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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은 인터넷을 진압할 수 있을까?[한세희 테크&라이프]

IT 일반

올해 초 불붙은 이란 반정부 시위 진압 과정에서 사망자가 3만명에 이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란 정부는 21일(현지시간) 시위로 인한 사망자가 3117명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얼마 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이란 보건부 고위 당국자의 말을 인용해 사망자가 3만명에 이를 수 있다고 보도했다. 정부 공식 발표와 비공식 추정치 차이가 10배에 이른다. 미국 인권운동 단체 HRANA는 사망자 수를 5137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혼란한 상황에서 정확한 자료 집계를 기대하긴 어렵다. 상황 파악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정보의 단절이다. 반정부 시위가 절정으로 치닫던 8일, 이란 정부는 온 나라의 인터넷 연결을 끊어버렸다. 소요 확대를 막기 위한 조치다. 소셜미디어나 메신저, 인터넷 게시판 등 시위를 조직하거나 목소리를 드러낼 매개체가 막혀 버렸다. 시위대의 외침이 외부에 닿을 수도 없었다. 시위 장면을 담은 이미지도, 잔혹한 진압 장면이 찍힌 영상도, 세계를 향한 시위대의 호소도 밖으로 전해질 수 없었다. 외부에서 내부 상황을 짐작할 데이터도 부족할 수밖에 없다. 외부 세계 접속 차단하는 ‘할랄 인터넷’인터넷이 철저히 차단됨에 따라 심지어 이란 외무부도 한때 인터넷에 접속할 수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은행 전산망이 중단돼 현금인출기가 멈췄고, 관영 뉴스 사이트가 접속 불가 상태가 됐다. 정부가 망 접속을 차단한 상황에서도 문제없이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는 이른바 ‘화이트 심’(White SIM) 카드를 발급받았던 이란 체제 내부자나 기자들도 이번엔 인터넷에 접속하지 못했다. 이는 이례적인 상황이다. 이란의 인터넷은 반정부 시위가 확대되거나 외부와 분쟁이 터지는 등 위기 상황에서 정부가 일반 국민의 인터넷 접속은 차단하면서 행정이나 경제 활동에 필요한 네트워크는 작동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외국 소셜미디어 접속을 막고 내국인의 디지털 행적을 추적할 수 있는 ‘사이버 만리장성’ 안에 자신들만의 인터넷 세상을 만들었듯, 이란 역시 통제 가능한 인터넷인 ‘국가정보네트워트’(NIN, National Information Network)를 구축했다. 이른바 ‘할랄 인터넷’이다. NIN은 지난해 6월 이란 주요 핵 시설 및 군사기지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촉발된 ‘12일 전쟁’ 중에도 이상 없이 작동했다. 하지만 이번엔 격화되는 시위를 막기 위해 인터넷을 통제하는 과정에서 NIN까지 접속을 차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이란 신정 체제가 이번 소요 사태를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강경한 진압으로 사태가 진정돼 감에 따라 이란 정부는 NIN 인터넷 접속 폭도 조금씩 확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란에서 많이 쓰이는 차량 호출 앱 ‘스냅!’이나 은행 송금 기능 등이 가동되고 있고, 지방 정부 사이트도 온라인 상태로 돌아왔다. 물론, 외국에서는 아직 접속할 수 없다. 시위 조직이나 내부 정보의 외부 유출은 막으면서 국가 내부 시스템은 돌아가게 한다는 NIN의 정책 목적은 성공적으로 달성한 셈이다. 이란에 자유 인터넷 가능할까?정부의 정보 통제에 맞서 시민의 저항도 계속된다. 차단을 우회해 서로 소통하거나, 외국에 있는 가족, 친지, 지원 단체 등에 소식을 전하려는 시도가 다양한 형태로 이뤄지고 있다. 스페이스X의 스타링크 위성 통신 서비스가 대표적이다. 스페이스X는 이란 시위 기간 중 이란에서 무료로 위성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개방했다. 앞서 2022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재임 시절에도 이란 제재에 대한 예외를 인정받아 비영리단체들이 스타링크 수신기를 이란 내 믿을만한 인권 활동가나 언론인에게 몰래 반입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차츰 이란에 스타링크 수신기 암시장이 형성되고 수천대의 장비가 이란에 암암리에 퍼져 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란 시위와 관련, 외부에 전해진 몇 안 되는 이미지나 영상은 이들 스타링크 네트워크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이란 국영방송 위성채널 신호를 해킹. 팔레비 왕정 마지막 왕세자 레자 발레비가 “이란 군은 국민에게 총을 겨누지 말라”고 호소하는 영상을 송출한 사건도 이란 내 스타링크 사용자에 의해 외부에 알려졌다. 트위터 창업자 잭 도시가 선보인 탈중앙화 메신저 ‘비트챗’(Bitchat)도 혼란에 빠진 이란에서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는 외신 보도도 나왔다. 비트챗은 블루투스를 사용하는 각 스마트폰이 노드가 되어 와이파이나 통신 신호가 없는 환경에서도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게 한다. 정부의 인터넷 차단에 맞서 사람들의 풀뿌리 스마트폰 네트워크를 시도하는 셈이다. 정부가 허가한 행정용 이메일 네트워크를 편법으로 활용해 외부 세계에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텍스트 기반의 단순한 브라우저로 차단을 회피하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독재자는 인터넷을 진압하고 싶다이란의 이번 대규모 반정부 시위 사태가 어떤 결말을 맺을지 아직 판단하긴 이르다. 다만, 정부의 초강경 진압에 시위가 잠잠해지는 상황으로 보인다. 이란 체제에 대한 저항처럼 이란 인터넷에 대한 저항도 쉽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이란 정부가 스타링크 사용자에 대한 단속을 벌이고 있어 시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정부가 4만대의 스타링크 수신기를 정지시켰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군사 작전 수준의 전파 방해로 스타링크 사용을 방해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현재 이란은 정부가 허가한 범위 안에서만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앞으로 아예 정부가 허가한 소수에게만 해외 인터넷 접속을 허용하는 정책을 영구적으로 시행하는 방안을 추진하리란 관측도 나온다.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확산, 시민들의 결집은 권위주의 체제를 뒤엎는 결과를 낳기도 하지만, 강력한 독재 정권은 인터넷마저 장악해 도리어 통제의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인터넷을 통제하려는 세계 곳곳의 권위주의 정권들은 이란이 시위대뿐 아니라 인터넷까지 진압할 수 있을지 주목해 보고 있을 터다.

2026.02.02 06:00

4분 소요
완도, 지리적 끝단에서 치유의 세계 관문으로[김현아의 시티라이프]

전문가 칼럼

지난 여정의 통영이 ‘예술’이라는 상징 자본을 통해 도시의 쇠퇴를 지연시키며 관광객의 소음으로 생존하는 도시라면, 완도는 철저히 ‘실물 자본’의 생산과 유통으로 지탱되는 거대한 해상 공장이다. 265개의 섬이 징검다리처럼 놓인 이 도시는 대한민국 전복의 70% 이상, 해조류의 절반 이상을 길러내는 명실상부한 ‘수산 경제의 최전방’이다. 완도는 수산업의 힘을 바탕으로 독보적인 자본의 집적지로 성장했다. 하지만 오늘날 완도의 거리는 그 탄탄한 경제적 실체와는 어울리지 않는 정적에 잠겨 있다. 한때 완도 전역의 청춘들이 맞선을 보며 미래를 약속하던 ‘나포리 다방’은 이제 굳게 닫혀 있다. 도시 곳곳에서는 발견할 수 있는 ‘500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니던 개’의 동상 역시 과거의 영광임을 알 수 있다. 개의 입에 물린 500원은 1973년 처음 발행되어 80년대 초반까지 유통되었던 ‘푸른색 500원권 지폐’다. 오늘날의 500원은 자판기 앞에서나 찾는 가벼운 동전이지만, 짜장면 한 그릇이 100원이던 시절 500원 지폐 한 장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이 지폐의 유통 시기는 완도가 ‘검은 황금’이라 불리던 김 양식으로 대한민국 수산 경제의 정점을 찍었던 황금기와 정확히 궤를 같이한다. 동상 속의 푸른 지폐는 바다가 육지의 부(富)를 압도했던 완도만의 자부심을 박제하고 있는 셈이다.그 자부심을 육지로 실어 나르기 위해 건설된 9개의 다리는 역설적이게도 완도의 부를 외부로 유출하는 거대한 빨대가 됐다. 과거 완도가 누렸던 독보적인 지경학적 풍요의 관성은 도시 구석구석에 화석처럼 남아 있으나, 정작 그 자산이 순환되어야 할 거리는 너무나 고요했다.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한 시내 거리의 정돈됨에 무심코 감탄을 내뱉자 나를 안내하던 현지인은 씁쓸한 미소와 함께 뼈아픈 한마디를 던졌다. “사람이 없어서 깨끗한 겁니다.” 그 말 끝에 묻어난 서늘한 두려움은 단순히 인구 감소라는 통계 수치를 넘어 도시의 신진대사가 멈춰가고 있다는 냉혹한 징후였다. 활기찬 산업적 소음이 사라진 자리를 메운 것은 ‘청결한 정적’뿐이었다.끝단의 의식과 잃어버린 ‘청해진’의 유전자1968년 14.6만명에 달했던 인구가 현재 4만명대로 급감했음에도 완도의 경제적 기초 체력만큼은 여전히 건재하다. 수산 지표들은 완도가 여전히 ‘부유한 섬’임을 증명한다. 문제는 이 수산 대국이 일궈낸 부가 더 이상 지역의 ‘정주 인구’로 치환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완도는 천혜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리적 끝단이라는 물리적 한계와 육지 중심의 개발 패러다임에 갇혀 있다. 다리는 놓였으되 사람을 불러들이는 통로가 아니라 자본을 육지의 거대 도시로 실어 나르는 일방통행의 도관이 됐다. 과거 장보고기념관에서 확인한 9세기의 완도는 결코 끝단이 아니었다. 당나라와 일본, 심지어 아랍 상인들까지 드나들던 동북아의 글로벌 플랫폼이자 관문이었다. 하지만 천 년이 지난 오늘날의 완도는 수산물을 ‘따서 보내는’ 1차 산업의 기지 역할에 머물러 있다. 사람들이 찾아와 ‘머물고 소비하는’ 3차 산업의 매력을 공간화하지 못하는 한, 완도의 다리는 소멸을 가속화하는 역설의 장치로 남을 뿐이다. 완도가 소멸의 파고를 넘기 위해 승부수로 던진 ‘해양치유’는 이 지점에서 매우 시의적절한 선택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마주한 해양치유센터의 풍경은 기대보다 아쉬움이 컸다. 명사십리 해변에 자리 잡은 센터 자체의 외형은 신산업의 거점이라기에 다소 소박했고 무엇보다 센터를 이용할 방문객들이 머물 번듯한 숙소나 상업 시설이 턱없이 부족했다. 외부에 적극적으로 알리기엔 민망할 정도의 빈약한 정주 인프라는 완도가 여전히 ‘휴양에서 ‘치유’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완도의 벤치마킹 모델인 프랑스의 로스코프(Roscoff)를 보자. 인구 3300명의 이 작은 마을은 매년 인구의 160배가 넘는 55만명의 방문객을 불러모은다. 그중 40% 이상이 외국인이다. 그들은 단순히 바다를 보러 오지 않는다. 의사의 처방에 따른 정교한 해상 치료를 받기 위해 고가의 비용을 지불하고 장기 체류한다. 바다를 ‘관광지’가 아닌 ‘의료적 플랫폼’으로 재정의한 결과다. 일본 시마네현의 아마정(海士町)역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구 2300명의 이 섬은 CAS(급속 냉동)라는 기술을 입혀 수산물의 가치를 극대화했고 그 경제적 자립을 바탕으로 교육과 정주 환경을 개선했다. 그 결과 인구의 20%가 넘는 청년 이주민을 확보했다. 그들에게 바다는 고립된 섬이 아니라, 기술과 콘텐츠가 결합된 ‘기회의 영토’였다.다시, 관문을 꿈꾸다해양치유센터 2층 발코니에서 명사십리의 광활한 바다를 바라보며 이 도시의 가능성과 한계의 기묘한 동거를 확인한다. 완도의 해조류는 세계 최상급이며, 바다의 기운은 로스코프 못지않게 강력하다. 하지만 이를 담아내는 그릇(도시 계획과 인프라)은 여전히 낡고 투박하다. 완도가 지방소멸의 절벽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끝단’의 의식을 버리고 다시 ‘관문’의 역할을 회복해야 한다. 완도의 전복과 해조류가 식탁 위(1차 산업)를 넘어 전 세계인이 찾아오는 처방전 위(3차 헬스케어 산업)로 올라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단순한 센터 건립을 넘어, 글로벌 기준에 부합하는 숙박 시설과 의료 연계 시스템, 그리고 무엇보다 청년들이 돌아와 일할 수 있는 ‘수산 테크’ 생태계가 공간적으로 배치되어야 한다. 장보고의 배가 드나들던 천 년 전의 바다와 명사십리의 파도는 변하지 않았다. 변해야 하는 것은 바다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그 자산을 다루는 도시의 전략이다. 완도를 ‘치유의 글로벌 게이트웨이’로 재설계하는 과감한 공간 정치가 필요하다.

2026.02.01 10:00

4분 소요
계열분리의 두 얼굴...가치 제고와 신뢰 훼손 [요즘 대기업 이별공식]③

산업 일반

“회사를 쪼개면 주주가치가 올라간다”는 것은 더 이상 시장의 상식이 아니다. 오히려 현시점의 분위기는 정반대에 가깝다. ▲분할 ▲분사 ▲자회사 상장 뉴스가 나오면 투자자들은 축하보다 먼저 묻는다. “이번에는 모회사 주주가 무엇을 받는가” “성장 과실은 어디로 가는가” “또 한 번의 디스카운트(증시 저평가)가 시작되는가”밸류업 화두 달라진 계열분리 의미기업 가치 향상(밸류업)이 화두가 된 시장에서 계열분리는 더 이상 ‘성장 전략’이라는 포장만으로 통과되지 않는다. 계열분리는 기업이 가치 제고를 말할수록 더 높은 수준의 책임을 지게 되는 의사결정이 됐다. 코스피 5000시대가 된 지금, 기업은 ‘구조의 공정성’까지 요구받는 것이다. 이 글을 지금 쓰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회계 전문가의 관점에서 보면 논쟁의 핵심은 찬반이 아니라 ▲구조 ▲현금흐름 ▲배분이라는 세 단어로 정리된다. 그리고 이 세 가지가 설계되지 않은 분할은 대부분 ‘가치 제고’가 아니라 ‘가치 이전’으로 해석된다.미국 시가총액 상위 기업을 보면 ‘여러 사업을 한다=쪼개야 한다’라는 결론으로 가지 않는다. 아마존은 리테일과 클라우드 서비스(AWS)라는 이질적 사업을 한 지붕 아래에 둔다. 회사는 현금 창출력이 큰 AWS로 ▲물류 ▲콘텐츠 ▲디바이스 같은 장기투자를 뒷받침한다. 구글 모회사 알파벳의 경우는 구글 검색광고가 ▲유튜브 ▲클라우드 등의 자본이 된다. 메타 역시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왓츠앱을 통합 생태계 안에서 묶어 네트워크 효과를 극대화해 왔다.분사 요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미국 기업들은 통합이 낳는 시너지가 여전히 유효한지 분사가 그 시너지를 무너뜨릴 만큼 가치가 있는지부터 따진다. 자발적 계열분리는 ‘유행’이 아니라 ‘조건’의 문제다. 시너지가 꺾이거나 규제 리스크가 경영의 본질을 갉아먹을 때 그때야 분사를 검토한다.한국의 사례는 최근 몇 년간 다양하게 전개됐다. ▲LG화학의 배터리 사업 물적 분할과 LG에너지솔루션 상장 ▲SK텔레콤의 인적 분할로 탄생한 SK스퀘어 ▲카카오의 여러 사업부 분사 및 개별 상장 ▲네이버의 복수 사업 신규 독립 등은 모두 ‘성장 사업의 독립’이라는 공통된 방향을 갖는다. 다만 시장의 평가는 분할 방식과 이후의 자본 정책에 따라 크게 갈렸다.기업 입장에서는 논리가 분명하다. 첫째 사업 집중과 의사결정 속도를 높인다. 둘째 ‘순수 플레이’로 시장의 재평가를 받아 숨은 가치를 드러낸다. 셋째 기업공개(IPO)나 전략적 투자 유치로 대규모 자본을 조달해 성장 속도를 끌어올린다. ▲배터리 ▲인공지능(AI) ▲플랫폼처럼 선제 투자 규모가 곧 시장 지위로 연결되는 산업에서 이런 분리 방식의 자본조달은 곧 전략이었다.기업과 다른 주주들의 관점주주 관점에서 계열분리는 ‘방식’이 곧 ‘결과’가 된다. 인적 분할은 기존 주주에게 선택권을 준다. 분할된 두 회사의 주식을 모두 받기 때문에 성장주와 안정주를 스스로 조합할 수 있다. 반면 물적 분할 후 자회사 상장은 갈등을 촉발하기 쉽다. 모회사가 100% 지분을 보유한 채 자회사를 상장해 외부 주주를 받으면 기존 주주는 성장 사업의 ‘직접’ 지분을 받지 못한다.그 결과 모회사가 성장 프리미엄을 잃고 디스카운트되면 기업이 말하는 ‘가치 제고’는 주주에게 ‘가치 이전’으로 읽힌다. 이 구조에서 논쟁이 반복되는 이유는 감정이 아니라 인센티브의 불일치다. 회계 전문가로서 강조하고 싶은 지점은 명확하다. 계열분리의 본질은 ‘쪼개느냐’가 아니라 재무적 실체를 어떻게 보여주고 그 성과를 누구에게 어떻게 배분하느냐의 설계다.시장이 분할에 반응하는 핵심 질문은 세 가지다. 첫째 분할이 기업의 현금흐름을 실제로 개선하는가. 둘째 투자 및 자본 정책이 장기적으로 주주 수익률을 높이는 방향인가. 셋째 ▲지배구조 ▲내부거래 ▲이해 상충 관리가 신뢰를 강화하는가다. 계열분리 논쟁을 회계의 언어로 번역하면 결론은 단순해진다. 분할 자체는 가치가 아니다. 분할 이후의 자본 배분이 가치의 운명을 결정한다.미국 빅테크가 통합을 유지하는 이유는 단지 규모가 커서가 아니다. 통합된 구조 자체가 강력한 현금흐름의 엔진이며, 그 엔진을 다시 성장에 재투자하는 내부 자본시장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이 분할을 선택하는 이유도 이해된다. 성장 산업의 투자 사이클이 짧고 자본시장의 레버리지를 쓰지 않으면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 다만 한국에서 계열분리가 더 큰 논쟁을 만드는 것은 ‘분할’ 자체가 아니라 ‘배분과 신뢰의 설계’가 뒤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결론적으로 계열분리는 선도 산업에서 유력한 전략이지만 만능 해법은 아니다. 기업 관점에서는 집중과 자본조달의 통로를 열어주지만 주주 관점에서는 방식에 따라 기회가 되거나 손실이 된다. 계열분리의 성패는 발표일의 주가가 아니라 분할 이후 2~3년 간의 현금흐름 궤적과 자본 배분의 일관성, 그리고 이해 상충을 관리하는 거버넌스에서 판가름 난다.“쪼개서 상장한다”가 아니라 “▲어떤 현금흐름을 만들고 ▲그 성과를 어떻게 나누며 ▲신뢰를 어떻게 축적할 것인가”를 답할 때 계열분리는 기업가치의 도구가 된다. 그렇지 않다면 분할은 또 하나의 디스카운트를 낳는 방아쇠가 될 뿐이다.

2026.02.01 08:00

4분 소요
5000, 1000…K증시 숫자를 경계하며 [EDITOR’S LETTER]

전문가 칼럼

“한국은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요 원인을 해결했다. 주가는 타당한 이유로 오르고 있으며, 한국 시장은 여전히 저평가돼 있다.” 글로벌 자산운용사 페더레이티드 헤르메스“반도체를 비롯한 기술 업종을 중심으로 강한 이익 상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번 상승장은 단순한 유동성 랠리가 아니라 이익 기반의 상승장이다.”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 최근 주식시장에서 코스피가 1980년 출범 이후 46년 만에 ‘꿈의 고지’인 5000선을 돌파하자 해외에서 나온 반응들입니다. 하나같이 ‘K-증시가 달라졌다’며 한국 시장을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코스피는 놀라운 상승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작년 10월 사상 처음으로 4000선을 넘은 이후 가파르게 오르더니 1월 22일 5,019.54를 찍었고 닷새 후에는 최초로 종가 기준 5000선을 돌파하며 연일 새 역사를 쓰고 있습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오명으로 외면받던 K-증시가 반도체와 인공지능(AI) 호황, 기관과 외국인의 순매수, 정부의 상법 개정 등에 힘입어 전 세계 주요 증시 가운데 가장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는 시장으로 부상했습니다.코스닥도 1월 26일 4년여 만에 처음으로 1000선을 넘으며 ‘천스닥’이 됐습니다. 코스피 대비 상대적으로 덜 오른 코스닥으로 투자자들의 시선이 옮겨간 데다, 원·달러 환율 하락 등 투자 환경 개선에 대한 기대가 겹치며 자금이 빠르게 유입되고 있습니다.코스피에 이어 코스닥까지 불장을 이루면서 K-증시가 이제야 제대로 평가받고 있다는 게 중론입니다. 정부는 이 열기가 식지 않고 지속될 수 있도록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골자로 한 3차 상법 개정안을 비롯해 시가 기준으로 부과되는 상속·증여세를 절세하기 위한 상장사의 주가 누르기 방지법 등 자본시장의 기초 체력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 개혁을 빠르게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증시가 워낙 뜨겁다 보니 여론도 대체로 찬성하는 분위기인데, 기업들은 속을 끓이고 있습니다. 3차 상법 개정안은 자사주 취득 후 일정 기간 내 소각을 원칙으로 하며 인적 분할 시 자사주에 신주를 배정하는 ‘자사주의 마법’을 금지하는 내용인데, 이러면 경영권 방어 수단이 사라져 해외 투기 자본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 있어 경제계는 반대하고 있습니다. 다만 무조건적인 반대보다는 합병 등 경영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취득한 자사주는 소각 대상에서 예외로 하는 등 보완책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 1차 상법 개정으로 이사의 책임이 확대되면서 기업 경영의 사법 리스크가 커진 만큼 이를 완화할 수 있는 배임죄 개선에 속도를 내달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한국경제인협회·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 8단체는 최근 “배임죄는 처벌 대상과 범죄 구성요건이 불분명해 경영진의 합리적 경영 판단까지 처벌할 위험이 크며, 기업인의 신산업 진출이나 과감한 투자 결정을 단념시키는 등 기업가 정신을 저해해 왔다”며 배임죄 개선을 호소했습니다.K-증시의 진짜 주인공은 기업입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낳았던 제도를 고치는 일만큼이나 기업이 투자하고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그래야 ‘코스피 5000’, ‘코스닥 1000’이라는 기록적인 숫자가 반짝 랠리가 아닌 구조적 도약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숫자에 취해 들었던 축배는 내려놓고, 기업의 체력과 경쟁력을 세세히 챙길 때입니다.

2026.02.01 06:00

3분 소요
계획보다 적응, 예측보다 대응[허태윤의 브랜드 스토리]

전문가 칼럼

2026년, 마케터들은 달갑지 않은 고민에 빠져 있다. ▲밀라노-코르티나 동계올림픽(2월) ▲FIFA 월드컵(6월) ▲전국동시지방선거(6월) ▲나고야-아이치 아시안게임(9월) 등 한 해에 4개의 메가 이벤트가 몰린다. 빅 이벤트는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 기회다. 그러나 함정이 있다. 모든 브랜드가 동시에 목소리를 높이면서 노이즈 레벨이 치솟는다. 지난 2018년, 올해와 같이 4대 빅 이벤트가 정확히 겹쳤던 해, 막대한 스폰서십 비용을 지불한 브랜드들 중 상당수가 '존재감 없음'으로 끝났다. 2026년은 더 복잡하다. 경기 불확실성은 높고, 예측은 어렵다. 그러나 반전의 기회가 있다. 인공지능(AI)과 OTT 플랫폼의 성숙으로 대응 능력이 진화했기 때문이다. 생성형 AI는 콘텐츠 제작 속도를 높였고, OTT·CTV(커넥티드TV)는 타겟팅 정밀도를 높였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전략이다.리얼타임 컨텍스트 마케팅, 순간을 잡는 자가 시장을 잡는다2013년 슈퍼볼 결승전, 34분간 정전이 발생했다. 오레오는 15분 만에 ‘You can still dunk in the dark’(당신은 어둠 속에서도 덩크할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트위터에 올렸고 1만5000건 이상의 리트윗과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리얼타임 마케팅의 전설이 탄생한 순간이다. 2026년의 게임 체인저는 AI다. 과거 '15분 만에 제작'이 화제였다면, 이제는 '5분 안에 10개 버전 제작'이 가능하다. 노이즈 속에서 돋보이려면 속도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이벤트 기간 동안 24시간 애자일 팀 구성 ▲AI 소셜 리스닝 실시간 추적 ▲현장 팀장 권한 위임이 필요하다.하이퍼-로컬 타겟팅, 정밀한 타겟이 노이즈를 뚫는다모두가 동시에 광고를 쏟아내면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묻힌다. 해법은? 정확한 사람에게만 말을 거는 것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지역별 타겟팅이 226개 지자체마다 다른 광고를 만들라는 뜻은 아니다. 하고 싶은 말(메시지)은 하나로 통일하되, 말하는 방식을 지역마다 다르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같은 올림픽 광고라도 강원도에서는 "우리 지역 올림픽"이라는 자부심을, 서울에서는 "세계인의 축제"라는 참여감을 강조하는 식이다. 기술은 이미 준비됐다. 넷플릭스는 2022년부터 광고를 받기 시작했고, 유튜브는 TV로 보는 사람들에게 지역·나이·관심사에 맞춘 광고를 보여준다. 티빙, 웨이브 같은 국내 플랫폼도 비슷한 서비스를 확대하는 중이다.AI를 쓰면 하나의 광고를 지역별로 10-20개 버전으로 자동 변환할 수 있다. 여기에 각 지역에서 영향력 있는 소규모 인플루언서를 결합하면 진정성까지 확보된다. 노이즈 속에서 살아남는 법은 '더 크게 외치기'가 아니라 '정확한 사람 귀에 속삭이기'다.참여형 브랜드 경험, 관객을 선수로 만들어라노이즈가 높은 환경에서 일방적 메시지는 무력하다. 소비자를 능동적 참여자로 만들어야 한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을 보자. 나이키는 공식 스폰서도 아니었지만, 팬들이 자신의 축구 영상에 #JustDoIt를 달아 올리도록 유도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축구 순간이 나이키 캠페인의 일부가 됐다. 결과는? 월드컵 기간 나이키의 브랜드 언급량이 공식 스폰서 아디다스를 30% 초과했다. 참여는 기억을 만들고, 기억은 충성도를 만든다. 광고를 100번 보는 것보다 한 번 참여하는 게 더 강력하다.경기 결과 예측 게임, 응원 미션 같은 게이미피케이션을 설계하라. 금전 보상이 아니어도 된다. ▲리더보드 1위 ▲특별 배지 같은 사회적 보상도 효과적이다. 팬들의 응원 콘텐츠를 모아 재확산하는 허브를 만들고, 경기 직후 즉시 관련 상품을 살 수 있게 연결하라.퍼포먼스와 진정성의 균형, 숫자와 감성 둘 다 잡아라빅이벤트 마케팅에는 딜레마가 있다. 경영진은 "광고비 쓴 만큼 매출이 올랐느냐"고 따진다. 그러나 소비자는 "돈 냄새 나는 광고"에 냉소적이다. 클릭 수와 구매 전환율만 쫓으면 당장 성과는 나올지 몰라도, 브랜드는 텅 빈다. 반대로 "브랜드 가치가 올랐다"는 추상적인 말만 하면 경영진을 설득하기 어렵다. 단기와 장기를 함께 측정하는 체계를 만들어라. 즉각적 성과(클릭·구매)와 브랜드 건강도(인지도·선호도)를 동시에 추적한다. 이벤트와 연관된 브랜드 서사를 만들어라. BBQ의 ‘치킨연금’은 아이디어 하나로 이 둘을 모두 잡았다.노이즈 속 생존 사례, 즉흥과 계획의 균형2024년 파리 올림픽, 삼성은 메달리스트에게 갤럭시 폰을 제공하고 시상대 셀카를 유도했다. ‘빅토리 셀피’는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시도된 후원사 제품의 시상대 등장이었다. 사전에 준비된 치밀한 기획이지만 선수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자연스러운 장면 연출했지만 현장에서의 창의적 적응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전 세계 메달리스트 셀카가 SNS 확산되며 '승리의 순간 = 갤럭시'로 각인 됐다 둘 다 '의미 있는 순간'에 브랜드를 연결한 것이다.2022년 베이징, BBQ는 공식 스폰서가 아니었다. 윤홍근 회장이 빙상연맹 회장 이라는 특수 관계를 활용해 즉흥적으로 '치킨연금' 아이디어를 냈다. 금메달리스트가 나오자 화제 폭발. 특수관계 논란은 있었지만 창의성으로 전년대비 매출 40%%가 급증했다.2026년은 2018년보다 유리하다. 첫째는 속도다. AI로 리얼타임 대응이 일상화됐다. 둘째는 정밀도. OTT·CTV로 하이퍼-로컬 타겟팅이 현실화됐다. 셋째는 효율이다. AI가 제작·타겟팅·측정을 자동화한다. 그러나 역설이 있다. 기술이 좋아졌다고 쉬워진 게 아니다. 모두가 같은 무기를 가지면, 전략과 창의성이 승부를 가른다.2026년 마케팅 환경은 이중적이다. 4개 빅이벤트는 기회지만 노이즈는 최고다. 불확실성은 높지만 대응 능력도 진화했다. 핵심은 창의적 순발력이다.. 오레오, BBQ 그리고 삼성의 성공비결은 창의적 아이디어다. 아울러 ▲‘의미 있는 순간'에 브랜드를 연결하는 순발력 ▲리얼타임으로 반응하되 창의적으로 ▲지역을 타겟하되 정밀하게 ▲소비자를 참여시키되 기억에 남게 ▲성과를 측정하되 진정성 있게. 2026년의 승자는 가장 큰 예산을 가진 브랜드가 아니다. 순발력있게 창의적으로 적응하는 브랜드가 될 것이다.

2026.01.26 10:00

4분 소요
2026 거브테크 시대 개막, AI가 바꾸는 정책 참여 경험[스페셜리스트 뷰]

전문가 칼럼

해마다 1월이 되면 사람들은 다양한 정책 정보를 마주한다. ▲세금 공제 ▲지역 지원금 ▲보험료 반환 ▲사회보장제도 등 올해 달라지는 제도 목록이 SNS 카드뉴스와 검색 콘텐츠를 가득 채운다. 그러나 정보 생산량이 높아진 것 대비 실제 정책 참여 증가 비율은 정체돼 있다.대중들의 정책 참여를 막는 큰 요인 중 하나는 정보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원활치 않기 때문이다. 문서를 여러 차례 읽어보더라도 소득·가구·부양·거주 형태 등 조건들이 엮여 있어, 본인이 이 정책의 수혜를 받을 수 있는지 스스로 판단하기가 어렵다. 또한 많은 시간을 들여 정보를 확인하고 정책 참여를 시도했다가 조건 미비로 실패하는 경험이 쌓이게 되면 자연스레 참여 의지가 약해지기 마련이다. 현대의 개인은 빠르게 변한다. 정규직과 프리랜서, 결혼·이사·부채 상환 등 여러 요인들에 의해 생활 구조가 계속 달라진다. 똑같은 자영업자라 하더라도 매출 구조·업종별 규제·임대 계약 조건의 차이가 있고 주거 환경이나 부양 여부가 1년 사이 바뀌기도 한다. 결국 동일한 집단에 속해도 개인의 상황에 따라 정책 적용 여부는 크게 갈린다. 이 때, 개개인의 세부 조건을 반영해 정밀하게 계산하고 정책의 수혜가 대중에게 온전히 닿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바로 거브테크(GovTech)다. 거브테크는 정부(Government)와 기술(Technology)의 합성어로, 기술·데이터·혁신 생태계와 협업하여 효율적이고 투명한 공공서비스 체계를 구축하는 최신 정부 혁신 패러다임이다. 거브테크를 구성하는 핵심 기술 인프라거브테크는 크게 네 가지 기술 축으로 움직이고 있다. 첫번째는 인공지능(AI/ML) 기반 기술이다. ▲방대한 정책 문서를 자동 요약하는 기술 ▲반복 질의에 대한 거대언어모델(LLM) 기반 응답 시스템 ▲복지 및 정책을 정밀 매칭하는 기능 ▲이상거래를 감지해 부정수급을 방지하는 탐지 기술 ▲예산 집행·도시 혼잡·재난 상황 등을 사전에 분석하는 예측 행정 기술이 포함된다. 두번째는 클라우드 및 공공데이터 인프라(Cloud & Data Infrastructure)다. ▲정부 데이터센터의 클라우드 이전 ▲공공데이터를 API 형태로 개방하는 구조 ▲개인 데이터 주권을 강화하는 MyData 기반 플랫폼 등이 해당된다. 세번째 기술은 사이버보안 및 디지털 신원(Security & Digital Identity)이다. ▲제로트러스트 기반의 정부망 보안 체계 ▲블록체인 기반 전자문서·전자서명 기술 ▲디지털 신원(Digital ID·DID)을 도입하는 흐름이 확산되고 있으며 ▲국내 행정전자서명이 대표적인 사례다.마지막은 데이터 거버넌스 및 상호운용성(Data Governance & Interoperability)다. 해당 분야에는 ▲기관 간 데이터를 연계하기 위한 표준 프레임워크 ▲메타데이터·품질관리 체계 ▲정책 결정을 지원하는 데이터 레이크 등이 있다.빠르게 성장하는 글로벌 거브테크 산업과 한국 시장 환경글로벌 거브테크 산업은 대규모 자본을 기반으로 급성장 중이다. 기업가치 10억 달러(한화 약 1조 4769억원)를 기준으로 하는 유니콘 기업만 보더라도 그 흐름은 명확하다. 미국의 정부용 데이터 분석 및 인공지능 플랫폼 ‘팔란티어’는 최근 기업가치가 약 4240억 달러(한화 약 626조 2056억원)에 달했으며, 공공기관 인사·컴플라이언스 솔루션을 제공하는 ‘네오고브’는 약 30억 달러(한화 약 4조 4307억원, 국방·정부기술 플랫폼을 구축하는 ‘안두릴’은 약 305억 달러(한화 약 45조 454억원)로 추정된다. 공공 행정의 디지털 전환이 거대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물론 하나의 산업 분야로 형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거브테크는 아직 시작 단계이긴 하지만, 발전을 위한 기본 조건을 이미 상당 부분 확보한 상태다. 모바일 본인인증 보급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며, 전자문서 처리와 디지털 행정 경험에 대한 국민 수용성도 높다. 여기에 ▲금융 서비스 ▲각종 보조금 신청 ▲연말정산 등 누적된 온라인 기반 행정 경험은 거브테크 서비스를 실생활에 안착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우리나라의 공공 조달·행정 부문이 경제 규모 대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2025년 기준 미국의 GDP는 30.34조 달러로 한국(GDP 1.95조 달러, 약 2780조 원) 대비 약 16배 규모지만, 같은 해 미국 연방정부 조달시장은 약 7000억 달러(약 980조 원)로 한국(약 1600억 달러, 약 225조 원) 대비 약 4배 수준이다. 이는 한국의 거브테크 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구조적 기반이 잘 마련돼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책 수요와 행정 구조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정부는 디지털 행정 고도화를 위한 대규모 구조 개편을 진행 중이다. 행정안전부는 2026년 예산 6조6665억원 중 AI 민주정부 및 정보화 분야에 8649억원을 편성하고, 기존 디지털정부혁신실을 ‘인공지능정부실’로 개편했다. 조직을 정책국·서비스국·기반국으로 재편한 것은 AI 기반 행정을 단일 사업이 아니라 국가 행정의 기본 인프라로 삼겠다는 방향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정부는 그동안 민간 기술 생태계와의 협업을 통해 실제 행정 적용 가능성을 검증해왔다. 그중 하나는 디지털플랫폼정부위원회가 2023~2024년 운영한 ‘국민체감 선도프로젝트’다. 개인·기업 대상 6개 과제를 선정해 민간 기업과 공동 개발한 사례로, 청년 정책 맞춤형 추천, 마음건강 데이터 분석 기반 서비스, AI 기반 공공입찰 추천 모델 등이 시범 구현돼 공공 데이터가 민간 기술과 결합해 국민 체감형 서비스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당시 웰로도 개인·기업 대상 과제의 주관·참여기업으로서 정책 추천 및 입찰 정보 분석 기술을 실증한 바 있다. 정책을 실제 경험으로 연결하는 웰로의 혁신 기술정책 데이터는 그 규모가 방대할 뿐만 아니라 기관별 형식도 상이해 공공기관의 단독 처리·표준화·활용에 한계가 있다. 이 때문에, 정책 정보를 개인·기업·기관 단위에서 실제 활용 가능한 형태로 전환하려면 웰로와 같은 전문 거브테크 기업들의 협업 지원이 필수다. 이런 상황속에서 웰로는 행정기관과 지방자치단체에서 발행되는 정책 정보를 수집·정제하고 한글 문서·웹 콘텐츠 등 방대한 비정형 데이터를 자연어 처리 기반으로 구조화해 사용자에게 맞춤 제공한다. 가족 구성·거주 지역·소득 등의 개인별 메타데이터를 반영해 정책 대상자와 혜택을 정밀하게 연결함으로써 이용자에게 필요한 정책을 자동 제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혁신적인 편의성 덕분에 웰로는 2025년 누적 이용자 수 523만명을 달성했다.스타트업 기업 ‘코딧’은 경우 공공이 필요로 하는 정책 정보를 자동으로 리포팅 해주는 AI 에이전트를 고도화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대선 정책 모니터링 플랫폼’, ‘APEC 2025 정책 모니터링 플랫폼’ 등을 연달아 출시해 관심을 끌었다. 해외에서는 ‘유나 솔루션즈’가 유명하다. 유나 솔루션즈는 공공부문의 핵심 행정 기능 및 재무 운영을 지원하는 클라우드 솔루션 기업이다. 북미 전역의 3400개 이상 공공기관이 효율적이고 투명한 운영을 위해 유나 솔루션즈와 협업중이다. ‘플럭스’도 주목할만 하다. 플럭스는 보조금 관리 소프트웨어 솔루션을 제공하는 기업으로 서비스 출시 2년 만에 7000여개의 비영리 단체를 고객으로 확보하는 등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다. 미국의 기술지원기관협회 2024년 보고서에 따르면 독립 재단의 34%, 가족 재단의 26%가 플럭스의 기술을 선호한다고 응답했다.지속 가능한 거브테크 산업을 위한 과제국내 거브테크 산업이 지속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술 기업이 행정 영역에서 실효성 있는 시도를 이어가도록 신규 모델을 실증하고 확장할 수 있는 환경이 구축돼야 한다. 또한 디지털 행정의 국제적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 초기 설계 단계부터 호환성과 확장성을 고려한 접근도 필요하다. 이와 더불어, 최근 산업 내 AI 활용이 확산되면서 데이터 보안과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요구도 커지고 있다. 특히, 공공 영역의 경우 보안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데이터가 어떻게 처리되고, 어떠한 책임 구조를 갖추고 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많은 거브테크 기업들은 장기적인 안정성과 신뢰 확보를 위해 투명한 AI 운영 체계를 만드는데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결론적으로 거브테크의 핵심은 정책을 단순한 정보로 전달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개인과 기업의 실제 삶 속에서 체감 가능한 경험으로 전환하는 데 있다. 정책 참여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확실성과 반복적인 실패 경험을 줄이고, 이용자가 자신의 상황에 맞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구조가 마련될 때 비로소 행정은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시민들은 더 이상 정책을 ‘찾아야 하는 정보’로 인식하지 않는다.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먼저 다가오는 서비스, 선택의 부담을 줄여주는 경험을 기대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정책이 제도에 머무르지 않고 경험으로 완성되는 순간, 거브테크는 선택지가 아닌 행정의 기본 전제가 될 것이다. 필자는 2021년 AI 기반 개인 맞춤형 정책 추천 플랫폼 ‘웰로’를 창업한 이후, 기업용 공공사업 관리 SaaS ‘웰로비즈’, 기관용 정책관리 솔루션 ‘웰로링크’를 출시하며 거브테크 전 분야로 확장해왔다. 개인 사용자 523만명, 가입 기업 7000개사를 돌파했으며, 2025년 세계 AI 학회 AAAI에서 대한민국 거브테크 분야 최초 ‘혁신적 인공지능 응용상’을 수상했다. 현재 국무총리실 공공데이터 전략위원회, 행정안전부 정책자문위원회 공공AX분과 의원으로 정책 자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2026.01.26 08:00

7분 소요
젠슨 황의 ‘잃어버린 15년’…우리는 왜 그를 기억하지 못했나[최화준의 스타트업 인사이트]

전문가 칼럼

지난해 10월 엔비디아의 창업자 젠슨 황(Jensen Huang) 최고경영자(CEO)의 방한은 장안의 화젯거리였다. 특히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함께 ‘치맥’을 즐기면서 진행한 이른바 ‘깐부 회동’은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경제 관계자들은 깐부 회동을 첨단 기술 기업들이 협력 의지를 다지는 행사로 받아들였고, 대중은 재벌 총수들이 선술집에서 만나 러브 샷을 하는 낯선 풍경에 열광했다. 필자 역시 이 흥미로운 만남을 지켜보며 한편으로 풀리지 않는 의문이 생겼다. ‘젠슨 황은 왜 그토록 오랜만에 한국을 찾아 대기업 총수들만 만나고 갔을까’ 하는 점이다. 물론 글로벌 빅테크 기업 CEO로서 당연한 행보라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반도체 스타트업으로 시작해 세계적인 기업을 일군 엔비디아의 정체성을 생각하면, 이번 방한 행보에는 까닭 모를 아쉬움이 남는다.젠슨 황의 한국 방문은 무려 15년 만이었다고 한다. 그는 그동안 중국·대만·일본 등 주변 아시아 국가를 수차례 방문했지만, 정작 메모리 반도체 강국인 한국은 찾지 않았다. 지난 몇 년간 글로벌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국내 반도체 스타트업들이 속속 등장했음에도, 엔비디아는 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한국을 추억하는 젠슨 황,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한국 측근들의 전언에 따르면 젠슨 황은 인연을 매우 소중히 여기는 인물이다. 30여 년 전 엔비디아에 투자했던 일본인 담당자의 연락 한 통에 직접 답장을 보내고 일본행을 택했을 정도다. 이번 방한의 계기 중 하나로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과 편지를 주고받았던 인연을 꼽기도 했다.그에게 한국은 각별한 기억이 있는 곳인 듯하다. 그는 방한 기간 중 "엔비디아의 성장은 한국의 PC방 덕분"이라며 과거 용산 전자상가를 누비던 시절을 회고했다. 온라인에서는 2008년 서울대학교에서 강연하던 그의 앳된 모습이 담긴 사진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0년대 초반, 엔비디아에게 한국은 의미 있는 시장이었고 젠슨 황은 이곳에서 꽤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기이한 점은 그 시절의 젠슨 황을 상세히 기억하거나, 개인적인 인연을 이어온 한국인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유명인의 사소한 에피소드까지 발굴하는 언론조차 그의 과거 행적을 찾지 못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용산 상인들의 인터뷰를 싣는 데 그쳤다. 반도체 업계 원로 중 누구도 그와의 인연을 자랑스레 이야기하지 않았다. 작은 인연을 가능성으로 바꾸지 못한 실수 엔비디아는 한국에 진출한 지 오래되었고, 한국은 그들에게 결코 작은 시장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젠슨 황을 기억하지 못할까. 스타트업 생태계에 몸담은 필자는 그 이유를 '과소평가된 작은 인연'에서 찾는다. 경영학에서는 이를 ‘약한 유대’(Weak Tie)라고 부른다.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이 약한 유대는 종종 거대한 기회로 이어진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 자유롭게 교류하는 문화 속에서 창업자들은 새로운 협업 관계 형성에 적극적이다. 스쳐 지나가는 만남이 훗날의 사업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반면, 이미 구축된 가치 사슬 위에서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협업을 결정하는 기존 대기업의 문화는 이와 사뭇 다르다.기성 기업들은 종종 창업자의 잠재력과 스타트업의 파괴력을 과소평가하며 작은 인연을 흘려보낸다. 모바일 운영체제 안드로이드(Android)의 창업자 앤디 루빈과 삼성전자의 일화가 대표적이다. 2004년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삼성전자를 찾은 앤디 루빈과 8명의 개발자는 턱없이 작은 회사 규모를 이유로 문전박대당했다. 그로부터 1년 뒤 안드로이드는 구글에 인수됐다. 이 사건은 대기업이 스타트업을 바라보는 시각의 한계와, 그들이 왜 혁신적인 파트너와 ‘깊은 관계’를 맺기 어려운지를 여실히 보여준다.필자는 15년 전, 젠슨 황 역시 한국에서 비슷한 시선을 경험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세계를 호령하지만 당시 엔비디아는 그저 그래픽 카드나 만드는 부품 제조사로 인식되던 시절이었다. 많은 국내 기업 관계자들이 그를 단순한 하청 업체 대표 정도로 치부했을 가능성이 크다.작은 인연도 소중히 여긴다는 젠슨 황은 과거 한국에서의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 그와 시간을 보내며 약한 유대를 맺었을 수많은 한국인 중 그를 뚜렷하게 기억하는 이는 없다. 15년 만에 돌아온 거물을 정치인과 재계 총수들은 환대했고 대중은 환호했다. 하지만 작은 인연이 불러올 엄청난 잠재력을 아는 필자는 그 화려한 깐부 회동 뒤편에서 씁쓸함을 느낀다.오늘 우리가 무심코 지나친 또 다른 스타트업 창업자가 15년 뒤 제2의 젠슨 황이 되어 돌아올지 모른다. 그때도 우리는 그를 기억하지 못할 것인가. 펜을 놓는 순간까지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남는 건 단순한 기우가 아닐 것이다.

2026.01.25 10:00

3분 소요
‘성공하는 혁신’의 생태계가 절실하다 [EDITOR’S LETTER]

전문가 칼럼

올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5.0%인 119조원, 2028년 9.4%인 233조원, 2030년 14.5%인 367조원…. 이 엄청난 숫자는 새롭게 등장한 신기술을 활용한 신사업의 성장 전망치인데요, 바로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실물자산이나 금융자산을 디지털 토큰 형태로 발행하는 토큰증권 이야기입니다. 고가의 빌딩이나 미술작품, 선박뿐 아니라 콘텐츠 지식재산권(IP) 등의 자산을 소액 단위의 디지털 조각으로 쪼개 여러 사람이 소유하고 임대료나 판매 차익을 나눌 수 있는 기존에 없던 혁신적 금융투자 방식입니다. 정부와 핀테크 업체들은 토큰증권이 자산 분산투자 및 벤처투자 활성화 등 특장점이 많다고 보고 2019년 금융규제 샌드박스 도입과 함께 ‘혁신금융서비스’ 틀에서 제한적으로 운영하며 정식 사업화를 준비했는데, 최근 관련 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제도권 금융으로 편입됐습니다. 이제 정식 사업화에 더욱 속도가 붙을 시점인데, 토큰증권 유통 시장을 운영할 조각투자 장외거래소(유통플랫폼) 사업자 선정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2018년 창업한 뒤 혁신금융서비스로 지정돼 7년간 관련 서비스를 운영해 온 1세대 핀테크 업체 루센트블록이 제외되고, 기존 거래소(한국거래소·넥스트레이드) 중심의 컨소시엄 두 곳이 선정된 것으로 알려져서입니다. 허세영 루센트블록 대표는 “혁신금융서비스 지정 기간 축적된 성과와 선도성에 대한 보호는커녕 운영할 권리조차 박탈당하고 퇴출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 자리는 아무런 기여도 한 적 없는 금융당국 연관 기관들이 자리를 채우게 됐다”며 울분을 토했습니다. 토큰증권의 정식 금융상품화만을 희망하며 오랫동안 시련의 시절을 버텨온 스타트업으로서는 억울하고 분한 건 당연지사입니다. 금융 당국은 사업자를 발표하려다가 연기했는데, 이후 최종 심사결과에 따라 혁신 사업에 도전했다가 문을 닫을 수도 있어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 신세입니다. 또 다른 혁신 사업에서도 핀테크 업체들이 부글부글 끓고 있습니다. 정부와 정치권에서 제도화를 추진하고 있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발행 주체를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뜨거운 가운데 은행권에 힘이 실리고 있어서입니다. 은행이 과반(51%) 지분을 보유한 컨소시엄을 스테이블코인 발행 주체로 우선 허용하는 방안이 당국에서 흘러나오자, 기술을 개발하고 서비스를 만들고 시장을 개척하던 핀테크 업체가 뒤로 밀리는 꼴이라며 기가 차다는 반응입니다. 금융 안정이라는 가치가 중요치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혁신을 주도한 기술 기업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면, 어느 누가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길을 개척할까요. 토큰증권과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한 신사업이 아닙니다. 미래 금융 질서를 재편할 촉매제이자 대한민국 금융의 미래가 걸린 승부처입니다. 전 세계적인 대전환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한민국호’가 순항하기 위해서는 혁신을 시도한 이들이 패배자가 되는 구조를 타파해야 합니다. 지금은 실패를 용인하는 것을 넘어, ‘성공하는 혁신’이 제대로 대접받는 공정한 생태계가 절실한 시점입니다.

2026.01.2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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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화가득률 90%…‘수출 산업’으로 진화하는 K-마이스 [E-MICE]

전문가 칼럼

아시아 최대 커피 박람회 ‘서울카페쇼’ 전시회 주최사인 엑스포럼은 최근 3년간 올린 외화 수입이 330만달러(약 48억원)에 달한다. 약 220억원인 회사 1년 전체 실적의 20%에 육박하는 규모다. 지난 2023년 40만달러(약 6억원)였던 외화 수입은 이듬해 2배 넘게 늘어난 90만달러(약 13억원)에 육박한 데 이어 지난해 200만달러(약 29억원)를 넘어섰다. 출품업체로부터 받는 전시 부스비(참가비)와 관람객이 내는 입장료(등록비)가 주 수입원인 전시·박람회 주최 회사로는 이례적인 실적이다. 엑스포럼은 그동안 올린 외화 수입이 수출 실적으로 인정받으면서 전시 업계 최초로 ‘200만불 수출탑’도 수상했다. 이전까지 순수 민간 전시 주최사나 컨벤션 기획사가 받은 수출탑은 100만불, 전시컨벤션센터는 코엑스가 지난 2024년 받은 500만불이 최고였다.오윤정 엑스포럼 상무는 “서울카페쇼 등 국내 행사를 비롯해 베트남 호찌민과 하노이, 프랑스 파리와 일본 오사카에서 여는 전시·박람회에 직접 참가비를 내고 출품하는 현지 기업이 늘어난 덕분”이라고 말했다. 전시·박람회 외국 출품기업 2.3배 증가마이스(MICE, 기업회의·포상관광·컨벤션·전시회) 산업의 기능이 수출·무역 진흥의 도구에서 수출 산업으로 다변화하고 있다. 숙박·쇼핑·관광 등 전후방 산업과 수출 기업의 판로 개척을 돕는 보조 기능에 더해 직접 외화 수입을 올리는 이른바 ‘외화 취득 산업’으로 역할을 하면서다. 연간 7000억달러(약 1033조원)를 넘어선 나라 전체 수출 규모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지만, 요원하기만 했던 마이스 산업의 국제화와 고도화 측면에서 의미 있는 변화라는 평가다.마이스는 그동안 높은 ‘외화가득률’(총 수입에서 외화로 벌어들이는 비율)에도 ‘번외’ 수출 산업으로 분류돼 왔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마이스의 외화가득률은 90%에 달한다. 외화벌이 능력만 놓고 보면 ▲자동차(71%) ▲TV(60%) ▲반도체(43%) ▲건설·플랜트(30%) 산업을 크게 웃도는 수치다. 외화가득률은 전체 수출 금액에서 제품 생산에 들어간 수입 원자재비를 빼고 남은 외화가득액이 전체 수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뜻한다. 외화가득률이 높다는 건 국산 원자재 사용 비율이 높아 그만큼 수익성이 크다는 의미다.지난 2023년 마이스 목적으로 방한한 외국인(153만명)의 총소비액 4조5000억원으로 외화가득률을 적용한 실질 수입은 약 4조원이다. 전체의 8%에 불과한 외국인(기업) 참가 비중을 싱가포르, 홍콩 등과 비슷한 수준인 40%까지 높이면 지금보다 5배 많은 20조원의 수출 효과를 얻을 수 있단 얘기다. 윤은주 한림대 교수(한국무역전시학회장)는 “제조업에 비해 월등히 높은 외화가득률에도 마이스를 수출을 늘리는 보조 수단으로 바라보는 인식과 시각이 높은 건 외화 취득의 주체가 마이스 업계가 아닌 호텔·항공·쇼핑 등 전후방 연관 업종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마이스의 수출 산업화 양상은 전시 산업이 주도하고 있다. 국내에서 열리는 전시·박람회에 출품하는 외국 기업이 늘면서 행사 자체가 외화를 버는 수출품 역할을 하고 있다. 다국적의 국제 행사로 인지도가 올라가면서 국내외 바이어 방문이 증가하는 ‘후방 연쇄효과’도 나타나고 있다.경연전람이 고양 킨텍스에서 2년마다 여는 ‘국제포장기자재전’은 전시 부스 판매로 역대 최대인 100만달러(약 14억원)가 넘는 외화 수입을 올렸다. 가장 최근인 지난 2024년 행사에 참가비를 내고 출품한 외국 기업은 직전 대비 10% 넘게 늘어난 22개국 548개사다. 전체 1376개 참가기업의 40%에 가까운 규모로 4600여개 전체 전시 부스 중 1000개 이상이 외국 기업들로 채워졌다.한국전시산업진흥회에 따르면 지난 2019년 7150개였던 국내 전시·박람회 출품 외국 기업은 지난 2024년 1만6192개로 2.3배 증가했다. 같은 기간 평균 8%이던 행사당 외국 기업 비중도 14%로 1.8배 늘었다. 추세만 놓고 보면 아직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한 세계 시장의 성장세를 웃도는 수치다. 세계전시연맹(UFI)에 따르면 지난 2024년 전 세계에서 열린 3만2000여건의 전시·박람회에 참가한 기업은 팬데믹 이전에 비해 0.8% 줄었다. 업계 해외 진출 늘고 사업도 다양해져관련 업계의 해외 진출이 늘면서 외화를 벌어들이는 사업 포트폴리오도 다양해지고 있다. 지난 2011년 베트남에 지사를 설립한 엑스포럼은 동남아에 이어 프랑스, 일본에도 진출해 작년 약 30건의 행사 중 8건을 해외에서 개최했다. ▲IT·전자 ▲식품 ▲교육 ▲패션 ▲소비재 등 분야도 다양하다.업계 내 유일한 상장사인 메쎄이상은 지난 2024년 ‘대한민국산업전’(KoINDEX)에 이어 올해 인도 뉴델리 현지에서 뷰티 박람회 개최를 준비 중이다. 연 95건의 전시·박람회를 여는 메쎄이상은 킨텍스와 뉴델리 ‘야쇼부미’ 전시장도 공동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엔 수출 진흥에 기여한 공로로 경연전람(철탑)과 함께 산업훈장(동탑)도 수훈했다.킨텍스는 뉴델리 야쇼부미 전시장 20년 운영권에 이어 작년 말레이시아 ‘페낭 워터프론트 컨벤션센터’ 운영권을 따내며 시설 운영사업을 동남아로 확대했다. 운영 3년 차에 접어든 야쇼부미는 서남아 최대 규모로 20년간 예상 수익이 최대 2800억원에 달한다.국제회의 기획·운영이 본업인 컨벤션 기획사는 컨설팅, 서비스로 영역을 넓히며 외화 수입을 늘리고 있다. 지난 2024년 아랍에미리트(UAE) 정부를 상대로 국제회의 기획·운영 컨설팅 사업을 시작한 인터컴은 그해 ‘100만불 수출탑’을 수상했다. 컨벤션 기획사가 수출탑을 받은 건 인터컴이 최초다. 대구 지역 컨벤션 기획사 덱스코는 지난해 외국인 참가자의 원활한 행사 참가를 돕는 하우징뷰로 서비스로 200만달러(약 29억원)가 넘는 수입을 올리며 ‘관광진흥탑’ 수상기업에 선정됐다.업계는 수출 산업화를 위해 행사 위주 정책과 제도의 대상과 범위를 기업 육성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마이스 수출 산업화가 제조업 중심 수출 구조를 다각화하는 효과도 클 것으로 본다. 국내 개최 행사의 해외 수요를 늘리기 위해 ‘패스트트랙’, ‘전시 비자’와 같은 입국 편의 서비스를 전략적으로 확대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이상택 메쎄이상 부사장은 “▲인포마 ▲알엑스 ▲엠씨아이 등 연간 1~3조원에 달하는 실적을 올리는 글로벌 마이스 기업이 국내에서도 나올 수 있다”며 “수출 산업화를 위해 먼저 마이스 산업은 물론 관련 기업에 대한 인식과 활용도부터 수출 산업의 관점에서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2026.01.25 06:00

5분 소요
보이스피싱이 모두 은행 책임?...왜 통신사와 정부는 뒤로 빠져있나 [이근면의 시사라떼]

전문가 칼럼

보이스피싱은 ‘고질적 방관 범죄’다. 수년째 범죄는 반복되고, 피해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며, 수법은 날로 교묘해지는데 대응은 늘 제자리걸음이다. 사건이 터지면 분노하고, 여론이 들끓으면 보상을 논의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잊힌다. 그 사이 범죄는 진화한다.최근 은행의 배상 책임을 강화하고 피해 보상 비율을 높이자는 논쟁이 한창이다. 어딘가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전세사기 피해 보상 논란 때와 판박이다. 결국 질문은 하나로 귀결된다. ‘그 보상 재원은 누구의 주머니에서 나오는가?’보이스피싱 피해 보상도 결국 국민의 돈이다. 은행의 부담은 수수료 인상으로, 공적 재원 투입은 세금으로 국민에게 전가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범죄를 막지 못한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은행인가, 통신사인가, 감독기관인가. 아니면 늘 그랬듯 아무런 권한도 없이 의무만 떠안는 ‘국민’인가.전 국민 얼굴 인증, 왜요? 제가요? 지금이요? 보이스피싱 예방책으로 거론되는 ‘전 국민 휴대전화 얼굴 인증 의무화’는 언뜻 강력해 보인다. 그러나 이는 전형적인 과잉 규제이자 행정 편의주의적 발상이다. 범죄는 소수가 저지르는데, 그에 따른 불편과 사회적 비용은 전 국민이 떠안아야 한다. 노인, 아동, 장애인 등 디지털 취약계층까지 잠재적 위험 요소로 간주하는 셈이다.얼굴 정보는 가장 민감한 생체 데이터다. 이를 통신 인프라 전반에 상시 축적하는 것은 보안 리스크를 구조적으로 키우는 일이다. “안전을 위해 자유를 조금 양보하자”는 명분은 여기서 통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유의 일부를 양보하는 차원이 아니라, 국민 전체를 상시 감시 체계 아래 두는 문제다. 빈대 한 마리 잡겠다고 초가삼간을 다 태우는 격이다. AI 시대, ‘기술적으로 못막는다’ 변명 통하지 않아더 큰 문제는 기술적 방임이다. 오늘날 AI는 ▲음성 패턴 ▲통화 빈도 ▲발신 행태 ▲위치 변화 ▲단말기 이동 경로까지 실시간으로 분석할 수 있다. 동일 번호나 유사 패턴의 반복 발신, 비상식적으로 짧은 시간 내의 번호 변경과 지역 이동 등 범죄 징후는 데이터로 남는다. 이런 신호는 ‘사후 수사’의 대상이 아니라 ‘사전 차단’의 대상이어야 한다.그런데도 통신사가 “우리는 단순 전달자”라며 책임을 회피한다면, 이는 기술 부족이 아니라 명백한 직무 유기다. 대한민국 통신 산업은 결코 낙후되지 않았다. 통신 3사는 세계 최고 수준의 네트워크와 AI 역량을 자랑한다. 그 뛰어난 기술을 광고와 요금제 수익화에만 쓰고, 정작 국민 보호에는 무력하다면 그들의 기술은 존재 가치를 잃는다.돈은 통신사가 벌고, 책임은 은행이 져라?현재 제도는 은행에 대해 “이상 거래를 탐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배상 책임을 일부 지우고 있다. 그렇다면 범죄의 통로인 통신망을 관리하는 통신사는 왜 책임에서 자유로운가.보이스피싱은 전화가 연결되지 않으면 성립조차 할 수 없다. 통신망은 범죄의 필수 플랫폼이다. 플랫폼에는 권한이 있고, 권한에는 응당 책임이 따른다. 유독 보이스피싱 앞에서만 통신사가 면책 특권을 누리는 것은 책임의 비대칭이자 정책적 특혜다.전세사기와 닮은 ‘사후 약방문’ 국가이 구조는 전세사기 사태와 소름 끼치게 닮아 있다. ▲관리·감독의 실패 ▲위험 신호 방치 ▲예방 부재가 이어지다 결국 세금으로 피해를 메우는 방식이다. 보이스피싱 대응 역시 예방에는 소홀한 채, 피해 발생 후 보상 논의로만 흐르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감독기관과 정부의 책임 소재는 희미해진다.보이스피싱은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진 재앙이 아니다. 수년간 통계가 쌓였고 수법과 대포폰 유통 경로도 드러나 있다. 그런데도 ▲통신사에 대한 사전적 기술 차단 의무 ▲금융권과의 공동 책임 구조 ▲예방 성과에 대한 정량적 평가 기준은 여전히 부재하다. 명백한 정책의 실패다.진짜 해법은 ‘국민 감시’가 아닌 ‘플랫폼 책임’ 대응 방향은 분명하다. 기술 강국답게 기술로 막아야 한다. 첫째, AI 기반 이상 통화의 실시간 차단을 의무화해야 한다. 둘째, 대포폰 개통 및 유통 관리 실패의 책임을 통신사에 명확히 귀속시켜야 한다. 셋째, 피해 발생 시 은행뿐만 아니라 통신사도 배상 책임을 분담하는 구조를 제도화해야 한다. 넷째, 면피성 노력이 아니라 실질적인 ‘피해 감소율’을 기준으로 책임을 물어야 한다.아울러 법과 제도의 재정비가 시급하다. 통신·금융·감독 당국이 서로 선 긋기에 바쁜 지금의 구조로는 예방 시스템이 작동할 수 없다. 범죄 예방 실패에 대한 공동 책임 체계를 법제화하고, 실질적 차단 성과를 낸 주체에게는 규제 완화나 인센티브를 주는 ‘성과 연동형 규제’가 필요하다. 그래야 기술이 현장에서 작동하고, 책임은 결과로 증명된다.보이스피싱은 더 이상 개인의 부주의나 노년층의 정보 소외 문제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이는 국가적 관리 실패가 누적된 시스템 범죄다. 이를 인정하지 않고 또다시 세금으로 피해를 덮으려 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다음에는 막겠다”는 공허한 약속만 반복하게 될 것이다.빈대 한 마리를 잡겠다고 집을 불태우는 나라는 안전한 나라가 아니다. 진짜 안전은 편한 정책이 아니라 옳은 정책, 즉 책임져야 할 곳에 확실히 책임을 묻는 것에서 시작된다.

2026.01.2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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