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포 터지는 증권시장, 골목은 초상집[한국경제 K자형 성장의 그림자]④
- 코스피 8000·예탁금 사상 최대…증시로 몰리는 돈
지방 자영업자·대학생 "경기 회복 체감 못해"
여의도·동탄은 활기, 골목 상권은 여전히 냉랭
[이코노미스트 박세진 기자·이혜리 기자] “돈이 안 돕니다. 돈이.”
지난 5월 25일 대구에서 주류 영업을 하는 A씨의 첫마디였다. 말끝에는 한숨이 묻어났다. 최근 거래처 식당과 술집을 돌며 가장 많이 듣는 말도 비슷하다고 했다. “손님이 줄었다” “매출이 안 나온다” “예전 같지 않다”는 푸념이다.
증권시장에서는 이른바 ‘삼전닉스’(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연일 상승세를 이어가고, 코스피는 사상 처음으로 8000선에 안착했다. 하지만 지방 골목의 온도는 전혀 달랐다.
부산 대학가도 사정은 비슷했다. 올해 복학한 대학생 C씨는 “예전보다 학교 앞 번화가가 확실히 조용해졌다”며 “취업난이 심해지면서 술자리나 모임보다 공부나 자격증 준비에 시간을 쓰는 학생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강의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식당과 술집으로 몰리던 풍경도 이제는 흔치 않다고 했다.
실제로 지난 5월 26일 저녁 시간 대학가를 둘러보니 빈 테이블이 눈에 띄는 식당이 적지 않았다. 세 대학이 밀집한 부산 남구 대학로도 예전 같은 활기를 찾기 어려웠다. 대학가는 지역 소비의 온도를 가장 민감하게 보여주는 곳이다. 이날 대학로의 공기는 차갑기만 했다.
대구에서 나고 자란 A씨와 B씨가 공통으로 꺼낸 말은 “최근 들어 유독 돈이 돌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유를 묻자 ‘주식’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증시가 달아오르면서 여윳돈이 주식시장으로 몰리고, 정작 식당과 술집, 지역 행사장 등 실물경제 현장에서 쓰이는 돈은 줄어든 것 같다는 설명이다.
A씨는 “예전에는 월급이나 목돈이 생기면 외식도 하고 술도 마시고 행사도 열었는데 요즘은 다들 투자 이야기부터 한다”며 “주머니에서 돈이 나와야 상권도 살아나는데 다들 증권 계좌만 들여다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자금은 증시로 빠르게 유입되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와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12일 기준 투자자예탁금은 137조4174억원으로 집계됐다. 지난 5월 7일 기록한 역대 최고치(136조9890억원)를 다시 넘어선 규모다.
‘빚투’(빚내서 투자)도 늘고 있다. 국내 증시 신용거래융자 잔고는 지난 4월 23일 처음으로 35조원을 돌파한 데 이어 같은 달 29일에는 36조원을 넘어섰다. 지난 5월 14일 기준 신용융자 잔고는 36조4698억원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반면 소비 심리는 위축되고 있다. 지난 4월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99.2로 전월보다 7.8포인트 하락했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조사에서도 지난 3월 소상공인 체감 경기실사지수(BSI)는 57.0, 전통시장 체감 BSI는 43.9에 머물렀다.
숫자가 말하는 현실도 현장의 체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반도체와 증시가 이끄는 호황의 온기는 아직 지방 골목까지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금이 몰리는 곳의 분위기는 달랐다. 증시와 반도체 산업의 수혜를 직접 체감하는 지역에서는 소비와 기대감이 살아나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었다.
다른 세상 여의도·동탄
지난 5월 27일 점심시간 무렵 찾은 여의도 증권가는 지방 골목과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직장인들은 커피를 손에 든 채 분주히 사무실로 향했고 식당가에는 손님들이 몰렸다. 곳곳에서는 저녁 회식 예약 문의도 이어졌다. ‘돈이 안 돈다’는 이야기는 이곳에선 쉽게 들리지 않았다.
한국투자증권 본사 인근 식당에서 일하는 D씨는 “코스피가 오르면서 저녁 매출이 확실히 늘었다”며 “점심은 비슷하지만 회식은 눈에 띄게 많아졌다”고 말했다. 그는 “주로 법인카드 결제가 많은데 최근에는 단체 예약 문의도 늘고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인근 식당 직원 E씨 역시 “경기가 좋아졌다고 단정할 순 없지만 장사가 아주 어렵지는 않다”며 “점심 손님도 꾸준하고 저녁 예약도 안정적으로 들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 호황의 온기가 직접 닿는 동탄 분위기도 달랐다. 삼성전자 화성사업장이 있는 경기 화성시 동탄 일대 상권에는 최근 성과급 지급 기대감이 퍼지고 있었다.
동탄의 한 자영업자는 “성과급 지급 소식 이후 회식 문의가 조금씩 늘고 있다”며 “아직 체감할 정도는 아니지만 상권 분위기가 나빠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백화점도 붐볐다. 이날 오후 방문한 롯데백화점 동탄점 푸드코트는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지방 대학가나 골목 상권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업계에 따르면 이 백화점의 올해 1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약 25% 증가했다. 해외 명품 매출은 40% 가까이 늘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인근 부동산 시장도 들썩이고 있다. 용인 수지구 성복역 인근의 한 공인중개사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성과급 소식 이후 매수 문의가 크게 늘었다”며 “실제 자금이 시장에 풀리는 시점에는 거래도 더욱 활발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대한민국 안에서도 경제의 온도는 전혀 달랐다. 증시는 축포를 쏘아 올렸지만 골목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반도체와 자산시장이 끌어 올린 상향선과 지방 상권·자영업자가 머무는 하향선. 이것이 지금 한국 경제가 마주한 K자형 성장의 민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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