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조원 규모 ‘프로젝트 크루서블’ 놓고 주도권 경쟁
자금조달 막았던 MBK·영풍, 미국선 ‘최대주주 그룹’ 강조
핵심광물 공급망 참여 명분으로 경영권 확보 정당성 부각
[이코노미스트 김정민 경제전문기자] 고려아연의 미국 핵심광물 제련소 건설 사업을 둘러싸고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측과 MBK파트너스·영풍 연합 간 충돌이 다시 격화하고 있다.
MBK·영풍은 국내에서 고려아연의 미국 사업 자금조달 방식에 반대하며 법적 대응에 나섰다. 그러나 미국 현지에서는 자신들을 고려아연의 ‘최대주주 그룹’으로 소개하며 프로젝트의 지원 주체를 자처해 고려아연 측의 반발을 사고 있다.
고려아연 측에서는 MBK·영풍이 현 경영진이 기획하고 미국 정부와 협상을 주도해 온 사업에 뒤늦게 관여해 성과에 ‘숟가락을 얹으려 한다’고 비판한다.
반면 MBK·영풍은 미국 제련소 건설 자체에 반대한 적은 없으며, 최 회장 측이 추진한 제3자 배정 유상증자 방식과 의사결정 절차에 문제를 제기했을 뿐이라는 입장이다.
그동안 최 회장은 MBK의 고려아연 인수 시도가 핵심광물 기술과 공급망의 안정성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프로젝트 크루서블’을 경영권 방어의 핵심 명분으로 활용해 왔다.
MBK·영풍이 테네시주에서 리셉션을 개최한 것은 미국 핵심광물 공급망 재편에 협조하는 책임 있는 최대주주라는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한 행보라는 분석이 나온다.
◇ 미국 핵심광물 공급망 겨냥한 11조원 프로젝트
15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MBK와 영풍은 지난 9일 현지시간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의 한 호텔에서 고려아연의 미국 투자 사업인 ‘프로젝트 크루서블(Project Crucible)’ 관련 리셉션을 개최했다.
행사에는 윤종하 MBK 대표업무집행자 부회장과 영풍 관계자, 미국 현지 로비업체 관계자, 테네시주 지역 인사 등이 참석한 것으로 전해졌다. MBK와 영풍은 행사에서 자신들을 고려아연의 ‘최대주주 그룹’이라고 소개하고 프로젝트에 대한 지원과 협력 의지를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프로젝트 크루서블은 고려아연이 미국 테네시주 클락스빌 일대에 비철금속·핵심광물 통합 제련소를 건설하는 사업이다. 설비투자액은 약 66억달러, 운전자금과 금융비용을 포함한 총사업비는 74억달러로 한화 약 11조원 규모다.
제련소는 연간 약 110만톤의 원료를 처리해 아연·납·구리와 안티모니·게르마늄 등 13종의 비철금속 및 전략광물을 최대 54만톤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올해 부지 조성에 착수해 2029년부터 단계적으로 상업생산을 시작한다는 계획이다.
테네시주 정부는 이 사업을 66억달러 규모의 투자와 740개 일자리를 창출하는 프로젝트로 발표했다. 테네시주 역사상 단일 사업 기준 최대 규모의 자본 투자다. 주 정부 차원에서 4500만달러 규모의 경제개발 지원도 이뤄질 예정이다.
미국은 경제안보 차원에서 반도체와 전기차, 방위산업에 필요한 핵심광물 공급망의 중국 의존도를 낮추는 것을 핵심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고려아연이 미국 정부 및 현지 전략적 투자자들과 손잡고 제련소를 건설하는 것은 미국의 핵심광물 공급망 재편에 한국 기업이 직접 참여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미국 정부가 단순히 보조금을 지급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합작법인을 통해 고려아연 지분까지 확보하도록 사업 구조를 설계한 것은 해당 프로젝트에 대한 미국 정부의 높은 관심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해 법원 역시 MBK·영풍이 제기한 신주 발행 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하면서 해당 거래가 미국 중심의 핵심광물 공급망 재편과 한미 경제안보 협력, 안정적인 수요처 확보를 위한 목적을 갖는다고 판단한 바 있다.
◇ 자금조달 막고 미국에서는 ‘지원 주체’ 자처
논란의 출발점은 MBK·영풍이 프로젝트 추진 과정에서 보인 상반된 행보다.
고려아연 이사회는 지난해 12월 미국 정부 주도 합작법인인 크루서블JV를 대상으로 약 2조8500억원 규모의 제3자 배정 유상증자를 추진했다.
신주 발행 규모는 약 221만주로 기존 발행주식의 12% 수준이었다. 미국 정부 및 현지 투자자가 참여하는 합작법인은 이를 통해 고려아연 지분 약 10%를 확보하는 구조였다.
MBK·영풍은 해당 유상증자가 최 회장의 경영권 방어를 위한 우호지분 확보 수단이라며 법원에 신주 발행 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대규모 신주 발행으로 기존 주주의 지분이 희석되고, 투자 조건과 의사결정 과정도 불투명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신주 발행의 주된 목적이 경영권 방어라고 단정하기 어렵고, 미국 제련소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전략적 필요성이 인정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만 MBK·영풍은 법원 결정 이후에도 미국 제련소 사업 자체에는 찬성한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이들은 프로젝트의 전략적 가치가 아니라 유상증자 방식과 투자 조건을 문제 삼은 것이라고 선을 긋고 있다.
MBK는 “미 제련소 사업의 전략적 가치를 단 한 번도 부인하거나 반대한 적이 없다”며 “가처분을 제기한 것은 최윤범 회장의 경영권 방어를 목적으로 대주주를 배제한 채 추진한 비정상적인 제3자 배정 유상증자 방식과 불투명한 의사결정 절차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프로젝트의 핵심 자금조달 방안을 저지하려 했던 MBK·영풍이 미국 현지에서는 ‘최대주주 그룹’을 앞세워 프로젝트의 지원 주체를 자처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려아연 측은 프로젝트 크루서블이 최 회장과 현 경영진, 기술진이 사업 초기부터 미국 정부 및 현지 관계자들과 협상하며 추진해 온 사업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MBK·영풍이 고려아연과 별도 협의 없이 미국 현지에서 프로젝트 지원 의사를 강조한 것은 기존 경영진이 만든 사업 성과에 뒤늦게 편승하려는 행보라는 주장이다.
◇ MBK·영풍이 ‘숟가락 얹기’에 나선 배경은
MBK·영풍이 미국에서 프로젝트 크루서블 관련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배경에는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의 무대가 국내 주주총회와 법원을 넘어 미국 정부와 정치권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프로젝트 크루서블은 미국 정부가 전략적 파트너이자 사실상 주주로 참여하는 사업이다. 프로젝트 추진 과정에서 미국 행정부와 테네시주 정부, 의회, 방산·첨단산업계의 이해관계가 고려아연의 지배구조와 연결될 가능성이 크다.
MBK·영풍이 향후 고려아연 경영권을 확보하려면 미국 정부와 현지 이해관계자들에게 프로젝트를 중단하거나 훼손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를 줘야 한다.
최 회장 퇴진이나 경영진 교체가 사업 차질로 이어질 수 있다는 미국 측의 우려를 해소하지 못할 경우 MBK·영풍의 경영권 확보 명분도 약화할 수 있어서다.
MBK가 미국에서 복수의 로비업체를 선임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미국 정부와 정치권을 상대로 소통 창구를 확보하려는 행보로 풀이된다.
MBK는 고려아연 경영권 확보를 위해 설립한 특수목적법인 한국기업투자홀딩스 등을 통해 스콰이어 패튼 보그스, 더 매키언 그룹, 체크메이트 퍼블릭 어페어스 등 현지 로비업체를 선임한 상태다.
MBK·영풍으로서는 최 회장 측이 프로젝트 크루서블을 한미 경제안보 협력의 상징이자 경영권 방어 논리로 활용하는 상황에서 자신들도 미국 핵심광물 공급망 구축에 협조하는 책임 있는 최대주주라는 점을 부각할 필요가 있다.
고려아연 측이 제기해 온 ‘핵심광물 공급망 훼손 가능성’과 ‘사모펀드의 단기 수익 추구’라는 비판을 희석하고, 경영권을 확보한 뒤에도 프로젝트를 계속 추진할 수 있다는 신뢰를 미국 측에 심어주려는 목적이라는 분석이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 제련소는 고려아연의 미래 성장동력인 동시에 한미 핵심광물 동맹의 중요 자산”이라며 “경영권 분쟁 당사자들이 프로젝트를 자신들의 명분으로 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업 지속성과 기술인력, 주주가치 보호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풍, MBK파트너스 프로젝트 리셉션 초청장 관련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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