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불닭·신라면 잘나가는데 왜…K라면이 日 닛신 못 넘는 이유
- [K라면 열풍, 진짜일까]⑥
양날의 검이 된 한국 특유 매운맛
글로벌 인프라 구축·현지화 필요
원래 라면은 맵지 않았다
K-열풍의 원동력이 된 한국 라면 특유의 매운맛은 사실 변형 조리법에서 시작된 것이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제조사 표준법이 아닌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창조하는 모디슈머(Modisumer)에 의해 완성됐다.
1958년 일본의 안도 모모후쿠가 세계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 치킨라멘을 발명했을 때 라면은 전혀 맵지 않았다. 일본 묘조식품의 도움을 받아 1963년 출시된 한국 최초의 라면인 삼양라면 역시 초기에는 고춧가루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순한맛이었다.
한국 라면 특유의 매운맛은 전화 한 통에서 시작됐다. 1960년대 중반 삼양라면이 고소한 풍미로 인기를 얻어갈 무렵, 삼양공업(삼양식품의 전신) 사장실의 전화기가 울렸다.
전화를 건 인물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었다. 그는 삼양라면이 정부의 분식 장려 정책에 공헌한 점을 격려하며 “라면에 고춧가루를 넣어 먹으니 참 맛있었다”고 말했다.
애주가였던 박 대통령은 술을 마신 후 라면을 즐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고춧가루가 라면 특유의 느끼함을 잡아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박 대통령의 조언에 고무된 삼양공업은 라면 스프에 고춧가루를 첨가했다. 이후 한국인의 입맛에 한층 가까워진 삼양라면은 시장 점유율이 80%까지 치솟았다. 물론 당시의 삼양라면도 한국 특유의 ‘매운맛 라면’이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한국 특유의 매운맛 라면은 신라면으로 시장 판도를 바꾼 농심에 의해 완성됐다. 이 회사는 1980년대 초 대대적인 투자로 라면 맛의 질적 변화를 이끌었다. 농심은 1983년 안성탕면을 출시해 큰 성공을 거뒀으며, 이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소고기의 깊은 국물 맛과 고춧가루의 얼큰한 조합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후 농심은 매운맛과 감칠맛을 동시에 담아내는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1986년 10월 시장 판도를 뒤바꾼 ‘신라면’을 선보였다. 다진 양념(다대기)에서 영감을 얻어 진한 매운맛을 구현한 신라면은 출시 직후 돌풍을 일으키며 한국 라면 시장의 주류를 단숨에 매운맛으로 바꿨다.
신라면의 매운맛은 왜 그토록 한국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던 것일까. 답은 인스턴트 라면의 보존성을 높이는 제조 방식에 숨겨져 있다.
라면은 면을 기름에 튀기는 유탕(油湯) 과정을 거친다. 이로 인해 필연적으로 느끼한 맛이 남을 수밖에 없다. 이런 단점이 강렬한 매운맛에 의해 대폭 완화됐다. 기존 라면의 느끼함과 짠맛이 신라면에서는 덜 느껴졌다.
이는 국내 라면 소비량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신라면 흥행 이후 한국은 인구 대비 세계 최대의 라면 소비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하지만 한국 라면은 세계 시장의 주류로 편입되지 못했다. 막강한 내수 시장을 앞세운 중국과 인도네시아 그리고 종주국인 일본의 글로벌 시장 내 입지가 너무 탄탄했기 때문이다.
이런 견고한 장벽은 최근 K-팝으로 대표되는 K-컬처의 글로벌 확산으로 균열이 가고 있다. 유튜브와 틱톡 등을 타고 ‘매운맛 챌린지’(Fire Noodle Challenge)가 유행하면서 한국 라면의 존재가 전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예상 밖 관심에도 아직 세계 시장에서 한국 라면의 입지는 좁다. 당장 매출 지표만 봐도 종주국 일본과의 격차가 크다.
일본 1위 닛신식품의 지난해 매출액은 7881억엔(약 6조8810억원), 영업이익은 650억엔(약 5675억원)에 달한다. 같은 기간 농심의 매출액은 3조5143억원(영업이익 1839억원), 삼양식품 매출액은 2조3517억원(영업이익 5241억원)을 기록했다. 닛신식품 단일 기업의 매출이 한국을 대표하는 두 기업의 합산 매출을 웃돈다.
아이러니하게 한국 라면의 성장과 한계 모두 ‘매운맛’ 그 자체에 있다. 매운맛에 익숙하지 않은 서구권 소비자들에게 한국 라면은 여전히 호기심에 시도하는 ‘이벤트성 특식’으로 소비되는 경향이 짙다. 강한 자극은 미각적 피로도를 높여 잦은 재구매로 이어지기 어렵다. 게다가 현지 공장 생산 비율이 낮아 물류비가 포함된 한국 라면은 가격 접근성 면에서도 불리하다.
실제로 거대 시장에서는 매운 라면보다 현지화된 순한 라면이 압도적인 지배력을 보인다. 멕시코는 일본 도요수산의 ‘마루찬’이 현지 맞춤형 맛과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시장 점유율 약 90%를 장악하고 있다. 약 20억달러(약 2조7600억원) 규모로 추산되는 유럽 시장도 자극적이지 않은 치킨·비프스톡 베이스를 앞세운 네슬레(마기)와 닛신이 오랜 기간 주도권을 쥐고 있다.
한국 라면이 일본을 넘어 세계 최고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매운맛’의 성공에만 안주해서는 안 된다. 매운 음식을 즐기지 못하는 전 세계 대다수 소비자의 일상에 녹아들 수 있도록 순하면서도 감칠맛을 극대화한 신제품 개발이 필수적이다.
동시에 국물 요리가 익숙하지 않은 문화권을 겨냥해 볶음면이나 파스타 형태를 차용한 현지 맞춤형 라면 라인업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
매운맛의 진입 장벽을 낮추고 글로벌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는 새로운 히트작이 탄생할 때 한국 라면 산업은 명실상부한 글로벌 1위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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