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공급의 속도는 부지가 아니라 절차에서 나온다[김현아의 시티라이프]
- [주택공급 이것이 문제다]②
부지가 아니라 속도,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
[김현아 가천대 사회정책대학원 초빙교수·정책평가연구원 연구위원] 용산공원에 집을 지어도 되는가. 서울시가 지난 8월 20일부터 나흘간 시민 1000명에게 물었더니 반대가 63.9%, 찬성이 32.0%였다. 성별이나 연령, 거주 권역을 어떻게 나누어도 반대가 60%를 넘었다.
반대 이유로 꼽힌 것은 “단기적인 주택난 해소를 위해 미래 세대가 이용할 공원을 훼손하는 근시안적 정책”이라는 응답으로 81.2%였다. 시민들은 이 문제를 주택 문제가 아니라 도심 녹지를 어느 세대의 몫으로 남길 것인가의 문제로 보고 있었다. 공원을 헐어 그 자리에 집을 짓는 것에 대한 논란이 우리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국도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다.
다만 그들이 손대는 곳은 도심 공원이 아니라 도시 외곽 그린벨트다. 영국 노동당 정부는 2024년 집권 직후 국가계획정책체계(NPPF)를 개정해 보전 기능을 사실상 상실한 그린벨트를 ‘그레이벨트’(Grey Belt)로 재분류하고, 주택 목표를 채우지 못하는 지자체는 이 땅을 개발에 쓸 수 있게 했다. 임기 5년 내 150만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린벨트 정책까지 포함한 계획체계 전반을 손보기로 한 것이다. 우리 정부가 8·13 대책에서 수도권 그린벨트를 풀어 23만호를 신속 공급하겠다고 밝힌 것과 발상의 뿌리가 다르지 않다.
최악의 주택위기, 150만호 공약이 나온 이유
2024년 집권한 노동당은 스스로 “역대 최악의 주택위기를 물려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과장이 아니다. 2025년 잉글랜드의 중위 주택가격은 30만 파운드로 상용근로자 중위연봉의 7.6배였다. 2000년만 해도 4배 남짓이던 것이 20여 년 만에 두 배 가까이 벌어졌고, 런던은 10.6배다. 임대료도 기록을 새로 쓰고 있다. 2026년 7월까지 1년간 잉글랜드의 평균 월세는 3.8% 올라 1451파운드, 런던은 2317파운드가 됐다. 가장 심각한 지표는 2025년 말 현재 임시거처에 머무는 가구가 13만4210가구에 달했고 그 안에서 지내는 부양아동도 17만6130명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실제 늘어난 주택(신축+용도전환-멸실)은 정부가 필요하다고 보는 연 30만호에 못 미친다. 그래서 노동당은 150만호 주택공급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규모로만 보면 우리의 어떤 공급대책과 견주어도 작지 않다. 여기에 더해 공급의 속도를 높이기 위한 인허가 제도도 계속 손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주택공급 정책은 정권에 따라 그 부침이 가장 심한 분야 중 하나다. 도심의 재개발·재건축을 활성화하자는 측과 유휴부지나 도시 외곽의 신도시 개발을 주장하는 측이 늘 팽팽하게 맞선다. 그러나 어떤 쪽이든 모두 과거보다 사업 진행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과거 문재인정부에서 추진됐던 3기 신도시(2019년)가 7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진행 중인 것만 봐도 과거보다 신도시 공급의 속도가 늦어진 것은 분명하다.
서울시가 지방정부 차원에서 ‘신속-통합기획’을 추진하면서 재개발·재건축 사업 초기 단계의 소요 기간을 대폭 줄였지만, 중앙정부가 주도권을 쥔 세제와 금융, 규제지역 지정이 엇박자를 내거나, 조합원들 간의 갈등과 건설자재비·임금 상승 같은 비제도적 요인이 겹치면 아무리 인허가 기간을 줄여도 착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용산공원도 다르지 않다. 부지가 정해진다 해도 토양정화와 협의에 걸리는 시간이 결코 짧지 않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공급확대 정책의 핵심은 새로운 부지가 아니라, 기존에 추진되고 있는 사업들의 속도를 높이는 일이다. 그런 측면에서 부지를 정하는 데 정치적 자본을 쓸 것인지, 아니면 실질적인 공급의 속도를 높이는 데 쓸 것인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영국 노동당은 진보정당이면서도 공급 규제 완화를 주택공급의 도구로 선택했다. 수요억제와 수요관리에 정치적 자산을 쏟고 있는 우리와 사뭇 다른 접근이다.
이동을 밀어준 쪽, 붙들어 맨 쪽…영국과 우리의 수요 정책
영국 노동당은 원래 주택공급에 적극적인 정당이었다. 전후 영국의 카운슬 하우징, 즉 지방정부가 직접 짓고 직접 운영하는 공공임대주택의 대량 건설이 노동당의 오랜 전통이었다. 2019년 총선에서도 해마다 10만호의 카운슬 하우스를 짓겠다고 공약했고, 당시 주택 분야를 맡았던 인사는 “시장이 해내지 못했다”며 국가가 더 직접 통제하겠다고 말했다.
반면 영국 보수당은 국민들의 자가보유를 촉진하는 정책을 강조했다. 대처 정부의 주택구입권(Right to Buy)은 카운슬 하우스에 살던 세입자가 그 집을 할인된 가격으로 사서 자가로 옮겨가게 했고, 2013년의 헬프투바이(Help to Buy)는 신축주택 구입자에게 집값의 20%(런던은 최대 40%)를 지분대출로 빌려줬다. 물론 이 정책들은 부작용(주택구입권의 경우 공공임대주택 재고 감소)과 비판이 있었지만, 세입자가 자가로 옮겨가도록 돕는 정책이었다.
우리나라의 수요 정책은 반대편에 서 있다. ‘1가구 1주택 실거주’를 사실상 규범으로 삼고 그 이외의 이동과 점유에는 무거운 세금과 대출 규제를 적용한다. 영국이 이동을 밀어주다 부작용을 낳았다면, 우리는 이동을 붙들어 매면서 부작용을 만들고 있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자. 공공임대 공급확대를 주장해왔던 노동당이 규제 완화를 함께 집어든 데는 이유가 있다. 영국은 땅이 없어서 집을 못 짓는 나라가 아니다. 국토의 대부분은 여전히 농지와 임야로 남아 있다. 모자란 것은 땅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면서 동시에 법적으로 개발이 허용된 땅이다. 1947년 도시농촌계획법 이후 잉글랜드의 계획체계는 개발을 원칙적으로 막아두고 개별 심사로 예외를 허용하는 방식으로 작동해왔다. 택지 부족이 규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해법은 재정이 아니라 규칙에 있다.
누가 결정하는가, 권한을 옮긴다는 것
지난해 12월 왕실재가를 받은 ‘계획·인프라법’(Planning and Infrastructure Act 2025)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법은 전국 단위 위임체계(national scheme of delegation)를 새로 도입해 주택 공급의 속도를 높이려 한다. 그동안 영국의 지방계획청은 어떤 인허가를 공무원 전결로 처리하고 어떤 것을 계획위원회로 올릴지 각자 정해왔다.
계획위원회는 선출직 지방의원으로 구성되고, 사업 하나하나를 건별로 심사해 승인 여부를 예측하기 어렵게 만드는 구조였다. 개정법은 정부가 하위 법령으로 위원회에 올릴 수 있는 신청의 범위를 제한하고 나머지는 훈련받은 전문 계획공무원이 결정하게 하는 근거를 마련했다. 위원 자격도 까다로워져 사전 교육을 이수해야 자리에 앉을 수 있다. 야당은 선출되지 않은 공무원이 지역의 일을 결정하게 된다고 반박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정부가 부지를 찾는 대신 결정의 위치를 옮겨 속도를 얻으려 했다는 점이다.
정부가 기대하는 것은 민간의 움직임이다. 사회·저렴주택 프로그램에 재정을 쏟는 영국도 그 돈으로 지을 수 있는 주택은 전체 목표 150만호의 20%에 그친다. 나머지 80%는 민간이 지어야 한다.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는 영국 정부의 논리가 여기서 나온다. 공공이 재정과 시행을 함께 떠안는 우리 방식과는 무게중심이 다르다.
최근 우리 안에서도 인허가 권한을 옮기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정부와 여당은 주택 공급의 속도를 높이겠다며 500가구 이하 소규모 재개발·재건축의 정비구역 지정 권한을 서울시에서 구청장에게 넘기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서울시는 8월 24일 브리핑에서 난개발과 특혜 시비를 이유로 반대 입장을 밝혔다. 재개발·재건축의 편익은 해당 구역과 자치구에 떨어지지만, 교통 혼잡과 학교 수용, 기반시설 부담은 생활권 전체가 나눠 진다. 결정권을 편익이 귀속되는 단위에 두면 판단은 빨라지지만 비용은 다른 곳으로 넘어간다. 영국의 권한 조정과는 정반대 방향이다.
신속한 주택공급을 위해서 규제를 풀 것인지 재정을 넣을 것인지, 부지를 찾을 것인지 절차를 고칠 것인지는 진보와 보수라는 진영을 따라 갈리지 않는다. 앞선 회에서 본 미국의 초당적 입법도, 영국 노동당의 규제 완화도 결국 같은 이야기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지을 것인가에만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닐까. 영국이 바꾼 것은 부지가 아니라 결정의 규칙이었다.(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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