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
'車사고 합의금'도 AI가 결정할까...손해사정법인의 고민
- [설 자리 좁아지는 손해사정법인]①
AI가 심사하고, 사람은 확인…합의까지 자동화되나
외부 법인에 남는 건 사망·후유장해 등 고난도 사건
AI가 심사하고, 합의도 대신하나
손해사정은 보험금 지급 여부와 지급액을 결정하기 위해 사고 원인과 손해 규모를 조사하는 절차다. 보험금 청구가 접수되면 보험사는 사고 조사와 손해액 산정 업무를 직접 수행하거나 자회사 손해사정법인 또는 외부 손해사정법인에 위탁한다.
화재·누수·재물손해와 실손보험 등은 외부 손해사정법인이 처리하는 비중이 높은 편이며 자동차보험 대인보상은 보험사 보상직원이 직접 담당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고 규모나 내용에 따라 자회사 또는 외부 손해사정법인에 위탁하기도 한다.
손해사정 업무 대부분은 현재도 보험사가 선정한 손해사정법인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2024년 전체 손해사정 업무 1억75만2000건 가운데 보험사가 자회사 손해사정법인에 위탁한 업무는 1838만4000건(18.2%), 비자회사 손해사정법인에 맡긴 업무는 7666만건(76.1%)이었다.
보험사가 직접 고용한 손해사정사가 처리한 업무는 570만6000건(5.7%)에 그쳤다. 전체 업무의 94.3%가 보험사가 선정한 손해사정법인을 통해 처리되는 구조인 만큼 AI 도입에 따른 업무 재편은 외부 손해사정업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보험사들의 AI 도입은 이미 보험금 심사 전반으로 확대되는 추세다. 진료기록과 보험약관을 대조해 보험금 지급 여부를 판단하거나 차량 파손 사진만으로 수리비를 산출하고 있다. 또 소액 보험금 지급 여부도 빠르게 심사가 가능하다. 또 보험사들은 몇년 전부터 AI 활용 확대에 맞춰 일부 보상조직의 인력 조정도 진행해 왔다. 보험사 내부에 많은 손해사정 담당 직원을 둘 필요가 없는 셈이다.
특히 업계가 가장 주목하는 변화는 경상환자 향후치료비 제도 개편이다. 향후치료비는 교통사고 피해자가 앞으로 치료를 받을 가능성을 고려해 지급받는 보험금이다. 실제 현장에서는 사고를 종결하기 위한 사실상의 ‘합의금’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는 보상 담당자가 피해자의 치료 기간과 통원 횟수, 부상 정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합의금을 제시하고 피해자와 협의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정부가 추진 중인 향후치료비 제도 개편이 시행되면 상황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금융당국은 경상환자의 향후치료비를 보험사와 피해자가 개별 협의를 통해 정하는 현행 방식에서 벗어나 보다 객관적인 지급 기준을 마련하는 방향으로 제도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아픈 곳이 딱히 없는데도 입원실에 드러누워 합의금을 더 높이려는 이른바 ‘배째라’식 행태를 차단하기 위해서다. 현재 이 제도는 시행이 추진됐지만 의료계와 소비자단체 등의 반발로 도입이 미뤄진 상태다.
업계에서는 향후 지급 기준이 정형화되면 AI 활용 범위도 크게 넓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AI가 치료 횟수와 진단명, 약관 기준만 입력받아 지급 금액을 자동 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A손해사정법인 대표는 “향후치료비가 정형화되면 경미 사고는 사실상 AI가 합의를 대신하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며 “예전처럼 담당자가 피해자와 합의금을 조율하는 업무는 크게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어 “예를 들어 AI가 ‘통원치료 10회, 위자료 얼마, 총 지급액 얼마’를 자동으로 계산해 안내하는 구조가 되면 단순 사고는 사람이 개입할 이유가 거의 없어진다”며 “보험사 입장에서는 처리 속도가 빨라지고 비용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쉬운 사건은 AI, 어려운 사건은 사람
이 같은 변화가 외부 손해사정법인에는 반드시 호재는 아니라는 것이 업계의 시각이다. 손해사정업계는 AI가 일감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쉬운 사건만 가져간다’는 점을 가장 우려한다.
그동안 외부 손해사정법인은 실손보험 심사나 소액 보험금 지급, 경미한 자동차사고 조사 등 비교적 정형화된 업무를 대량으로 처리하며 안정적인 수익을 확보해 왔다.
하지만 앞으로 외부 손해사정법인에 남게 될 사건은 사망사고와 후유장해, 과실비율 분쟁, 보험사기 의심 사건처럼 사람의 판단이 필요한 고난도 사건들 가능성이 높아진다. 의료기록을 수백 쪽 검토하거나 병원을 방문하고 피해자를 면담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사고 현장 확인과 의료·법률 검토까지 필요해 처리 기간도 길고 민원이나 소송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높다.
보험사 입장에서는 AI를 통해 비용 절감 효과를 기대할 수 있지만 외부 손해사정법인은 수익성이 높은 단순 업무가 줄고 고난도 사건 비중이 커지면서 기존 사업 모델을 재검토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분석이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단순·반복 업무는 AI가 맡고 사람은 고난도 사건에 집중하는 구조가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면서 “보험사는 효율성을 높일 수 있지만 외부 손해사정법인은 수익 모델 자체를 새롭게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AI 시대에서 손해사정사의 역할이 오히려 더 전문화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B손해사정법인 대표는 “AI가 판단하기 어려운 사건은 결국 사람이 맡을 수밖에 없다”며 “같은 진단을 받아도 피해자의 직업이나 나이, 후유증 정도에 따라 노동능력 상실률이나 손해액이 달라진다. 이런 부분은 현장조사와 경험이 필요해 AI가 대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차량 범퍼가 긁혔는지, 휴대전화 액정이 깨졌는지처럼 정형화된 사고는 사진만으로도 AI가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며 “하지만 보험사기 의심 사건이나 사망·후유장해 사건은 사고 경위부터 치료 과정, 의무기록, 피해자의 생활환경까지 종합적으로 살펴야 해 결국 사람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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