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일반
‘보안이 곧 실적’…해킹 사태에 엇갈린 통신 3사 성적표
- 해킹 사태 직격탄 맞은 SKT…LG유플러스·KT 반사이익
뒤늦게 보안 강화 외치는 통신 3사
[이코노미스트 원태영 기자]대한민국 통신업계의 지형도가 ‘보안’이라는 변수 앞에 크게 흔들리고 있다. 과거 통신사 간 경쟁이 ‘누가 더 저렴한 결합 상품을 내놓는가’ 혹은 ‘누가 더 많은 보조금을 투입하는가’와 같은 마케팅 전쟁이었다면 이제는 고객 개인정보를 얼마나 안전하게 지키느냐가 기업의 존폐와 성적표를 결정짓는 핵심 지표로 자리 잡았다. 최근 발표된 이동통신 3사의 연간 실적은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가 되고 있다.
SK텔레콤 ‘1등 신뢰’ 붕괴…창사 이래 최대 위기
가장 뼈아픈 성적표를 받아 든 곳은 부동의 업계 1위 SK텔레콤이다. SKT가 최근 발표한 지난해 연결 기준 실적은 시장에 큰 충격을 안겼다. 영업이익은 1조732억원으로 전년 대비 무려 41.4%나 감소했다. 매출액 역시 17조992억원으로 4.7% 줄어들었으며, 당기순이익은 73%나 급감한 3751억원에 그쳤다.
이러한 ‘실적 쇼크’의 정점에는 작년 발생한 전대미문의 대규모 해킹 사태가 있다. 당시 약 2500만명에 달하는 가입자의 유심(USIM) 정보가 유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유심 정보 유출은 단순히 이름이나 연락처가 새 나가는 수준을 넘어, 기기 복제나 금융 범죄로 이어질 수 있는 치명적인 사안이었다.
정부 당국으로부터 약 두 달간 신규 가입자 모집 중단이라는 중징계를 받은 것이 결정타였다. 영업 정지 기간 동안 SKT는 손을 묶인 채 경쟁사로 떠나는 고객들을 지켜봐야만 했다. 브랜드 이미지 타격은 수치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유출 사고 이후 고객 이탈을 막기 위해 쏟아부은 ‘방어적 마케팅 비용’과 무너진 보안 시스템을 처음부터 다시 구축하기 위해 투입된 막대한 인프라 비용은 수익 구조를 급격히 악화시켰다. ‘1등 통신사는 안전할 것’이라는 충성 고객들의 믿음이 깨지면서 발생한 ‘민심의 이반’이 지표로 증명된 셈이다.
SKT가 흔들리는 사이 경쟁사들은 모처럼 웃음을 지었다. LG유플러스는 매출 15조4517억원(5.7% 증가), 영업이익 8921억원(3.4% 증가)을 기록하며 견조한 성장세를 나타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모바일 가입 회선 수다. 전년 대비 7.7% 늘어난 3071만개를 기록했는데, 이는 알뜰폰(MVNO) 시장의 공격적인 확장과 더불어 SKT의 보안 이슈에 불안감을 느낀 가입자들이 대거 유입된 결과로 분석된다. 이른바 ‘보안 난민’들이 LG유플러스의 품으로 이동하며 톡톡히 반사이익을 누린 것이다.
KT의 성적표는 더욱 화려하다. KT는 매출 28조2442억원(6.9% 증가), 영업이익 2조4691억원을 기록했다. 특히 영업이익 성장률은 전년 대비 205%라는 경이적인 수치를 기록하며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했다. 이는 KT가 추진해 온 기업용 서비스(B2B)와 클라우드 사업의 본궤도 진입 덕분이기도 하지만, 경쟁사의 위기를 틈타 전략적으로 가입자 유치에 집중한 마케팅 전략이 주효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LG유플러스와 KT, 반사이익 속에 가려진 ‘불안한 미소’
하지만 업계 전문가들은 이러한 호실적이 온전히 실력에 의한 것만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경쟁사의 대형 악재로 인한 일시적인 풍선효과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LG유플러스와 KT 역시 마냥 승전고를 울릴 상황이 아니다. 해킹 사태는 SKT에만 머물지 않고 통신업계 전체로 번지고 있다. 정부는 SKT 사고 이후 통신 3사 전체를 대상으로 보안 실태 전수조사를 벌였으며, 그 과정에서 LG유플러스와 KT도 해킹 사태를 피해가지 못했다.
이에 따라 올해 실적부터는 정부가 부과할 대규모 과징금이 반영될 것으로 전망된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유출 규모와 관리 소홀의 책임을 물어 수백억원대에 달하는 과징금을 검토 중이다. 이는 통신사들의 영업이익을 깎아 먹는 직접적인 요인이 될 것이다.
더욱 큰 부담은 피해 고객들을 대상으로 한 ‘직접 보상’이다. 이미 지난 4분기 실적에서 개인정보 유출 사고에 대한 비용을 어느정도 반영한 SKT와 달리 LG유플러스와 KT는 올해 실적부터 보안 강화 비용과 보상 마케팅 비용을 반영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렇게 되면 현재의 성장세가 꺾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가성비’에서 ‘안전’으로…고객 선택 기준 바뀌다
이번 사태는 통신 시장의 근본적인 패러다임을 변화시켰다. 과거 가입자들이 통신사를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했던 요소는 ‘결합 할인’이나 ‘멤버십 혜택’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 소중한 개인정보가 안전하게 관리되는가’가 최우선 순위로 떠올랐다.
실제로 통신 3사는 올해 경영 화두로 일제히 보안 혁신을 내걸었다. SKT는 기존 글로벌 보안 경영체계에 실제 대응 매뉴얼을 구체화해 실행력을 극대화한 실전형 보안 거버넌스를 구축했다고 밝혔다.
이번 개편의 핵심은 RACI 체계 도입이다. 보안 통제 영역별로 ▲실무 담당자(Responsible) ▲최종 책임자(Accountable) ▲자문 대상자(Consulted) ▲통보 대상자(Informed)를 명확히 규정해 사고 발생 시 혼선을 줄이고 신속한 의사결정을 가능케 했다. 또한 사고 유형별 단계별 점검 항목과 조치 방법을 담은 런북(Runbook)을 마련해 담당자 유무와 관계없이 현장에서 즉각적인 조치가 가능하도록 실무 지침을 정교화했다.
KT는 향후 5년간 총 1조원 규모의 정보보안 투자를 단행할 예정이다. 특히 AI 기반의 지능형 관제 시스템과 ‘제로 트러스트’(Zero Trust) 체계 구축 등 기술적 고도화에만 3400억원을 집중 투입한다. 제로 트러스트는 인증 전까지 그 어떤 접속도 절대 신뢰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토대로 한 차세대 네트워크 보안 모델이다. 아울러 현재 160여명 수준인 보안 전문 인력을 300명까지 대폭 확충한다.
LG유플러스도 5년간 7000억원 규모의 보안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단순한 방어 시스템 구축을 넘어 외부 화이트 해커를 동원한 블랙박스 모의해킹을 상시화해 실질적인 방어력을 검증하고 있다. 아울러 2027년까지 전사적인 제로 트러스트 아키텍처를 완성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결국 올해 통신 시장의 진정한 승자는 가장 높은 영업이익을 기록하는 회사가 아니라 고객들로부터 ‘이곳이라면 내 정보를 믿고 맡길 수 있다’는 확신을 끌어내는 회사가 될 것이다. ‘보안이 곧 실적’이라는 공식은 이제 통신업계에서 부정할 수 없는 절대 명제가 됐다.
통신업계 관계자는 “스마트폰이 ▲금융 ▲결제 ▲인증의 핵심 도구가 된 상황에서 통신사의 보안 사고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 개인의 삶을 파괴할 수 있는 위협으로 인식되고 있다”며 “이제 보안은 비용이 아니라 기업 가치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가 됐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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