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일반
달라진 화장품계 ‘양반’ 아모레퍼시픽 [K뷰티 ‘성골’의 변신 vs 글로벌 명가의 추락]①
- 속도·실행력 중심 조직으로 전환
전통적 방식 벗어나 포트폴리오·유통 구조 재편 성공
[이코노미스트 서지영 기자] seojy@edaily.co.kr
K-뷰티업계의 ‘양반’ 아모레퍼시픽(아모레)이 변하고 있다. 1945년 설립된 태평양화학을 모태로 하는 아모레는 글로벌 수준으로 발전한 대한민국 화장품 업계의 토대를 만든 기업으로 평가된다. 자연스럽게 국내 굴지 화장품 ODM(연구·개발·생산) 기업을 비롯해 뷰티 업계 전반에 아모레 출신들이 전면 포진하고 있다. 아모레는 한때 가족이었던 직원들이 외부에서 활약하는 모습에 무척 관대했다. 보통의 기업들이 자사 출신 경쟁자들의 싹을 자르거나 날을 세우는 모습과 달랐다. 아모레 이름 뒤에 ‘K-뷰티업계의 양반’ 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배경이다.
성골 의식 내려놨다…확 달라진 조직 문화
“사실 여기 있는 우리 전부 아모레퍼시픽 출신입니다.”
국내 한 중견 화장품 ODM 기업 임원이 곁에 있는 두 명의 파트장을 가리키며 웃었다. 한때 아모레에서 선·후배로 합을 맞췄던 이들은 타 ODM사로 옮겨 핵심 개발과 브랜드 성장을 이끌고 있다. “K-뷰티 업계의 뿌리는 아모레에서 시작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국내외 중견 K뷰티 기업은 물론 해외 개발사까지… 소위 잘 나가는 회사에는 모두 아모레 출신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모레 출신’이라는 이력 자체가 화장품 업계에서는 경쟁력으로 통하는 분위기다. 최근 K-라이프스타일 향수 브랜드로 주목받는 L사 대표도 ‘아모레 향 컨설팅 및 브랜드 매니저 출신’ 프로필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아모레에서 경험을 쌓은 뒤 독자 브랜드를 세운 이 대표는 한남·도산·명동으로 플래그십 스토어를 확장하며 공격적인 경영을 펼치고 있다.
대기업은 내부 직원의 이직에 상당히 민감한 편이다. 주요 기술이나 영업·마케팅 노하우 등 민감한 내부 기밀이 외부로 유출될 수 있어서다. 일부 기업은 임직원에게 경업금지(퇴직자가 경쟁사나 동종 업계로 이직하거나 창업하는 것) 서약서를 받고, 이를 어길 시 민사 소송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모레는 전 직원의 동종 업계 이직이나 퇴사 후 브랜드 론칭에 비교적 관대한 편으로 평가된다. 같은 아모레 출신들이 잘 되길 바라는 분위기와 국내 대표 뷰티 기업이라는 자부심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회사마다 조직 문화가 다르지만 아모레는 영업이나 마케팅 전반에서 점잖은 편”이라며 “‘양반’이나 ‘화장품 사관학교’라는 표현도 이런 분위기에서 나왔다”고 귀띔했다.
아모레는 경영에서도 장기적인 브랜드 가치를 중시해왔다. 경쟁사들이 단기 실적에 집중할 때도 브랜드 이미지를 지키는 데 무게를 뒀다. 채널 입점 역시 신중하게 결정했다. 브랜드에 맞지 않는 채널은 입점하지 않았고, 해외 진출도 충분한 시장 조사를 거친 뒤 실행에 옮겼다.
문제는 글로벌 뷰티 시장의 변화 속도가 빨라졌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유통망이던 백화점과 면세점 중심 구조는 SNS와 온라인 플랫폼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소비자들은 새롭고 트렌디한 브랜드를 찾기 시작했다. 북미와 동남아를 중심으로 ‘빠른 테스트-빠른 확장’ 구조가 자리 잡으면서 K-뷰티 전략도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기존 방식만으로는 대응이 어렵다는 내부 위기의식이 커진 배경이다.
아모레 관계자는 “예전에는 퇴사자들의 외부 성공을 응원하는 분위기였다면 지금은 그들을 통해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다. 시대에 맞추어 변화하려는 조직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달라진 실적과 전략
양반 의식을 내려놓으면서 성장 방식은 물론 실적도 달라지고 있다. 유통업계에 따르면 아모레의 지난해 연결 기준 매출은 전년 대비 9.5% 증가한 4조2528억원, 영업이익은 52.3% 늘어난 3358억원을 기록했다.
무엇보다 내용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일부 브랜드에 대한 매출 의존도가 높았다. 최근에는 ▲라네즈 ▲에스트라 ▲코스알엑스 등 복수 브랜드가 동시에 글로벌 성장 축을 형성하며 포트폴리오를 분산했다.
아모레는 전략적으로도 변화를 택했다. 2023년 총 9351억원을 들여 유럽에서 성장하던 코스알엑스의 인수를 마무리했다. 이후 일시적인 매출 정체를 감수하고 저마진 도매(B2B) 채널을 줄이는 대신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의 직접 판매(D2C) 구조로 전환했다. 그 결과 코스알엑스는 신규 제품군이 안착하며 매출과 영업이익이 동시에 증가했다.
이커머스·글로벌 플랫폼·틱톡 등 SNS 채널 활용도 확대했다. 코스알엑스는 지난해 4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10% 이상, 직전 분기 대비 50% 이상 증가했다. 분기 기준 역대 최고 실적이다. 기존의 ‘브랜드 중심·장기 전략’에서 벗어나 속도를 높인 결과로 풀이된다.
김승환 아모레퍼시픽 대표이사는 지난 3월 26일 정기 주주총회에서 “해외 시장에서 핵심 브랜드의 호실적과 신규 브랜드 진출 확대에 힘입어 글로벌 전반에서 성장세가 나타났다”고 말했다.
인수 기업을 통해 학습하는 모습도 나타난다. 코스알엑스는 국가별로 유통망을 유연하게 구성하고 채널 반응을 보며 물량을 확대하고 있다. 본사가 일괄적으로 전략을 설계하던 기존 방식과는 다르다. 현장 판단과 실행 속도를 중시하는 구조다.
업계 관계자는 “코스알엑스의 유럽 영업 방식은 아모레 내부에서도 참고 사례로 거론된다”며 “시장 변화에 맞춰 스스로를 바꾸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점이 핵심 변화”라고 말했다.
아모레 관계자는 “각 지역 고객 특성에 맞춘 상품과 콘텐츠를 개발하고 글로벌 유통사와 협업을 강화해 해외 사업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며 “지역별 소비자 니즈에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는 포트폴리오로 성장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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