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빚투의 위협…금융당국, 무관용으로 ‘불완전 판매’ 잔혹사와 단절
- ETF·ELD로 23조원 몰려…불완전판매 적발 시 엄벌
금감원, 사후 구제서 선제적 문제 차단으로 선회
[이코노미스트 이병희 기자] 금융당국이 금융권의 단기 실적 집중에 따른 문제를 사전 예방하기 위해 ‘사전 예방적 감독체계’를 가동하기로 했다. 고위험 상품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고 판매하는 불완전판매를 근절하기 위해 ‘무관용 원칙’을 강조했다. 과거 파생결합펀드(DLF)와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사태처럼 대규모 손실이 발생한 뒤에야 수습에 나섰던 사후 구제 방식에서 벗어나 위험 요인을 선제적으로 파악하고 미리 대응하겠다는 방침이다.
1차 소비자위험대응협의회 개최…‘사전 예방’으로 패러다임 전환
금융감독원은 지난 3월 20일 이찬진 금감원장 주재로 ‘제1차 소비자위험대응협의회’를 열고 고위험 상품 판매 및 전 금융권의 레버리지 투자 위험을 점검했다. 이번 협의회는 이 원장의 조직개편을 통해 신설된 최고 협의 기구다. 소비자 위험을 ‘모니터링·위험포착·감독검사·시정환류’ 순으로 조치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 원장은 이날 회의에서 “금융시장 변동성 확대에 편승한 금융회사의 단기 성과주의와 소비자 이익을 등한시하는 상품 제조·판매 관행에 엄정히 대응할 것”이라고 했다. 특정 부서 단위의 진단을 넘어 부서 간 칸막이를 허물고 리스크 요인을 종합 평가해 선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금감원이 가장 먼저 정조준한 것은 급격히 확대된 레버리지 투자, 이른바 ‘빚투’다. 최근 증권사 신용융자 잔고는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며 시장의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빚을 내 주식에 투자하는 경우 주가가 하락하면 더 큰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투자자가 산 주식을 담보로 더 많은 투자를 할 수 있는 신용융자는 담보 가치가 떨어질 때 충격이 더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증권사는 빌려준 돈을 회수하기 위해 투자자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주식을 매각하는 반대매매를 하는데, 이 때문에 투자자는 원금 대부분을 잃을 수도 있다.
금감원은 증권사뿐 아니라 전 금융권의 잠재적 빚투 요인을 정밀 점검하기로 했다. 점검 대상에는 ▲은행권 신용대출·예금담보대출 ▲저축은행 스탁론 ▲카드사 카드론 ▲보험사 약관대출 등이 모두 포함됐다. 금감원은 여신상품 한도와 연체율 관리를 통해 특정 분야로의 지나친 쏠림이 발생하지 않도록 지도할 계획이다.
눈여겨볼 점은 은행 창구를 통한 고위험 상품으로의 ‘머니무브’도 주요 감시 대상에 넣었다는 점이다. 5대 은행의 상장지수펀드(ETF) 신탁 납입액은 2025년 상반기 4조9000억원에서 하반기 15조6000억원으로 3배 이상 폭증했다. 지수연동예금(ELD) 판매 금액 역시 같은 기간 4조3000억원에서 7조6000억원으로 급증하는 추세다. 코스피가 상승하면서 투자자들의 자금이 몰렸고, 이 자금이 다시 증시를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금감원은 한꺼번에 많은 자금이 몰리는 상황에서 불완전판매가 이뤄지지는 않았는지 들여다보겠다는 입장이다.
금융당국이 전방위로 점검에 나선 것은 과거 홍콩H지수 ELS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다. ELS는 기초자산으로 삼는 특정 주가지수나 개별 종목의 가격 흐름에 따라 수익률이 결정되는 파생결합증권이다. 주가가 폭등하더라도 수익이 무한정 늘어나지 않지만 대신 주가가 정해진 범위(하락 한계선) 밑으로만 떨어지지 않으면, 예금보다 높은 약정 수익을 지급하는 것이 특징이다. 문제는 투자 기간 중 기초자산 가격이 발행 당시보다 일정 수준(보통 40~60%) 이하로 한 번이라도 떨어지면 원금 손실 위험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2024년 초 발생한 홍콩 ELS 사태는 금융권에 막대한 손실과 신뢰 하락을 안겼다. 당시 홍콩H지수가 반토막이 나면서 투자자들은 50% 이상의 막대한 손실을 봤다. 이런 상품 중 상당수가 은행에서 판매됐는데, 일부 은행은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손실이 나지 않는다”는 식으로 설명하며 상품을 판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일부 은행들은 글로벌 지수 변동성이 큰 시기에도 영업 목표를 상향하고 판매 한도를 확대하는 등 무리한 실적 경쟁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87세 고령 투자자에게 투자 성향을 임의로 상향해 안내하거나, 청력이 약한 고객에게 ‘이해했다’는 답변을 강요하는 등 심각한 불완전판매 사례도 적발됐다.
2023년 말 기준 홍콩 H지수 기초 ELS 판매 잔액은 39만6000계좌, 18조8000억원에 달했다. 이 중 65세 이상 고령층 비중이 21.5%(8만4000계좌)를 차지했다. 당시 H지수 급락으로 인한 예상 투자 손실액은 6조원에 육박했다. 이후 중국의 부양책에 힘입어 H지수가 7000선을 회복하며 발행액이 다시 늘기도 했지만 투자자 손실과 금융사 신뢰 하락이라는 상처가 남았다.
‘4조원 과징금’의 경고… “더 이상의 감경은 없다”
과거의 불완전판매 행위는 금융권에 막대한 금전적 제재로 돌아왔다. 금감원은 홍콩 ELS를 판매한 5개 은행에 대해 당초 합산 1조9000억원 규모의 과징금을 사전 통보했으나, 은행의 자율 배상 노력 등을 고려해 제재심의위원회를 거치며 1조3000억~1조4000억원 수준으로 일부 감경했다.
하지만 이세훈 금감원 수석부원장은 향후 유사 사례 발생 시 ‘무관용 원칙’을 적용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 수석부원장은 “종전 홍콩 ELS 제재는 금소법 시행 초기와 자율 배상을 고려해 감경했으나, 만약 감경이 없었다면 은행 전체 과징금은 4조원 수준이었을 것”이라며 “추후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면 일체의 감경 없이 법에서 정한 수준 그대로 부과하겠다”고 경고했다.
금융권은 대규모 손실에 따른 배상금 지급과 과징금 부과로 인해 대규모 충당금을 쌓아야 했다. 이는 경영 실적 악화와 대외 신뢰도 하락이라는 역효과로 이어졌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런 사태가 재발할 경우 금융시장에 대한 신뢰가 훼손되고 증시에도 심각한 타격을 줄 것이라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며 “금융회사가 페널티를 받는 것보다 사전에 리스크 관리와 내부통제에 투자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이익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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