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일반
잡기도 어렵고 처벌도 약하다…뻥 뚫린 韓 기술 보호망 [산업스파이, 대한민국을 훔치다]③
- 전문 수사 인력 부족·순환보직에 첨단기술 범죄 대응 한계
검찰청 폐지 후 중수청 출범…수사 경험·전문성 승계 관건
[이코노미스트 원태영 기자] 대한민국 첨단산업의 심장부가 기술 유출에 위협받고 있다. 반도체·이차전지·디스플레이 등 수십년간 국가적 역량을 쏟아 세계 정상에 올려놓은 국가 핵심기술이 경쟁국으로 흘러가는 사건이 빠르게 늘고 있다.
과거 기술 유출이 개별 기업의 영업비밀 침해나 사익을 노린 개인의 일탈로 여겨졌다면 지금은 다르다. 미중 패권 경쟁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 속에서 첨단기술 탈취는 한 국가의 산업 경쟁력과 경제 안보를 흔드는 ‘총성 없는 전쟁’으로 바뀌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에 따르면 국내 핵심기술의 해외 유출 적발 건수는 2021년 9건에서 2025년 33건으로 4년 만에 3.6배 이상 증가했다. 적발 건수는 실제 유출 규모의 일부일 가능성이 크다. 기술 유출은 피해 기업이 신고하지 않거나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범행을 적발해도 해당 자료가 법률상 보호 대상인 기술인지, 피의자에게 해외 사용 목적이 있었는지를 입증해야 한다.
기술 유출 잡아도 입증부터 난관
기술 유출에 대한 국민적 위기의식은 높다. 경총의 대국민 인식 조사에서 응답자의 92.5%는 핵심기술 해외 유출이 국가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심각하다’고 답했다. 91.4%는 주요국처럼 경제 안보 차원의 새로운 법체계가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법정형만 보면 국내 처벌이 마냥 가벼운 것은 아니다. 현행 산업기술보호법은 국가 핵심기술이 외국에서 사용될 것을 알면서 유출하면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고 65억원 이하의 벌금을 함께 부과하도록 규정한다. 산업기술 해외 유출도 1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억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선고형은 법정형에 미치지 못한다. 국내 기술 해외 유출 사건의 역대 최고 형량은 징역 6년4개월이다. 상당수 피고인이 집행유예나 벌금형을 받고, 실형이 선고돼도 비교적 단기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다.
낮은 선고형의 원인을 법원의 관대한 판단으로만 돌리기도 어렵다. 기술 유출 범죄는 ▲유출 자료의 경제적 가치와 비밀 관리 여부 ▲국가 핵심기술 해당 여부 ▲해외 사용 목적 등을 수사기관이 입증해야 한다. 기업이 핵심 자료를 영업비밀로 충분히 관리하지 않았거나 피해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하면 혐의 입증이 어려워진다.
피해 기업이 신고를 주저하는 문제도 있다. 기술 유출 사실이 알려지면 보안 체계가 허술한 기업이라는 낙인이 찍히거나 해당 기술이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추가로 노출될 수 있어서다. 신고가 늦어지면 초기 수사의 골든타임도 놓치게 된다.
업계 관계자는 “유출 정황이 있어도 기업이 피해 기술의 가치와 보호 노력을 입증하지 못하면 무죄가 나올 수 있다”며 “피해 기업이 안심하고 신고하고 수사에 협조할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문 인력 부족…수십만개 파일서 증거 찾아야
국내 기술 유출 수사의 가장 큰 약점은 첨단기술을 이해하는 전문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3나노 이하 파운드리 극자외선(EUV) 공정과 8세대 OLED 증착 장비, 전고체 배터리 전해질 배합 기술 등은 공학 전문가도 장기간 연구해야 이해할 수 있는 고난도 기술이다.
수사기관은 압수수색으로 수십만개의 이메일과 메신저 대화, 디지털 파일을 확보하고도 어떤 자료가 핵심기술이고 실제 유출에 사용됐는지를 가려내야 한다. 산업 지식과 디지털 포렌식 역량을 함께 갖춘 수사관이 필요하지만 이를 충족하는 인력은 부족하다.
기술 분야별 전문 인력을 확보하기도 쉽지 않다. 반도체·배터리·디스플레이 전문가는 대부분 기업과 대학, 연구 기관에 몰려 있다. 공공 부문의 처우와 채용 방식으로는 현장 경험을 갖춘 고급 인력을 영입하는 데 한계가 있다. 전문성을 쌓아도 수사관이 순환보직으로 자리를 옮기면 경험과 노하우가 조직에 축적되지 않는다.
결국 수사기관은 외부 전문가의 감정과 피해 기업의 설명에 상당 부분 의존한다. 이 과정에서 수사가 길어지고 양측의 기술적 주장이 충돌하면 혐의를 입증하기도 어려워진다. 기업이 영업비밀 노출을 우려해 자료 제출에 소극적으로 나서면 수사는 더 지연된다.
기관별 기능이 분산된 점도 문제다. 국가정보원은 해외 연계 유출 징후를 포착하고 경찰과 검찰은 수사와 기소를, 산업통상자원부는 국가 핵심기술 여부 판단을 맡아왔다. 기관마다 전문 인력이 흩어져 있어 하나의 사건에 역량을 신속하게 집중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더욱이 오는 10월 2일 검찰청이 폐지되고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이 출범하면 관련 인지수사 기능도 새 수사 체계로 넘어간다. 검찰이 기술유출범죄 수사지원센터를 통해 축적한 전문성과 수사 경험을 중수청이 안정적으로 이어받을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산업기술 유출 사건은 산업마다 범행 수법과 증거 형태가 달라 축적된 수사 노하우가 중요하다. 조직 개편 과정에서 전문 인력이 이탈하거나 사건 기록과 경험이 제대로 이전되지 않으면 초기 대응이 늦어질 수 있다. 중수청 출범 전까지 인력 배치와 사건 이관 원칙을 구체화하고, 국정원·경찰·중수청·공소청·산업부가 초기부터 공조하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해외는 수사·재판까지 전문화
세계 주요국은 기술 유출을 국가안보 위협으로 규정하고 처벌과 수사 체계를 강화하고 있다. 전문 수사기관과 전담재판부, 보안 심사 등 적발부터 처벌까지 이어지는 체계를 구축했다.
미국은 1996년 제정한 경제스파이법(EEA)을 통해 외국 정부나 기관에 이익을 줄 목적으로 영업비밀을 탈취한 개인을 최대 15년의 징역형에 처한다. 법인에는 1000만달러(약 140억원) 또는 탈취한 영업비밀 가치의 3배 가운데 큰 금액까지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
연방수사국(FBI)은 경제스파이 사건을 국가안보·방첩 문제로 다루고 연방검찰과 공조한다. 외국 정부와의 연계 여부와 자금 흐름, 기술 자료의 이동 경로 등을 추적한다.
대만은 2022년 국가안전법을 개정해 ‘국가핵심관건기술’의 영업비밀을 외부 세력을 위해 빼돌리는 행위를 경제 간첩 범죄로 규율했다. 해외 유출은 5년 이상 12년 이하의 징역과 최대 1억대만달러(약 44억원)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다.
대만은 지식재산·상사법원에 국가안보 사건을 다루는 전문 재판부도 두고 있다. 기술 이해도가 높은 법관이 사건을 신속하게 심리하고 재판 과정에서 기술 자료가 다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다.
일본은 부정경쟁방지법을 통해 영업비밀을 해외에서 사용하거나 공개할 목적으로 침해하면 최대 10년의 징역형을 선고할 수 있다. 법인에는 최대 10억엔(약 88억원)의 벌금을 부과한다. 중요 경제 안보 정보를 취급하는 민관 인력의 신뢰성을 확인하는 보안 심사 제도도 도입했다.
중국도 2023년 개정 반간첩법을 시행해 국가안보·이익과 관련된 문건과 데이터, 자료의 탈취를 간첩 행위에 포함했다. 국가안전 기관의 조사 권한도 확대했다.
해외 사례는 형량 강화만으로 기술 유출을 막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범죄의 범위를 명확히 정하고 전문 기관이 신속하게 수사하며 기술을 이해하는 재판부가 판단해야 처벌의 실효성이 높아진다.
특별법 제정에 나선 국회
국회가 ‘산업스파이 가중처벌 특별법’ 제정에 나선 배경도 여기에 있다. 오는 9월 시행되는 개정 형법은 간첩죄 적용 대상을 ‘적국’에서 ‘외국 또는 이에 준하는 단체’로 확대한다. 그러나 국가 핵심기술이 형법상 국가기밀에 해당하는지 불명확하고 해외 민간기업이 배후인 기술 탈취에는 적용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박균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산업스파이 가중처벌에 관한 특별법안’을 대표 발의할 예정이다. 법안은 외국 정부 등을 위한 기술 유출을 ‘경제간첩죄’, 해외 민간기업을 위한 유출을 ‘경제이적죄’로 구분해 처벌한다. 미수뿐 아니라 예비·음모도 처벌하고 범죄수익을 몰수·추징할 수 있도록 했다.
이원태 국민대 특임교수는 "산업스파이는 개별 기업의 피해를 넘어 국가 경쟁력과 경제 안보를 훼손하는 중대 범죄"라며 "국가 핵심기술의 조직적 해외 유출에는 원칙적으로 실형을 선고하고 유출로 얻은 이익과 해외 기업이 절감한 연구개발 비용까지 철저히 환수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산업기술 유출은 기업 한 곳의 손실을 넘어 우리 산업 생태계와 국가 경쟁력에 장기적인 영향을 주는 문제다. 처벌 강화도 필요하지만, 핵심 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과 중소기업 및 연구 기관에 대한 보안 역량 지원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며 "기술과 인재의 정상적인 교류를 위축시키지 않으면서도 조직적인 해외 유출에는 분명한 책임을 묻는 균형 잡힌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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