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일반
럭셔리 뷰티 ‘명가’ 에스티로더가 흔들린다 [K뷰티 ‘성골’의 변신 vs 글로벌 명가의 추락]②
- 글로벌 소비 패턴·K뷰티 공세에 3년째 성장 정체
구조조정·M&A 총력전… R&D 부족 근원적 회복 ‘물음표’
[이코노미스트 서지영 기자]
미국 럭셔리 뷰티 ‘명가’ 에스티로더컴퍼니즈가 흔들리고 있다. 에스티로더컴퍼니즈는 전 세계 150여 개국에서 ▲에스티로더 ▲라메르 ▲조말론 등 유명 화장품을 전개하고 있는 글로벌 ‘빅3’ 화장품 기업이다.
그러나 최근 3년간 젠지세대의 소비 패턴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했고, K-뷰티와 중국 C-뷰티의 급격한 성장에 대응하지 못하면서 실적도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다급해진 에스티로더컴퍼니즈는 부진한 브랜드를 헐값에 내놓는가 하면, 대규모 인수·합병(M&A)을 통해 몸집을 키우고 있다. 시장의 반응은 냉담하다. 마케팅을 중심에 둔 포트폴리오 변화만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한풀 꺾인 ‘갈색병’ 신화
에스티로더컴퍼니즈는 지난 80년간 럭셔리 뷰티의 전형을 구축해 온 기업이다. 작은 크림 한 통, 에센스 한 병에 30만~40만원대에 달하지만, 품질과 브랜드 이미지가 결합되며 소비자들의 선망을 받아왔다.
성공한 뷰티 브랜드는 스킨케어를 넘어 향수·색조·보디 제품으로 확장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에스티로더컴퍼니즈의 방식은 사뭇 달랐다. 실제로 대표 브랜드인 에스티로더는 ‘어드밴스드 나이트 리페어’와 ‘더블웨어 파운데이션’ 등 소수의 히트 제품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키워왔다.
문제는 주 소비층과 화장품 구매 패턴이 변했다는 점이다. 그 사이 시장의 중심으로 떠오른 3040 소비자들은 이제 더 이상 럭셔리 스킨케어에 집착하지 않는다. 화장품 연구·개발·생산(ODM) 기술이 보편화하면서 제품 수준이 상향 평준화를 이뤘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브랜드보다 더 트렌디한 뷰티에 관심을 갖고 있어서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만 해도 갈색병은 여행 뒤 부모님께 드리는 선물 1위였지만 이제는 그런 분위기가 사라졌다”며 “3040세대는 작은 에센스 하나에 30만원을 호가하는 에스티로더의 갈색병을 더는 합리적인 소비라고 여기지 않는다”고 귀띔했다. 이들은 갈색병 대신 ‘가성비’가 탁월한 K-뷰티와 중국의 C-뷰티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실적으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에스티로더컴퍼니즈는 2025 회계연도 매출이 약 143억달러로 전년 대비 8% 감소했다. 로이터통신과 블룸버그는 에스티로더컴퍼니즈가 2023년 이후 중국 시장 둔화와 면세 채널 부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K-뷰티와 같은 지역 브랜드가 빠르게 시장을 잠식하면서 3년 연속 성장 정체 국면에 들어섰다고 분석했다.
경쟁사와의 격차도 벌어지는 모양새다. 로레알은 지난해 약 450억유로 매출로 최대 실적을 냈다. 반면 에스티로더는 약 150억달러 수준에 머물며 격차가 세 배 이상으로 벌어졌다. 국내 뷰티 R&D 업계 관계자는 “에스티로더컴퍼니즈의 명성을 이끈 스테디셀러 중심 구조의 한계가 드러났다”며 “럭셔리 뷰티를 추구하던 회사의 아이덴티티도 흔들리고 있다”고 귀띔했다.
다소 폐쇄적인 지배구조도 한계로 지목된다. 에스티로더컴퍼니즈는 창업주 가문이 차등의결권으로 약 80% 의결권을 쥐고 있다. 자연스럽게 디지털 전환과 소비 트렌드 변화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대규모 구조조정…경쟁력 회복은 ‘글쎄’
에스티로더컴퍼니즈는 매출이 줄자 자구책 마련에 나섰다. 스테판 드 라 파베리 에스티로더컴퍼니즈 최고경영자(CEO)는 ‘뷰티 리이매진드’ 전략을 내놓고 구조조정과 포트폴리오 재편을 시작했다. 비용 절감과 디지털 전환을 통해 2026년까지 수익성을 회복하겠다는 목표다.
가장 먼저 돈 안 되는 브랜드부터 팔고 있다. 에스티로더컴퍼니즈는 2010년 이후 K-뷰티 붐이 일자 더마 코스메틱을 지향하는 ‘닥터자르트’를 1조2000억원에 사들였다. 그러나 거대한 뷰티 공룡의 품에 안긴 닥터자르트는 특유의 경쾌한 마케팅을 하지 못했다. 결국 주요 시장이었던 중국 및 한국 내 부진으로 최근 1년 매출은 1788억원으로 23% 줄었고, 영업적자도 232억원으로 확대됐다.
에스티로더컴퍼니즈는 닥터자르트의 운영사인 해브앤비의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IB업계는 해브앤비의 기업 가치를 2000억원대로 평가한다. 당초 인수 가격보다 1조원가량 가치가 줄어들면서 ‘헐값 매각’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동시에 대규모 M&A도 추진한다. 에스티로더컴퍼니즈는 스페인 향수·패션 하우스 푸이그와 M&A를 전제로 한 사업 통합 협상을 진행 중이다. 파이낸셜타임스 등 외신들은 이 거래가 성사될 경우 기업가치 400억달러(약 54조 원) 규모의 글로벌 ‘럭셔리 뷰티 공룡’이 탄생할 것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투자업계 시선은 냉정하다. 모닝스타 댄 수 애널리스트는 “인수 이후 통합과 체질 개선을 동시에 추진하기는 쉽지 않다. 브랜드 투자와 혁신, 실행력 회복에 집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에스티로더컴퍼니즈의 주가는 M&A 관련 보도 직후 약 8% 하락했다.
물론 손을 놓고 있진 않다. 에스티로더컴퍼니즈는 백화점과 면세점 중심 전략을 넘어 온라인과 SNS 숍으로 판매 채널을 넓히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자구안이 에스티로더컴퍼니즈의 움직임이 근본 해법이 되기는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럭셔리 뷰티 명가를 지탱해 온 큰 축인 R&D보다 마케팅에 치우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 공시에 따르면 연구개발 투자액은 2022년 이후 연간 약 4000억원 초반 수준에 묶여있다. 이마저도 비용이 판매관리비에 포함돼 기술 투자 성격이 약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반면 로레알은 연간 약 2조원에 달하는 R&D 투자를 집행하며 글로벌 뷰티 업계에서 압도적인 기술 격차를 유지하고 있다. 경쟁사들이 인공지능과 바이오 기반 기술 투자를 늘리는 상황 속에서 에스티로더컴퍼니즈는 M&A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화장품 OEM사 관계자는 “에스티로더는 마케팅 기업이 된 지 오래”라면서 “지속적이고 독보적인 기술력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무기가 된다. 그러나 마케팅과 포트폴리오 재편 위주의 경영은 기업이 지속가능한 성장을 일구는 데 한계가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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