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이슈
인플레는 끝나지 않았다…전쟁이 다시 흔든 물가 경로 [특파원 리포트]
- 유가 급등 넘어 공급 불안
협상·군사 병행 속 인플레 경로 재편
[김상윤 이데일리 뉴욕 특파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인플레이션을 끝낸 줄 알았다. 금리는 충분히 올라갔고, 수요는 눈에 띄게 둔화했다. 물가 상승률은 정점을 찍고 내려오기 시작했으며, 중앙은행들은 긴축 정책이 효과를 내고 있다고 판단했다. 시장 역시 이 판단을 받아들였고, 관심은 더 이상 ‘얼마나 더 올릴 것인가’가 아니라 ‘언제 내릴 것인가’로 이동했다. 인플레이션은 관리 가능한 문제로 돌아온 듯 보였다.
그러나 이란 전쟁은 이 흐름에 균열을 만들고 있다. 전쟁이 격화되자 국제유가는 빠르게 반응했고, 처음에는 익숙한 패턴처럼 보였다. 중동 긴장이 고조될 때마다 유가가 오르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안정되는 흐름은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됐기 때문이다. 시장이 이를 일시적 충격으로 간주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익숙함이 오히려 판단을 흐릴 수 있다.
협상과 충돌이 동시에 만든 ‘공급 불안’
지금 전쟁은 단순한 충돌이 아니라, 협상과 군사 작전이 동시에 진행되는 국면으로 바뀌고 있다. 미국은 이란에 핵·탄도미사일 통제와 호르무즈 해협 안정화를 포함한 15개 항의 종전안을 전달하며 출구를 모색하고 있다. 파키스탄을 통한 중재 채널이 가동되고, 이집트와 터키 등도 협상 참여를 독려하는 등 외교적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군사 충돌은 멈추지 않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란의 미사일 및 핵 관련 인프라를 타격하고 있고, 이란 역시 미사일 공격으로 대응하고 있다. 특히 이란은 전쟁 이후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서방 선박 통행을 제한하면서 글로벌 원유와 천연가스 공급에 직접적인 압박을 가하고 있다.
이처럼 외교와 군사 행동이 동시에 진행되는 구조에서는 시장이 방향을 잡기 어렵다. 협상 기대가 커지면 유가는 내려가지만, 같은 날 군사 충돌이 확대되면 다시 상승한다. 최근 유가가 하루에도 크게 출렁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단순한 가격 변동성이 아니라, 이런 구조가 에너지 공급 자체를 지속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특히 호르무즈 해협은 전 세계 원유의 약 20%가 통과하는 핵심 통로다. 이곳의 흐름이 흔들리고, 동시에 생산 시설까지 타격을 받으면서 이번 충격은 단순한 수송 차질을 넘어 공급 기반 전체를 압박하는 양상으로 확대되고 있다.
결국 핵심은 유가의 수준이 아니라 지속성이다. 공급이 일시적으로 흔들리는 것과 생산 기반 자체가 훼손돼 가격이 높은 상태로 유지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번 전쟁은 후자의 가능성을 시장에 각인시키고 있다.
에너지 가격 상승이 단순히 기름값만 오르는 데 그치는지, 아니면 다른 상품과 서비스 가격까지 끌어올리는 전반적인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한 논쟁도 다시 등장한다. 이론적으로는 전자에 가깝다는 해석이 많다. 즉 유가 상승은 특정 가격의 변화일 뿐, 전체 물가를 움직이는 인플레이션과는 구분해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중앙은행은 이런 공급 충격에 과도하게 반응하기보다 변동성이 큰 에너지 가격을 제외한 핵심 물가 흐름을 중심으로 정책을 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에너지 가격은 생산비와 운송비를 통해 경제 전반으로 확산하는 비용이다. 기업은 이를 가격에 반영하고, 소비자는 이를 받아들이면서 앞으로 물가가 오를 것이라는 기대가 형성된다. 인플레이션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경로다.
최근 몇 년간의 경험은 이 점을 분명히 보여줬다. 한때 ‘일시적’이라고 불렸던 물가 상승은 예상보다 훨씬 오래 지속됐고, 중앙은행들은 뒤늦게 대응하면서 상당한 비용을 치렀다. 이 경험 이후 정책당국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그 교훈은 또 다른 위험을 만든다. 이번에는 과잉 대응이다. 유가 상승이 물가를 자극한다고 해서 금리를 더 올리는 것이 적절한 대응일까. 에너지 가격은 통화정책으로 직접 통제할 수 있는 변수가 아니다. 금리를 올린다고 해서 산유량이 늘어나지는 않으며, 대신 수요만 더 위축된다.
물가와 성장 사이, 중앙은행의 딜레마
이것이 통화정책 딜레마다. 금리를 올리면 경기 둔화가 심화하고, 금리를 유지하면 물가 상승을 용인하는 셈이 된다. 어느 쪽도 완전한 해법은 아니다. 중앙은행은 결국 불완전한 선택지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더 복잡한 점은 이번 상황이 2022년과 동일하지 않다는 데 있다. 당시에는 팬데믹 이후 억눌린 수요가 폭발했고, 공급망이 동시에 붕괴하면서 물가 상승 압력이 전방위적으로 확대됐다. 지금은 수요가 이미 둔화하고 있고, 정책도 긴축적이며, 노동시장 역시 과열 국면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런데도 물가가 다시 오를 수 있다는 점이 지금 상황의 본질이다.
에너지 가격 상승은 결국 기업의 마진을 압박하고 소비자의 실질소득을 감소시키며, 소비와 투자의 위축으로 이어진다. 물가는 오르는데 경제는 둔화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에 가까운 조건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전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번 충격의 핵심 변수는 유가 수준이 아니라 전쟁의 경로다. 협상이 실제로 성사돼 호르무즈 해협이 안정되고 공급이 정상화될지, 아니면 이란 내부 혼선과 이스라엘의 입장 불확실성 속에 충돌이 장기화할지에 따라 물가의 경로도 달라진다.
모든 논의는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유가가 얼마나 오르느냐가 아니라, 전쟁 상태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느냐다. 전쟁이 단기에 끝난다면 이번 에너지 충격은 일시적인 파동으로 남을 것이지만, 갈등이 장기화하고 공급이 지속적으로 흔들린다면 물가는 다시 고착화되고 정책당국은 다시 뒤쫓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인플레이션은 생각보다 끈질기다. 한 번 잡았다고 해서 사라지는 문제가 아니다. 이번에는 그 경로가 에너지일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잠시 잊고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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