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일반
10년 공들인 기술, USB 하나에 넘어갔다 [산업스파이, 대한민국을 훔치다]②
- 휴대전화 카메라에 무너진 기술 안보
반도체부터 조선·방산까지 전방위 침투
[이코노미스트 정길준 기자] 대한민국이 반도체와 미래 산업으로 세계 시장을 호령하고 있지만, 주머니 속 작은 이동식저장장치(USB) 하나와 스마트폰 카메라 앞에서 기술 주권이 통째로 흔들리고 있다. 주요 기술 유출 사건을 재구성해 보니 핵심기술을 빼돌리는 데 거창한 스파이 작전이나 첨단 해킹은 필요하지 않았다.
국내 대표 기업들은 지금도 핵심기술 유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수조원의 연구·개발(R&D) 비용과 수십년에 걸친 임직원의 피땀이 담긴 영업비밀과 노하우가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경로를 거쳐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 출력물과 USB, 스마트폰 촬영부터 퇴직자·협력사를 통한 우회 반출까지 유출 수법도 다양하다.
중국 반도체 추격 빌미
삼성전자가 1조6000억원의 개발비를 투입해 확보한 ‘18나노 D램 공정 기술’은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을 좌우하는 국가 핵심기술이었다. 그러나 이 기술은 전직 임직원의 이직과 무단 반출을 거쳐 중국 CXMT(창신메모리반도체테크놀로지)로 흘러 들어갔다.
삼성전자 전직 임원 등은 퇴직하면서 공정 흐름도와 설계 자료를 몰래 들고 나간 뒤 중국 현지에서 한국인 엔지니어들을 포섭해 공정을 복제했다. 이 과정에 관여한 삼성전자 퇴직자는 수백 단계의 공정 정보를 노트에 베껴 유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CXMT는 이후 D램 양산에 성공했고 한국 반도체 산업은 막대한 잠재적 피해를 떠안았다. 경쟁사가 수년간 거쳐야 할 시행착오와 개발기간을 한꺼번에 단축하면서 한중 간 기술격차도 빠르게 좁혀졌다.
현대자동차의 수소연료전지 스택 제조 기술도 퇴직 임직원의 은닉과 협력사를 통한 우회 경로로 뚫렸다. 스택은 수소와 산소를 반응시켜 전기를 생산하는 수소전기차의 핵심 장치다.
현대차 전 연구원 A씨는 퇴직 당시 ‘사내 제반 자료와 저장매체를 반환하고 폐기하겠다’는 영업비밀 유지 서약서를 회사에 제출했다. 하지만 서약서는 형식에 그쳤다. A씨는 스택 촉매 전극 슬러리 조성비가 담긴 엑셀 파일 출력물 등 5종의 영업비밀을 무단 반출해 자택에 보관했다. 이를 바탕으로 중국 동종 업체로 이직해 관련 업무에 활용하려 했다.
협력업체를 통한 2차 유출 경로도 작동했다. 현대차 설비 협력사 직원 B씨는 업무 목적으로 제공받은 현대차 구매요구사양서 등을 프로젝트가 끝난 뒤에도 지우지 않았다. 사내 보안점검에서 현대차로부터 삭제 요구를 받고도 몰래 보유하다가 중국 자동차 업체에 수출할 수소연료전지 스택 양산 설비를 제작하는 데 부정 사용했다.
장비 사진 찍고 이직자 포섭
SK하이닉스가 2010년부터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 개발한 HKMG 반도체 제조 기술과 세정 공정 노하우도 협력업체 직원들의 손을 타고 해외로 흘러갔다. HKMG는 반도체 미세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전류 누설을 막아 연산 속도를 높이고 전력 소비를 줄이는 차세대 공정 기술이다.
협력사 무진전자 직원들은 반도체 설비 점검과 협업 과정에서 SK하이닉스의 승인 없이 세정장비 제어 패널에 입력된 양산 레시피 화면을 카메라 등으로 촬영해 빼돌렸다. 장비 패널에 표시된 세부 설정값은 수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확보한 세정 공정의 핵심 노하우다.
이렇게 획득한 세정장비 정보와 HKMG 기술은 중국 반도체 제조사에 제공됐다. 이들은 다른 회사에서 이직한 직원을 통해 해당 업체의 초임계 세정장비와 첨단 세정 설비(IRIS) 정보를 넘겨받아 자사의 신규 장비를 설계·제작하는 데 무단 도용하기도 했다. 협력 과정에서 확보한 고객사 기술과 이직자가 가져온 경쟁사 자료가 한꺼번에 악용된 것이다.
디스플레이 분야의 유출 수법 역시 구체적이고 과감했다. 삼성디스플레이에서는 중국과의 기술격차를 10년가량 단축할 수 있고 경제적 가치만 2000억원 이상으로 평가된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생산 기술이 유출 대상이 됐다. 유출범들은 사내에서 취득한 OLED 생산 기술 자료와 설비 사양, 도면 등을 무단 반출해 중국 제조사에 제공하거나 기술 자문 형태로 넘겼다.
LG디스플레이에서는 주재원의 이직 시도가 기술 유출로 이어졌다. 중국 주재원으로 근무하던 직원이 현지 경쟁 업체로의 이직을 타진하는 과정에서 사내 보안 서버에 무단 접속한 뒤 화면에 표시된 기술 자료와 영업비밀을 휴대전화 카메라로 촬영해 빼돌리려다 적발됐다.
학계와 연구 기관도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카이스트 교수가 중국의 해외 인재 유치 사업인 ‘천인계획’에 선정된 뒤 자율주행차 핵심 장비인 라이다 관련 연구 자료를 중국 충칭이공대 연구진에 무단 유출한 사건은 국가 R&D 자산의 보안 체계에도 경종을 울렸다. 기업뿐 아니라 대학과 연구 기관까지 기술 보호망을 촘촘하게 구축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례다.
조선·방산 기술 넘어 한미 군사 기밀까지
기술 유출의 손길은 민간 첨단산업을 넘어 국가안보의 핵심 축인 조선과 방위산업, 군사시설로까지 뻗어나가고 있다.
조선 분야에서는 외국인 경력직 채용의 빈틈을 노린 유출이 발생했다. 인도 국적 엔지니어 D씨는 약 10년 동안 국내 조선 3사를 순차적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석유시추선 핵심 설계 자료를 무단 수집·보관하다가 해외로 빠져나가기 직전 적발됐다. 자유로운 인재 이동을 보장하면서도 퇴직·이직 과정에서 핵심 자료가 함께 이동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하는 과제를 남겼다.
국가안보와 직결된 방위산업 기술 유출도 이어졌다. 해군 출신 방산업체 대표와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직원들은 잠수함 관련 주요 설계 도면을 대만에 유출했다. 육상 방산 분야에서도 이직이 유출 창구가 됐다. 방산업체 연구원들은 국내 경쟁사로 자리를 옮기면서 K2 전차 종합식 보호장치의 핵심인 양압·냉난방장치 기술 자료를 무단 반출했다. 이들을 받아준 경쟁사는 빼돌린 기술을 활용해 해외 방산업체와 수출 계약까지 체결했다.
스파이 행위는 방산기술 탈취를 넘어 군사시설 주변의 직접적인 안보 침해 활동으로 고도화하고 있다. 최근 수사당국은 한미 군사시설 주변에서 안보 침해 활동을 벌인 혐의로 중국군 출신 2명을 구속했다.
중국군 출신 피의자 E씨는 전북 군산공항 인근 호텔에 투숙하며 한미 공군 전투기와 관제탑 간 교신을 불법 도청한 혐의를 받는다. 또 다른 중국군 출신 피의자 F씨는 평택 주한미군 기지 정문 인근에서 군장점을 운영하며 부대 내부 한국인 직원을 포섭해 한미연합군사훈련 관련 자료와 지휘부 문건을 빼돌린 것으로 조사됐다.
이번 적발은 국가안보 최전선에서 축적해 온 국가정보원(국정원)의 추적과 방첩 역량이 빚어낸 성과다. 국정원은 점조직 형태로 은밀하게 움직이는 해외 정보요원들의 실체를 장기간 내사해 파악했고, 치밀한 채증을 통해 안보 침해 사범 검거를 이끌었다. 해외 정보 세력의 활동을 조기에 포착하고 관계 기관 수사로 연결하는 방첩 체계의 중요성을 보여준 사례다.
구멍 뚫린 법망과 솜방망이 처벌
문제는 간첩 행위자를 적발하고도 형법상 간첩죄를 적용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간첩죄 적용 대상을 적국에서 ‘외국 또는 이에 준하는 단체’로 넓힌 개정 형법이 오는 9월 시행되지만, 형벌 법규 불소급 원칙에 따라 시행 전 범행에는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정 형법이 시행돼도 경제 안보를 위협하는 초국경적 기술 탈취를 모두 막기는 어렵다. 개정 간첩죄는 외국 또는 이에 준하는 단체를 위해 지령·사주·의사 연락받아 국가기밀을 탐지·수집·누설하는 행위를 처벌한다. 국가 핵심기술이 형법상 ‘국가기밀’에 해당하는지 불명확한 데다 외국 정부가 아닌 해외 민간기업이 배후에 있으면 적용이 어려울 수 있다.
국정원이 유출 징후를 포착하고 산업스파이를 적발해도 범죄 구성요건과 처벌 근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엄중한 처벌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의미다. 외국 정부가 개입한 기술 탈취는 경제간첩죄로, 해외 민간기업이 배후인 유출은 경제이적죄로 다스려 가중 처벌하는 ‘산업스파이 가중처벌 특별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경제계도 기술 유출을 단순한 재산권 침해가 아닌 국가안보 범죄로 규정하고, 범죄 수익까지 철저히 환수할 수 있는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과거 현대전자 시절 독보적인 경쟁력을 갖췄던 디스플레이 패널 기술이 하이디스 매각 등을 거치며 중국으로 흘러가 기술 주도권을 넘겨준 비극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미국 등 주요국은 산업스파이 행위에 매우 엄중하게 대처하지만 우리나라는 법적 처벌과 대응이 여전히 헐겁고 솜방망이에 그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며 “국가 운명이 걸린 핵심기술이 허무하게 빠져나가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아무리 독보적인 기술이라도 해외나 경쟁사에 한번 빼앗기면 상대방이 빠르게 기술격차를 좁혀 따라온다”며 “기술 유출로 이익을 본 주체와 기업을 명확히 공개하고 유출 원인을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와 기업 모두 국가적 경각심을 갖고 산업기술 보안 체계를 뿌리부터 재정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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