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 일반
시총 300억 밑돌면 무조건 끝?…법원 급제동에 상폐 기준 강화 ‘일단 멈춤’
- [자본시장 선진화의 그늘]①
법원 “절차·시작점 위법” 가처분 인용…상폐·정리매매 일시 중단
흑자 기업도 쫓겨나는 정량 잣대 논란…거래소, 후속 절차 당분간 유예
[이코노미스트 이병희 기자] 자본시장 선진화와 부실기업 솎아내기를 명분으로 정부와 한국거래소가 강력하게 추진하던 상장폐지 기준 강화 정책에 법원이 제동을 걸었다. 법원은 상장폐지 결정이 내려지기까지의 절차적 정당성이 현저히 결여됐을 뿐 아니라 정책 적용 시점을 가파르게 앞당기면서 기업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최소한의 예측 가능성을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금융당국과 거래소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던 ‘기계적 상장폐지’ 강화 절차에 문제가 있다고 본 것이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2월 ‘부실기업 신속·엄정 퇴출을 위한 상장폐지 개혁 방안’을 발표했다. 7월부터 코스닥 상장유지 시가총액 기준을 150억원에서 200억원으로 올려 잡았다. 유가증권시장 상장유지 기준은 200억원에서 300억원으로 높였다. 당초 2027년 1월부터 적용할 예정이었는데 금융당국은 이를 6개월 앞당겨 올해 7월 1일부터 시행했다. 2028년 1월 시행 예정이었던 ‘유가증권시장 500억원·코스닥 300억원’의 상폐 요건은 1년 앞당겨 내년 1월부터 시행하기로 했었다.
금융당국이 상폐 기준 강화 정책을 앞당긴 것은 한국 증시의 만성적인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는 해석이 나온다. 주식 거래량이 적고 시가총액이 작은 기업은 퇴출시킬 필요가 있었다는 뜻이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한 번 기업공개(IPO)에 성공한 기업은 좀처럼 쫓겨나지 않는 기형적 구조를 깰 필요가 있다”며 “수십 년간 고착화된 낮은 상장유지 시가총액 기준(기존 코스닥 40억원·유가증권시장 200억원 수준)은 ‘좀비 기업’을 장기간 방치하는 부작용을 낳는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속도였다. 당국이 시장에 공표했던 유예기간을 단축하고 개정 기준 적용 시점을 앞당겨 조기 시행하는 강수가 화근이 됐다. 자본시장의 체질을 개선하겠다는 의도가 기업이 대응할 시간을 빼앗는 결과로 이어진 셈이다. 증권업계에서는 증시 상황과 기업의 경쟁력을 면밀하게 살펴보지 않고 시가총액이라는 일률적인 기준만으로 퇴출시키는 방식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이번 정책은 ‘한계기업 정화’가 아니라 시총 하위 기업을 한꺼번에 정리하는 ‘살생부’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한계기업 정화 아닌 살생부”…흑자 기업도 쫓겨나는 ‘낙인효과’
상폐 위기에 내몰렸던 주연테크와 케이엠제약은 한국거래소를 상대로 관리종목 지정 결정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고 법원은 이들 기업의 손을 들어줬다. 가처분 신청이 인용되면서 본안판결 확정 시까지 상장폐지와 정리매매 절차가 중단됐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에 회생 기회도 제대로 주지 않고 정책을 앞당기면서 문제가 커졌다”며 “주연테크와 같은 이유로 상폐 위기에 내몰린 기업들 중 상당수가 법적 대응을 고민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법원이 지적한 상폐 기준 강화 정책의 문제점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기업의 소명 및 이의신청 등 절차적 참여권 전면 미보장 ▲당초 예정된 적용 시점을 앞당겨 조기 시행함에 따른 기업의 예측 가능성 심각한 침해 ▲단기간 내 시가총액 복구를 요구하며 기계적 퇴출을 강제하는 기준의 비례의 원칙 위배다.
특히 거래소는 매출액이나 재무 건전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실질심사 트랙과 달리 시가총액 미달 건에 대해서는 기업심사위원회의 실질심사나 이의신청 절차를 일절 거치지 않고 곧바로 정리매매에 붙이는 ‘형식적 상장폐지’를 적용해 왔다. 법원은 주식시장에서 상장폐지가 갖는 파급력을 고려할 때 해당 기업이 주가 하락의 부당성이나 재무 건전성을 입증하고 소명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절차적 기회조차 박탈한 것은 행정법상 대원칙을 위반한 것이라고 명시했다.
금융당국이 설정한 기계적 정량 기준이 가혹한 낙인효과를 유발하는 악순환을 만든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행 상장규정에 따르면 코스닥 상장사가 시가총액 기준(200억원)을 30거래일 연속 밑돌 경우 즉시 관리종목으로 지정된다. 관리종목에 지정되는 순간 해당 기업은 사실상 자본시장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상황으로 내몰린다. 관리종목 지정 공시가 뜨면 투자자들이 보유했던 주식을 쏟아내고 투매가 이어지면 주가는 더 떨어지게 된다. 이는 시가총액 기준에서 더 멀어지는 결과로 이어진다. 채권 발행이나 유상증자 등 기업의 자본 유입 통로도 사실상 막힌다.
일부 기업 가운데서는 실제 영업이익 창출 능력과 무관하게 퇴출 위기를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7월 말 기준 시가총액 200억원 미만 코스닥 상장사 149곳 가운데 45곳은 흑자기업으로 파악됐다.
법원 “절차적 참여권 침해” 제동…거래정지 8개사 묶인 자금 어쩌나
거래소는 10월 7일 보도자료를 통해 관련 사유로 관리종목 지정된 종목들의 상장폐지 절차를 당분간 유예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거래소 측은 “유사 분쟁 확산에 따른 기업·투자자의 불확실성 증대 가능성을 고려해 관리종목 지정 후 후속 상장폐지 절차는 10월 2일부터 진행하지 않고 있고 향후에도 유예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거래소 측은 가처분 인용 결정에 불복해 법원에 이의신청 및 항고 등을 제기하며 법적 다툼을 이어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만 거래소는 “2026년 10월 2일 이전에 시가총액 미달 상장폐지가 결정돼 거래정지 중인 법인에 대해서는 거래정지를 지속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해당 법인은 ▲신라에스지 ▲골드앤에스 ▲케이엠제약 ▲핀텔 ▲주연테크 ▲세진티에스 ▲에이에프더블류 ▲SHD 등 8개사다.
문제는 해당 기업뿐 아니라 이 기업의 주식을 산 투자자들까지 피해를 보게 됐다는 점이다. 시가총액 기준 적용 시점이 앞당겨지면서 상장폐지 대상이 된 기업은 주가가 하락했고 해당 기업에 투자했던 주주들 가운데 일부는 손실을 감수하고 주식을 처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정리매매 직전에 거래정지 상태가 된 기업의 주주들도 자금이 묶이는 피해를 봤다. 상장폐지 후속 절차가 유예되긴 했지만 거래가 정지되면서 개인 투자자들은 주식을 팔 수 없어 자금이 동결됐기 때문이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정부의 일방적인 정책 밀어붙이기에 애꿎은 투자자들과 기업이 피해를 보고 있다”며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 정책 신뢰성부터 높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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