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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값이 곧 민심’…2026 지방선거, 부동산 투표가 판을 흔든다[김현아의 시티라이프]

전문가 칼럼

2026년 6월 지방선거가 다가올수록 한국 정치의 오래된 진실 하나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후보의 정치 철학도, 공약의 정교함도 아닌 ‘집값’이 유권자의 선택을 결정짓는 가장 강력한 기제로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정치학자들은 이 현상에 ‘부동산 투표’(Real Estate Voting)라 이름을 붙였고, 이제 그것은 단순한 학술 가설을 넘어 데이터로 입증된 한국 선거의 확고한 구조적 문법이 됐다. 물론 이번 2026년 지방선거에서 부동산 민심이 전체 선거판을 온전히 압도할지는 미지수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과 비상계엄이라는 전대미문의 정치적 격랑이 남긴 여진이 여전히 유효하며 최근 이란의 전쟁상황이 대외적 안보이슈와 물가비상이라는 민생이슈로 국가적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있기 때문에 집권 여당에 힘을 실어주는 ‘결집의 민심’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외적 변수가 단기적 충격에 그친다면 6월의 선거판, 특히 서울시장 선거를 뒤흔들 핵심 뇌관은 결국 부동산이 될 가능성이 높다.학계가 입증한 부동산 투표의 원리유권자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투표에 영향을 미친다는 ‘경제 투표’ 이론을 부동산과 연관지을때 학계는 크게 두 가지 경로로 설명한다. 첫째는 회고적 투표(Retrospective Voting)다. 집권 세력의 부동산 정책이 피해를 줬다면 가차 없이 처벌을 내리는 방식이다. 숭실대 신정섭 교수의 논문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나타난 주택소유와 투표선택: 회고투표 vs. 자산투표’(2022)는 부동산 정책 실패가 어떻게 정권 교체로 이어졌는지를 실증적으로 분석했다. 둘째는 자산 투표(Patrimonial Voting)다. 주택 보유자가 집값이 오를수록 자산 가치를 지켜줄 정치 세력을 지지하는 경향이다. 동아시아연구원(EAI)의 보고서 ‘2024년 총선에서의 자산 투표: 수도권 유권자를 중심으로’(2024)에 따르면, 자산 상위 집단이 보수 정당에 투표할 확률은 다른 집단에 비해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높았다. 이미 부동산은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 유권자의 정치적 지향점을 결정하는 자산 가치의 척도로 작동한다.과거 선거 사례들은 부동산 투표의 실체를 선명하게 증명한다. 그 최초의 전국적 폭발은 2006년 5·31 지방선거였다. 참여정부는 임기 내내 집값 급등과 씨름했고 “집값 반드시 잡겠다”는 대통령의 잇단 공언이 빈말로 판명되면서 부동산 정책에 대한 신뢰는 완전히 무너졌다. 그 결과 집권당인 열린우리당은 선거사상 유례없는 참패를 당했다. 이 선거는 부동산 민심이 지방선거를 통해 집권 여당을 심판한 최초의 원형으로 기록된다. 그 여진은 1년 후 대선으로도 그대로 이어졌다. 2007년 제17대 대선에서 유권자들은 참여정부의 규제 일변도 부동산 정책에 등을 돌리고 ‘규제 완화’와 ‘공급 확대’를 내세운 이명박 후보를 역대 최대 득표 차이로 선택했다. 연이어 2008년 제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서울 압승을 이끈 핵심은 ‘뉴타운·재개발’ 공약이었다. 이는 한국 선거사에서 ‘부동산 보상투표’의 전형적인 원형이 됐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이어진 연속적 선거 결과는 부동산 심판이 지방-대선-총선을 가리지 않고 작동하는 전국적 투표 메커니즘임을 확인시켜 줬다.반면 2021년 4·7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처벌의 정치’가 다시 서울을 기점으로 폭발한 해였다. 문재인 정부하에서 누적된 집값 폭등과 규제 일변도의 정책, LH 사태가 유권자들의 불만에 기름을 부었고, 오세훈 후보의 압승은 그에 대한 준엄한 회고적 심판이었다. 이 서울의 민심 이반은 이듬해 전국 대선으로도 곧장 파급됐다. 2022년 제20대 대선에서 유주택자들은 징벌적 과세와 규제에 분노해 자산 방어를 위해 결집했고 무주택 서민들은 ‘벼락거지’로 전락했다는 상대적 박탈감에 처벌 투표에 합류했다. 전혀 다른 지위의 두 집단이 ‘부동산 실패’라는 공통의 이유로 정권 심판에 가담했던 역설적 순간이었다. 2025년 5월 조기 대선에서는 탄핵이라는 거대 서사가 선거를 주도했지만, 서울의 득표율은 여전히 아파트 가격과 강한 상관관계를 보이며 ‘부동산 계급투표’의 흔적을 뚜렷이 남겼다. 서울에서 시작돼 전국을 바꾼 ‘보상’과 ‘처벌’의 반복한편, 비수도권의 투표 방정식은 정반대다. 미분양 물량의 적체와 인구 감소로 인한 하방 압력 속에서 지킬 자산 가치가 사라진 곳에서 자산 투표는 무력하다. 비수도권 유권자들을 자극하는 것은 ‘소외감’이다. 이재명 정부의 부동산 대책이 수도권 집값 관리에 집중돼 있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중앙정부가 지방의 생존권을 방치하고 있다’는 분노가 표심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이재명 정부가 ‘5극 3특’ 지방시대 정책에 공을 들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지금 서울의 유권자들은 이재명 정부 부동산 정책의 기묘한 양면성 앞에 서 있다. 알맹이 없는 공급 대책은 실망을 안겼고 토지거래허가구역 확대는 중산층 서민들의 재산권을 옥죄었다. 과도한 금융 규제가 더해지며 서민들은 시장에서 퇴출되고 현금 부자들만 유리한 불공정한 환경이 고착화됐다. 그러나 이 정책적 참사를 덮는 것은 이재명 대통령 특유의 강렬한 상징 정치다. 공격적인 SNS 메시지와 다주택자 압박, 분당 자택 처분이라는 상징적 행위는 시장에 즉각적인 냉각 효과를 불러왔다. 서울 일부 지역에서 급매물이 등장하고 가격이 하락하면서 단기적으로는 부동산 민심이 대통령의 서사에 동조하는 기현상도 감지되고 있다. 하지만 매매 가격의 일시적 하락 이면에는 전세 물량 실종과 전세의 월세 전환 가속화라는 임대차 시장의 붕괴가 진행 중이다. 결국 2026년 6월의 선택은 열려 있다. 유권자들이 대통령의 정치적 퍼포먼스가 주는 단기적 효과에 힘을 실어줄지, 아니면 누적된 정책 실패와 재산권 침해의 고통을 심판할지는 누구도 예단할 수 없다. 서울의 부동산 민심은 지금, 6월의 심판대를 향해 소리 없는 카운트다운을 시작했을 뿐이다.

2026.03.15 09:00

4분 소요
민간 기업이 만든 AI가 전쟁 핵심 전력 되는 시대[한세희 테크&라이프]

전문가 칼럼

이란에 대한 미국과 이스라엘의 최근 전면 공습은 50년 가까운 시간의 흐름이 누적된 결과다. 하지만 가까운 원인을 따지자면 2023년 10월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민간인까지 납치 살해하며 시작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뻗어 나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와 싸우는 한편, 레바논 헤즈볼라와 예멘 후티 번군도 공격했다. 하마스와 헤즈볼라, 후티는 중동에서 이스라엘과 미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란이 지원하는 이란 대리 세력들이다. 이어 이스라엘은 2025년 6월 이란을 기습해 주요 군사 및 핵 시설을 파괴했고 핵 과학자와 정치인 등을 암살했다. 미국도 이스라엘에 가세해 이란 핵 시설을 폭격했다. 이른바 ‘12일 전쟁’이다. 이후 이란과 미국, 이스라엘이 이란 핵무장 포기 등을 놓고 벌인 지루한 협상은 결국 2월 말 미국과 이스라엘의 또 한 번의 대규모 공격으로 귀결됐다. 이란 둘러싼 갈등에서 ‘전쟁 AI’ 등장 현재 이란을 둘러싼 급박한 정세가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에서 비롯된 것처럼 지금 이란 공습에서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새로운 기술 하나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처음 논란이 된 바 있다. 바로 전쟁을 위한 인공지능(AI) 기술이다. 2024년 이스라엘 군이 민간인 사이에 섞인 하마스 병력을 식별하기 위해 AI를 쓰고 있다는 폭로가 나왔다. 이스라엘은 ‘라벤더’라는 AI 시스템을 개발, 무리 중 누가 하마스 무장 세력에 참여하는 사람인지 식별했다. 여러 데이터를 수집하고 연결 관계를 분석, 하마스 무장 조직원인 것으로 판단되면 폭격을 가했다. 보도에 따르면 최대 3만7000명이 라벤더 AI에 의해 병력으로 판단되기도 했다고 한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결정에 AI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로선 AI가 실제 전장에서 활용된 최대 규모 사례로 꼽힌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가능성을 보인 군사 AI 활용은 이번 공습에서 제대로 위력을 발휘했다. 미군이 이란 최고지도자와 정부 고위 인사들, 주요 핵 시설과 군사 기지를 타격할 작전을 짜고 우선순위를 정할 때 AI 스타트업 앤트로픽의 ‘클로드’ 모델과 팔란티어의 ‘메이븐 스마트 시스템’ 등을 적극 활용했다. 179개 출처에서 데이터를 수집하는 메이븐에 클로드를 결합해 정보 수집과 표적 식별, 작전 계획 및 전투 결과 평가 등을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정확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이스라엘의 라벤더 AI가 하던 일을 훨씬 큰 규모로, 더 빠르고 정확하게 하게 된 것이다. 데이터를 분석해 공격 표적을 빠르고 효과적으로 찾아낸다는 점에서 둘은 같다. 1등 공신 앤트로픽, 도리어 퇴출 위협?하지만 세상에 주는 충격은 같지 않다. 팔레스타인 일대에서 무장 세력 참여자를 찾아내 제거하는 것과 한 나라 최고지도자와 고위 인사 수십 명을 추적해 은신처에 미사일을 보내는 일은 다르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앤트로픽 클로드는 올해 초 미군이 베네수엘라를 습격해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부부를 붙잡아 올 때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른 나라의 방공망을 사이버 공격으로 마비시키고 최고 지도자와 고위 인사들의 동선을 낱낱이 파악해 미사일을 날리거나 특공대를 보내 체포하는 장면은 새로운 종류의 ‘초강대국’의 등장을 예감하게 한다. 팔레스타인의 라벤더에서 테헤란의 클로드까지 2년 남짓한 시간 동안 AI는 놀랄 정도로 발전했고, 생소하고 강력한 힘이 처음 등장할 때 늘 그랬듯 우리는 본능적 두려움과 당혹감을 느낀다. 이런 당혹 속에서 우리는 이 새로운 힘을 어떻게 써야 할지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 미국 정부와 앤트로픽의 최근 대립은 이 논의가 혼란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란 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앤트로픽 클로드는 마두로 체포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정작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란 공습 직전인 2월 말 모든 연방 기관에 앤트로픽 기술 사용을 중단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앤트로픽이 클로드를 국방부에 공급하는 조건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AI를 인명 살상 여부의 자율적 판단이나 내국인 대규모 감시엔 사용하지 말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AI의 윤리적 활용을 강조하는 앤트로픽의 평소 기조와 부합하는 요구이나, 합법 범위 내에서 AI 사용 범위를 제약 없이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미국 전쟁부와 입장이 갈렸다. 이로 인해 트럼프 대통령은 앤트로픽을 ‘공급망 위험 기업’으로 지정하고 국가안보 관련 시스템에서 앤트로픽 제품 사용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직후 시작된 이란 공습에서 앤트로픽의 AI는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부는 AI의 강한 능력을 활용하고자 하지만 민간 기업에 예속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기업은 강한 국가의 영향력 아래 스스로의 원칙을 포기하도록 강요받는 상황을 우려한다. AI는 제2의 핵무기아마도 제2의 핵무기와 같은 의미를 갖게 될 가능성이 큰 AI 기술을 놓고, 정부가 기술을 가진 민간 기업의 결정에 예속되는 상황을 받아들이리라 기대한다면 순진한 것일 터다. 경쟁 AI 기업들이 정부와 거래를 트고 싶어하는 상황에서 앤트로픽의 윤리적 원칙은 의미를 잃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미국 정부는 오픈AI와 국방 관련 AI 활용에 대한 계약을 맺었고, 앤트로픽은 “경쟁사가 하는 만큼은 우리도 하겠다”며 원칙에서 물러나는 입장을 밝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픈AI의 로봇 부문 책임자가 국방 계약 체결에 반발하며 퇴사하는 등 조직 내부는 뒤숭숭하다. 안보를 위해 최첨단 AI를 국가가 활용할 수 있게 해야겠지만, AI가 시민의 자유와 프라이버시를 겨누지 않게끔 통제하는 방법 논의가 필요하다. AI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지뢰나 화학무기, 집속탄 같은 위험한 무기의 사용을 국제 조약으로 규제하듯 AI 규제를 위한 국제적 약속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강대국이나 불량 국가는 이런 조약에 가입하지 않거나, 가입하더라도 규제를 우회하는 방법을 찾아내기는 하지만 말이다.

2026.03.15 08:00

4분 소요
노란봉투법과 AI발 노동 대전환의 시대 [EDITOR’S LETTER]

전문가 칼럼

두 번의 대통령(전 정부) 거부권, 경영계와 야당의 거센 반대를 뚫고 작년 입법화된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 법률)이 6개월의 준비기간을 마치고 3월 10일 정식 시행에 들어갔습니다. 노란봉투법은 하청 노동자에 대한 원청 책임을 강화하고 노동쟁의 범위를 넓히는 동시에 파업 노동자에 대한 기업의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도록 한 것이 주요 골자입니다. 이에 하청업체 등 간접고용 근로자도 원청 사용자와 단체교섭 등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자동차·조선·석유화학업계 등 곳곳에서 하청 노조들의 원청 교섭 요구가 봇물 터지듯 분출되고 있습니다. 대형 노동자단체인 민주노총은 하청 노조의 교섭 요구를 회피하는 사업장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고 오는 7월에는 총파업까지 전개한다는 계획입니다. 그동안 기업 경영진이 좀 더 유리했던 노사 환경에서 노란봉투법이라는 친노동법이 도입되면서 노동자들, 특히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던 비정규직·특수 노동자 등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아 나선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하지만 기업들은 울고 싶은 심정입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고 일부 개선 움직임도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전쟁’이라는 돌발 악재로 유가 및 환율이 요동쳐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이런 위기에서는 노사가 하나로 똘똘 뭉쳐도 모자랄 판에 내부에서 노사가 갈라져 대립하게 돼 대응 역량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노사 관계는 늘 좋을 수가 없습니다. 또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양보를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 어느 선에서는 서로 악수를 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기업들이 국내외적인 다양한 도전에 직면해 있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최근 기업들은 로봇 도입과 AI(인공지능) 전환의 시대를 맞아 일하는 방식을 바꿔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대전환의 흐름을 외면해서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게 자명한 만큼 다들 AI·로봇으로의 대전환에 적극 나서고 있습니다. 문제는 노동자의 일자리가 줄어들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노조의 반발이 크다는 겁니다. 현대자동차그룹이 자회사 보스턴다이내믹스를 통해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를 개발하고 있는데, 노조측은 “노사 합의 없이는 단 한 대도 들여올 수 없다”며 반대하고 있습니다. 사람처럼 걸어 다니며 관절을 이용해 생산 작업을 할 수 있는 아틀라스가 생산 현장에 투입되면 고용 충격이 예상된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도입이 된 것도 아닌데 반대부터 한 셈이어서 비판 여론이 컸는데요, 노조측은 “기술 발달을 저해할 생각이 아니라 충분한 숙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라며 한발 물러났습니다. AI·로봇이 일상 속으로 빠르게 파고들면서 노동 생태계도 큰 변화가 불가피한데요, 그렇다고 ‘일자리 축소’라는 결론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직은 미지의 세계인 만큼 노사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어가야 할 때입니다. 그 길에서 노란봉투법이 갈등의 증폭제가 아니라 상생을 위한 숙의의 장을 여는 시발점이 되어야 할 텐데요, 이는 노사 모두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2026.03.15 06:00

2분 소요
루이비통 vs 강남 수선집의 '리폼 전쟁'...대법원 판단 살펴보니 [백세희의 컬처&로(LAW)]

전문가 칼럼

지난달 말 대법원은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과 국내 수선업체 강남사 간 소송에서 주목할 만한 판결을 내놓았다. 루이비통이 이른바 ‘리폼’ 업체를 상대로 제기한 상표권 침해 금지 및 손해배상 청구 사건이었다. 대법원은 수선업자가 루이비통 상표권을 침해했다는 1·2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특허법원으로 돌려보냈다(대법원 2026. 2. 26. 선고 2024다311181 판결).원고 루이비통은 잘 알려진 글로벌 명품 브랜드다. 특유의 로고는 1896년 창안된 이후 전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돼 왔다. 루이비통의 2020년 매출은 약 1조467억원에 이른다. 피고 강남사는 국내에서 가방과 지갑 등의 수선·제작업을 하는 사업자다. 2017년부터 2021년까지 명품 가방 소유자들의 요청에 따라 대가를 받고, 명품 로고가 표시된 가방의 원단이나 금속 부품 등을 활용해 전혀 다른 형태의 가방과 지갑을 만들어 왔다. 이런 가공 행위를 흔히 ‘리폼’이라 부른다.리폼은 약 8~9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누구도 크게 문제 삼지 않는 새로운 시장이었다. 유행이 지난 명품 가방을 다른 제품으로 바꿔 사용하려는 소비자와, 이를 수선해 용역비를 받는 수선업자가 주요 참여자였다. 그러나 이 흐름에 편승해 출처가 불분명한 명품 부자재를 대량으로 확보해 리폼 제품을 만든 뒤 온라인 쇼핑몰에서 판매하는 사례도 등장했다. 예컨대 샤넬 로고가 새겨진 단추에 침을 달아 귀걸이로 만든 뒤 ‘업사이클링 제품’이라며 판매하는 식이다.명품 브랜드들은 이러한 움직임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수선업자와 업사이클링 판매자를 가리지 않고 상표권 침해를 주장했다. 실제로 “내용증명을 받았다”는 상담도 잇따랐다. 법적으로 다툴 여지가 있어 보이면서도, 글로벌 브랜드와 소송을 벌이는 부담 때문에 쉽게 맞서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결국 루이비통은 타협하지 않은 강남사를 상대로 2022년 2월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이 시작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다른 리폼 업체들은 온라인 광고를 내리거나 사업을 중단했고, 일부는 조용히 영업을 이어갔다.전혀 다른 제품이 되는 리폼…1·2심의 판단“내 돈 주고 산 가방인데 마음대로 고쳐 쓰지도 못하나.” 루이비통의 소송 소식을 접한 많은 이들의 반응이었다. 실제로 인터뷰와 칼럼을 통해 의견을 들어보면 상당수는 루이비통의 소 제기를 과도하다고 봤다.그러나 다른 시각도 있었다. 법원에 제출된 리폼 제품 사진을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진다는 의견이었다. 일부 리폼 제품은 단순한 수선을 넘어 새로운 제품을 창조한 수준에 가까웠다. 현재 판매 중인 신제품과 거의 동일한 디자인의 제품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런 제품이 중고 시장에 유통될 경우 소비자가 정품으로 오인할 가능성도 충분해 보였다.1·2심 법원의 판단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리폼 제품이 독립된 교환가치를 지닌 채 중고 시장에서 거래된다면 이는 상표법상 ‘상품’에 해당하며, 소비자가 루이비통 정품으로 오인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상표의 사용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법원은 리폼 제품을 판매하는 행위뿐 아니라 리폼 행위 자체와 완성 제품을 의뢰인에게 전달한 행위까지도 상표권 침해로 판단했다.그러나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핵심은 ‘개인적 용도의 사용’이었다. 명품 가방의 원단과 부자재를 이용해 새로운 제품을 만든 뒤 이를 개인이 직접 사용하는 경우라면 상표법 위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제 조건은 분명하다. 리폼 제품이 상거래에 제공되거나 시장에 유통되지 않고 오직 개인적 용도로 사용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리폼 과정에서 이루어진 상표 표시 행위가 상표법상 ‘상표의 사용’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대법원은 또 중요한 현실적 문제를 짚었다. 리폼 작업에는 상당한 시간과 노동,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소비자가 직접 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만약 소유자가 직접 하는 리폼만 허용하고 수선업자를 통한 리폼을 금지한다면, 소유자의 자유는 사실상 형식적인 권리에 그칠 수 있다는 것이다.따라서 수선업자의 리폼 행위라도 소유자의 의뢰에 따라 이루어지고 결과물이 개인적 사용에 머문다면 위법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결국 이 사건에서 피고 수선업자는 루이비통의 상표권을 침해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됐다.대기업 명품 브랜드와 국내 수선업체의 법정 공방이라는 점에서 이 판결은 큰 화제를 모았다. 국내 최대 로펌을 선임한 루이비통을 상대로 작은 수선업체가 승소했다는 점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다”는 평가도 나왔다. 또 “국내 최대의 로펌인 김앤장을 선임한 루이비통을 이긴 수선집!”이라는 이 서사를 주제로 벌써 ‘소송의 뒷이야기’ 같은 후속 기사들도 나오기 시작한 것 같다.‘위법한 리폼’은 무엇일까다만 이번 판결이 모든 리폼을 허용한 것은 아니다. 대법원은 상표권 침해가 될 수 있는 리폼의 기준도 함께 제시했다.형식적으로는 소비자의 의뢰가 있었더라도, 실제로는 리폼업자가 주도적으로 제품을 생산해 판매하고 시장에 유통시키는 경우라면 상표법상 ‘상표의 사용’에 해당해 침해가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예를 들어 리폼 제품의 디자인이나 형태, 생산 개수 등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수선업자가 가지고 있는 경우, 소비자가 가져온 명품 제품은 일부만 사용하고 수선업자가 보유한 부자재를 대부분 활용해 제품을 만드는 경우, 혹은 리폼 전 제품의 소유권을 수선업자에게 넘겨 판매 목적의 제품을 만드는 경우 등이 이에 해당할 수 있다. 또 리폼이 개인 사용이 아니라 제3자 판매를 위한 것임을 수선업자가 알거나 알 수 있었던 경우에도 상표권 침해가 성립할 수 있다.다만 이러한 사정을 입증할 책임은 상표권자인 명품 브랜드에 있다. 브랜드 측이 리폼업체를 상대로 상표권 침해 소송을 제기하려면 이러한 구체적 사실들을 모두 증명해야 한다.대법원의 이번 판결로 한동안 주춤했던 명품 리폼 시장이 다시 살아날 것 같다. 하지만 이에 편승해 명백히 위법인 유사 행위도 다시 활개를 칠까 걱정이다. 소유자가 오래된 자기 물건을 가지고 와 고쳐달라는 게 아니라, 업자가 출처 불명의 부자재를 가공해 이른바 명품 ‘업사이클링’이라 주장하는 방식이 그렇다. 폐기 대신 재활용(recycling) 또는 새활용(upcycling)을 통해 제품 수명을 연장하려는 소비자들의 선한 뜻을 이용해 명품 브랜드들의 명성에 무임승차하는 이들이다. 예컨대 단추에 침을 달아 귀걸이를 만들거나, 가방 로고를 목걸이 펜던트로 가공해 판매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는 리폼업자가 제품 생산과 판매를 주도하며 시장에 유통시키는 행위로, 대법원이 제시한 상표권 침해 사례에 정확히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 더 큰 문제는 그 부자재가 실제 명품에서 나온 것인지조차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이다.이번 판결은 미국, 유럽, 일본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그 결과를 지켜보고 있던 중요한 사건이다. 사회적 파급 효과도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이런 판결을 접하면 짜릿하다. 생활 속 분쟁이 명료하게 정리되는 것을 볼 때마다 우리 사회가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다. 독자들도 함께 이 기분을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백세희 법률사무소 아트앤 대표변호사

2026.03.14 10:00

5분 소요
‘같은 1등급’의 함정…내신 9→5등급제, 2028 대입 변수로 [임성호의 입시지계]

전문가 칼럼

2027학년도 대학입시를 끝으로 내신 9등급제는 사실상 막을 내린다. 2028학년도 대학입시부터는 내신 등급 체계가 5등급제로 개편된다. 현행 9등급제에서는 학교 내신 상위 4%까지 1등급, 11%까지 2등급, 23%까지 3등급, 40%까지 4등급, 60%까지 5등급, 77%까지 6등급, 89%까지 7등급, 96%까지 8등급이 부여된다. 상위 96% 미만에 해당하는 학생은 9등급으로 처리된다. 반면 5등급제에서는 상위 10%까지 1등급, 34%까지 2등급, 66%까지 3등급, 90%까지 4등급을 부여하고, 상위 90% 미만은 5등급으로 분류된다. 등급 체계 변화가 불러올 가장 큰 변수는 2028학년도 대입부터 나타난다.같은 1등급, 다른 기준2028학년도 대학입시에서는 고3 수험생이 5등급제 내신 성적표를 제출하는 반면, N수생은 9등급제 내신 성적표를 제출하게 된다. 이때 대학으로서는 ‘같은 1등급’이라도 서로 다른 기준에서 산출된 성적표를 동시에 받아보게 되는 셈이다. 특히 대학이 9등급제에서 상위 4%에 들어 획득한 1등급 수험생과, 5등급제에서 상위 10% 이내에 들어 1등급을 받은 수험생 중 어떤 학생을 최종적으로 더 높게 평가할지가 입시 현장에서 중요한 관전 요소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다. 통계적으로만 놓고 보면 9등급제 1등급이 상위 4%로 더 촘촘하게 압축돼 있어 ‘희소가치가 높다’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여지가 있다는 점도 함께 제기된다. 결국 대학들이 어떤 방식으로 두 성적표를 해석하고 반영하느냐에 따라 입시 지형에 큰 변화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더 나아가 2029학년도 입시에서는 ‘등급 체계 혼재’가 한 단계 더 복잡해질 수 있다. 만약 대학이 내신 9등급제 1등급을 더 선호하는 방향의 평가 경향을 보인다면, 2029학년도에는 고3과 재수생이 5등급제 성적표를 제출하고, 삼수생 이상부터는 9등급제 성적표를 제출하게 된다. 이 경우 삼수생 이상이 상대적으로 유리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될 수 있다. 물론 내신 5등급제에서는 고교학점제가 전면 적용되는 만큼, 학생부의 다양한 활동 기록이 어떤 방식으로 평가받느냐가 또 다른 관건이 될 수 있다.이런 변화는 ‘마지막 9등급제 입시’인 2027학년도에도 파급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2027학년도는 현행 내신 9등급제가 적용되는 마지막 대입이다. 이 과정에서 내신 상위권 학생들의 대학 진학 이후 움직임에 변화가 생길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예컨대 현행 9등급제에서 내신 1등급을 확보했더라도, 상위권 학생들이 특히 선호하는 의약학 계열에 진학하지 못하고 일반 학과에 합격해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이 있을 수 있다. 이들 중 일부는 9등급제 마지막 대학입시 상황에서 당초 목표했던 대학(또는 의약학계열)로 ‘재진입’을 노리는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다는 분석이다. 9등급제 내신 희소가치 소멸그 배경에는 ‘내신 성적표의 희소가치’ 문제가 놓여 있다. 2027학년도에 이미 확보한 상위권 내신 성적표를 활용하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면, 2028학년도에는 5등급제 고3 학생들과 섞여 경쟁해야 한다. 이때 9등급제 내신이 갖고 있던 희소가치가 사실상 소멸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여기에 2027학년도 대학입시부터 지역의사제가 도입되는 점도 변수로 꼽힌다. 지역의사제는 상위권 학생들의 대입 문호를 더 크게 확장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향후 5년간 지역의사제는 확대되는 상황이 계속 예정돼 있다는 점에서, 중장기적으로도 입시 수요의 이동을 촉발할 여지가 있다.이미 ‘대학 중도 탈락’ 증가 흐름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서연고(서울대·연세대·고려대)의 최근 5년간 재학생 중도 탈락 수는 공시 기준으로 꾸준히 늘고 있다. 2020년 1,416명에서 2021년 1624명, 2022년 1971명, 2023년 2131명, 2024년 2126명으로 증가했고, 2025년에는 2496명으로 더 늘었다. 이들 서연고 중도 탈락 학생의 상당수는 의약학 계열로 재입학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분석이 뒤따른다.범위를 주요 10개대로 넓혀도 흐름은 유사하다. 주요 10개대 중도 탈락 인원은 2020년 5827명, 2021년 6790명, 2022년 7265명, 2023년 7576명, 2024년 7781명, 2025년 8683명으로 가파른 증가세를 보인다. 주요 10개대에서 중도 탈락한 학생들 역시 의약학 계열 또는 상위권 대학으로의 재입학을 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된다.의대 재학생 상황도 예외로 보긴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의대 재학생 가운데 중도 탈락자는 2020년 185명, 2021년 173명, 2022년 203명, 2023년 179명, 2024년 201명, 2025년 386명으로 집계됐다. 이를 의대·치대·한의대·약대 범위로 확대하면 수치는 더 크게 뛴다. 2020년 300명, 2021년 311명, 2022년 360명, 2023년 521명, 2024년 660명, 2025년 1004명으로 증가했다. 특히 의대 중도 탈락 학생의 72%가 지방권 소재 의대 재학생이라는 점도 언급된다. 의대 재학생의 중도 탈락은 대부분 수도권 또는 상위권 의대로의 재입학으로 볼 수 있으며, 치대·약대·한의대 역시 의대로의 재진입 또는 상위권 의약학 계열 대학으로 이동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2027학년도는 상징성도 크다. 2027학년도는 현행 내신 9등급제가 도입된 2008학년도 대학입시 이후 20년 만에 처음 맞는 ‘마지막 9등급제 입시’다. 따라서 내신 상위권 학생뿐 아니라 상황에 따라 중위권대 재학생까지도 5등급제로 바뀌기 이전, 마지막 입시에서 원하는 대학으로의 재진입을 노리는 사례가 상당수 발생할 수 있다는 예상이 제기될 수 있다.연도별로 등급 체계가 겹치는 구조도 복잡해진다. 2028학년도 입시에서는 고3이 5등급제 성적표를 제출하고, N수생은 9등급제 성적표를 제출한다. 2029학년도에는 고3과 재수생이 5등급제 성적표를 제출하며, 삼수생 이상부터는 9등급제 성적표를 제출하게 된다. 2030학년도에는 고3·재수·삼수생이 5등급제 성적표를 제출하고, 4수생 이상부터는 9등급제 성적표를 제출하는 형태로 겹침이 이어진다.결국 내신 정책 변화에 따른 불확실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더욱이 내신 제도 개편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또다시 진행되는 중이라는 점에서, 향후 입시 환경의 변동성은 더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2026.03.1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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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역사를 바꾼 10대 발명품 [와인인문학]

전문가 칼럼

와인은 ‘신의 물방울’이라 불리지만 그 물방울을 우리가 마시는 형태의 문화로 완성한 것은 인간의 끊임없는 탐구와 ‘발명’이었다. 인류가 포도를 발효시켜 알코올을 얻은 이래 와인의 품질과 유통 그리고 문화를 혁명적으로 진보시킨 10가지 결정적 발명품을 소개한다.로마의 실용성이 낳은 ‘맛의 연금술’첫 번째는 오크(참나무)통이다. 고대 와인 운송의 표준은 무겁고 깨지기 쉬운 점토 항아리인 ‘암포라’였다. 로마인들이 갈리아(현재의 프랑스)를 정복하며 발견한 나무통은 혁명이었다. 오크통은 굴려서 운반할 수 있어 물류의 혁신을 가져왔지만, 진정한 발명은 그 ‘화학적 작용’에 있다. 오크는 와인에 타닌과 바닐라, 토스트 향을 입히고 미세한 기공을 통해 와인을 숨 쉬게 해 맛을 부드럽게 해준 덕분에 복합미를 지닌 숙성주로 진화할 수 있었다.두 번째는 와인에 ‘시간’이라는 개념을 부여한 유리병이다. 17세기 이전까지 와인은 산화에 쉽게 노출돼 장기 보관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석탄을 연료로 하는 용광로의 발명으로 튼튼한 유리병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와인의 역사는 바뀌었다. 유리병은 와인을 외부 공기로부터 차단하여 산패를 막고 진정한 ‘숙성’을 가능하게 했다. 빈티지의 개념 그리고 수십 년을 견디는 위대한 와인의 탄생은 유리병 덕분이다. 세 번째는 유리병의 완벽한 단짝인 코르크 마개다. 유리병이 발명됐어도 그것을 막을 완벽한 마개가 없었다면 무용지물이었을 것이다. 나무 조각이나 기름 먹인 천을 쓰던 시절을 지나 17세기경 도입된 코르크는 와인 역사상 위대한 발견 중 하나다. 코르크의 유연성은 병목을 완벽하게 밀봉하면서도 아주 미세한 양의 산소만을 투과시키는 ‘미세 산화 작용’을 허락한다. 덕분에 와인은 병 속에서 질식하지 않고 천천히 숙성되며 제3의 아로마(부케)를 피워낼 수 있었다.네 번째는 와인을 지키는 보이지 않는 수호자라 불리는 이산화황(SO2)이다. 현대에는 첨가물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이산화황의 사용은 와인을 상하지 않게 막아준 결정적인 발명이다. 고대부터 황을 태워 통을 소독하는 지혜는 있었으나, 이를 과학적으로 제어해 항산화제로 사용하게 된 것은 와인 품질 유지의 핵심이다. 이것 없이는 바다를 건너온 와인을 마실 수 없었을 것이며 곧바로 산화돼 갈색으로 변했을 것이다.다섯 번째는 멸종 위기에서 유럽 와인을 구한 접붙이기 기술이다. 19세기 후반 아메리카 대륙에서 건너온 진딧물 ‘필록세라’는 유럽의 포도밭을 초토화했다. 유럽종 포도나무가 멸종될 뻔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해낸 것은 바로 ‘접붙이기’ 기술이었다. 필록세라에 내성이 있는 미국 종 포도나무 뿌리에 유럽 종 가지를 접붙이는 이 발명은 오늘날 포도 재배의 표준이 됐다. 우리가 마시는 대부분의 프랑스, 이탈리아 와인은 사실 이런 접목 기술의 결과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부터 정교한 과학 기술까지여섯 번째는 불량품을 명품으로 바꾼 샴페인 제조 방식이다. 과거 와인에서 발생하는 기포는 ‘악마의 장난’이라 불리는 결함이었다. 그러나 돔 페리뇽과 동시대 수도사들 그리고 영국인들의 유리병 기술이 결합해 이 기포를 병 안에 가두는 기술을 완성했다. 병 속에서 2차 발효를 유도해, 높은 압력을 견디며 효모 찌꺼기를 제거하는 일련의 복잡한 공정의 발명은 와인을 단순한 술에서 축제의 상징이자 ‘럭셔리의 아이콘’으로 격상시켰다.일곱 번째는 대항해 시대를 견디게 한 보존 기술인 주정 강화다. 긴 항해 동안 와인이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증류주를 첨가하는 아이디어는 포트·셰리·마데이라라는 위대한 와인 장르를 탄생시켰다. 이는 단순한 보존법을 넘어 발효를 중단시켜 천연 당분을 남기거나 산화적 숙성을 유도해 와인의 풍미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주정 강화 기술은 와인의 수명을 극도로 늘려준 획기적인 발명이다.여덟 번째는 와인 양조를 과학으로 진화시킨 파스퇴르의 미생물 연구다. 루이 파스퇴르 이전까지 와인 발효는 신비로운 자연 현상이었다. 파스퇴르는 효모가 당분을 알코올로 바꾼다는 원리를 규명하고 박테리아가 와인을 식초로 만든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의 연구 덕분에 인류는 비로소 ‘저온 살균법’을 비롯한 위생적인 양조 제어를 할 수 있게 됐다. 와인 양조학은 파스퇴르의 현미경 아래에서 비로소 과학으로 다시 태어났다.아홉 번째는 신선한 화이트 와인의 혁명이라고 불리는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와 온도 조절 시스템이다. 1960~70년대 도입된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와 냉각 기술은 현대 화이트 와인의 혁명을 가져왔다. 이전에는 통제가 어려웠던 발효 온도를 자유자재로 조절함으로써 포도 고유의 신선한 과일 향과 산도를 완벽하게 보존할 수 있게 됐다. 이 발명 덕분에 서늘하지 않은 지역에서도 훌륭한 화이트 와인을 생산할 수 있게 됐고, 전 세계 와인의 상향 평준화를 이끌었다.마지막은 ‘떼루아’(포도 재배 환경)를 지적재산권으로 만든 사회적 발명인 원산지 통제 명칭 제도다. 기술적 도구는 아니지만 1935년 프랑스에서 법제화된 원산지 통제 명칭(AOC) 시스템은 와인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도적 발명’이다. 포도의 원산지가 와인의 품질과 가치를 결정한다는 떼루아의 개념을 법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 제도는 가짜 와인을 근절하고 지역별 와인의 개성을 보호하며 와인을 단순한 농산물이 아닌 ‘문화유산’이자 ‘브랜드’로 확립시켰다. 전 세계 모든 와인 법규의 모태가 된 위대한 발명이다.

2026.03.1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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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치는 주가, 빚투, 그리고 워런 버핏의 투자 원칙[EDITOR’S LETTER]

전문가 칼럼

“이제 무섭기까지 해요.” 최근 미친 듯이 요동치는 코스피를 두고 나온 말인데요, 정말 그렇긴 합니다. 코스피는 올해 1월 4300선에서 출발해 같은 달 27일 종가 기준 처음으로 5000선을 상회했고, 한 달도 안 된 2월 25일 사상 처음으로 6000선을 돌파했습니다. 1700포인트나 뛰어오른 데 두 달도 채 걸리지 않은 겁니다. 전 세계적으로 사례를 찾기 힘든 모습이라서 투자자들 중에는 놀라움을 넘어 두렵다고 얘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증시로 돈이 쓰나미처럼 밀려들고 있는데, 이 중에는 빚을 내서 투자하는 ‘빚투’도 상당합니다. 투자자가 주식 투자를 위해 증권사로부터 자금을 빌린 뒤 갚지 않은 금액인 신용거래융자 잔고는 지난 2월 26일 기준 32조3684억원을 기록했습니다. 1월 29일 사상 처음 30조원을 돌파한 이후 한 달도 안 돼 2조원 이상 늘었으며, 작년 말 27조2864억원에서 올해 들어서만 약 20% 급증했습니다. 이에 일부 증권사는 신용거래융자를 중단했습니다. 빚투 열기는 이 같은 수치뿐 아니라 각종 주식 토론방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요, 한 맞벌이 부부는 ‘국내 증시가 불장이라서 1억원을 대출받았다. 잠시 쓰고 갚을 건데…’라며 자신들의 빚투 상황을 자세히 얘기하면서 다른 투자자들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이제 빚투는 특별한 사례가 아닌, 일종의 보편적인 투자 행태가 된 모습입니다. 그 이면에는 ‘나만 뒤처질 수 없다(FOMO, 포모)’는 불안감과 ‘이번 기회에 인생 역전을 하겠다’는 심리가 강하게 깔려 있습니다. 한 증권업계 임원은 “요즘 집 등 자신의 고액 자산을 걸고 대출을 받아 주식 투자하는 분들이 있다”며 “주식으로 돈 벌 기회가 왔고 놓치면 바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애기했습니다. 문제는 증시가 내 마음 같지 않다는 겁니다. 끝없이 치솟을 것 같던 국내 증시는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전쟁’이라는 예상치도 못한 악재에 6000선이 단번에 무너지면서 투자자들의 낯빛이 파랗게 질렸습니다. 한 빚투 직장인은 “불안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며 공포에 휩싸인 모습이었습니다. 빚투의 무서움은 하락장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주가가 하락해 담보유지비율이 기준치 밑으로 떨어지면, 증권사는 주식을 강제로 매도하는 ‘반대매매’를 단행합니다. 이 매물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면 주가는 더 하락하고, 이는 또 다른 반대매매를 부르는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합니다. 자칫하면 평생 일궈온 자산을 한순간에 잃는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그래서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이 ‘주식 투자는 여윳돈으로 하라’는 겁니다. 또 개별 종목을 직접 투자하기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성장지수펀드(ETF) 등 금융상품에 투자하라고 권합니다. ‘투자의 대가’로 불리는 워런 버핏의 원칙도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남들이 탐욕을 부릴 때 두려워하고, 남들이 두려워할 때 탐욕을 부려라.” 지금은 누군가의 수익률을 부러워할 때가 아닙니다.

2026.03.0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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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회는 클수록 좋다?…‘몸집 줄이기’가 기업 가치 키운다 [대신경제연구소 ESG인사이트]

ESG

기업 이사회의 적정 규모를 둘러싼 논의가 국내 자본시장의 핵심 화두로 부상하고 있다. 단순히 몇 명이 이사회 회의실에 앉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사회 규모는 ▲전략적 의사결정의 속도 ▲경영진 감독의 실효성 ▲나아가 주주가치 제고와 직결되는 지배구조의 핵심 변수다. 최근 주요 상장사를 중심으로 이사회 정원 축소 및 정예화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이 문제는 내부 행정 사안을 넘어 시장 전체의 주목을 받고 있다.글로벌 스탠다드, 이사회 ‘슬림화’글로벌 선진 시장은 이미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있다. 2023년 말 기준 미국 S&P 500 기업들의 평균 이사 수는 약 10.8명으로, 1980년대 초반의 16명에 비해 크게 줄었다. 40년에 걸친 지속적인 슬림화다. 영국 FTSE 100 기업들의 평균은 10.2명, 일본 닛케이 225 기업들도 10.4명 수준이다. 국가별 제도적 차이는 있지만, 선진 시장의 이사회 규모는 10명 안팎으로 수렴하고 있다.이러한 흐름의 배경에는 기관투자자들의 적극적인 스튜어드십 활동이 있다. 엔론·월드컴 사태 이후 2002년 도입된 사베인스-옥슬리법은 미국 이사회의 독립성과 전문성 강화를 요구하며 소수 전문가 중심 이사회 선호를 강화했다. 일본의 경우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외국인 기관투자자 유입과 함께 소규모 이사회와 사외이사 확대 요구가 본격화됐으며, 이에 부응한 기업들은 시장에서 가치 프리미엄을 받았다.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사 ISS와 글래스 루이스는 이사회 규모에 대해 획일적 기준을 제시하기보다 기업의 특성과 지배구조 맥락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만 글래스 루이스는 최소 5인 이상, 20인 이하 범위를 제시하면서 과도한 대규모 이사회에서는 이른바 ‘주방의 요리사가 너무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고 경고한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 역시 이사회 규모가 지나치게 커질 경우 개별 이사의 책임성과 관여도가 약화된다고 지적하며 정예화를 요구하고 있다. 국민연금도 과도한 이사 수 확대에는 반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기업가치를 극대화하는 이사회 최적 규모학계의 실증 연구들은 이사회 규모와 기업 성과 사이에 ‘역U자형’의 비선형 관계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이사회 규모가 커질수록 초기에는 전문성과 다양성 및 감독 기능 강화로 기업 성과가 개선되지만, 일정 수준을 넘으면 의사소통 비용 증가와 무임승차 문제로 성과가 오히려 하락한다.국내 주식시장에 상장한 약 2500개 기업의 10년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역시 동일했다. 시장가치(Tobin’s Q)·수익성(ROA)·양적 성장(총자산성장률) 모두에서 ‘역U자형’ 관계가 확인됐고 최적 이사회 규모는 약 7~9명 수준으로 추정됐다. 이 수준을 과도하게 초과하는 이사회는 기업가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소규모 이사회일수록 기업의 시장 가치가 높게 평가된다는 Yermack(1996)·Eisenberg et al.(1998) 등 해외 연구 결과와도 일치한다.국내외 기업 사례들도 같은 교훈을 보여준다. 신한금융지주는 사모펀드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 수용을 위해 2022년 14명까지 확대됐던 이사회를 2023년 11명으로 축소했다. 특수한 필요성이 소멸된 후 신속하게 정상화에 나선 모범 사례로 평가된다. 독일의 알리안츠·BASF·포르쉐 역시 노동자와 주주가 동수로 참여하는 공동결정제도 아래 20명을 넘던 감사회를 유럽 주식회사 전환 이후 12명 수준으로 줄이며 의사결정 효율성을 높였다. 미국의 P&G와 GE도 행동주의 투자자와의 위임장 대결 과정에서 이사회 규모를 늘렸지만, 갈등이 마무리된 이후에는 전문성 중심의 정예 체제로 재편했다.종합하면 경영권 분쟁이나 대형 인수합병(M&A)·외부 투자자 참여 등 특수한 상황에서는 이사회 규모가 일시적으로 확대될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 기업가치를 높인 기업들은 대부분 10명 내외 체제로 복원됐다. 국가와 산업을 막론하고 선도 기업들의 이사회 규모는 7~12명 범위로 수렴하며, 이 범위가 경영 감독과 의사결정 효율성의 균형을 최적화하는 ‘스위트 스팟’으로 평가된다.앞으로 기업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단순히 이사 수를 줄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정예화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사외이사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중심으로 내실화하되, 이사진은 전략·재무·기술·리스크 등 전문 영역을 다룰 수 있도록 구성해야 한다. 또한 위원회 구조 재정비와 이사회 성과평가 체계 고도화를 통해 이사회가 전략과 리스크에 대한 실질적 감독 기구로 기능하도록 운영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 또한 구조 개편의 취지와 중장기 거버넌스 로드맵을 공개해 시장과 투명하게 소통할 필요가 있다.이사회 규모의 합리화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이사회 기능의 실질화와 책임성 강화를 위한 출발점이다. 글로벌 투자자들은 정예화된 이사회를 경영 효율성과 주주가치 제고를 위한 변화의 신호로 인식한다. 덩치 큰 이사회가 기업을 더 잘 이끈다는 것은 오래된 오해다. 진짜 경쟁력은 정예화된 이사회가 만들어내는 깊이 있는 토론과 명확한 책임에서 나온다.정영호 대신경제연구소 거버넌스컨설팅센터 팀장·수석연구원 .

2026.03.07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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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 핀테크 전쟁 2라운드가 시작됐다 [동남아시아 투자 나침반]

전문가 칼럼

싱가포르 내 법인 계좌 개설 절차는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다. 전통 은행(Traditional Bank)에서 법인 계좌를 개설하려면 통상 2~3개월의 기간이 소요되며, 개인 계좌 개설 심사도 강화되는 추세다. 이러한 시장의 틈새를 공략하여 Aspire·Airwallex·Revolut 등 핀테크 기업들이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이들은 ▲계좌 개설 ▲저수수료 기반 국제 송금 ▲투자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며, 계좌 개설 소요 시간을 5분 내외로 단축했다. 계좌 번호는 싱가포르 DBS 등 전통 은행의 가상 계좌 형태로 발급되며, 자금은 제휴 은행의 수탁 계좌(Safeguarding Account)에 분리 보관되어 안전성을 확보하고 있다.동남아 중소기업 금융 병목 현상 드러나이러한 핀테크 기업들도 주목하고 있는 시장이 있다. 바로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이다. 동남아시아 중소기업(SME) 대출 시장은 여전히 금융 접근성이 낮다. 정책 자금 체계가 발달한 한국과 달리 정부 지원이 제한적이며, 은행권의 대출 문턱도 높다. 주요 요인은 ▲중소기업 재무 정보 및 향후 비즈니스 전망의 불확실성 ▲현금 흐름 데이터의 비정형성 ▲신용 평가 체계의 미성숙으로 분석된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임베디드 금융(Embedded Finance)이 도입되고 있다. 이는 비금융 플랫폼 내에 금융 기능을 내재화하여 제공하는 형태다. 개인 소비자에게는 전자상거래 플랫폼 내 결제 및 선구매 후결제(Buy Now Pay Later, BNPL) 서비스로 이미 보편화되어 있다. 전자상거래 플랫폼을 통해 결제하고 물건 구입시 BNPL과 같은 옵션을 선택하는 것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동남아시아의 디지털 금융은 빠르게 성장하는 분야이다. 구글과 테마섹이 발간한 ‘e-Conomy SEA 2025’에 따르면 디지털 결제는 2025년 1조4120억달러 (약 2000조원)에서 2030년이 되면 2조6000억달러(약 3700조원)로 성장할 전망이다. 디지털 대출은 2025년 910억달러(약 130 조원)에서 2030년 2500억달러(약 360 조원)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측된다. 2025년 27억달러(약 3조9000억원)인 디지털 보험은 2030년까지 2.5배 이상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성장의 중심에는 임베디드 금융이 있다. 전자상거래 등 디지털 생태계가 빠르게 성장하는 동남아시아에서는 개인들의 경우 임베디드 금융이 익숙하다. 동남아시아 개인 이용자의 임베디드 결제·대출·보험 경험률은 각각 49%·45%·37%에 달한다. 현재 이 흐름은 개인에서 기업 영역으로 전이되고 있다. B2B 마켓플레이스의 재고 기반 대출, 물류 플랫폼의 운송료 선지급, 판매시점 정보관리(POS_ 시스템의 매출 기반 신용 한도 설정 등이 주요 사례다. KPMG는 소매· 물류·통신·헬스케어, 교육, 제조 분야를 임베디드 금융의 주요 적용 산업으로 분류했다.임베디드 금융의 파급력은 중소기업 금융의 핵심 인프라인 B2B 플랫폼에서 발생한다. B2B 마켓플레이스 안에서 재고 기반 대출이 이뤄지고, 물류 플랫폼 안에서 운송료 선지급이 가능하다. POS 시스템 안에서 매출 기반 신용한도 자동 설정 등이 대표적 사업영역으로 꼽힌다. 그 외 SaaS(Software as a Service) 기업들도 고객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다양한 서비스를 만들 수 있다. 글로벌 회계법인 KPMG는 임베디드 금융이 적용될 수 있는 대표적 산업으로 소매·물류·통신·헬스케어·교육·제조 분야로 꼽고 있다. 데이터 기반 신용 평가 모델 주목 받아임베디드 금융의 파급력은 중소기업 금융의 핵심 인프라인 B2B 플랫폼에서 발생한다. SaaS 기반 전사적자원관리(ERP) 및 회계 소프트웨어는 ▲기업의 실시간 현금 흐름 ▲매입·매출 ▲인건비 지출 내역 등 과거가 아닌 현재의 데이터를 볼 수 있다. 오프라인 매장의 POS 시스템은 매장의 ▲일일 매출액 ▲객단가 ▲단골 고객 비중 ▲재고 회전율을 실시간으로 수집하여 매출 채권 기반 대출의 근거로 활용된다. 또한 전기료·수도료·법인 휴대폰 요금 등의 공공요금 결제 이력은 기업의 영업 지속성을 확인하는 지표가 된다. 중소기업관련 임베디드 금융은 데이터 기반 신용평가 모델, 정책금융·보증 연계 경험이 있는 한국기업에 동남아시아 시장에서의 또다른 기회를 줄 수 있다. 임베디드 금융은 수익성이 빠르게 나지만, 연체율이 급등하면 구조가 무너지는 구조다. ▲법적 회수 체계 미성숙 ▲데이터 정확성 문제 ▲높은 경기 변동성 등의 리스크가 상존한다. 따라서 연체율 관리를 포함한 보수적인 위험 관리 전략 수립이 필수적이다. 향후 동남아 디지털 금융의 핵심 과제는 중소기업의 실시간 현금 흐름 확보와 신용 인프라 구축이 될 것이다. 필자는 삼정 KPMG∙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한국벤처투자 등 23년이상 다양한 사업경험과 더불어 벤처캐피탈∙회계법인∙인프라∙스타트업 등에서 경력을 쌓았다. 현재 싱가포르의 Hanbridge의 대표로 한국 중소∙벤처기업의 해외 진출 및 해외 자금 유치를 돕는 역할과 함께 한국과 동남아시아의 생태계를 연계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2026.03.0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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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전쟁 발발, 세계 질서 격변...트럼프 ‘힘의 외교’ 어디로 가나 [스페셜리스트뷰]

전문가 칼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 세계를 흔들고 있다. 지난 2월 28일 미국·이스라엘이 이란을 선제공격하면서 대혼란이 야기됐다. 양국의 선제공격으로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와 군 수뇌부 40여명이 사망했다. 중동 정세는 대혼란에 빠졌다. 양국의 전쟁은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폐쇄하고 중동에 있는 미군기지와 주변 이웃 국가들의 정유공장·공항 등에 무차별 보복을 가하고 있다.트럼프 정부는 거침없고 예측 불가능하다. 올해 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군사력을 동원해 베네수엘라 대통령 마두로를 체포했다. 뒤이어 트럼프 대통령은 그린란드 소유권 확보를 위해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거친 발언까지 내뱉으며 나토동맹을 흔들기도 했다.트럼프 정부가 출범한 지 2년째다. 지난해 트럼프 정부의 관세정책을 되짚어보고 트럼프 대통령의 2026년 대외정책 핵심인 돈로 독트린(Donroe Doctrine·신고립주의)과 그린란드, 미국·이란 전쟁 등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이에 따라 향후 벌어질 정치·경제적인 국제 정세 파장도 전망해 본다.2년차 트럼프 정부의 돈로 독트린트럼프 2기 정부의 집권 1라운드인 2025년에는 관세 보복이 핵심 과제였다. 동맹국들과 함께 보조를 맞춰 대중국 경제·안보 봉쇄정책을 추진했던 바이든 전 정부와는 달리 트럼프는 한국·일본·유럽연합(EU) 등 동맹국들에 일방적이고 미국 우선주의식의 관세정책을 감행해 동맹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무차별식 보호무역주의를 추진해 왔는데도 불구하고 전 세계 무역 상대국들은 세계 최대 소비 국가인 미국과 반목할 수 없었다. 트럼프 정부의 상호 관세를 낮추기 위해 미국에 유리한 통상 협상을 체결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달랐다. 국력 신장에 힘입어 트럼프 정부와 무역전쟁을 벌였으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 배경에는 핵심 광물이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이 중국의 희토류 공급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진핑 주석이 희토류 수출 통제를 히든카드로 꺼내 들면 트럼프 정부도 관세 보복 카드를 접을 정도로 그 위력이 대단했다. 반면 바이든 정부 시절부터 사용해 왔던 대중국 반도체 제재는 먹히지 않고 있다. 중국이 반도체 자급자족 역량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한국에서 열렸던 미·중 정상회담을 계기로 미·중 무역전쟁은 잠시 휴전 상태다.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2년 차인 올해 돈로 독트린에 집중할 것이다. 트럼프 정부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국가안보전략(NSS)이 전략적 우선순위가 서반구라는 점을 명확히 알려주고 있다.트럼프는 친중 성향인 베네수엘라 마두로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지난해 말부터 군사적 압박을 강화해 왔다. 전통적으로 중남미는 미국의 앞마당이다. 그런데 중국이 중남미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어 트럼프 정부를 자극했다. 결국 트럼프는 군대를 동원해 마두로 대통령 부부를 체포하고 미국으로 압송했다. 트럼프의 ‘힘의 외교’가 서반구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트럼프의 돈로 독트린은 미국 우선주의 성격이 강하다. 사업가 출신인 트럼프 대통령은 셈법이 뛰어나서 손해 볼 일은 하지 않는다. 베네수엘라에서 마두로를 축출한 것도 석유 사업권을 되찾고 중국·러시아의 영향력을 단절시키기 위함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1기 정부 시절부터 그린란드에 관심을 보였다. 특히 올해 초 그린란드 영토를 소유하겠다고 공언해 분란을 촉발했다. 서반구에 있는 그린란드는 군사·경제적 측면에서 전략적 요충지다. 트럼프는 군사력을 동원해 그린란드를 병합할 욕심을 드러냈다. 당사자인 그린란드는 물론 소유권을 가진 덴마크도 충격에 빠졌다. 나토국가들은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그린란드에 군병력을 파병하겠다고 선포했으며, 트럼프 정부도 파병하는 EU 8개국에 추가 관세 10%를 부과하겠다고 압박했다. 이에 EU 집행부도 통상위협대응조치(ACI)로 맞대응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미국·유럽 간에 맺었던 대서양동맹이 깨지는 위기에 봉착했다. 다보스포럼에 참석한 트럼프가 무력을 사용해 합병하지 않겠으며, 추가 관세부과도 철회하겠다고 한발 물러서자, 미국과 나토국가 간 정면충돌 상황은 면했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유럽 각국의 불신감은 고조되고 있다.과거 나토국가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관련 바이든 정부와 한목소리를 냈는데,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휴전 방식을 놓고 미국과 갈등을 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푸틴 정부에 유리한 방식을 검토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나토국가에 국방비 인상을 요구해 왔으며 NSS에서 “유럽 문명이 소멸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폄훼했다. 트럼프 정부와 유럽 국가 간 갈등의 골은 이제 더 이상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거침없는 트럼프 정부의 배경트럼프 정부가 그린란드에 탐욕을 부리는 이유가 있다. 첫째, 그린란드에 매장된 약 3610만톤(t)의 희토류를 확보하기 위함이다. 트럼프가 미·중 무역전쟁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중국의 희토류 공급망에서 서둘러 탈피해야 한다. 둘째, 미국은 중국·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골든 돔이란 새로운 미사일방어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린란드가 골든 돔에 꼭 필요한 지정학적 요충지이다. 셋째, 중국은 북극권을 눈여겨보고 있다. 북극권이 녹고 있어 항로 요충지로써 중요성이 주목받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중·러 영향력을 차단하길 원한다. 넷째, 트럼프는 영토 확장에 욕심이 많다. 파나마 운하 환수에도 관심을 보였고, 가자지구에 고급 휴양지를 건설하길 원한다. 지난해 8월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주한미군 기지 소유권을 달라고 했으며, 과거 북한 김정은 위원장에도 “북한 해변에 콘도를 건설할 것”을 권유한 바 있다.현재 트럼프 정부는 그린란드·덴마크와 협상 중이다. 미국은 그린란드에서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협상 가닥을 잡고 있다. 그린란드가 주권 포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의 달인이다. 트럼프는 지난해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를 압박해 희토류 등 광물 개발 협정을 체결했다. 그린란드 문제도 시간은 걸리겠지만, 미국에 유리한 상황으로 타결될 공산이 크다.트럼프 대통령의 그린란드 장악 시도가 향후 주변국과 국제 정세에 미치는 파급 영향을 살펴보도록 하자. 미국·나토 간 동맹관계는 균열이 커질 것이다. 바이든 전 정부는 동맹국과의 협조 관계를 중요시했다. 유럽 국가들도 미국과 함께 대중국 디커플링(탈동조화), 디리스킹(위험 제거)정책에 보조를 맞췄다. 그러나 향후 트럼프 정부와의 원활한 협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트럼프 정부의 대외정책에 실망한 유럽 주요 국가들은 최근 중국과 관계 개선을 시도하고 있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평소 전략적 자율성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미국의 품속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노선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의 핵심 동맹국인 영국의 키어 스타머 총리도 중국을 방문했다. 바이든 정부하에서 미국·유럽의 연합전선으로 봉쇄됐던 중국은 이제 유럽과의 관계 회복으로 탈출구를 확보하게 됐다.유럽 국가들은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군사적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유럽이 미국의 핵우산 정책 속에 놓여 있어, 안보적 측면에서 미국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신뢰감이 떨어져, 유럽 스스로 러시아의 위협에 대비하려는 자강 의지를 높이고 있다. 트럼프의 그린란드 영토에 대한 욕심은 러시아와 중국을 춤추게 만들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그린란드의 매입 가치가 10억달러 정도라면서 미국의 그린란드 영토 확보를 부추기고 있다. 그 이유는 미국의 그린란드 병합을 빌미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표면적으로 그린란드에 대한 트럼프 야욕을 비난하고 있으나, 내심 이를 반기고 있다. 중국이 대만을 무력으로 통일할 명분을 삼을 수 있어서이다. 2027년은 시진핑 주석이 대만을 통일하겠다고 공언한 해이다. 중국은 기회마다 대만해협을 포위하고 있다. 향후 양안 관계는 험악해질 것이다.중남미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확대될 것이다. 올해 트럼프는 쿠바 등 중남미 좌파 국가들을 겨냥한 힘의 외교를 과시할 가능성이 크다. 중남미에서 중국의 대외정책 핵심인 일대일로가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트럼프 정부는 NSS에서 명시한 대로 중국의 영향력에서 미국 앞마당을 지키기 위해 중남미 좌파 정부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일 것이다.이런 상황에서 중동의 화약고까지 터졌다. 트럼프는 이란 정부가 핵 개발 포기 의사를 보이지 않자, 이스라엘과 함께 대대적인 공습을 가하고 있다. 미국은 이란의 핵 보유를 원천적으로 차단함은 물론 신정체제까지 교체하려고 한다. 미국·이란 전쟁이 확대돼 원유 수송 요충지인 호르무즈 해협이 장기적으로 봉쇄될 경우 국제유가는 배럴당 120달러(약 17만8000원) 이상 치솟을 수 있다.미·중 패권 경쟁에는 단기적으로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오는 4월 트럼프 대통령의 방중이 예정돼 있다. 올 하반기에는 시진핑 주석의 미국 답방도 예정돼 있다. 양국 모두 충돌을 원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 집권 하반기부터 중국과의 패권 경쟁이 다시 치열해질 가능성이 크다. 미·중 간 갈등의 핵심은 대만 문제이다. NSS에서도 중국 견제를 강조하고 있다.향후 트럼프 정부는 관세정책을 여전히 활용할 것이다. 서반구에서 힘의 외교를 바탕으로 한 대외정책을 추진하면서 중국은 물론 나토국가들과도 갈등을 빚을 소지가 다분하다. 그린란드 영토주권 문제는 국제적으로 다양한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띄고 있다. 올해 국제 정세는 세계 각지에서 녹록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한양대 국제대학원 글로벌 전략·정보학과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마켓인텔리전스(경쟁정보) ▲경제 안보 ▲국제관계 ▲미래학 등이다. 한국외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Pace 대학 경영학 박사 학위도 취득했다. 주요 이력으로는 ▲대통령 자문 동북아시대위원회 과장 ▲주 보스턴 총영사관 영사 ▲주미국 한국대사관 참사관 등이 있다.

2026.03.0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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