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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폭 이력 있으면 서울권 대학 가기 어렵다 [임성호의 입시지계]

전문가 칼럼

2026학년도 대학입시부터 학교폭력 조치 사항이 대입 전형에 전면 반영됐다. 학교폭력 관련 처분을 받을 경우 수시와 정시 모두에서 적지 않은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구조로 입시 환경이 바뀐 것이다. 학교폭력 처분은 1호부터 9호까지 구분된다. 가장 낮은 수위의 조치라 하더라도 대입 과정에서는 치명적인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학교폭력 조치는 ▲1호 서면사과 ▲2호 접촉·협박·보복 행위 금지 ▲3호 학교 봉사 ▲4호 사회봉사 ▲5호 특별 교육 이수 또는 심리치료 ▲6호 출석정지 ▲7호 학급 교체 ▲8호 전학 ▲9호 퇴학 처분 순으로 수위가 높아진다.학폭 심의 건수 증가세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 등 주요 대학에서는 학교폭력 처분 이력이 있을 때 대입에서 강도 높은 불이익을 주고 있다. 그러나 전국 고등학교 학교폭력 심의 건수는 오히려 증가세다. 2025년 전국 고등학교 학교폭력 심의 건수는 7646건으로 최근 3년 사이 가장 많았다. 2023년 5834건, 2024년 7446건에서 2025년 7646건으로 늘었다. 전년과 비교하면 200건, 2.7% 증가한 수치다.지역별로 보면 2025년 학교폭력 심의 건수는 서울권 922건, 경인권 2721건, 지방권 4003건이었다. 서울권은 2023년 691건에서 2024년 876건, 2025년 922건으로 늘었다. 전년 대비 증가 폭은 46건, 증가율은 5.3%다. 경인권은 2023년 1894건, 2024년 2706건, 2025년 2721건으로 집계됐다. 전년보다 15건, 0.6% 증가했다. 지방권은 2023년 3249건, 2024년 3864건, 2025년 4003건으로 늘었다. 전년 대비 139건, 3.6% 증가했다.학교폭력 처분이 입시에 직접적인 불이익으로 연결되기 시작했지만, 서울과 경인, 지방권 모두에서 심의 건수는 증가했다. 피해 학생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고, 과거라면 그냥 넘어갔을 사안도 학교폭력 심의로 이어지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고교 유형별로는 일반고의 증가세가 두드러졌다. 2025년 일반고 학교폭력 심의 건수는 5059건으로 전년보다 3.4% 늘었다. 영재학교와 특목·자사고는 212건으로 전년 대비 15.2% 증가했다. 특히 전국 단위 자사고는 2024년 16건에서 2025년 34건으로 2배 이상 늘었고, 국제고도 같은 기간 6건에서 13건으로 증가했다.학교폭력 심의 유형별로는 언어폭력이 32.5%로 가장 많았다. 이어 신체 폭력 25.6%, 사이버폭력 13.4%, 성폭력 10.8%, 강요 4.6%, 금품 갈취 4.1%, 따돌림 3.6%, 기타 5.5% 순이었다. 말 한마디가 학교폭력 심의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 된 셈이다.증가율이 가장 컸던 유형은 강요였다. 강요 관련 심의 건수는 2024년 411건에서 2025년 531건으로 29.2% 늘었다. 따돌림도 2024년 327건에서 2025년 413건으로 26.3% 증가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단계에서부터 이 같은 행위가 학교폭력 심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학생과 학부모 모두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서울 주요 대학은 강경 대응실제 처분 결과는 2025년 1만2628건으로 집계됐다. 2024년 1만2975건보다는 다소 줄었지만, 2023년 1만1258건보다는 많은 수준이다. 심의 건수는 늘었지만 실제 처분 건수는 전년보다 감소한 셈이다. 가해 학생 측에서도 적극적으로 방어에 나서는 사례가 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처분 건수가 심의 건수보다 많은 것은 한 건의 심의에 여러 학생이 연루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처분 결과별로는 2호 접촉·협박·보복 행위 금지가 28.1%로 가장 많았다. 이어 1호 서면사과 20.1%, 3호 학교 봉사 19.2%, 5호 특별 교육 이수 또는 심리치료 16.5%, 4호 사회봉사 6.5%, 6호 출석정지 5.6%, 8호 전학 1.9%, 7호 학급 교체 1.7%, 9호 퇴학 처분 0.3% 순이었다. 이 가운데 7호 학급 교체는 전년 대비 27.6% 늘어 가장 큰 증가 폭을 보였다.2027학년도 기준으로 서울대는 수시에서 1호부터 9호까지 모든 학교폭력 처분 결과를 대입 평가에 반영해 불이익을 주고 있다. 연세대는 1호 서면사과만으로도 지원할 수 없는 전형이 있으며, 고려대도 1호 처분부터 지원 제한 또는 불이익이 발생한다. 정시에서도 서울대는 1호 서면사과부터 불이익을 적용하고, 연세대와 고려대 역시 1호 처분받으면 즉각 감점이 이뤄진다.2028학년도부터는 현재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적용받는 내신 체계도 바뀐다. 기존 9등급제가 5등급제로 전환되면서 내신 동점자가 대량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커지고, 내신 등급의 변별력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학교폭력 처분 결과가 지금보다 더 큰 불이익으로 작용할 수 있다. 2028학년도부터 수시와 정시 모두에서 내신 정성평가 기준이 강화되는 만큼, 사소한 처분 이력만으로도 입시에 상당한 타격을 받을 수 있다.학교폭력 심의와 처분 결과가 대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 된 만큼, 미취학 아동과 초·중·고 학생, 학부모 모두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학교폭력 문제는 단순히 학교 안에서 끝나는 사안이 아니다. 성숙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 태도와도 연결되는 문제라는 점에서 더욱 주의 깊게 바라봐야 한다.

2026.06.14 11:00

4분 소요
AI 기업 과실, 국민과 나눠야 할까[한세희 테크&라이프]

전문가 칼럼

만약 인공지능(AI)이 우리 모두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기술이라면,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우리는 AI에 대해 얼마나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깊이 개입할 수 있을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근 기자들 앞에서 “주요 AI 기업들의 일부를 미국 대중에게 주는 방안”을 언급해 화제가 됐다. AI 기술의 급격한 발달로 인한 우려를 덜 수 있다는 것이다. 오픈AI나 앤트로픽 같은 AI 기업이 지분을 출자해 펀드를 만들어 대중에 수익을 나누는 형태를 생각할 수 있다.실제로 오픈AI는 4월 AI로 인한 경제 성장의 결실을 모든 시민들과 나누는 ‘국부 펀드’ 조성을 제안한 바 있다. 백악관 일부 인사들이 이 제안에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AI 확산으로 고용이 줄어들어 사람들은 고통받고 기술 발전의 혜택은 소수 빅테크 기업과 그곳에서 일하는 엘리트 인력에게만 돌아가는 암울한 미래를 막기 위한 대안으로 제시된 아이디어다. 혹은 그런 우려로 인한 대중의 반감으로 AI 사업에 지장이 생길 것을 걱정한 오픈AI의 제안이라 봐도 될 것이다. ‘사회주의’ 비판 속에서 지분 확보 나선 미국기본소득처럼 개인에게 직접 현금을 쏘는 방식은 아니지만, 사회 전체에 영향을 끼칠 기술의 등장으로 발생할 큰 이익을, 이로 인해 피해를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대중 전체에 일부 나누자는 기본 접근은 비슷하다. 기본소득 논의는 소득 불균형을 해소하고 누구나 기본적 삶의 질을 누릴 수 있게 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됐지만, AI 시대를 맞아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됐다. AI와 로봇이 모든 일을 하고 사람들은 일에서 소외될 수 있다는 우려가 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세상이 됐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이 실효성 있는 방식일지는 의문이지만, 우리가 알던 세상의 패러다임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상황이라면 가능한 모든 대안들을 검토해 볼 필요는 있다. 이런 고민의 결과가 AI 기업들이 참여한 국부 펀드 같은 아이디어들로 드러나는 셈이다. 미국 민주당 버니 샌더스 의원 같은 좌파와 트럼프 대통령이 이 문제에서 비슷한 방향성을 보이는 것도 흥미롭다. 대중이 AI 기업의 소유권을 일부 갖는다는 아이디어는 최근 미국 좌파 계열에서 관심이 커졌고, 샌더스 의원이 주요 AI 기업들에 50% 세율의 일회성 중과세를 매겨 국민을 위해 사용하자는 제안을 하면서 더욱 탄력을 얻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책사였던 스티브 배넌 등 우파 일부도 이런 흐름에 동조하고 있다. AI 발전을 우려하는 대중을 달랠 필요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샌더스 의원의 의견이 비슷하게 만난 사례는 또 있다. 지난해 미국 정부가 반도체와과학법, 일명 칩스(CHIPS) 법에 따라 인텔에 주어지는 보조금을 정부 지분으로 전환한 일이다. 인텔은 지원금 109억달러에 대한 반대급부로 지분 약 10%를 정부에 넘겼다. 보조금 사용을 기업 결정에 맡기지 않고 정부가 아예 지분을 확보한 것은 “대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국민 세금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샌더스 의원 등 진보 진영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도리어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공화당 의원들과 경제학자들에게 “사회주의적 정책”이라는 비판을 들었다. 트럼프 행정부와 민주당 등 이른바 진보 세력이 기업 활동 개입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각기 다르다. 진보 계열 인사들은 막대한 자금력과 기술력을 가진 오픈AI나 앤트로픽, 인텔 같은 빅테크를 향한 힘의 쏠림을 어떻게 견제할 지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 현재 미국 정부는 치열한 기술 패권 경쟁에서 주도권을 확고히 하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다. ▲AI ▲첨단 반도체 ▲디지털 플랫폼 ▲친환경 에너지 ▲양자와 우주 기술 등 세계 강대국 간 질서를 뒤흔들 기술들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들 핵심 전략 기술 분야 기업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려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전략 기술 기업에 영향력 높이는 미국 정부최근 미국 정부는 국내 9개 주요 양자 기술 기업들에게도 칩스법에 따라 20억달러의 지원금을 제공하고, 이들 기업의 지분 일부를 받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IBM이 전체 예산의 절반인 10억달러를 받아 뉴욕주에 양자 프로세서 제조 시설을 건설한다. 반도체 파운드리 기업 글로벌파운드리스도 양자 칩 제조 시설 건설을 위해 3억7500만달러를 받는다. 또 ▲초전도 ▲이온트랩 ▲중성원자 같은 주요 양자 하드웨어 플랫폼 기술을 가진 ▲디웨이브 ▲리게티컴퓨팅 ▲퀀티넘 ▲사이퀀텀 ▲아톰컴퓨팅 ▲인플렉션 ▲디랙 등 양자 기술 스타트업이 지원금을 받는다. 미국 정부는 희토류 자석 기업 벌컨엘리먼츠와 광산 기업 MP머터리얼즈 지분도 확보했다. 중국 등 외국에 의존하는 자원 때문에 생길 수 있는 공급망 위협에 대한 일종의 보험이다. 인텔이나 양자 기업에 대한 지원은 지원금을 정부 지분으로 바꾸는 것이고, AI 기업에 대한 논의는 국부 펀드를 만들어 국민에게 이윤을 배분한다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주체인 기업을 어떤 방식으로 통제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다는 점은 비슷하다. 이런 핵심 기술의 핵심 역량이 소수 기업들에 몰려 있다는 점이 고민을 더한다. AI나 양자, 우주 기술의 혁신은 과거 2차 세계 대전 당시 원자탄 같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국가 주도로 총력을 기울인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 ‘맨하탄 프로젝트’가 오픈AI나 앤트로픽, 스페이스X에서 각각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앤트로픽이 자사 AI 기술을 자율 살상 무기에 사용하지 말라고 국방부에 요구한 것은 정당한 일일까. 기업을 제어할 행정력을 가진 국가가 기업의 전략 기술을 시민 통제에 활용한다면, 혹은 압도적 기술력을 가진 기업이 정부의 손길에서 벗어난다면 어떻게 될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국부 펀드에 자기 몫이 있다는 사실 정도에 우리는 만족해도 되는 것일까.

2026.06.14 10:00

4분 소요
탈서울 시작된 'K스타트업 창업' 생태계...다음 과제는 민간 [최화준의 스타트업 인사이트]

전문가 칼럼

서울이 전부였던 국내 창업 생태계 지형에 변화의 움직임이 보인다. 현재 글로벌 무대에서 경쟁력을 갖춘 국내 도시는 서울 정도다. 글로벌 창업 생태계 순위를 매기는 유명 평가 기관은 스타트업지놈(Startup Genome)과 스타트업블링크(StartupBlink)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각국 정부는 지역 창업 생태계의 글로벌 경쟁력을 파악할 때 해당 기관의 순위를 참고한다. 2025년 스타트업 지놈에서 발표한 평가에서 서울은 8위, 올해 스타트업블링크 보고서에서는 20위를 차지했다. 서울시의 창업 생태계는 글로벌 20위권 이내로 창업 선도국의 도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하지만 글로벌 창업 도시 100위 안에 다른 지역 도시들은 보이지 않았다. 글로벌 창업 도시 서울은 국내 창업 생태계의 자랑이자 고질적인 문제인 생태계의 불균형을 보여주는 온상이었다. 하지만 최근 공개된 스타트업블링크 보고서는 국내 창업 생태계의 서울 집중화가 완화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한국은 지난 한 해 동안 20.6%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며 글로벌 국가 순위에서 지난해보다 한 계단 상승한 19위로 우뚝 올라섰다. 이는 5년 만에 거둔 최고 순위이다.주목할 만한 부분은 이번 상승의 주역이 서울이 아닌 지역 도시들이라는 점이다. 지역 광역시들은 무서운 성장세를 보여주었다. 여러 광역시들은 100%가 넘는 성장세를 보였는데, 대구시는 무려 254.9%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그 결과 모든 광역시들이 500위권 안팎에 위치하는 놀라운 성과를 보였다. 이에 더해 올해는 지역 중소 도시들인 천안·춘천·전주·원주·세종·아산 등 6개 도시가 세계 1000대 스타트업 도시에 새로 진입하면서 국내 1000대 창업 도시 수는 16개로 작년 9개에 비해 대폭 늘어났다. 이번 보고서에서 돋보이는 국내 창업 생태계의 큰 변화는 단연 탈중앙화다.대구·대전 등 비수도권 지표 상승특히 대전시의 약진이 도드라진다. 대전은 올해 처음으로 글로벌 창업 도시 300위권에 진입하면서 서울과의 점수 격차를 27배로 줄였다. 이는 지난해 44배에 달했던 격차에 비하면 크게 줄어든 수치이다. 지난 몇 년간 대전은 지역 창업 생태계를 활성화하고자 지역의 대학과 정부, 공공 기관이 합심해 꾸준하게 다양한 시도를 해 온 결과 마침내 괄목한 만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에 반해 서울은 창업 생태계가 성숙 단계에 진입했다. 여전히 글로벌 20위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국내 10대 도시 중 가장 낮은 7.4%의 성장률을 보였다. 서울은 스타트업 지원 부문에서 세계 4위, 아시아·태평양 지역 1위로 높은 순위를 유지했지만 다른 평가 영역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다. 전문가들은 이를 공공이 주도하는 창업 생태계 육성이 한계에 다다른 신호라고 해석한다. 지역 도시들의 고속 성장이 언제까지 지속될 지는 미지수이다. 창업 생태계 전문가들은 이번 지역 도시들의 가파른 성장세가 공공 영역의 뒷받침 덕분이었다고 분석하면서 공공 부문에 의존하는 성장 방정식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더했다. 결국 국내 창업 생태계는 언제까지 공공 지원에 기대어 성장할 것인가 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창업 생태계의 균형 있는 발전은 한국이 글로벌 스타트업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과업이다. 실제로 이번 스타트업블링크 보고서에서 한국은 공적 지원을 제외한 영역에서 낮은 평가를 받았다. 예를 들어 ‘혁신가 비즈니스 환경 지수’에서 한국은 32위에 그쳤다. 이는 규제와 같은 시장 환경이 창업 생태계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문화적 인식 변화’ 역시 변화가 시급한 과제로 꼽혔다. 보고서는 한국의 뛰어난 청년 인재들이 창업보다는 안정된 대기업 경력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으며 기업가 정신이 부족함을 지적했다. 이는 궁극적으로 공공 영역의 지원보다는 문화적 전환이 동반되어야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지난해 국내 창업 도시들을 방문했던 스타트업블링크 CEO 엘리 데이비드 로카(Eli David Rokah) 역시 국내 생태계를 비슷한 맥락에서 진단했다. 그는 정부의 지나친 개입은 장기적으로 창업 생태계 기반을 취약하게 만들어 한국 스타트업들의 글로벌 경쟁력이 약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역 도시 고성장 공공 지원 덕분…이젠 대안 모색해야 지난 5월 한성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지역 창업 생태계 육성 청사진을 공개했는데 그 중심에는 지역 창업 도시가 있다. 구체적으로 과학특성화 대학이 있는 도시를 중심으로 2030년까지 세계 100위권 창업 도시 5곳 이상을 육성하겠다는 계획이다. 이에 중소벤처기업부는 대구·대전·광주·울산의 지방 정부와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이는 분명 창업 생태계의 서울 및 수도권 집중화를 해결하기 위한 의미 있는 발걸음이다. 개인적으로 이번 정책에서 민간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을 남겨두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정부가 판을 직접 짜는 대신에 민간 자본과 활동 집단이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활동하도록 환경과 창업에 친화적인 문화를 조성하는 데 돕는 역할을 자처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아무리 훌륭한 제도를 제안하고 인프라를 구축해 놓아도 낡은 규제와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문화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인재들은 결국 안정된 길을 택할 뿐이다. 정부가 혁신의 마중물 역할에 충실하고 남은 공간을 민간의 창의성으로 채워나갈 때, 지역 창업 생태계는 지속 가능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필자는 전남대 경영대학 교수로 창업생태계와 창업실패를 연구하고 있다. 다국적 기업과 창업생태계 현장을 모두 경험하고 연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창업생태계를 가까이 하면서 창업자들과 유연하고 창의적인 시각을 공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26.06.14 10:00

4분 소요
새로운 중국 밀크티 한국 시장 넘본다 [심재범의 커피이야기]

전문가 칼럼

중국 본토를 뜨겁게 달군 밀크티 브랜드 ‘차지’(Chagee·패왕차희)가 커피 공화국 대한민국에 상륙해 주목을 받고 있다. 패왕차희는 아직 한국 소비자들에게 생소하지만, 중국 여행을 다녀온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입소문이 자자하다. 개인적으로도 지난해 상하이 출장 중 가장 인상 깊게 살펴본 음료 브랜드가 바로 이 패왕차희였다.전통차 인식이 달라졌다패왕차희는 2017년 중국의 대표적인 차 산지인 윈난성에 첫발을 내디뎠다. 회사는 ▲원엽차 ▲우유 ▲중국풍 이미지 ▲세련된 패키지 ▲모바일 주문 시스템을 결합해 다소 올드하게 느껴지던 차(茶)를 ‘젊은 세대가 들고 다니며 마시는 트렌디한 음료’로 재정의했다. 이제는 중국 현지를 넘어 글로벌 식음료 브랜드로 성장 중이다. 패왕차희는 2025년 말 기준 전 세계에서 7453개의 티하우스를 운영하며 순매출 129억1000만위안(약 2조9500억원)을 기록했다.패왕차희는 왜 한국 시장 공략에 나선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내 차 시장의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과거 한국에서 전통차는 ‘건강하고 점잖은 음료’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이런 공식을 깬 것이 공차다. 한국 밀크티 시장의 대중화는 버블티로 유명한 공차의 등장과 궤를 같이한다고 봐도 무방하다.공차는 2006년 대만에서 시작해 2012년 한국에 상륙했다. 이 브랜드는 홍대 1호점을 시작으로 ▲블랙 밀크티 ▲타피오카 펄 ▲당도 및 얼음 조절 ▲토핑 선택이라는 커스텀 조합을 선보이며 밀크티를 일상 음료의 반열에 올렸다. 공차의 성공 공식은 단순하면서도 강력했다. ▲당도 30% ▲얼음 적게 ▲펄 추가와 같은 주문법은 소비자가 자신의 취향을 직접 설계하는 재미를 줬다. 스타벅스가 커피 시장에서 ‘개인화’(Customization)를 이끌었다면, 공차는 밀크티 시장에 이를 정착시켰다. 관련 시장이 커지면서 공차코리아는 2017년 대만 본사를 역인수했다. 국내에서는 2025년 기준 900여개의 매장을 운영하며 1000억원대 매출을 기록하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다.공차의 성공 이후 국내에는 다양한 밀크티 브랜드가 쏟아져 나왔다. ▲아마스빈 ▲팔공티 ▲흑화당 등이 등장하면서 한때 버블티 신드롬이 일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2024년 한국에 상륙한 ‘헤이티’(HEYTEA)는 또 다른 방향성을 제시했다.중국 광둥성에서 시작한 헤이티는 이른바 ‘치즈티’의 원조로 불리는 중국식 신식 차음료 브랜드다. 이 브랜드는 ▲과일차 ▲치즈폼 ▲브라운슈가 보보 밀크티 등 시각적으로 화려하고 디저트에 가까운 음료를 선보이며 젊은 소비자를 사로잡았다. 효율적이지만 매우 낯선 시스템올해는 패왕차희의 한국 법인인 차지코리아가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지난 4월 30일 서울 강남 플래그십 스토어를 시작으로 용산과 신촌에 잇달아 직영점을 열었다.저자는 오픈 당일 패왕차희 매장을 방문했다. 이곳은 지금껏 경험한 브랜드와 차별화된 시스템을 갖췄다. 우선 매장에 계산대가 따로 없고, 애플리케이션(앱)으로만 주문할 수 있었다. 매장 입장은 수령 예정 시각 20분 전부터 가능했다. 매장 앞이 아니라 앱 안에서 줄을 서는 느낌이었다. 이런 시스템은 효율적이지만 낯설다. 카페에 들어가 메뉴를 보고 주문하는 과정이 앱 안으로 옮겨간 셈이다.매장 내부는 예상보다 쾌적했다. 직원들은 바쁜 와중에도 친절했고, 매장 안에서는 시판 차 제품을 체험하거나 구매할 수도 있었다. 다만 전체적인 구성은 오래 머무는 카페보다 픽업 스테이션에 가까웠다. 테이크아웃 용기와 보냉백이 눈에 띄었고, 많은 소비자가 음료를 받아 들고 나갔다. 고급스러운 중국풍 패키지와 달리 매장 내 음용 컵은 패스트푸드점 탄산음료 컵과 비슷한 재질이었다. 이미지는 프리미엄이지만, 운영은 대량 제조와 빠른 회전율에 맞춰져 있었다.주문한 음료는 대표 메뉴인 보야 자스민 밀크티와 우롱 밀크티였다. 기본 당도와 기본 얼음으로 주문했고, 가격은 6400원이었다. 보야 자스민은 자스민 향이 선명했다. 기존 버블티처럼 타피오카 펄이나 강한 설탕 맛이 음료를 지배하지 않았다. 향이 먼저 올라오고, 그 뒤를 우유의 질감이 받쳤다. 우롱 밀크티는 자스민보다 조금 더 대중적이었다. 구수한 차의 느낌과 우유의 질감이 안정적으로 어울렸다.패왕차희의 메뉴는 전통차의 기준과는 조금 다르다. 차를 기반으로 만든 현대식 음료에 가깝다. 원엽차와 유제품의 ▲질감 ▲당도 ▲얼음 ▲컵 ▲빨대 ▲보냉백 ▲앱 주문까지 모두 합쳐져 하나의 상품이 된다. 그래서 패왕차희를 이해하려면 ▲음료의 향미 ▲주문 방식 ▲대기 시스템 ▲포장 경험이 함께 움직인다는 점을 봐야 한다.오픈 초기의 대기는 호기심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효과가 강하게 작동한 결과일 수 있다. 한국 시장은 유행을 빠르게 받아들이지만, 반복 구매 앞에서는 냉정하다. 한 번의 호기심은 줄을 만들 수 있지만, 브랜드를 오래가게 만드는 것은 두 번째 방문이다.한국의 커피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에 가깝다. 생두 가격은 오르고, 대형 프랜차이즈는 브랜드 이미지와 운영 부담을 동시에 안고 있으며, 저가 커피 브랜드 사이의 경쟁도 치열하다. 패왕차희는 이런 상황에서 어떤 결말을 맺게 될까.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된다.

2026.06.13 13:00

4분 소요
베토벤이 양육권 다툼을?...천재 음악가는 왜 법정에 섰나 [백세희의 컬처&로(LAW)]

전문가 칼럼

불멸의 천재 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대중은 그의 음악뿐 아니라 청력을 잃어가면서도 명작을 남긴 비극적인 삶에 주목한다. 최근에는 그의 이름을 내건 창작 뮤지컬까지 공연될 정도로 베토벤은 시대를 초월한 문화 아이콘이다.하지만 그가 생애 후반 5년 가까이 법정 다툼에 매달렸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상대는 다름 아닌 동생의 아내, 즉 제수 요한나였다. 두 사람이 벌인 분쟁의 핵심은 조카 카를(Karl)의 후견권과 양육권이었다.1815년 베토벤의 남동생 카스파르 카를은 아홉 살 아들 카를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그는 형 베토벤에게 후견인이 되어달라는 뜻을 남겼지만, 사망 직전 아내 요한나를 공동후견인으로 추가했다. 평소 요한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지 않았던 베토벤은 이 의사표시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후 1820년까지 치열한 소송전을 이어간다.베토벤에게는 동생의 유언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지만, 요한나에게는 친아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절박한 문제였다. 분쟁은 그의 창작 활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소송이 한창이던 1819년에는 단 한 곡의 작품도 발표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엄밀히 말하면 이 사건은 단순한 양육권 다툼이 아니었다. 요한나의 친권을 박탈하고, 자신이 후견인으로 지정된 뒤, 실질적인 양육권까지 확보하려는 복합적인 법적 분쟁이었다.영화 <불멸의 연인>의 영감이 된 진흙탕 분쟁편의상 ‘양육권 분쟁’이라 요약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요한나의 친권 상실 ▲베토벤의 후견인 및 양육자 지정 이렇게 3가지 청구가 복합된 분쟁이었을 것이다. 수술에 동의하고, 여권 발급을 신청하는 등 미성년자의 법률행위를 대리하기 위해서는 법정대리인이 필요하다. 보통 부모가 친권자로서 법정대리인이 되지만, 사망하거나 특별한 사유로 친권을 상실하게 되면 ‘후견인’을 선정한다. 베토벤은 ①요한나의 친권을 상실시켜 ②자신이 조카의 후견인이 되고, ③양육권까지 가져오려 한 것이다.19세기 오스트리아에서는 부(父)가 유언으로 자녀의 후견인을 지정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소송의 큰 줄기는 ‘유언의 효력’을 다투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대에는 공동친권자인 부모 중 한 명이 사망하면 자동으로 생존 부모가 단독친권 및 양육자가 된다. 따라서 현대의 소송은 ‘단독친권자의 친권을 소멸’시키는 것이 큰 줄기가 된다는 차이가 있다. 이렇게 소송물은 다르지만 진행되는 속을 들여다보면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상대가 얼마나 아이를 키우기에 부적합한 인물인가로 쟁점이 좁혀지기 때문이다.베토벤이 보여준 모습은 ‘집착’에 가까웠다고 한다. 동생과 조카에 대한 책임감, 제수에 대한 불신 등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납득하지 못한 사람들은 ‘요한나가 베토벤의 숨겨진 연인이고, 카를은 사실 아들’이라는 설을 제시했다. 이런 의문은 영화 <불멸의 연인>(1994)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 베토벤과 요한나의 소송기록을 접하면 이런 설정은 결코 영화적 상상력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로를 증오하는, 말 그대로 이전투구의 기록이기 때문이다.베토벤은 요한나의 전과를 거론한다. 결혼 전 자기 집의 귀금속을 훔쳐 가출했고 결혼 후에도 같은 일을 벌였다. 목걸이를 비싸게 팔아주겠다고 접근해 자기가 가졌다. 횡령, 무고도 범했다. 베토벤은 그녀가 양육에 부적합하다고 주장했다. 동생이 죽기 직전 아내를 공동후견인으로 추가한 것은 혼미한 정신에 이용당한 것이라고도 했다. 법원은 베토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는 1816년 조카의 단독후견인이 된다.모든 범죄자가 친권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현대 대한민국에서는 어떨까. 범죄자는 친권을 잃을까. 아동복지법 제18조 제1항은 친권 상실 사유를 ▲친권남용 ▲현저한 비행 ▲아동학대 ▲그 밖에 친권을 행사할 수 없는 중대한 사유 등 크게 4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부모의 범죄는 ‘현저한 비행’에 해당할 수 있다. 다만 모든 범죄로 친권을 상실하는 것은 자녀에게 바람직하지도 않고 혼란만을 만들 뿐이다. 그렇다면 ‘중범죄’는 가능할까.‘고유정 사건’으로 떠들썩하게 알려진 전 남편 살인사건이 친권 상실의 예에 들어맞는다. 고 씨는 2017년 6월 피해자와 이혼하면서 아들에 대한 친권과 양육권을 단독으로 가졌다. 이후 고 씨는 피해자를 살해했고 유죄가 인정되어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유족은 고 씨의 친권을 상실하고 아이의 후견인으로 피해자의 남동생을 선임에 달라고 법원에 청구했다.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다만 죄질이 약한 범죄에 대해서 법원은 매우 신중하다. 절도와 간통을 저지른 단독친권자에 대해 “비행을 저지른 친권자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친권을 행사하거나 후견을 하게 하는 것이 자녀의 복리를 위하여 보다 낫다고 인정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섣불리 친권상실을 인정하여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미성년자의 친족에 의한 친권상실청구를 기각하곤 한다. 이런 논거라면 베토벤 소송도 결과가 뒤집혔을 수 있다. 요한나가 아들을 학대했다는 정황도 없다. 실제로 이 소송은 결과가 한 번 뒤집혔다. 관할 문제로 불씨가 살아나 베토벤은 패소하고 만 것이다. 베토벤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때가 유일하게 작품번호(Opus)가 없는 시기다. 결론적으로 항소심에서 베토벤이 다시 조카에 대한 권리를 빼앗아오지만 말이다. 친권과 양육권의 문제는 원칙이란 걸 세우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다. 오로지 ‘자(子)의 복리를 위한 결정을 한다’는 최소한의 대원칙만이 있다. 무엇이 아이에게 최선의 결과로 이어질 것인지는 하나하나 따져보는 수밖에 없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 없으므로 법원의 결정이 진정 최선이었는지를 사후에 검증할 방도도 없다. 베토벤과 조카 카를, 해피엔딩은 아니었다그러나 소송의 승리가 곧 행복한 결말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베토벤은 조카를 직접 돌보며 교육했지만 관계는 점차 악화됐다. 음악적 재능이 부족했던 카를에게 기대를 걸었던 베토벤의 바람은 실현되지 못했다. 결국 카를은 스무 살 무렵 자살을 시도했고, 이후 군에 입대하며 삼촌과 멀어졌다. 그는 몇 달 뒤 찾아온 베토벤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물론 요한나의 손에서 자랐다고 해도 행복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긴 하다.베토벤 말년의 음악을 최고로 평가하는 이들이 있다. 병약해진 육체의 한계를 딛고 탄생한 불후의 명작이라는 것이다. 비단 육체적 고통만은 아니었다. 조카에 대한 후견권과 양육권을 둘러싼 분쟁과 이어진 조카와의 갈등. 이 모든 정신적 고통까지 합쳐진 고난의 시기였다. 천재 음악가 이전에 한 명의 삼촌이자 소송 당사자였던 베토벤의 모습까지 알고 나면, 그의 말년 음악이 조금은 다르게 들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백세희 법률사무소 아트앤 대표변호사

2026.06.1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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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리즘이 설계하는 도시, 누구를 위한 스마트시티인가[김현아의 시티라이프]

전문가 칼럼

필자는 이번 지방선거 개표 방송 앞에 앉아 묘한 감정의 엇갈림을 느꼈다. 화면 한쪽에서는 당선자들의 얼굴이 하나 둘 화면을 채우고 다른 한쪽에서는 방송사와 오픈AI가 협업한 ‘AI 상황실’이 실시간으로 당선 확률을 숫자로 보여주고 있었다. 기술은 분명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질문 하나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AI가 민심을 읽는 시대에, 과연 AI는 민심을 위해 작동하고 있는가. 지난 칼럼까지 필자는 지방선거라는 창을 통해 우리 도시의 설계도를 들여다봤다. ▲행정통합의 효율과 역설 ▲부동산 민심의 지층 ▲에너지 전환이 바꾸는 도시 경쟁의 문법 ▲전쟁과 월세 사이에서 흔들린 표심까지. 선거는 끝났다. 이제 시선을 선거판 너머로 돌려야 할 때다. 선거보다 더 도시를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재편하고 있는 또 다른 힘이 있다. 알고리즘이다.‘기술 중립성’이라는 신화흔히 기술은 중립적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보자. 망치는 집을 짓는 데도, 사람을 해치는 데도 쓰인다. 기술 자체에 선악은 없다. 다만 쓰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그 결과는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도시에 들어오는 AI는 다르다. 알고리즘은 특정 목적을 위해 설계되고 특정 데이터를 학습하며 특정 주체의 손에 쥐어진다. 그 설계의 의도와 데이터의 편향, 권력의 배치가 AI의 ‘중립성’을 이미 지워버린다.AI 도시 연구자 롭 키친(Rob Kitchin)은 이를 ‘알고리즘 통치’라고 부른다. 즉, 알고리즘 통치란 인간의 판단을 대신해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자원 배분 ▲서비스 제공 ▲공간 관리를 결정하는 통치 방식을 말한다. 과거에 시장이나 시의회가 예산을 배분하고 정책을 결정하던 자리에, 이제 코드가 들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코드가 내린 결정은 투표로 번복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알고리즘은 선출되지 않기 때문이다.얼마 전 필자는 AI 기능이 탑재된 부동산 정보 사이트에 접속했다가 멈칫했다. 내가 찾는 집을 찾아줄 뿐만 아니라 세금 조회부터 대출, 청약 시뮬레이션까지, 서비스는 놀랍도록 정교했다. 그런데 그 정교함에 닿으려면 ▲로그인 ▲본인 인증 ▲각종 조건 입력 등 여러 단계의 문을 통과해야 했다.그렇다면 이 문을 열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 그리고 곧 이어진 생각 ‘나도 나이를 더 먹으면 이 문 앞에서 멈추게 되지 않을까.’ AI가 정교해질수록 서비스의 문턱도 함께 높아진다. 이것이 지금 우리 스마트시티가 직면한 역설이다.민간 서비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국토교통부는 올해만 거점형·특화단지·강소형 등 유형별로 스마트도시 조성사업을 전국 각지에서 동시 추진하고 ‘AI시티 혁신기술 발굴사업’을 통해 6개 민간 기술을 실제 도시 공간에서 실증하는 프로젝트를 가동 중이다. 숫자만 보면 화려하다. 그러나 이 화려한 대시보드 뒤에 가려진 것이 있다. 2020년부터 2025년까지 국내 스마트시티 뉴스 기사 2만 2000여 건을 텍스트마이닝으로 분석한 연구(구자근, 2025)에 따르면, 기술·산업·데이터 생태계 관련 어휘는 담론의 전면을 차지한 반면, 시민권·데이터 권리·알고리즘 윤리와 같은 사회적·윤리적 차원의 논의는 상대적으로 약하게 등장하는 데 그쳤다.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유럽연합 기본권청(FRA)은 2022년 보고서에서 AI 알고리즘이 훈련 데이터에 내재된 사회적 편견을 그대로 흡수해 젠더·인종·계층 차별을 자동화하는 현상을 경고했다. 우리의 스마트시티 담론은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는 능숙하지만, ‘누구를 위해 만들 것인가’에는 아직 서툴다.그 누구의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날카롭다. AI는 과거의 데이터를 먹고 자란다. 그런데 그 과거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았다. 아마존은 2018년 AI 채용 시스템을 폐기했는데, 남성 중심의 이력서 데이터로 학습한 알고리즘이 여성 지원자에게 체계적으로 낮은 점수를 매겼기 때문이다. 미국 형사사법 체계에서 재범 가능성 예측에 쓰인 콤파스(COMPAS) 시스템은 흑인의 재범 확률을 과대평가하고 백인의 확률을 과소평가했다는 연구가 공개돼 파문을 일으켰다. 알고리즘은 사회의 불평등을 수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수치화하고 자동화하고 더 빠르게 확산시킨다.알고리즘에도 선거가 필요하다도시 공간에 이 논리를 들여오면 문제는 더 선명해진다. AI가 도시 서비스를 배분할 때 학습하는 데이터에는 이미 여성 안심 귀갓길이 부족했던 도시의 기억, 장애인 이동권이 배제된 보도블록의 설계, 고령층의 동선이 빠진 대중교통 노선이 반영도 있다. 기존의 공간 불평등이 데이터로 코드화되고, 그 코드가 다시 미래의 도시를 설계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도 AI 기술 활용의 젠더 편향 실태를 분석하며 이 문제를 정책 의제로 제기하고 있다.스마트시티가 정말 ‘스마트’하려면, 데이터를 정교하게 만들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이 도시를 설계하는 사람들은 노인의 느린 걸음을, 장애인의 우회 동선을, 야간 귀갓길을 불안해하는 여성의 감각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가. 문제는 누가 버튼을 누르느냐가 아니라, 버튼을 누르는 사람이 자신과 다른 삶을 상상할 수 있느냐다. 그 상상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젠더 감수성 교육과 다양성 설계 훈련을 통해 길러진다. 알고리즘이 소외를 자동화하기 전에, 먼저 설계하는 사람이 자신과 다른 삶이 어떻게 소외되는지를 느끼고 배워야 한다알고리즘은 우리의 동의 없이 도시를 결정한다. 그래서 필자는 이 연재를 통해 하나의 질문을 반복해서 던질 것이다. “이 알고리즘은 누가 설계했고, 누구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는가.” 이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다. 어떤 도시를 원하는지에 대한 시민의 의지가 기술의 방향을 규정해야 한다. 배달 플랫폼의 AI가 구도심 골목을 배송 불가 지역으로 분류하는 것도 CCTV의 안면인식 시스템이 광장을 감시하는 것도, 노인 복지 예산을 AI가 더 정교하게 배분하는 것도 모두 기술의 문제이기 전에 우리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의 결과다. 기술에도 투표가 필요한 이유다. (다음 편에 계속)

2026.06.0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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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금융 없이 전환금융도 없다 [대신경제연구소 ESG인사이트]

ESG

올해 2월 25일 금융위원회는 ‘기후금융 활성화 방안’을 발표하며 2035년까지 총 790조원 규모의 기후금융을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기존 계획(2024~2030년, 420조원)에서 규모와 기간 모두 대폭 확대된 수치다. 이 발표에서 시장의 이목을 끈 키워드는 단연 ‘전환금융’(Transition Finance)이다. 고탄소 산업의 저탄소 전환을 금융이 직접 지원해 기존 녹색금융이 닿지 못했던 탄소 다배출 산업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금융권과 산업계 모두가 주목했다. 기후금융 로드맵의 실질적 이행을 위해 금융위원회와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전환금융 가이드라인’을 발표했으며, 은행연합회와 금융투자협회 등 금융권도 지난 4월부터 실무 가이드라인 마련에 착수한 상태다.그러나 이 흐름 속에서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우리나라 기후금융의 주축이었던 녹색금융은 이제 완성된 제도로서 뒷전으로 물러나도 되는 것인가?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전환금융에 쏠린 관심이 뜨거울수록, 녹색금융의 미완성 과제를 직시해야 할 이유는 오히려 더 커진다.‘녹색금융’의 기준, K-Taxonomy녹색금융의 핵심 인프라는 한국형 녹색분류체계(K-Taxonomy)다. 2021년 12월 최초 수립됐고, 2023년과 2025년 두 차례 개정을 거쳐 현재 2개 부문 100개 경제활동으로 구성돼 있다. 재생에너지 생산·무공해 차량 제공 등 탄소중립과 환경개선에 직접 기여하는 녹색부문 93개 활동과 LNG 발전·블루수소 제조 등 과도기적 전환부문 7개 활동이다. 다만 단순히 이 분류표에 속한다고 해서 녹색금융의 수혜를 입는 것은 아니다. ‘4단계 판단 프로세스’를 거쳐 최종적인 녹색성을 판별하는 구조다. ▲‘활동기준’ 해당 경제활동이 분류체계에 정의된 녹색 활동에 속하는지 ▲‘인정기준’ 6대 환경목표 달성을 위한 기술적 기준에 부합하는지 ▲‘배제기준’(DNSH) 목표 달성 과정에서 다른 목표에 심각한 피해를 주지는 않는지 ▲‘보호기준’(MS) 인권·노동·안전·반부패·문화재 보호 등 최소한의 법규를 위반하지 않았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6대 환경목표란 온실가스 감축·기후변화 적응·물의 지속가능한 보전·순환경제로의 전환·오염 방지 및 관리·생물다양성 보전 등 금융 지원 대상이 환경적으로 기여해야 하는 여섯 가지 지향점을 뜻한다. 여기서 K-Taxonomy의 역할은 단순한 분류에 그치지 않는다. 어떤 대출이 녹색여신인지, 어떤 채권이 진짜 녹색채권인지를 판단하는 근거이자 그린워싱을 방지하는 최전선이다. ‘2035 NDC’(국가온실가스 감축목표) 이행과 ‘2050 탄소중립’ 달성을 뒷받침하는 투자 나침반으로 기능하며, 기후금융 생태계 전반의 신뢰성을 담보하는 기준점이다. ‘전환금융’ 기대만큼 큰 그린워싱 우려친환경 프로젝트나 녹색산업에 자금을 대는 ‘녹색금융’이 기후금융의 정공법이라면, ‘전환금융’은 녹색금융이 포괄하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채우기 위해 설계된 카드다. 한국은 철강·석유화학·시멘트 등 탄소 다배출 제조업의 비중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유독 높다. 이들 업종은 녹색 기준을 당장 충족하기 어렵지만, 이들이 배출하는 탄소량은 국내 산업 배출의 약 73%를 차지한다. 결국 녹색금융만으로는 탄소중립의 핵심 고지를 공략할 수 없다는 현실 인식이 전환금융 도입의 배경이다.이에 따라 2026년 2월 제정된 ‘전환금융 가이드라인’은 제도를 이원화했다. 구체적으로 ▲K-Taxonomy 활동기준 충족을 조건으로 일정한 유예기간을 부여하는 ‘녹색분류체계 기반 전환금융’ ▲기업이 자체 수립한 전환전략과 외부 검증에 의존하는 ‘전환전략 기반 전환금융’ 두 축이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벌써부터 실효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첫째, 녹색금융과의 경계 모호 문제다. 동일한 투자가 녹색금융으로도, 전환금융으로도 해석될 여지가 있으며 더 느슨한 전환금융으로 쏠릴 가능성이 있다. 둘째, 기후공시 의무화가 본격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기업의 ‘자기 선언’에 의존하는 방식은 ‘그린워싱’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셋째, 전환 자금을 저금리로 조달한 뒤 공정 전환은 지연시켜 기존의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탄소 고착’(Carbon Lock-in) 리스크를 배제할 수 없다. 특히 기업의 ‘자체 전략’에 의존하는 방식은 실질적 탈탄소를 담보하기 어렵기에, 객관적인 평가 기준이 필수적이다. 전환금융의 선도국인 일본이 철강·화학 등 고탄소 업종별 감축 경로와 핵심 기술을 명시한 국가 차원의 로드맵을 제공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역시 기업의 자체 전략을 견인할 업종별 로드맵을 정교화하는 동시에, 그 최종 목적지이자 나침반이 될 K-Taxonomy의 정합성을 더욱 단단하게 다져야 한다. 무엇이 ‘진짜 녹색’인지 명확해야, 무엇이 ‘전환 중’인지도 판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기후금융의 두 바퀴, 함께 성장해야전환금융의 나침반이 돼야 할 녹색금융 역시 아직은 미완의 과제다. 국내 녹색금융은 녹색채권·녹색여신에 집중돼 있어, 녹색펀드나 보험 등 다양한 자산군으로 확대될 필요가 있다. 대다수 중소·중견기업의 접근성은 여전히 낮고, 금융기관 내에서 K-Taxonomy 판단 프로세스를 금융 심사에 적용할 수 있는 전문인력도 부족하다. 녹색금융 자금이 실제로 K-Taxonomy 적합 활동에 사용되는지를 사후 검증하는 체계 역시 미흡하다.전환금융과 녹색금융은 함께 성장해야 한다. 녹색금융 기반이 취약하면 전환금융은 방향을 잃은 채 자금만 흘러가는 구조가 된다. 시장의 관심이 전환금융으로 집중되는 이 시점에 ▲녹색금융 상품의 다양화 ▲접근성 확대 ▲심사역량 강화 ▲사후 모니터링 체계 구축 등이 병행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790조원이라는 숫자가 실질적인 탄소중립으로 이어지려면, 그 자금이 ‘진짜 녹색’으로 향하고 있다는 시장의 신뢰가 먼저다. 기후금융 선도국가로의 도약은 새로운 제도의 출범이 아닌, 기존 기준의 엄격한 실행에서 시작된다.

2026.06.07 10:00

4분 소요
왜 모든 ‘1원’은 같은 가치여야 하는가 [스페셜리스트 뷰]

전문가 칼럼

우리는 보통 모든 1원의 가치가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은행 계좌에 들어 있든 어떤 결제 앱으로 송금하든, 현금이든 예금이든 1원은 언제나 1원의 가치를 가진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자명해 보이는 질서는 사실 중앙은행과 금융제도가 오랜 시간 구축해온 정교한 공공 인프라 위에서 유지된다. 최근 국내에서 원화 연동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제도권 안으로 편입하려는 논의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특정 법정통화나 실물자산에 가치를 연동한 디지털 자산으로 비트코인과 같은 기존 암호자산의 가격 변동성을 줄이면서도 블록체인 기반의 프로그래머빌리티(programmability)를 구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금융산업의 차세대 인프라로 주목받고 있다. 실제로 글로벌 결제·송금 시장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한 실험이 본격화되고 있으며 미국과 유럽에서도 제도화 논의가 빠르게 진전되고 있다.화폐의 단일성이라는 보이지 않는 질서문제는 이 논의가 단순한 기술 혁신이나 산업 육성의 차원을 넘어 현대 통화체계의 핵심 원리인 ‘화폐의 단일성’(singleness of money)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는 점이다. 화폐의 단일성은 동일한 액면가의 화폐는 발행 주체나 유통 형태와 무관하게 경제 내에서 동일한 가치로 수용돼야 한다는 원칙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이론적 개념이 아니다. 화폐의 단일성은 현대 금융시스템의 신뢰 구조를 떠받치는 가장 근본적인 제도적 토대이며 역사적으로 이 원칙이 흔들릴 때 금융 불안과 경제적 혼란은 반복적으로 발생해왔다. 오늘날 경제주체들은 현금·은행예금·간편결제 잔액·카드 결제 등 서로 다른 형태의 화폐를 사용하지만 누구도 “어느 은행의 1만원이 더 가치 있는가”를 고민하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관습이 아니라 정교한 공적 제도의 결과다.현대 통화체계는 사실상 계층적(hierarchical) 구조를 가진다. 최상위에는 중앙은행 화폐인 현금과 지급준비금이 존재하고 그 아래에 시중은행 예금과 다양한 화폐성 금융부채가 위치한다. 이 구조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이유는 하위 화폐가 제도적으로 중앙은행 화폐와 액면가 교환이 보장된다는 신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의 최종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 기능 ▲예금보험제도 ▲지급결제 인프라 ▲은행 규제 체계가 결합되면서 “1원은 어디서나 1원”이라는 단일성이 유지된다. 이 원칙은 단순한 편의성의 문제가 아니다. 화폐는 ▲교환의 매개 ▲가치 저장 수단 ▲가치 척도라는 세 가지 기능을 수행하는데, 그 중 가치 척도(unit of account) 기능은 화폐의 단일성과 직결된다. 경제주체들이 동일한 기준 단위를 공유해야 가격 비교와 계약 체결, 장기적 투자 판단이 가능해진다. 만약 동일한 명목가치의 화폐가 서로 다른 할인율로 거래되기 시작한다면 거래비용은 급증하고 가격체계는 왜곡된다. 결국 자원배분의 효율성 자체가 훼손된다. 화폐 신뢰의 본질은 특정 발행기관에 대한 신뢰만이 아니다. 그것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재정건전성·금융규제·지급결제시스템 등 통화체계를 구성하는 전체 제도에 대한 신뢰다. 특히 디지털 금융환경에서는 이 신뢰의 취약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2023년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 당시 단 하루 만에 약 420억 달러 규모의 예금 인출 요청이 발생한 사례는 디지털 시대의 뱅크런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전개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신뢰는 장기간에 걸쳐 축적되지만 붕괴는 순식간에 발생한다. 자유은행시대의 역사적 교훈화폐의 단일성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지 않을 경우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는 19세기 미국의 자유은행시대가 극명하게 보여준다. 1837년부터 1860년대 초반까지 미국에서는 연방 차원의 통일적 통화체계가 부재한 가운데 각 주 정부의 인가를 받은 민간은행들이 자체적으로 은행권(banknote)을 발행했다. 그 결과 전국에서는 수천 종의 은행권이 뒤섞여 유통됐다. 당시에는 민간 경쟁이 금융혁신과 효율성을 높일 것이라는 기대가 존재했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만큼 안정적이지 못했다. 은행권의 가치는 발행은행의 신용도와 지급능력에 따라 달라졌고 동일한 1달러 지폐조차 지역과 발행기관에 따라 할인돼 거래됐다. 뉴욕의 우량은행이 발행한 은행권은 거의 액면가로 유통된 반면 변방 지역의 취약한 은행이 발행한 은행권은 큰 폭의 할인 가격으로 거래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상인들은 수백 종에 달하는 은행권의 실제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뱅크노트 디텍터’(banknote detector)라는 주간 간행물을 참고해야 했다. 거래비용은 급증했고 위조지폐 문제도 만연했다. 특히 지급준비금이 충분하지 않은 이른바 ‘와일드캣 뱅크’(wildcat bank)들이 과도한 은행권 발행에 나서면서 금융 불안은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다만 경제사 연구에서는 이러한 혼란이 민간 화폐 발행 자체보다는 당시 미국 특유의 분절적 은행 규제와 지점 확장 제한 등 제도적 제약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실제로 18~19세기 스코틀랜드 자유은행체제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으로 운영된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그럼에도 미국 자유은행시대의 경험은 화폐의 단일성이 단순한 시장 경쟁만으로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어렵고 신뢰 가능한 공적 결제·청산 인프라와 규율 체계가 병행돼야 함을 보여준 사례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후 미국은 1863~1864년 국법은행법(National Bank Acts)을 통해 국법은행 중심의 은행권 발행 체계를 구축했고 1913년 연방준비제도(Fed) 설립을 거치며 현대적 중앙은행 체계를 확립하게 된다. 스테이블코인, 새로운 민간 화폐인가흥미로운 점은 21세기 스테이블코인이 19세기 민간 은행권과 일정한 구조적 유사성을 가진다는 데 있다. 복수의 민간 발행기관이 각자의 담보자산과 신용에 기반해 화폐성 청구권을 발행하고 그 안정성이 발행기관의 건전성에 의존한다는 점에서다. 현재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시장은 달러 연동형 스테이블코인이 사실상 지배하고 있다. 테더(USDT)·써클(USDC) 등을 중심으로 시장규모는 이미 2500억 달러를 넘어섰으며 일부 신흥국에서는 사실상 달러 대체 결제수단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복수의 민간 발행자에 의해 발행될 경우다. 발행사의 ▲신용도 ▲준비자산 구성 ▲유동성 관리 능력 ▲환매 조건 등에 따라 동일한 ‘1원 기반 스테이블코인’조차 시장에서 서로 다른 가치로 거래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이러한 취약성은 더욱 확대된다. 2022년 테라-루나 사태는 알고리즘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구조적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다만 테라-루나와 같은 알고리즘형 스테이블코인은 준비자산 기반 담보형 스테이블코인과 구조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점 역시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담보형 스테이블코인 역시 준비자산의 유동성 문제가 발생하거나 대규모 환매 요구가 동시에 발생할 경우 액면가 유지에 실패할 수 있다. 이 경우 위험은 특정 투자자 손실에 그치지 않는다. 스테이블코인이 지급결제 수단으로 광범위하게 활용될수록 그 충격은 실물경제와 금융시스템 전반으로 빠르게 번질 수 있다. 디지털 시대의 화폐 질서 설계할 때스테이블코인 자체를 무조건 금지하거나 배제하는 데 논의의 초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민간 디지털 화폐가 확산되더라도 “1원은 언제나 1원”이라는 화폐의 단일성이 흔들리지 않도록 만드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 제도적 조건이 충족될 필요가 있다. 우선 스테이블코인의 준비자산이 충분한 안전성과 유동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위기 상황에서도 이용자가 언제든 액면가로 환매할 수 있다는 신뢰가 유지되지 않는다면 화폐의 단일성은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준비자산 역시 변동성이 큰 위험자산이 아니라 현금과 단기 국채 등 높은 유동성과 안정성을 갖춘 자산 중심으로 구성될 필요가 있다. 준비자산의 외부 감사와 투명한 공시 체계 역시 신뢰 유지의 핵심 조건이다.발행기관에 대한 엄격한 인가와 상시 감독 체계 역시 필수적이다. 화폐와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는 이상 최소한 은행에 준하는 수준의 건전성 규율이 적용될 필요가 있다. 특히 대규모 환매 상황에서도 안정적인 유동성 공급이 가능하도록 환매 지연 및 제한 등 상환 유연화 장치와 은행 등 금융중개기관을 통한 유동성 지원 체계와 같은 비상 대응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또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테이블코인이 기존 지급결제 시스템과 어떻게 연계되는지다. 다양한 민간 디지털 화폐가 발행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중앙은행 화폐를 기준으로 액면가 교환이 가능해야 한다. 그래야만 서로 다른 디지털 화폐들이 동일한 가치 체계 안에서 안정적으로 유통될 수 있다. 최근 한국은행이 ‘한강 프로젝트’를 통해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와 예금토큰 등 새로운 디지털 결제 인프라를 실험하는 것도 디지털 환경에서 화폐의 단일성과 최종 결제 기능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점검하는 실증적 과정으로 볼 수 있다.결국 스테이블코인 논쟁의 핵심은 기술혁신 자체가 아니라 디지털 시대에 화폐의 공공성과 통화질서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있다. 19세기 미국 자유은행시대의 경험은 민간 화폐 경쟁이 일정 수준의 혁신과 효율성을 가져올 수는 있지만 화폐의 단일성이 훼손될 경우 그 사회적 비용 역시 매우 커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원화 스테이블코인 제도화 논의는 단순한 산업 진흥 논리만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복수 발행사의 스테이블코인이 위기 상황에서도 안정적으로 액면가를 유지할 수 있는지, 이용자 보호 장치와 준비자산 규율은 충분한지, 디지털 환경에서도 원화 기반 지급결제 질서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한 면밀한 논의와 제도적 보완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19세기 영국 경제사상가 월터 배젓(Walter Bagehot)의 말처럼 화폐는 스스로 질서를 유지하지 않는다. 디지털 시대에도 “모든 1원은 같은 가치여야 한다”는 화폐의 단일성 원칙만큼은 절대 흔들려서는 안 된다. 필자는 카이스트(KAIST) 금융전문대학원에서 금융학을 전공하고 미국 공인재무분석사(CFA) 자격을 취득했다. 1999년 한국은행에 입행한 이후 뉴욕사무소 과장, 국제국 차장, 발권국 부장 등을 거쳤으며 현재는 국회예산정책처에서 파견 근무 중이다.

2026.06.0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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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0만 몰린다더니 호텔은 텅텅…흥행 ‘빨간불’ 켜진 월드컵 [E-MICE]

전문가 칼럼

오는 6월 11일(현지시간) 미국·캐나다·멕시코에서 개막하는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엇갈리고 있다. 100여 년 대회 역사상 처음 3개국에서 동시에 열리는 이번 대회는 역대 가장 많은 48개 팀이 참가한다. 시장에서는 이번 대회의 규모와 흥행이 월드컵 역사상 ‘역대 최고’로 기록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 나온다. 반면 개최국 미국의 까다로운 비자 정책과 중동 전쟁으로 인한 고유가, 고물가 부담에 안전 이슈까지 더해지면서 ‘안방 잔치’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역대 23번째 열리는 이번 대회는 6월 11일 멕시코와 남아프리카공화국 예선 경기를 시작으로 7월 19일 미국 뉴저지에서 열리는 결승전까지 총 40일간 진행된다. 기존 32개 팀에서 48개 팀으로 규모를 확대한 이번 대회는 미국·캐나다·멕시코 3개국 16개 도시에서 총 104경기를 치른다.‘역대 최고 대회’ vs ‘안방 잔치’ 기대 우려 엇갈려 FIFA는 지난해 3월 세계무역기구(WTO)와 공동 발간한 이번 대회 사회경제적 영향을 분석한 보고서에서 사상 처음 3개국에서 열리는 이번 대회에 전 세계에서 650만 명이 넘는 축구 팬이 몰릴 것으로 예상했다. 경기장 건설 등 인프라 조성 등에 140억달러(약 21조원)를 들이는 대회로 기대되는 경제 효과는 GDP(국내총생산) 기여 약 410억달러(약 62조원), 직간접 세수입 94억달러(약 14조원), 신규 일자리 82만 4000개 등 총 800억달러(약 121조원)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FIFA와 미국관광협회는 대회 기간 해외에서 32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몰리고 이들이 1인당 평균 5048달러(약 763만원) 이상을 지출할 것으로 예상했다. 평소 미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보다 1.7배 많은 금액으로, 이들 중 3분의 1은 최소 2주 이상 머무르면서 경기가 열리는 여러 도시를 방문할 것으로 기대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는 최근 전 세계 인구의 75%에 해당하는 60억명가량이 대회를 직접 관람하거나 TV 중계를 통해 시청할 것으로 예상했다. 특히 TV 중계권료 뿐만 아니라 시청률, 광고비 등에서 이번 대회가 역대 최고의 메가 스포츠 이벤트가 될 것이라며 특수를 누릴 수혜 업종으로 항공·방송·스포츠 의류·음료·온라인 베팅을 지목했다.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백악관에서 잔니 인판티노 FIFA 회장과 만난 자리에서 “월드컵 개최로 미국이 300억달러(약 35조 원) 규모의 경제 효과와 20만 개가 넘는 신규 일자리를 얻게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면서 “전 세계 축구 팬들이 적절한 심사를 거쳐 미국에 쉽게 입국할 수 있도록 보장하겠다“며 비자와 입국 심사 완화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와 조치에도 불구하고 전체 650만여 명 관람객 중 절반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던 외국인 관람객은 좀처럼 반등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대회 개막이 다가올수록 미국 건국 250주년에 열리는 대회가 아메리카 ‘안방 잔치’에 그치면서 흥행, 경제 효과 측면에서 기대에 한참 못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는 배경이다.미국호텔숙박협회는 최근 호텔 시장 전망 보고서를 통해 미국 호텔과 개최 도시들이 기대했던 경제적 효과가 반감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대회 개막이 다가오면서 경기 티켓은 500만 장 넘게 팔렸지만, 개최 도시 11곳 중 9곳의 호텔 약 80%는 예약률이 초기 예상치를 크게 밑도는 것으로 알려졌다. 보고서는 “주최 측인 FIFA가 객실 예약의 약 70%를 취소하거나 해제하면서 시장에 공급 과잉을 초래했다”며 “사전에 계약을 맺은 객실의 최대 95%가 취소된 사례도 있다”고 지적했다. “월드컵 축구대회, 부유층 위한 축제로 변모”대회기간 외국인 방문 수요가 기대에 못 미치는 이유는 평소 대비 4~5배 치솟은 항공료, 숙박비로 비용 부담이 늘고, 불안한 정세로 안전 우려까지 커진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에 따르면 대회 기간인 6월 중 유럽·아시아발 미국 주요 개최 도시행 항공편은 예약률이 전년 대비 4~5%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중동 전쟁 여파로 운항 노선이 줄면서 현재 미주와 유럽을 잇는 국제선 항공료는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중동 전쟁 발발 이전보다 가격이 평균 30~40% 오른 상태다.숙박비도 특수를 노린 호텔들이 일제히 가격을 3~4배 올리면서 부담이 늘어난 상태다. 뉴욕타임스 등에 따르면 16개 개최 도시에 있는 100여 개 주요 호텔의 대회 기간 객실료는 1박당 평균 1013달러(약 150만원)로 평소 293달러(약 44만원)보다 3.5배 비싼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 상당수 호텔들이 저조한 예약률에 뒤늦게 가격 정책을 포기하고 있지만, 효과는 국내 수요 회복에 머무르고 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뉴저지, 팔리델피아 등 일부 지역에선 숙박세에 식품세를 인상하기로 하면서 부담을 키우고 있다.로잔나 마이에타 미국호텔숙박협회장은 “캔자스시티는 호텔의 85~90%가 평년 여름철 예약률에 못 미치고, 보스턴과 필라델피아, 샌프란시스코, 시애틀은 예상치보다 거의 80% 낮은 심각한 상황”이라며 “뉴욕, 댈러스, 휴스턴은 사실상 변동이 없는 평년 수준”이라고 밝혔다. 이어 “개막을 앞두고 국내 수요가 올라서고 있지만, 씀씀이가 큰 외국인 관람객의 격차를 메우기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토로했다.비싼 경기 입장권도 관람 수요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FIFA는 다음달 19일 뉴저지 이스트 리더퍼드 메트라이프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결승전 1등급 입장권 가격을 3만 2970달러(약 4900만원)로 올렸다. 이전 가장 비쌌던 결승전 1등급 입장권 가격 1만 990달러(약 1630만원)의 3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뉴욕포스트는 “저렴한 조별 리그 경기장 상단 좌석도 장당 400달러(약 60만원)가 넘는다”며 “월드컵이 부유층을 위한 축제로 변모하면서 역사상 가장 비싼 스포츠 행사라는 씁쓸한 타이틀을 얻게 될 것”으로 우려했다.한편 FIFA는 중계권료와 입장권 판매, 스폰서십 등 이번 대회로 얻는 수익이 역대 최대였던 2022 카타르 대회 75억달러(약 11조원)보다 75% 늘어난 131억달러(약 19조5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26.06.06 10:00

5분 소요
백마의 전설 남아있는 샤토 슈발 블랑 [와인인문학]

전문가 칼럼

프랑스 보르도 우안 생테밀리옹(Saint-Émilion)을 대표하는 최고급 와이너리(포도주 양조장) ‘샤토 슈발 블랑’. 이름 그대로 ‘흰 말’(White Horse)을 뜻하는 이 우아한 샤토의 로비에 들어서면 전면을 장식한 거대하고 눈부신 백마 그림이 방문객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이 백마에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를 새로 세운 ‘선량왕’ 앙리 4세의 낭만적인 전설이 깃들어 있다. 장거리 여행 중에도 지친 말을 자주 바꿔 타곤 했던 그가 파리로 향하던 길에 생테밀리옹 인근 농가에 훌륭한 흰말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하루를 묵어가며 말을 갈아탔다는 이야기다.‘닭고기’를 약속한 선량왕앙리 4세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군주 중 한 명이다. 30년간 이어진 구교와 신교의 끔찍한 종교 전쟁(위그노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 스스로 구교로 전향했고 1598년 낭트 칙령을 내려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다. 그의 정치는 따뜻하고 실용적이었다. ‘일요일이면 모든 백성의 식탁에 닭고기를 올리게 하겠다’는 유명한 약속은 400년 전 평민들에게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기적 같은 꿈이었다. 하지만 그는 파탄 난 경제를 살려내며 이 약속을 지켰고 백성들은 그를 ‘선량왕’이라 부르며 칭송했다.흥미롭게도 프랑스인들에게 닭은 각별한 상징이다. 2000년 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역을 점령했을 때 그곳 사람들을 라틴어로 수탉을 뜻하는 ‘갈루스’(Gallus)와 발음이 비슷한 ‘골루아’(Gaulois)라 부르며 조롱한 것이 발단이었다. 오기가 발동한 골족은 아예 수탉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아버렸다.이 흥미진진한 전설을 품은 샤토 슈발 블랑의 본격적인 역사는 183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근의 거대한 포도밭이었던 샤토 피지악(Château Figeac)이 분할 매각되면서 포므롤 경계에 맞닿은 15헥타르의 알짜배기 자갈밭이 뒤카스(Ducasse) 가문에 넘어간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꾸준히 영토를 확장한 슈발 블랑은 1862년 런던과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압도적인 품질로 메달을 휩쓸며 세계 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오늘날 라벨에 자랑스럽게 새겨진 두 개의 메달이 바로 그 증거다. 1998년에는 루이비통을 이끄는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샤토를 인수하며 럭셔리 제국의 핵심 자산이 됐다. 슈발 블랑은 생테밀리옹의 절대 군주로 군림해 왔다. 오랫동안 샤토 오존(Château Ausone)과 함께 생테밀리옹 최고 등급인 ‘프리미에 그랑 크뤼 클라세 A’를 양분했으나 2012년 앙젤뤼스와 파비가 동일 등급으로 승격되자 자존심이 상했는지 아예 등급제에서 탈퇴해 버렸다. 이제 계급장이 없는 무관의 제왕이 됐지만 아무도 그들의 권위를 의심하지 않는다. 영화 캐스팅 비화와 로버트 파커를 문 개이 위대한 와인은 할리우드의 러브콜도 숱하게 받았다. 애니메이션 ‘라타투이’와 제임스 본드 영화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에 등장했고 명작 ‘사이드웨이’에서는 주인공이 패스트푸드점에서 몰래 마시는 궁극의 와인으로 조명받았다. 재미있는 비화가 있다. 사이드웨이의 감독이 원래 섭외하려던 곳은 샤토 페트뤼스(Château Pétrus)였다. 하지만 이름 없는 감독의 제안을 잡상인 취급하며 문전박대한 페트뤼스 덕분에 슈발 블랑이 대신 그 영광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평론가와 얽힌 통쾌한 에피소드도 빼놓을 수 없다. 1980년대, 세계 최고의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가 1981년 빈티지를 시음하고 낮은 점수를 주자 샤토의 매니저 자크 에브라르는 불만을 품고 그를 다시 초청했다. 포도밭에 도착한 파커가 매니저가 키우던 개에게 다리를 물리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피가 나는 상처에 붙일 밴드를 달라는 파커에게 매니저가 밴드 대신 파커가 발행한 와인 평론지를 무심하게 던져줬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다. 다행히 서로 화해했고 재평가를 통해 점수는 상향 조정됐다고 한다.오늘날 슈발 블랑은 생테밀리옹에서 가장 현대적인 와이너리로 진화했다. 지롱드 강 우안 최초로 포도밭 지하에 배수 설비를 깔았고 크기가 제각각인 52개의 콘크리트 발효조를 품은 2000만달러(약 301억원)짜리 최첨단 셀러를 구축해 구획별 정밀 양조를 완성했다. 포므롤과 맞닿은 점토와 자갈밭은 카베르네 프랑과 메를로 품종의 기적 같은 블렌딩을 낳는다.프랑스 체류 시절 운 좋게 이 위대한 샤토를 직접 방문해 2011년 빈티지를 시음할 기회를 얻었다. 2011년산은 메를로의 비중이 높던 다른 빈티지와 달리 카베르네 프랑이 52%를 차지해 결이 달랐다. 깊고 짙은 루비색을 뚫고 잘 익은 딸기와 검은 올리브 및 트러플 그리고 은은한 삼나무와 다크 초콜릿의 향연이 펼쳐졌다.타닌은 아직 젊고 단단했지만 거대한 구조감 속에서도 실크처럼 촘촘한 질감과 우아한 피니시가 혀끝을 황홀하게 감쌌다. 시간을 초월한 백마의 질주는 잔 속에서 여전히 멈추지 않고 있었다. 와인 애호가에게 최고의 와인은 한 번도 여행하지 않은 와인이다. 양조 된 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와인은 복잡한 유통 과정(여행)을 겪은 와인에 비하면 거의 완벽한 조건에서 보관되고 숙성되기 때문이다.

2026.06.06 08:00

4분 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