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세계 최초 와인'의 반격…아르메니아가 다시 포도밭을 깨우는 이유 [홍미연의 와인 스토리:지(知)]
- 브랜디 생산기지에 머물렀던 6100년 역사의 산지, 와인 산업 재도약
지정학 리스크 속 수출 다변화 승부수…유럽·미국 시장 정조준
공교롭게도 같은 달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 인근에서는 세계 와인업계의 시선이 집중되는 행사가 열렸다. 세계적인 국제 와인대회 ‘콩쿠르 몽디알 드 브뤼셀(Concours Mondial de Bruxelles)’이 아르메니아에서 개최된 것이다.
예레반에서 약 28㎞ 떨어진 가르니 신전에는 대회 개막을 알리는 문장이 투영됐다. “Armenia, the oldest newest wine country.” 가장 오래된 동시에 가장 새로운 와인의 나라. 이 모순적인 표현 속에는 아르메니아 와인 산업이 처한 현실과 야망이 함께 담겨 있다.
아르메니아는 스스로를 와인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로 소개한다. 성경 창세기에 따르면 대홍수 이후 노아의 방주가 도착한 곳은 아라라트산이다. 물이 빠진 뒤 노아가 처음 심은 작물이 포도나무였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아르메니아인들의 정체성에 깊게 남아 있다. 물론 이는 신화의 영역이다. 그러나 고고학은 이 신화에 흥미로운 근거를 더했다. 2011년 국제 연구진은 아르메니아 남부 바요츠 조르 지역의 아레니-1 동굴에서 기원전 4100년 무렵의 와인 양조 시설을 발견했다. 포도 압착 시설과 발효 용기, 저장 시설, 포도씨가 함께 출토됐다. 학계는 이를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오래된 완결형 와인 양조 유적으로 평가한다. 6100년 전 이미 이곳에서는 체계적인 와인 생산이 이뤄지고 있었던 셈이다.
노아의 포도밭과 세계 최고의 양조장
현지 와인업계는 이 유산을 단순한 관광 자산이 아니라 산업 경쟁력으로 활용하고 있다. 프랑스 보르도와 이탈리아 토스카나가 수백 년의 역사를 강조한다면, 아르메니아는 수천 년의 시간 자체를 브랜드로 내세운다. 아르메니아 와인의 핵심 경쟁력은 토착 품종에 있다. 대표 품종은 레드 와인용 포도인 ‘아레니 누아르(Areni Noir)’다. 이 품종은 수천 년 동안 바요츠 조르 지역에서 재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레니 누아르는 검붉은 과실향과 선명한 산도, 적당한 탄닌 구조를 갖는다. 해발 1000~1500m에 이르는 고지대 포도밭과 화산성 토양, 큰 일교차가 결합되면서 독특한 풍미를 형성한다.
화이트 품종 가운데서는 ‘보스케핫(Voskehat)’이 대표적이다. 아르메니아어로 ‘황금 열매’를 의미하는 이 품종은 흰 꽃과 살구, 복숭아 향이 특징이다. 여기에 화산성 토양에서 비롯된 미네랄감이 더해지며 독특한 개성을 만든다. 최근에는 하그타낙(Haghtanak), 카눈(Kangun), 가란 드마크(Garan Dmak) 등 다양한 토착 품종을 활용한 실험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세계 와인시장이 국제 품종 중심에서 지역 고유 품종 중심으로 이동하는 흐름 속에서 아르메니아는 오히려 차별화 기회를 얻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역사와 품종을 보유하고도 아르메니아 와인이 세계 시장에서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브랜디 산업에 있다. 1887년 예레반에 대규모 증류소가 설립된 이후 아르메니아는 소비에트 연방의 대표적인 브랜디 생산 기지로 성장했다. 특히 ‘아르메니안 코냑’은 소련 시절 최고급 주류로 평가받았다. 처칠이 즐겨 마셨다는 일화까지 더해지며 상징적인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와인 산업이 상대적으로 소외됐다는 점이다. 소련은 아르메니아를 고급 브랜디 생산 거점으로 육성했고 포도 재배 역시 상당 부분이 증류용 원료 생산에 집중됐다. 자연스럽게 프리미엄 와인 산업은 성장 기회를 얻지 못했다.
독립 이후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브랜디 수출은 안정적인 외화 수입원이었지만 와인 산업은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 채 오랫동안 변방에 머물렀다.
지정학이 만든 새로운 기회
변화의 시작은 해외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계 기업인들로부터 나왔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미국과 프랑스, 아르헨티나 등지의 디아스포라 자본이 고국 와인 산업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대표 사례가 카라스 와이너리다. 아르헨티나 출신 아르메니아계 사업가 에두아르도 에우르네키안은 대규모 포도원을 조성하고 세계적인 와인 컨설턴트 미셸 롤랑을 영입했다. 현대적 양조 기술과 토착 품종이 결합하면서 아르메니아 와인의 품질은 빠르게 향상됐다.
최근에는 NOA, 트리니티 캐니언, 조라 등 국제 시장에서 주목받는 생산자들도 등장했다. 특히 조라는 세계적 와인 평론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으며 아르메니아 와인의 존재감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현재 아르메니아의 연간 와인 생산량은 약 1400만~1600만 리터 수준이다. 규모만 놓고 보면 프랑스나 이탈리아는 물론 인근 조지아와 비교해도 작은 시장이다. 그러나 업계는 양보다 질에 집중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러시아 의존도를 줄이고 미국, 영국, 독일, 북유럽, 아시아 시장으로 진출을 확대하는 것이 목표다.
여기에 또 다른 변화도 기다리고 있다. 아르메니아는 EU와의 협정에 따라 2032년까지 브랜디 제품에서 ‘코냑(Cognac)’ 명칭 사용을 중단해야 한다. 수십 년 동안 활용해 온 대표 브랜드 자산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다. 결국 아르메니아는 브랜디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 와인을 새로운 국가 브랜드 산업으로 육성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러시아 시장 축소와 코냑 명칭 폐지라는 위기는 역설적으로 와인 산업 성장의 계기가 되고 있다.
가르니 신전 벽면을 비춘 문구처럼 아르메니아는 지금 자신을 “가장 오래된, 가장 새로운 와인의 나라”로 다시 정의하고 있다. 6100년 전 세계 최초의 양조장이 있었던 땅. 그리고 이제 막 세계 시장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신흥 와인 국가. 아르메니아 와인의 진짜 이야기는 어쩌면 지금부터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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