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일반
전쟁 포화 속 ‘호르무즈 잔혹사’... 韓 경제, 퍼펙트스톰 오나
- [美·이란 전쟁, 시험대 선 韓 경제]①
‘호르무즈 봉쇄’ 시 원유 수급 마비… 고유가·고환율·고물가 ‘3고(高)’ 습격
[이코노미스트 원태영 기자]중동의 화약고가 결국 터졌다. 미국과 이란 사이의 군사적 충돌이 격화되면서 글로벌 금융시장과 에너지 시장은 유례없는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에너지 자급률이 낮고 수출 의존도가 높은 대한민국 경제에 이번 사태는 단순한 외부 변수를 넘어선 ‘생존의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우리 경제의 성장 잠재력 자체가 훼손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동맥경화’ 걸린 호르무즈, 에너지 안보 붕괴
정부는 3월 4일 강기룡 재정경제부 차관보 주재로 관계기관 합동 점검회의를 열어 ▲에너지 ▲화학제품 ▲소재·장비 등 중동 의존도가 높은 경제안보품목의 ▲수입 동향 ▲대체 가능성 ▲국내 생산여건 등을 점검하고 향후 대응 방향에 대해 논의했다. 점검 결과 에너지의 경우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고 있으나 현재까지 국내 수급 관련 특이 동향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에 따르면 현재 한국이 보유한 비축유는 정부와 민간을 합산해 총 208일분이다. 이 가운데 정부 비축유는 절반 수준인 약 100일분으로 국제에너지기구(IEA)가 권고하는 최소 기준인 90일분을 웃돈다. 나프타는 호르무즈 해협 이용 비중이 54%로 상황 장기화시 수급 우려가 있어 수출 물량 내수 전환 등 지원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정부는 이에 더해 중동 외 원유 물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비상 대책을 가동했다. 공급망안정화기금을 통해 북미·중남미 등 중동 외 지역으로부터 원유 구매 자금 지원 한도를 기존 90%에서 100%로 확대키로 했다.
문제는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장기 봉쇄’다. 폭 33km에 불과한 이 해협은 전 세계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 물동량의 약 20%가 통과하는 전략 요충지로, 중동산 원유가 아시아로 향하는 핵심 수송로다. 한국은 수입 원유의 약 70%, LNG의 약 30%를 이 해협을 통해 들여온다. 만약 이란이 이곳을 장기간 봉쇄하거나 군사적 분쟁 지역으로 만들 경우, 대체 항로를 찾기 힘든 한국의 에너지 수급은 사실상 ‘마비’ 상태에 이른다.
특히 원유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설 경우 국내 소비자물가상승률이 1%포인트 이상 오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지난 3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연평균 국제 유가(두바이유 기준)가 배럴당 100달러에 이를 경우 소비자물가상승률은 1.1%포인트 상승 압력을 받는 것으로 추정됐다. 같은 조건에서 경제성장률은 0.3%포인트 하락하고 경상수지는 260억달러 감소할 것으로 분석됐다.
시나리오별로 보면 전쟁이 단기간 내 협상 국면으로 전환돼 2026년 연평균 유가가 80달러 내외에 머무는 ‘기준 시나리오’에서는 성장률이 0.1%포인트 하락하고 경상수지는 58억달러 감소하는 데 그칠 것으로 추산됐다. 소비자물가는 0.4%포인트 오르며 물가 부담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됐다.
미국 또는 연합군의 지상군 투입과 함께 해협 봉쇄가 장기화되는 오일 쇼크 시나리오에서는 연평균 유가가 150달러 이상으로 치솟아 성장률이 최소 0.8%포인트 하락하고 소비자물가는 2.9%포인트 급등할 것으로 분석됐다. 경상수지 감소폭도 767억달러에 달할 수 있다는 전망이다. 이 경우 연간 성장률이 1% 안팎에 머물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고 연구원은 내다봤다.
문제는 국제 유가가 이미 빠르게 오르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글로벌 원유 기준 가격인 브렌트유 선물은 지난 3일 배럴당 85달러까지 상승해 2024년 중반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가 미국이 글로벌 해상 운송로 보호에 나설 것이라는 보도 이후 약 80달러 수준으로 소폭 조정됐다.
최근 한국 경제의 경기 복원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에서 이번 중동발 충격은 경기 회복 국면으로의 진입을 상당 기간 지연시킬 가능성이 크다고 현대경제연구원은 내다봤다. 특히 실질임금이 줄어드는 가운데 물가만 치솟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내수 경기가 침체 국면에 빠질 것으로 우려했다.
물가 폭탄과 소비 위축…스태그플레이션 공포
고유가는 즉각적으로 국내 물가를 자극한다. 유가 상승은 운송비와 제조 원가를 높여 공산품 가격을 올리고 이는 소비자 물가 지수(CPI)의 가파른 상승으로 이어진다. 전기와 가스 등 공공요금 인상 압박까지 가중되면 서민 경제는 유례없는 고통에 직면하게 된다.
더 큰 문제는 ‘환율’이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커지면 안전 자산인 달러로 자금이 쏠리며 원·달러 환율이 급등한다. 환율 상승은 수입 물가를 한 번 더 밀어 올리는 ‘더블 악재’로 작용한다. 한국은행의 고민도 깊어질 수밖에 없다.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자니 가계부채와 경기 침체가 발목을 잡고 금리를 동결하자니 자본 유출과 물가 폭등이 우려되는 ‘진퇴양난’의 형국이다. 결과적으로 성장은 멈추고 물가만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이 한국 경제의 가장 큰 적이 될 전망이다.
중동산 원유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다만 새로운 대체 공급선을 발굴하기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원유 공급의 최우선은 안전성이다. 수급이 잠시라도 끊길 경우 공장 가동이 멈추게 된다. 실제로 정유업계에서는 러이아산 원유 수입을 늘렸다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원유 수입이 끊긴 전례가 있다.
이번 미·이란 전쟁은 한국 경제에 있어 ‘외부 충격’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우리가 그동안 외면해왔던 에너지 편중 구조와 수출 중심 경제의 취약점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칼날이다. 이번 위기를 단순히 버텨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에너지 구조의 근본적 혁신과 산업 포트폴리오의 재편을 통해 체질을 개선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전쟁의 화마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경제 자생력을 확보하는 것, 그것이 지금 대한민국에 주어진 가장 시급한 과제다.
김용희 선문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번 이란 전쟁으로 유가와 환율 불안이 커지면서 한국 경제에는 성장 둔화·물가 재상승 압력이 동시에 커진 상황”이라며 “다만 정부와 한은이 시장안정 조치를 가동하고 있어 단기 충격의 크기는 중동 정세의 장기화 여부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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