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 일반
글로벌로 문 넓히는 ‘KRX’… 거래시간·공시·감시 대수술
- [한국을 세일즈하라]②
야간 거래·공시 선진화·AI 감시 동시 추진… 10년 만의 대수술
유동성 분산·상장사 영문 공시 부담 진통… 보완책 마련 목소리도
[이코노미스트 이병희 기자] 한국거래소가 ▲해외 기관투자자 유치 ▲거래시간 연장 ▲시장감시 고도화를 추진하면서 글로벌 거래소로의 체질 개선에 속도를 내고 있다. 자본시장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한국 증시의 접근성을 높이고 세계 주요국과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한 종합 개편에 나선 것이다.
최근 해외 주요국 거래소들은 24시간 거래 체제로 전환하는 등 유동성 흡수 경쟁을 벌이고 있다. 거래시간 확대와 공시 및 감시 체계를 선진화하는 작업이 필수 과제로 떠올랐다는 해석이다.
거래소는 단순한 제도 변경을 넘어 해외 주요 기관투자자들을 직접 공략하는 ‘글로벌 세일즈’ 행보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정은보 한국거래소 이사장은 미국 최대 공적연기금인 캘리포니아공무원연금(CalPERS)을 방문해 한국 증시의 제도 개선 성과와 투자 매력을 직접 설명했다. 또 뉴욕증권거래소(NYSE) 등 글로벌 주요 거래소와의 협력 관계를 강화하며 해외 자금을 국내로 끌어들이기 위한 행동에 나섰다. 한국 증시의 저평가 요인으로 지적받아온 접근성·투명성 문제를 해결해 해외 기관 자금을 유입시키겠다는 전략이다.
10년 만에 증시 개편… 오후 8시까지 ‘실시간 매매’ 가능
거래소 변화의 중심에는 9월 14일 개장한 ‘오후 8시 애프터마켓’이 있다. 거래소는 저녁 시간대 매매 환경을 마련해 해외 증시 변화에 국내 투자자들이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한편 글로벌 거래 시간표에 맞춘 유동성 체계를 갖추겠다는 방안이다.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운영하던 10분 단위 시간외단일가매매 제도를 전면 폐지하고 오후 4시부터 8시까지 실시간으로 매수·매도 호가가 일치하면 체결되는 ‘시간외접속매매(애프터마켓)’를 도입했다. 이에 따라 주식시장의 실질적인 일일 거래 마감 시각은 기존 오후 6시에서 오후 8시로 2시간 연장됐다. 대체거래소(ATS) 넥스트레이드(NXT)가 선점한 저녁 시간대 유동성 쟁탈전도 본격화됐다.
NXT가 저렴한 수수료와 조기 개장을 앞세우고 있다면 한국거래소는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 상장주식 상당수를 아우르는 넓은 거래 대상을 강점으로 내세운다. 초기 점유율은 증권사 최선집행의무(SOR·Smart Order Routing) 엔진의 주문 배분 방식과 사전 마케팅에 따라 갈릴 전망이다.
거래시간 연장은 장기적으로 글로벌 24시간 거래 체제로 가기 위한 발판으로 해석된다. 거래가 오후 8시까지 이어지더라도 공식 종가와 다음 거래일 기준가격은 정규시장 종가(오후 3시 30분)를 유지하며 위험 종목이나 초저유동성 종목 등은 거래 대상에서 제외된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주요 선진국 거래소들이 24시간 거래를 지향하는 만큼 우리나라에서도 이번 애프터마켓 시스템이 안정화되면 프리마켓 도입과 24시간 거래 체제로의 단계적 전환이 가속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상장기업 체질개선… 부실기업 솎아내기 본격화
거래시간 확대와 시장 개방에 발맞춰 주식시장을 보다 건전하게 만들기 위한 감시·퇴출 체계도 대폭 강화됐다. 거래소 시장감시위원회는 온라인상의 종목 정보와 이상거래 징후를 실시간으로 분석하는 인공지능(AI) 기반 감시 시스템을 가동했다. 이를 통해 불공정거래 징후를 초기에 포착하고 불법 리딩방이나 온라인 루머에 따른 시장 왜곡 현상을 선제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야간 거래 신설 등으로 불공정거래 노출 우려가 커진 만큼 감시 고도화가 핵심 과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부실기업의 조기 퇴출을 통한 시장 정화 작업도 강력하게 추진된다. 거래소는 시가총액이나 매출액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거나 장기간 재무건전성이 악화된 상장사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 한계기업을 조기에 퇴출시키고 있다. 우량기업 중심으로 자금이 선순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취지다.
투자자 정보 접근성 확대와 기업 투명성 제고를 위해 공시 제도 전반도 대대적으로 손질한다. 코스피 시장에서는 해외 투자자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자산 2조원 이상 상장사에 영문공시를 의무화하고 2027년 3월부터는 코스피 전체 상장사로 의무 대상을 확대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거래소 관계자는 “공시 관련 제도 개선을 통해 글로벌 투자자의 우리나라 자본시장 접근성이 한층 제고될 것”이라며 “상장기업의 중요한 정보가 일반 주주에게도 적시에 제공돼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책상 위 글로벌화 전략” 기업 부담 증가 외면 지적도
일각에서는 거래소의 글로벌화 전략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무리한 추진으로 국내 주식시장의 변동성이 커지거나 기업들의 부담이 증가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야간 거래의 경우 정규장에 비해 시장 참여자와 잔량이 부족하다는 점이 한계로 꼽힌다. 주식 거래량이 적으면 소량의 매매만으로 주가가 단숨에 급등락하는 가격 왜곡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야간 시장은 정규장과 달리 충격 완화 장치가 부족해 투자자들의 피해도 커질 수 있다. 여기에 증권사의 인력 운용 부담도 현실적인 문제로 작용한다.
공시 제도 강화에 따른 상장사들의 행정적·재정적 부담 문제도 있다. 일부 상장사들은 영문 공시 대응을 위한 전문 인력이 부족하다며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코스피 상장사라 하더라도 내수 위주 기업이 많고 실제 영업이익이 많지 않은 곳도 상당수”라며 “영문공시를 위해 인력을 별도로 두거나 회계법인에 유료로 맡길 만큼 여유롭지 않은데 정부가 일방적으로 제도를 의무화하고 나서면서 부담이 커졌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상법 개정 등 굵직한 이슈에 밀려 영문 공시 의무화 제도가 주목받지 못하고 있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문제 중 하나”라고도 했다.
거래소 측은 “원활한 제도 안착을 위해 번역 지원 서비스를 확대하고 영문공시 용어집을 발간하는 등 상장사의 역량 강화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관계자는 “정부와 거래소가 유가증권시장 상장사를 모두 삼성전자나 SK 정도로 보는 것 같다. ‘문제가 생기면 그때 가서 생각하자’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며 “잘하는 기업에 혜택을 주는 인센티브 제도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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