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네덜란드 정부가 민간 기업 CEO를 갈아치운 이유는?[한세희 테크&라이프]
- 갈라선 세계의 요충지, 네덜란드의 줄다리기
[한세희 IT 칼럼니스트] 네덜란드에는 ‘비상 물자 공급법’(Goods Availability Act)이란 법이 있다.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될 경우, 정부가 기업 이사회 결정을 무효로 만드는 등 강력하게 개입할 수 있게 하는 법이다.
네덜란드 같은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런 법을 실행할 일이 있으리라 생각하긴 어렵다. 그런데 냉전 시대 1952년 제정된 이 법이 70년만에 처음 실제 발동되는 일이 벌어졌다. 9월 말, 네덜란드 정부가 반도체 기업 넥스페리아에 대한 통제권을 가져간 것이다. 중국인인 장쉐정 CEO도 해임하고 임시 CEO를 지명했다. 정부는 “넥스페리아 지배 구조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며 위급 상황에서 반도체 수급이 제대로 안 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이 같은 조치를 취한다고 밝혔다. 이번 조치가 “매우 이례적”이라는 점은 인정했다.
70년만에 처음 발동된 비상 조치
넥스페리아는 네덜란드 네이메헌에 본사를 둔 토종 기업이지만, 주인은 중국이다. 2019년 중국 휴대폰 위탁 제조사 윙텍이 인수했다. 자동차와 가전 제품에 들어가는 범용 반도체를 주로 생산한다.
네덜란드 본사와 유럽 공장에선 설계와 전공정 제조를 담당하고, 중국 법인에서 패키징해 최종 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식으로 역할을 분담했다.
전체 생산량의 80%가 중국에서 완성돼 출하된다. 넥스페리아는 중국 소유 기업이라는 점 때문에 최근 미국 정부의 제재 리스트에 올랐다. 미국 기업이 제재 리스트에 오른 기업과 거래하려면 미국 정부의 사전 허가를 얻어야 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하다. 사실상 국제 시장 퇴출이다. 미국은 제재를 벗으려면 장쉐정 CEO를 해임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장 CEO는 유럽 본사와 중국 법인을 분리해 유럽측 독립성을 유지하기 원하는 정부 방침을 거부하고 화사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는 시도를 해 왔다. 본사에선 넥스페리아 반도체 핵심 지적재산권(IP)이 유출되고, 생산 시설 역시 대거 중국으로 이전될 것이란 우려가 나왔다. 이러한 갈등이 결국 비상 물자 공급법 실행이라는 결말로 이어졌다.
당연히 중국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중국 정부는 이 조치를 규탄하며 중국에서 생산되는 넥스페리아 최종 제품의 수출을 봉쇄했다. 넥스페리아 중국 법인은 “중국 자산의 안보에 대해 결코 타협하지 않을 것”이라며, 중국 현지 직원에게 네덜란드 본사 지시를 따르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중국 법인은 중국 기업으로서 독립적으로 운영될 것이란 선언이다. 넥스페리아 본사는 장 CEO가 “중국 법인이 이제 독립적으로 운영된다”거나 “넥스페리아가 월급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았다”와 같은 거짓을 퍼뜨리고 있다고 맞서고 있다.
넥스페리아를 둘러싼 혼란에 세계 주요 자동차 기업들은 부품 수급난을 우려하고 있다. 넥스페리아는 일부 자동차용 범용 반도체 제품 시장에서 1~2위를 유지하고 있다. 높은 기술력을 필요로 한 제품은 아니지만, 수급이 안 된다면 자동차 제조 라인을 멈춰 세울 수 있다. 범용 부품 제조와 유통이 막혀 전체 자동차 생산에 차질을 빚었던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재현될 수 있다.
넥스페리아 사태는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전쟁에 유럽이 동참한 결과라 볼 수 있다. 자유 무역에서 경제 안보로 유럽의 초점이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네덜란드는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의 요충지에 있다. 최첨단 미세회로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생산하는 세계 유일의 기업 ASML이 네덜란드에 있다. 애플 아이폰 프로세서와 엔비디아 인공지능(AI) 학습 칩을 위탁 생산하는 TSMC, 세계 1위 메모리 기업 삼성전자, CPU 대표 기업인 인텔 등이 ASML의 장비를 필요로 한다.
네덜란드 정부는 앞서 미국의 중국 반도체 제재에 동참, ASML EUV 장비의 중국 수출을 막는 등 중국과 거리를 두고 있다. 자국 대표 기업 ASML이 최대 시장 중국에서 입지가 약해지는 상황을 감수하고 내린 결정이다.
혁신에 뒤쳐진 대가
넥스페리아 건은 70년 동안 한 번도 시행되지 않은 법률을 꺼내 직접 민간 기업 활동에 개입했다는 점에서 더욱 명시적으로 이 싸움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냉전 시대에도 적용하지 않은 법을 지금 끄집어 낼 정도로 현재 상황을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
첨단 기술과 디지털 플랫폼을 둘러싼 미중 패권 경쟁이 과거 냉전과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음을 보이는 징후이기도 하다. 글로벌 자유 무역과 분업, 공급망 의존을 통해 더 평화롭고 번영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기대가 허물어지고 새로운 질서를 맞이하고 있다. 앞서 영국도 안보를 이유로 웨일스 뉴포트에 있는 넥스페리아 생산 공장의 지분을 매각하게 한 바 있다. 프랑스도 중국 영향 아래 있는 반도체 기업에 비슷한 조치를 취한 적이 있다.
이런 조치는 중국 같은 전체주의 국가의 확장을 막고 자유 민주주의 블록을 지키려는 의도를 내세운다. 하지만 중국이 넥스페리아 통제를 강화하고 제품 수출을 막아 자동차 부품 공급망이 마비될 위험이 우려되는 것에서 보듯, 오히려 우려하던 공급망 안보 붕괴나 지적재산 유출을 더 빠르게 할 가능성도 있다. 세계는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고, 그 결과는 거대한 블록으로 분열된 세계일 수 있다.
애초에 넥스페리아가 중국 자본에 넘어가지 않았다면 현재 이런 문제를 피할 수도 있었을까? 넥스페리아는 네덜란드 글로벌 전자 기업 필립스가 2006년 반도체 사업을 분리해 사모펀드에 매각하며 설립된 NXP에서 다시 2016년 분리돼 탄생한 회사다. NXP가 넥스페리아를 중국 정부 소유 기업이 낀 투자사에 넘겼고, 이를 다시 윙텍이 인수하며 중국 지배가 확고해졌다. 이를 되돌리기 위한 모험을 지금 네덜란드는 하고 있다.
일찍이 1920년대 진공관을 생산했던 첨단 기업 필립스의 반도체 사업이 미국, 일본, 한국 등에 밀리면서 재무적 투자자에 넘어간 결과다. 혁신에 뒤쳐진 대가는 이런 식으로 치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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