없다.특히 오늘의 노동 환경은 기득권을 가진 대기업 노조와 정규직 중심 구조가 장벽을 세운 반면, 청년과 비정규직, 여성, 고령층 등 노동 약자는 일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청년은 ‘미래의 노동력’이 아니라 지금 당장의 노동 약자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청년 없는 일자리 정책은 공허하다. 청년과 노동 약자를 위한 정책 없이는 국가의 미래도 없다. 기득권의 벽을 허물고 청년에게 기회를 돌려주는 것, 그것이 대한민국이 다시 살아나는 길이다.

2025.10.1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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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는 ‘기록의 민족’도, ‘IT 강국’도 없다 [EDITOR’S LETTER]

전문가 칼럼

우리는 세계가 인정한 ‘기록의 민족’입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팔만대장경’(2007년)과 ‘조선왕조실록’(1997년)만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은 고려가 거란과 몽골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내자는 뜻에서 만들어졌는데요, 불경을 새긴 목판 8만1258판(280톤)이 7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있습니다. 불가사의한 일이 가능한 데는 선조들의 지혜와 노력이 있었는데요, 목판을 바닷물에 1~2년 담가 뒀다가 소금물에 삶고 건조해 갈라지고 비틀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옻칠로 방충까지 신경을 썼습니다. 보관 장소인 해인사 장경판전도 햇빛·바람·습기 등이 목판 보존에 최적의 환경이 되도록 설계했는데 지금의 과학자들도 놀라워합니다. 해인사가 가야산의 깊은 산속에 있어 임진왜란·한국전쟁 등 숱한 전쟁을 피할 수 있었던 것도 팔만대장경을 지금도 볼 수 있는 이유입니다. 조선왕조실록도 우리 민족의 기록과 보존의 세계적인 역량을 보여줍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제1대 태조부터 제25대 철종까지 472년(1392~1863)간 정치·경제·외교·군사·법률·산업·예술·종교 등을 연대기 순으로 정리해 편찬한 공식 국가 기록이라는 점에서 세계사적으로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전란·화재 등에도 600년 넘게 보존·관리돼 왔다는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선조들이 혹시 모를 불의의 사고에 대비한 자세가 빛났는데요, 실록을 한양의 춘추관 사고와 함께 지방 여러 외사고에 분산해서 보관해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특히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사고가 불탄 상황에서 전주사고본이 유일하게 남았던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이후에는 또다시 실록이 소실되는 일이 없도록 접근이 어려운 오대산·태백산·묘향산·마니산 등에 외사고를 마련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습니다. 선조들은 종이와 나무로 만든 기록조차 수백 년 지켜냈는데, 우리는 첨단 기술로 만든 디지털 기록조차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 국가정보자원관리원(국정자원) 대전 본원 화재로 인해 정부 전산망이 마비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디지털 정부’ ‘IT 강국’이라는 자부심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배터리 1개에서 튄 불똥으로 인터넷우체국·정부24·국민비서·모바일 신분증 등 정부의 전산 시스템 674개가 먹통이 돼 추석 연휴를 앞둔 국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습니다. 이런 불상사에 대비해 서버 이중화가 이뤄져 바로 재가동이 돼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은 이른바 ‘디지털 외사고’를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록의 민족, IT 강국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진 것인데요, 문제는 또 있습니다. SK텔레콤·KT·롯데카드 등 주요 기업들이 연이어 해킹을 당하며 대규모 고객 정보가 털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국이 해커들의 놀이터로 전락했다는 우려까지 나옵니다. 국가의 전산망은 불타고 기업의 보안은 뚫리는 지금의 상황으로는 기록의 민족, IT 강국이라는 명성을 지킬 수 없으며, AI 시대를 선도하기는커녕 생존도 힘들 것입니다. 앞으로 더 복잡해지고 고도화될 디지털 시대에 대비해 근본적이고 체계적인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2025.10.1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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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꺾이자 반도체 계약학과 ‘최상위 라인’ 부상 [임성호의 입시지계]

전문가 칼럼

2026학년도 주요 대학 수시 경쟁률이 나왔다.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 이른바 '서연고' 자연계열 수시 평균 경쟁률은 15.36대 1을 기록했다. 고려대가 21.45대 1, 연세대가 16.29대 1, 서울대가 8.15대 1이었다. 지난해 2025학년도 평균 16.57대 1과 비교하면 하락세다. 전년도 기준으로 고려대 21.49대 1, 연세대 19.10대 1, 서울대 9.37대 1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3개 대학 자연계열 모두 경쟁률이 줄어든 셈이다. 대기업 계약학과, ‘의대 다음 라인’ 부상의약학계열 지원 열기도 다소 식었다. 전국 의대·치대·한의대·약대·수의대 평균 경쟁률은 25.81대 1로 집계됐다. 의대는 평균 25.28대 1, 치대는 18.10대 1, 한의대 18.62대 1, 약대가 34.83대 1, 수의대 20.38대 1이었다. 지난해 2025학년도 의·치·한·수·약 평균 경쟁률 27.94대 1에 비해 하락했고, 지원자 수도 3만1,571명(21.9%) 줄었다.합격선과 지원자 선호도를 고려할 때, 의약학계열 다음 라인으로 꼽히는 곳이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대기업 계약학과인 셈이다.현재 계약학과를 운영하는 대기업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자동차, LG디스플레이, LG유플러스, 카카오엔터프라이즈, 삼성SDI 등 7곳이다. 이들 기업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포항공대, 경북대, 한양대, 서강대, 숭실대, 가천대 등 9개 일반대학과 계약학과를 두고 있으며, 카이스트 등 4개 과학기술원에서도 삼성전자와 계약학과를 운영하고 있다. 계약학과별 경쟁률을 보면 기업별 희비가 엇갈린다. 삼성전자와 연계된 5개 대학의 2026학년도 수시 평균 경쟁률은 18.33대 1로, 전년도 21.16대 1에서 낮아졌다. 지원자 수도 4973명에서 4,492명으로 481명(9.7%) 줄었다. 반면 SK하이닉스와 연계된 3개 대학 평균 경쟁률은 30.98대 1로, 전년도 28.15대 1보다 상승했다. 지원자 수도 2,027명에서 2478명으로 451명(22.2%) 늘었다.삼성전자가 운영하는 대학별 계약학과 경쟁률은 성균관대 반도체시스템공학과가 31.22대 1로 가장 높았고, 성균관대 지능형소프트웨어학과가 23.29대 1, 경북대 전자공학부 모바일공학전공이 17.85대 1, 고려대 차세대통신학과 14.10대 1, 포항공대 반도체공학과 12.38대 1,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11.01대 1 순이었다.SK하이닉스와 연계된 계약학과의 경우, 서강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가 무려 48.50대 1로 가장 높았다. 이어 한양대 반도체공학과 36.59대 1, 고려대 반도체공학과 12.04대 1 순이었다.만만치 않은 기업 연계 계약학과 경쟁률삼성전자 외 다른 기업과 연계된 계약학과도 경쟁률이 만만치 않았다. 현대자동차와 계약한 고려대 스마트모빌리티학부는 13.00대 1, LG디스플레이와 연세대 디스플레이융합공학과는 12.22대 1, LG유플러스와 숭실대 정보보호학과는 11.58대 1, 카카오엔터프라이즈와 가천대 클라우드공학과는 37.57대 1이었다. 2026학년도에 신설된 삼성SDI-성균관대 배터리학과는 17.94대 1로 첫해부터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기업별 평균 경쟁률을 보면 카카오엔터프라이즈가 37.57대 1로 가장 높았으며, 전년도 34.48대 1에서 상승했다. 지원자 수도 65명(9.0%) 증가했다. 이어 SK하이닉스 30.98대 1, 삼성전자 18.33대 1, 삼성SDI 17.94대 1, 현대자동차 13.00대 1, LG디스플레이 12.22대 1, LG유플러스 11.58대 1 순으로 나타났다.과학기술원 내 계약학과도 열기가 이어졌다. 삼성전자와 연계한 대구경북과학기술원 반도체공학과는 경쟁률 9.89대 1로 전년도 9.12대 1에서 올랐다. 지원자 수도 39명(17.1%) 증가했다. 광주과학기술원 반도체공학과 역시 6.40대 1로 전년도 5.72대 1보다 상승했고, 지원자 수도 17명(11.9%) 늘었다. 한국과학기술원은 4.20대 1을 기록했으나, 전년도에는 학과별 경쟁률을 공개하지 않아 비교는 어려웠다. 울산과학기술원은 지난해와 올해 모두 경쟁률을 공개하지 않았다.다만 대기업 계약학과, 특히 반도체학과는 의약학계열과 중복합격이 잦은 전형으로 꼽힌다. 수시 6회 지원 제한 탓에 상당수 학생이 의·치·한·약 합격 후 계약학과를 포기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런 중복합격 이탈 현상에도 불구하고 일반고 학생들의 합격선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일반고 기준 합격선은 대체로 1등급 초·중반대에서 형성된다. 반면 과학고 출신들은 중복 이탈 규모에 따라 합격선 변동 폭이 크다. 일반고가 1등급 초·중반이라면, 과학고는 5등급 내외까지 합격선이 내려갈 수 있다.특히 남학생 최상위권 학생들 사이에서는 의약학계열을 선호하지 않을 경우, 반도체 계약학과 지원으로 쏠림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실제로 대기업 계약 반도체학과 합격생의 남학생 비율은 80%를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향후 계약학과 선호도가 기업의 경영성과와 비전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전망한다. 기업 상황이 직접적으로 학과 매력도에 반영될 수 있으며, 그 변동 폭은 매년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2026학년도 경쟁률에서도 이미 기업들의 경영상황이 일정 부분 반영된 것으로 분석된다.

2025.10.1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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