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잠 못 드는 열대야, ‘움직이는 별장’서 보낸 여름밤 [타봤어요]
- 기아 EV9 롱레인지 2WD 6인승 시승기
99.8kWh 배터리, 주행과 머무름 경계 지워
2.4t 거구서 나오는 주행 성능은 또 다른 재미
기자는 최근 기아의 대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EV9을 타봤다. 서울에서 출발해 전북 정읍 산내면과 진안 마령면, 군산 등을 오가며 2박 3일 동안 약 800㎞를 달렸다. 숙소는 따로 잡지 않았다. 두 번의 밤을 모두 EV9 안에서 보냈다. 한여름인데도 집보다 차 안이 더 시원했다. 문을 닫으면 외부 소음도 크게 줄었다.
EV9은 차체 길이가 5m를 넘는다. 기자가 시승한 롱레인지 2WD 6인승 모델의 공차중량도 2.4t을 웃돈다. 수치만 보면 크고 무거운 차다. EV9을 처음 마주했을 때 기자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운전대를 잡으면 인상이 달라진다. 각종 주행·주차 보조 기능 덕분에 큰 덩치가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평범한 준중형 SUV를 모는 듯했다.
산길과 비포장도로, 좁은 골목길 등을 두루 다녔지만 차체 크기 때문에 불편을 겪은 적은 없었다. 무게도 마찬가지였다. 가속페달을 밟자 힘을 아낌없이 쏟아냈다. 2.4t이 넘는 차체가 머뭇거림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고속도로에 합류하거나 앞차를 추월할 때도 힘이 부족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밟는 만큼 속도가 붙어 운전하는 재미도 있었다.
장거리 주행에도 피로감은 크지 않았다. 각종 주행 편의 기능이 제 몫을 한 덕분이다. 고속도로 주행 보조 기능은 차를 차로 중앙에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앞차와의 간격도 자연스럽게 조절했다. 높은 착좌 위치와 넓은 시야 덕분에 교통 흐름을 파악하기도 쉬웠다. 속도를 높일수록 차체가 노면에 단단히 붙는 듯한 안정감도 인상적이었다.
굽이진 산길에서도 움직임은 안정적이었다. 방향을 연달아 바꿔도 차체가 좌우로 크게 쏠리지 않았다. EV9의 롤링(코너를 돌 때 차체가 좌우로 기우는 현상)이 크다는 평가도 있지만 기자의 체감은 달랐다. 크기와 무게를 고려하면 오히려 민첩하게 느껴졌다. 코너에서도 거대한 차체를 안정적으로 붙잡았다.
충전도 편리했다. EV9의 충전구는 차체 오른쪽 뒤편에 있어 충전 케이블을 연결하기 수월했다. 충전 속도도 빨랐다. 350㎾급 초급속 충전기를 이용하면 배터리 잔량을 10%에서 80%까지 채우는 데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99.8kWh의 대용량 배터리를 탑재했지만 식사하거나 커피를 마시는 동안 장거리 주행에 필요한 전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EV9의 진짜 매력은 차를 세운 뒤 드러났다. 차박이 처음이었던 기자는 별도의 장비를 준비하지 않았다. 대신 평소 백패킹에 사용하던 장비를 챙겼다. 백패킹은 텐트와 침낭, 취사도구 등 야영 장비를 배낭에 넣고 걸어서 이동하는 캠핑 방식이다. 장비가 가볍고 부피도 작아 차박 전용 매트나 침상 없이 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기자의 키는 182㎝다. 2열과 3열을 정리한 뒤 얇은 백패킹용 매트를 깔고 누웠다. 발끝과 머리 위로 여유가 남았다. 몸을 완전히 뻗어도 답답하지 않았다. 선루프 너머로 하늘을 바라보는 재미도 있었다. 배낭과 옷가지, 조명 등 짐을 둘 공간도 충분했다.
한여름 백패킹은 고역에 가깝다. 땀에 젖은 채 텐트를 설치해야 하고, 열기가 빠지지 않은 텐트 안에서는 벌레와 씨름해야 한다. 모든 장비를 등에 지고 이동해야 해 더위가 더욱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이 때문에 기자는 여름 캠핑을 가급적 피하는 편이다.
EV9과 함께한 차박은 달랐다. 목적지에 도착한 뒤 텐트를 치거나 무거운 배낭을 메고 이동할 필요가 없었다. 2열과 3열을 정리하고 매트와 침낭을 펼치자 잠자리 준비가 끝났다. 문을 닫고 에어컨을 켜니 덥고 습한 바깥 공기와 곧바로 단절됐다. 벌레가 들어올지 걱정하며 창문을 열어둘 필요도 없었다.
대용량 배터리는 차박의 질을 바꿨다. 내연기관차라면 밤새 에어컨을 사용하기 위해 시동을 켜둬야 한다. 엔진 소음과 진동, 배기가스도 신경 쓰인다. EV9은 달랐다. 유틸리티 모드를 활성화한 뒤 공조 장치를 켜고 잠들어도 실내는 조용했다. 오후 10시 77%였던 배터리 잔량은 약 8시간 동안 냉방을 가동한 다음 날 오전 6시에도 70%를 유지했다.
차량 외부로 전기를 공급하는 V2L 기능도 유용했다. 충전구에 V2L 커넥터를 연결하고 멀티탭을 꽂자 야외에 콘센트가 생겼다. 조명으로 주변을 밝히고 노트북으로 영화를 봤다. 필요한 전기는 모두 EV9이 공급했다. 99.8kWh 배터리는 긴 주행거리를 위한 장비에 그치지 않았다. 냉방과 조명, 여가까지 책임지는 생활 공간을 만들어냈다.
EV9은 이동과 머무름의 경계를 지운 차였다. 기자가 시승한 모델은 빌트인 캠2와 듀얼 선루프를 포함해 7954만원이다. 차박만을 위해 구매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다만 가족과 장거리를 자주 이동하고 여행과 캠핑을 즐기는 운전자라면 EV9의 넓은 공간과 대용량 배터리는 분명한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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