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셔터 내리는 은행, 그 자리 메우는 ‘전국구 금융 편의점’
- [우체국의 재조명]①
2500여개 우정 네트워크 활용해 ‘은행대리업’ 시동
올 상반기 4대 은행 대출 판매 목표…금융 사각지대 해소
[이코노미스트 이병희 기자] 시중은행이 수익성 악화와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을 이유로 오프라인 영업점을 축소하면서 우체국이 주목받고 있다. 영업점이 사라져 생기는 ‘금융 공백’을 우체국이 메울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전국 2500여개에 달하는 촘촘한 우정 네트워크가 시중은행의 대리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해석이다.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12월 우체국·저축은행을 활용한 ‘은행대리업’ 서비스를 혁신금융서비스(금융 규제 샌드박스)로 지정했다. 은행대리업이란 ▲예금·적금 가입 ▲대출 상담·신청 ▲계좌이체 등 은행의 고유 업무를 제3자가 대신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올 상반기부터 전국 20여개 총괄 우체국에서 시중은행의 대출 상품을 판매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우체국이 은행의 모든 업무를 대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객 상담을 비롯해 거래 신청서 접수, 계약 체결 등 일선 현장의 대고객 접점 업무를 대신 수행하게 되면 금융 소비자 소외 문제도 완화될 전망이다.
‘금융공백’ 메우는 우정 네트워크…대출 상담부터 신청까지 한곳에서
금융위가 은행대리업에 주목한 것은 최근 시중은행들이 점포 수를 급격히 줄이면서 지역 소비자들의 금융 접근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기 때문이다. 모바일 뱅킹이 일상화되고 오프라인 지점을 찾는 소비자들이 줄자 은행들은 막대한 임대료와 인건비가 발생하는 점포를 정리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5년간 폐쇄된 시중은행 점포 수는 1000여개에 달한다. 2019년 6709개였던 영업점 수는 2024년 기준 5625개까지 감소했다. 정리된 점포 대부분은 인구가 적은 지방이나 도심 외곽 지역에 위치해 있는데, 일부 금융 소비자들은 영업점에서 은행 업무를 보기 위해 1시간 이상 이동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온 방안 중 하나가 오픈 뱅킹(Open Banking) 서비스다. 오픈 뱅킹은 한 은행 영업점에서 다른 은행의 계좌 조회나 이체 업무까지 할 수 있도록 한 서비스다. 예를 들어 하나은행 영업점에서 신한은행 계좌에 있는 금액을 하나은행 계좌로 이체할 수 있다. 문제는 한 지역에 시중은행 영업점이 한 곳도 없는 경우 금융 소비자는 은행 영업점을 찾아 돌아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전국 영업망을 가지고 금융 업무까지 해온 우체국이 은행대리업 대상자로 존재감이 부각된 것이다. 우체국은 국가 기관으로 공익적 가치도 고려한다. 산간벽지와 도서 지역까지 촘촘하게 연결망을 구축하고 있는 이유다. 전국 약 2500개에 달하는 우체국이 과거 우편물 접수처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시중은행의 업무를 대행하는 ‘금융 거점’으로 거듭나게 됐다.
금융위는 시범적으로 올 상반기 중 전국 20여개 총괄 우체국에서 4대 은행(KB국민·신한·우리·하나) 대출 상품부터 판매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대출 상품으로는 개인신용대출과 정책서민금융상품 등이 거론된다. 향후 은행대리업이 자리 잡으면 전국 우체국 지점까지 서비스를 확대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대출 심사와 승인 등 핵심 의사결정은 은행이 맡는다. 수탁 기관인 우체국은 고객 상담과 신청서 접수 등 대면 창구 역할을 수행하게 될 예정이다.
수익성 개선‧공익성 확보…시스템 구축과 상품 선정은 과제
금융위는 이 서비스를 통해 소비자가 대면으로 은행 업무를 이용할 수 있는 채널이 증가하고 한 곳에서 다양한 예금·대출 상품의 금리 등을 비교할 수 있는 편익이 커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런 협력 모델은 은행과 우정사업본부 양측에 실익을 가져다주는 ‘윈윈(Win-Win)’ 전략이 될 수 있다는 게 금융 관계자의 설명이다. 시중은행은 임대료·인건비·관리비 등 막대한 고정비가 들어가는 점포를 무리하게 유지하지 않아도 된다. 지점 하나를 유지하는 데 연간 수십억원이 투입되는 점을 고려하면 대리업체에 수수료를 지급하는 게 훨씬 경제적일 수 있다. 동시에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는 비판 여론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워질 수 있다.
우정사업본부 역시 새로운 먹거리를 얻게 됐다. 이메일과 메신저의 보편화로 우편 물량이 급감하면서 우편 사업 적자는 매년 심화하고 있는데, 은행대리업을 통해 고정 수익을 확보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실제 지난달 취임한 박인환 신임 우정사업본부장은 취임사에서 “우편 사업은 정보통신(IT) 발달과 민간 경쟁 심화로 매출이 감소하고 경직성 비용 구조로 적자 폭이 매년 확대되고 있다”며 “금융 사업도 취약한 수익 기반 영향으로 이익이 정체된 상황”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박 본부장은 우체국 네트워크를 활용해 민생 접점의 공적 플랫폼을 구현하겠다며 정부 위탁 사업을 발굴·확대하고, 지역 균형 발전과 생활 안전망 강화를 뒷받침하는 특화 서비스를 개발하겠다고도 했다. 은행대리업은 공적 플랫폼으로서 우체국의 위상을 강화하고 시민들의 생활 안전망을 강화하는 것과 맥락이 닿아 있다는 해석이다.
전문가들은 우체국의 변신이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단순한 입출금 대행을 넘어, 향후에는 대출 상담이나 금융 투자 상품 판매 등 보다 고도화된 서비스까지 우체국 창구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미 일부 우체국에서는 인공지능(AI) 기반의 무인 키오스크를 도입하거나, 시중은행과 공동 점포를 운영하며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우체국 자체의 예금·보험 상품과 시중은행의 상품을 결합한 하이브리드형 금융 서비스가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우체국이 우편 업무 축소로 적자가 커질 때는 전국 영업점이 부담이었지만, 이제는 전국 어디에나 있다는 ‘접근성’이 무기가 됐다”며 “디지털 기술이 발전할수록 역설적으로 오프라인 창구의 가치는 희소해질 것이고 우체국은 그 빈틈을 메우는 강력한 금융 플랫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은행 대리업자의 명확한 역할이 정해지지 않은 점은 한계로 지적된다. 시중은행들과 우체국은 실무 회의를 통해 시범 운영에서 취급할 상품을 선정하고 업무 프로세스를 결정하게 되는데, 아직 우체국에서 취급할 은행의 대출 상품 등을 제대로 정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이후 은행대리업에 필요한 업무 프로세스와 전산 시스템 개발도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우체국 직원들이 전산 시스템을 익히고 상품까지 취급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시범 운영을 시작하기까지도 시일이 걸릴 수 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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