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왜 모든 ‘1원’은 같은 가치여야 하는가 [스페셜리스트 뷰]
- 원화 스테이블코인 논쟁이 던진 ‘화폐의 단일성’ 질문
디지털 금융혁신 속 통화질서의 원칙 고민해야
[김충화 한국은행 국장] 우리는 보통 모든 1원의 가치가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은행 계좌에 들어 있든 어떤 결제 앱으로 송금하든, 현금이든 예금이든 1원은 언제나 1원의 가치를 가진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자명해 보이는 질서는 사실 중앙은행과 금융제도가 오랜 시간 구축해온 정교한 공공 인프라 위에서 유지된다.
최근 국내에서 원화 연동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제도권 안으로 편입하려는 논의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특정 법정통화나 실물자산에 가치를 연동한 디지털 자산으로 비트코인과 같은 기존 암호자산의 가격 변동성을 줄이면서도 블록체인 기반의 프로그래머빌리티(programmability)를 구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금융산업의 차세대 인프라로 주목받고 있다. 실제로 글로벌 결제·송금 시장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한 실험이 본격화되고 있으며 미국과 유럽에서도 제도화 논의가 빠르게 진전되고 있다.
화폐의 단일성이라는 보이지 않는 질서
문제는 이 논의가 단순한 기술 혁신이나 산업 육성의 차원을 넘어 현대 통화체계의 핵심 원리인 ‘화폐의 단일성’(singleness of money)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는 점이다. 화폐의 단일성은 동일한 액면가의 화폐는 발행 주체나 유통 형태와 무관하게 경제 내에서 동일한 가치로 수용돼야 한다는 원칙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이론적 개념이 아니다.
화폐의 단일성은 현대 금융시스템의 신뢰 구조를 떠받치는 가장 근본적인 제도적 토대이며 역사적으로 이 원칙이 흔들릴 때 금융 불안과 경제적 혼란은 반복적으로 발생해왔다. 오늘날 경제주체들은 현금·은행예금·간편결제 잔액·카드 결제 등 서로 다른 형태의 화폐를 사용하지만 누구도 “어느 은행의 1만원이 더 가치 있는가”를 고민하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관습이 아니라 정교한 공적 제도의 결과다.
현대 통화체계는 사실상 계층적(hierarchical) 구조를 가진다. 최상위에는 중앙은행 화폐인 현금과 지급준비금이 존재하고 그 아래에 시중은행 예금과 다양한 화폐성 금융부채가 위치한다. 이 구조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이유는 하위 화폐가 제도적으로 중앙은행 화폐와 액면가 교환이 보장된다는 신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의 최종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 기능 ▲예금보험제도 ▲지급결제 인프라 ▲은행 규제 체계가 결합되면서 “1원은 어디서나 1원”이라는 단일성이 유지된다. 이 원칙은 단순한 편의성의 문제가 아니다.
화폐는 ▲교환의 매개 ▲가치 저장 수단 ▲가치 척도라는 세 가지 기능을 수행하는데, 그 중 가치 척도(unit of account) 기능은 화폐의 단일성과 직결된다. 경제주체들이 동일한 기준 단위를 공유해야 가격 비교와 계약 체결, 장기적 투자 판단이 가능해진다. 만약 동일한 명목가치의 화폐가 서로 다른 할인율로 거래되기 시작한다면 거래비용은 급증하고 가격체계는 왜곡된다. 결국 자원배분의 효율성 자체가 훼손된다.
화폐 신뢰의 본질은 특정 발행기관에 대한 신뢰만이 아니다. 그것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재정건전성·금융규제·지급결제시스템 등 통화체계를 구성하는 전체 제도에 대한 신뢰다. 특히 디지털 금융환경에서는 이 신뢰의 취약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2023년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 당시 단 하루 만에 약 420억 달러 규모의 예금 인출 요청이 발생한 사례는 디지털 시대의 뱅크런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전개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신뢰는 장기간에 걸쳐 축적되지만 붕괴는 순식간에 발생한다.
자유은행시대의 역사적 교훈
화폐의 단일성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지 않을 경우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는 19세기 미국의 자유은행시대가 극명하게 보여준다. 1837년부터 1860년대 초반까지 미국에서는 연방 차원의 통일적 통화체계가 부재한 가운데 각 주 정부의 인가를 받은 민간은행들이 자체적으로 은행권(banknote)을 발행했다. 그 결과 전국에서는 수천 종의 은행권이 뒤섞여 유통됐다. 당시에는 민간 경쟁이 금융혁신과 효율성을 높일 것이라는 기대가 존재했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만큼 안정적이지 못했다.
은행권의 가치는 발행은행의 신용도와 지급능력에 따라 달라졌고 동일한 1달러 지폐조차 지역과 발행기관에 따라 할인돼 거래됐다. 뉴욕의 우량은행이 발행한 은행권은 거의 액면가로 유통된 반면 변방 지역의 취약한 은행이 발행한 은행권은 큰 폭의 할인 가격으로 거래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상인들은 수백 종에 달하는 은행권의 실제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뱅크노트 디텍터’(banknote detector)라는 주간 간행물을 참고해야 했다. 거래비용은 급증했고 위조지폐 문제도 만연했다. 특히 지급준비금이 충분하지 않은 이른바 ‘와일드캣 뱅크’(wildcat bank)들이 과도한 은행권 발행에 나서면서 금융 불안은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다만 경제사 연구에서는 이러한 혼란이 민간 화폐 발행 자체보다는 당시 미국 특유의 분절적 은행 규제와 지점 확장 제한 등 제도적 제약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실제로 18~19세기 스코틀랜드 자유은행체제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으로 운영된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그럼에도 미국 자유은행시대의 경험은 화폐의 단일성이 단순한 시장 경쟁만으로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어렵고 신뢰 가능한 공적 결제·청산 인프라와 규율 체계가 병행돼야 함을 보여준 사례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후 미국은 1863~1864년 국법은행법(National Bank Acts)을 통해 국법은행 중심의 은행권 발행 체계를 구축했고 1913년 연방준비제도(Fed) 설립을 거치며 현대적 중앙은행 체계를 확립하게 된다.
스테이블코인, 새로운 민간 화폐인가
흥미로운 점은 21세기 스테이블코인이 19세기 민간 은행권과 일정한 구조적 유사성을 가진다는 데 있다. 복수의 민간 발행기관이 각자의 담보자산과 신용에 기반해 화폐성 청구권을 발행하고 그 안정성이 발행기관의 건전성에 의존한다는 점에서다. 현재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시장은 달러 연동형 스테이블코인이 사실상 지배하고 있다. 테더(USDT)·써클(USDC) 등을 중심으로 시장규모는 이미 2500억 달러를 넘어섰으며 일부 신흥국에서는 사실상 달러 대체 결제수단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복수의 민간 발행자에 의해 발행될 경우다. 발행사의 ▲신용도 ▲준비자산 구성 ▲유동성 관리 능력 ▲환매 조건 등에 따라 동일한 ‘1원 기반 스테이블코인’조차 시장에서 서로 다른 가치로 거래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이러한 취약성은 더욱 확대된다. 2022년 테라-루나 사태는 알고리즘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구조적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다만 테라-루나와 같은 알고리즘형 스테이블코인은 준비자산 기반 담보형 스테이블코인과 구조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점 역시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담보형 스테이블코인 역시 준비자산의 유동성 문제가 발생하거나 대규모 환매 요구가 동시에 발생할 경우 액면가 유지에 실패할 수 있다. 이 경우 위험은 특정 투자자 손실에 그치지 않는다. 스테이블코인이 지급결제 수단으로 광범위하게 활용될수록 그 충격은 실물경제와 금융시스템 전반으로 빠르게 번질 수 있다.
디지털 시대의 화폐 질서 설계할 때
스테이블코인 자체를 무조건 금지하거나 배제하는 데 논의의 초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민간 디지털 화폐가 확산되더라도 “1원은 언제나 1원”이라는 화폐의 단일성이 흔들리지 않도록 만드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 제도적 조건이 충족될 필요가 있다. 우선 스테이블코인의 준비자산이 충분한 안전성과 유동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위기 상황에서도 이용자가 언제든 액면가로 환매할 수 있다는 신뢰가 유지되지 않는다면 화폐의 단일성은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준비자산 역시 변동성이 큰 위험자산이 아니라 현금과 단기 국채 등 높은 유동성과 안정성을 갖춘 자산 중심으로 구성될 필요가 있다. 준비자산의 외부 감사와 투명한 공시 체계 역시 신뢰 유지의 핵심 조건이다.
발행기관에 대한 엄격한 인가와 상시 감독 체계 역시 필수적이다. 화폐와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는 이상 최소한 은행에 준하는 수준의 건전성 규율이 적용될 필요가 있다. 특히 대규모 환매 상황에서도 안정적인 유동성 공급이 가능하도록 환매 지연 및 제한 등 상환 유연화 장치와 은행 등 금융중개기관을 통한 유동성 지원 체계와 같은 비상 대응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또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테이블코인이 기존 지급결제 시스템과 어떻게 연계되는지다. 다양한 민간 디지털 화폐가 발행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중앙은행 화폐를 기준으로 액면가 교환이 가능해야 한다. 그래야만 서로 다른 디지털 화폐들이 동일한 가치 체계 안에서 안정적으로 유통될 수 있다. 최근 한국은행이 ‘한강 프로젝트’를 통해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와 예금토큰 등 새로운 디지털 결제 인프라를 실험하는 것도 디지털 환경에서 화폐의 단일성과 최종 결제 기능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점검하는 실증적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스테이블코인 논쟁의 핵심은 기술혁신 자체가 아니라 디지털 시대에 화폐의 공공성과 통화질서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있다. 19세기 미국 자유은행시대의 경험은 민간 화폐 경쟁이 일정 수준의 혁신과 효율성을 가져올 수는 있지만 화폐의 단일성이 훼손될 경우 그 사회적 비용 역시 매우 커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원화 스테이블코인 제도화 논의는 단순한 산업 진흥 논리만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복수 발행사의 스테이블코인이 위기 상황에서도 안정적으로 액면가를 유지할 수 있는지, 이용자 보호 장치와 준비자산 규율은 충분한지, 디지털 환경에서도 원화 기반 지급결제 질서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한 면밀한 논의와 제도적 보완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19세기 영국 경제사상가 월터 배젓(Walter Bagehot)의 말처럼 화폐는 스스로 질서를 유지하지 않는다. 디지털 시대에도 “모든 1원은 같은 가치여야 한다”는 화폐의 단일성 원칙만큼은 절대 흔들려서는 안 된다.
필자는 카이스트(KAIST) 금융전문대학원에서 금융학을 전공하고 미국 공인재무분석사(CFA) 자격을 취득했다. 1999년 한국은행에 입행한 이후 뉴욕사무소 과장, 국제국 차장, 발권국 부장 등을 거쳤으며 현재는 국회예산정책처에서 파견 근무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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