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홍명보의 사과가 남긴 것…브랜드는 패배보다 태도로 무너진다 [허태윤의 브랜드스토리]
- 국가대표 축구가 보여준 브랜드 위기의 민낯
패배보다 치명적인 위기 대응의 실패
어떤 이는 연봉을 털어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간다. 휴가를 쓰고, 사표를 내고, 카드빚을 감수하고서라도 그 90분 경기를 눈앞에서 보려 한다. 광고 한 번 하지 않았는데 전 국민이 같은 시간에 같은 화면 앞으로 모인다. 경기장 밖이라도, 다른 나라에서 열려도 그 현장의 경험을 나누기위해 광장에는 사람들로 가득찬다. 마케팅 교과서를 다 뒤져도 이만한 몰입은 없어보인다.
마케팅에는 '관여도'(involvement)라는 말이 있다. 소비자가 그 대상에 마음을 얼마나 깊이 거는가를 재는 척도다. 치약 같은 상품은 관여도가 낮다. 아무 브랜드나 집어도 그만이다. 자동차나 집은 관여도가 높다. 그래서 오래 고민하고 크게 건다.
그렇다면 국가대표 축구는 어디쯤일까. 관여도의 꼭대기, 그 너머다. 돈을 걸고, 시간을 걸고, 잠을 걸고, 끝내 감정을 통째로 건다. 이긴 날엔 모르는 사람과 얼싸안고, 진 날엔 며칠을 앓는다. 이토록 깊이 마음을 거는 상품은 세상에 흔치 않다.
그래서 국가대표 축구는 스포츠이기 이전에 하나의 브랜드다. 변방의 축구 후진국에서 일약 세계 4강을 경험한 우리가 가진 가장 거대한 브랜드다. 누구도 회원으로 가입한 적 없는데 전 국민이 팬이고, 세대를 건너 물려받은 마음으로 지어진 자산이다. 이런 브랜드는 돈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한번 금이 가면 돈으로도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브랜드의 진짜 얼굴은 무너질 때 나온다
그 브랜드가 지금 흔들린다. 단순히 졌기 때문이 아니다. 멕시코·남아프리카공화국·체코와 한 조, 험하지 않은 조였다. 체코를 잡고 출발했지만 멕시코와 남아공에 내리 졌다. 1승 2패. 그것도 국제축구연맹(FIFA·피파) 랭킹이 한참 아래인 남아공에 0-1로 패했다. 본선이 48개국으로 늘어난 무대에서 조차 토너먼트를 밟지 못했다. 그러나 더 깊은 상처는 점수판이 아니라 그 뒤에 있었다. 협회장과 사령탑이 동시에 사라졌고, 컨트롤 타워는 비었다. 당장 9월 A매치도 또 임시 감독으로 치러야 할 판이다. 협회엔 대책이 없었고, 그 빈자리의 한가운데에 감독 한 사람이 희생양으로 세워졌다.
브랜드는 패배로 무너지지 않는다. 패배를 다루는 방식으로 무너진다. 그리고 지금의 방식이라면, 이 거대한 브랜드가 다시 광장을 붉게 물들이기까지는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잘나갈 때의 얼굴은 누구나 비슷하다. 브랜드를 오래 들여다본 사람은 안다. 브랜드의 진짜 얼굴은 호황에 나오지 않는다. 박수가 쏟아질 때 모든 브랜드는 근사한 말을 하고, 그 말들은 서로 닮아 있다. 차이가 드러나는 건 일이 틀어졌을 때다. 리콜이 터지고 사고가 나고 고객이 등을 돌리는 순간, 바로 그때 그 브랜드가 평소 무엇을 품고 있었는지 민낯으로 드러난다.
1982년 미국에서 누군가 타이레놀에 독극물을 넣어 사망 사고가 났다. 존슨앤드존슨의 잘못이 아니었는데도 회사는 제품을 즉시 회수했다.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고 해명보다 사람의 안전을 앞세웠다. 그 결정이 타이레놀을 살렸다. 위기가 도리어 신뢰의 증거가 된 드문 사례다.
우리에겐 반대의 기억이 더 많다. 2013년 남양유업은 대리점에 물건을 떠넘긴 녹취가 공개되자 사과 회견을 열었지만, 그 자리가 오히려 분노를 키웠다. 고개는 숙였는데 사람들이 듣고 싶던 말은 없었고, 잘못의 구조를 인정하는 대신 덮으려는 표정이 먼저 읽혔다. 불매운동은 회견 뒤에 더 거세졌다. 이듬해 터진 대한항공의 '땅콩 회항'도 다르지 않았다. 사과문은 정중했다. 그러나 그 정중함 뒤에서 사람들은 진심이 아니라 매뉴얼을 읽었다. 형식은 완벽한데 태도가 비어 있었고, 대중은 그 빈자리를 정확히 알아챘다.
사과에는 두 개의 층이 있다. 형식과 태도다. 형식은 문장과 표정, 그리고 절차이고, 태도는 그 아래 흐르는 마음이다. 형식은 며칠이면 만든다. 홍보팀이 다듬고 변호사가 검토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과문이 나온다. 그러나 태도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동안 쌓아온 것이 그 순간 새어 나올 뿐이다. 사람들은 형식을 읽는 게 아니라, 그 틈으로 새어 나오는 태도를 읽는다.
이번 홍명보 감독의 말도 그랬다. "모든 책임은 감독인 나에게 있다."
맞는 말이다. 문제는 그가 12년 전에도 똑같이 말했다는 데 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1무 2패로 주저앉았을 때도 책임을 자기에게 돌렸다. 같은 문장이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돌아온 순간, '책임'이라는 단어는 무게를 잃는다. 반복된 사과는 사과가 아니라 절차가 된다.
부임할 때 그는 "저는 저를 버렸습니다"라고 했다. 비장하다. 그런데 주어가 전부 '나'다. 내 책임, 내 명예, 나의 헌신. 여기에 공감의 핵심이 있다. 팬이 묻던 것은 감독의 명예도, 그의 자기희생 서사도 아니었다. '우리가 느낀 실망을 당신은 아느냐'였다. 사람들은 '우리'의 마음을 물었는데, 그는 '나'의 책임으로 답했다. 주어가 어긋난 것이다. 공감의 실패는 대개 마음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주어가 자기에게 고정돼 있어서다. 브랜드도 같다. 위기의 순간 기업은 "우리가 이만큼 노력했다"고 말하고, 소비자는 "내가 이렇게 느꼈다"를 듣고 싶어 한다. 주어가 '우리'에 머무는 한, 아무리 진심을 담아도 그 말은 상대에게 도착하지 않는다. 공감은 마음의 양이 아니라 주어의 방향이다.
브랜드가 사랑받는 이유는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무너지지 않는 브랜드는 없다. 끝내 곁에 남는 브랜드는 실패한 적 없는 브랜드가 아니라, 실패를 잘 견딘 브랜드다. 넘어진 자리에서 변명 대신 진심을 꺼내고, '나'가 아니라 '당신'을 먼저 부른 브랜드다.
국가대표 축구라는 거대한 브랜드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 전 국민을 팬으로 둔 자산이 한 번의 패배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그 회생에 걸리는 시간은, 점수판이 아니라 태도가 결정한다. 사과문은 하루면 쓴다. 그러나 그 사과가 신뢰가 될지 조롱이 될지는 그동안 쌓아온 태도가 정한다. 잘나갈 때 만든 말은 다 비슷하다. 무너질 때 꺼내는 한마디가, 그 브랜드의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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