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피지컬AI의 민주화…韓 제조업 혁신 이끈다 [스페셜리스트 뷰]
- 데이터 만능주의 넘어서야…현장의 암묵지 자동화가 한국형 AX의 해법
휴머노이드 로봇 주목받지만…현장에서 비효율적인 경우도 많아
[서형주 카본식스 CTO] 피지컬 AI(Physical AI)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다. 피지컬 AI란 OpenAI의 챗GPT(ChatGPT)나 구글의 제미나이(Gemini)가 언어 세계에서 범용적인 지능을 보여주듯, AI가 로봇이나 자동차와 같은 물리적 시스템과 결합하여 실제 세계의 다양한 작업을 수행하는 비전을 의미한다.
2025년 CES 기조연설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피지컬 AI를 “AI의 다음 프론티어”라고 선언했다. 흥미로운 점은 세계가 그의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피지컬 AI를 현실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각국 정부는 피지컬 AI 발전을 위한 국책 사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고, 상장된 로봇 기업들의 주가는 연일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 10여 년간 로봇 분야를 연구해온 경험에 비춰볼 때, 이만큼의 자본과 관심이 동시에 집중된 적은 없었다.
이러한 세계적인 흐름 속에서 한국은 피지컬 AI 시대의 주요 수혜국으로 주목받고 있다. 피지컬 AI가 가져올 자동화는 최근 많은 한국 기업이 공통으로 겪고 있는 제조업 인력난을 단순한 비용 문제가 아닌, 구조적 경쟁력의 문제로 전환시킬 수 있는 핵심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Physical AI와 로봇의 시대
국내 제조업은 지속적인 인건비 상승으로 인해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해 왔다. 그러나 인건비 상승이 이제는 전 세계적인 추세가 되면서 단순히 생산기지를 옮기는 전략 역시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한편 미국은 관세를 무기로 제조업 리쇼어링(Reshoring)을 추진하고 있지만, 높은 인건비를 고려하면 공장을 미국으로 되돌리는 것 역시 쉬운 선택은 아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동화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 과제가 되었다. 이제는 ‘어디로 옮기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생산하느냐’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러한 자동화의 높은 수요 속에서 피지컬 AI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 기술로 부상하고 있다. 이 흐름에 맞춰 국내 주요 대기업과 정부 역시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인공지능 혁신(AX·AI Transformation)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필자는 미국에서 로봇과 AI 기술을 연구한 이후 창업하여, 실제 제조 현장을 직접 돌아다니며 이 기술들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를 고민해 왔다. 그 과정에서 마주한 제조업의 현실적인 문제들과 피지컬 AI가 이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구조적 한계들도 짚어보려 한다.
제조업 자동화가 어려운 페인 포인트(Pain Point)
제조업에서 오랫동안 자동화되지 못한 공정들은 왜 지금까지도 사람의 영역으로 남아 있을까.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본 결과, 자동화의 어려움은 크게 세 가지 이유로 정리할 수 있었다.
첫째, 기존 자동화 방식은 제품과 환경의 비정형성에 극도로 취약하다. 대부분의 자동화 설비는 미리 정의된 동작만을 수행하는 ‘개방 루프’(Open-loop, 미리 설정된 입력값에 따라 작동하는 제어 방식)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 제조 현장에는 정해진 모션만으로는 수행할 수 없는 작업이 훨씬 많다. 필름이나 케이블처럼 형태가 쉽게 변하는 유연한 물체를 다루는 공정이 대표적이다. 한 배터리 제조사의 경우, 셀 두께가 0.1mm만 달라지거나 보호 필름에 미세한 변형만 일어나도 기존 설비가 대응하지 못해 라인이 멈추곤 했다. 숙련된 작업자는 경험을 통해 축적된 물리적 ‘커먼센스’(Common sense)를 바탕으로 이러한 변화를 즉각 판단하고 보정하지만, 기존 자동화 설비로는 이러한 대응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둘째, 제조 공정과 생산 환경의 높은 다양성이다. 특정 제품을 장기간 대량 생산하는 경우에는 자동화 설비의 경제성이 확보된다. 하지만 위탁생산(EMS) 업체나 소비자 전자 산업처럼 수요에 따라 모델이 수시로 바뀌는 환경에서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제품이 바뀔 때마다 설비를 재구성하고 로봇 모션을 다시 학습시켜야 하므로, 이러한 다품종 소량생산 환경에서 기존 자동화 방식은 구조적으로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다.
셋째, 자동화는 제조 기업 입장에서 기술이 아닌 투자의 문제다. ▲수율 ▲작업 속도 ▲총비용이라는 세 요소가 동시에 충족되어 노동자의 인건비 대비 투자수익률(ROI)이 확보되어야 한다. 대기업과 진행하는 시범 양산 프로젝트들이 기술적으로는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성 문턱을 넘지 못해 실제 양산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사례가 매우 많다.
피지컬 AI, 전문가의 암묵지 실행 가능하게 만들어
기존의 제조업 자동화는 오랫동안 규칙 기반(Rule-based) 방식에 의존해 왔다. 로봇의 동작 궤적을 사람이 사전에 모두 정의한 것이다. 그러나 예외 상황이 빈번하고 생산 대상이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현장에서 모든 경우의 수를 규칙으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피지컬 AI는 이를 데이터 기반 접근으로 전환한다. 주어진 센서 입력과 환경 속에서 어떤 행동이 적절한지를 규칙으로 작성하는 대신, 데이터로부터 스스로 학습하게 만드는 것이다. 핵심은 이것이다. 숙련 작업자가 “필름이 구겨졌을 때 어떻게 펴는지”를 말로 설명할 수는 없어도, 그 동작을 직접 보여줄 수는 있다. 엔지니어가 모든 예외 상황을 코드로 짤 수는 없어도, 그 상황들을 데이터로 수집할 수는 있다. 피지컬 AI는 바로 이 암묵지(Tacit Knowledge)를 명시적인 자동화로 전환하는 도구가 된다.
충분한 데이터와 컴퓨팅 자원이 갖춰질 때, 데이터 기반 접근은 규칙 기반 방식보다 훨씬 높은 성능과 유연함을 보여준다. 로봇은 비정형 물체나 미세한 위치 변화에도 대응할 수 있고, 환경이 바뀌더라도 현장 데이터를 보강하여 빠르게 적응할 수 있다. 이는 로봇 설정에 필요한 인력과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준다. 더 나아가 데이터가 대규모로 축적된다면, AI는 경험하지 못한 명령이 주어지더라도 기존 지식을 바탕으로 유추하여 작업을 수행하거나 실수를 스스로 복구할 가능성까지 열어준다. 전 세계가 이를 ‘로봇의 챗GPT 순간’이라 부르며 기대하는 이유다.
피지컬 AI의 불편한 스케일링
그러나 이러한 파급력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다. 바로 충분한 데이터의 축적이다. 많은 기업이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데이터를 수집하고 ‘데이터 팩토리’라는 산업까지 등장했지만, 범용 지능을 위해 얼마나 많은 데이터와 비용이 필요한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데이터의 양보다 ‘성격’이다. 자동화 대상과 범위가 명확히 정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모으는 데이터에는 한계가 있다. 또한 피지컬 AI는 필연적으로 물리적 플랫폼에 종속된다. 제조업은 공정 중심으로 발전해 왔기에 공장마다 장비 구성이 제각각이다. 하나의 통일된 플랫폼 위에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지능을 배포하는 것이 구조적으로 어렵다는 뜻이다.
이 맥락에서 휴머노이드 로봇이 해법으로 주목받기도 하지만, 제조업에서는 오히려 비효율적인 경우가 많다. 공정마다 요구되는 도구와 로봇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무거운 유리판을 옮길 때는 공압식 패드가, 특정 공정에서는 특수 조명과 현미경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다양성은 수십 년간 축적된 공학적 최적화의 결과물이다. 피지컬 AI를 도입한다고 해서 이러한 기술적 선택들을 단일 플랫폼으로 쉽게 대체할 수는 없다. 결국 제조업에서의 피지컬 AI는 단일한 범용 해답이 아니라, 복잡한 물리적 현실 위에 ‘어떤 지능을 어디에 얹을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선택의 문제다.
한국 제조업 피지컬 AI에서 기회 찾아야
제조업에서 피지컬 AI를 현실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우선해야 할 전략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당분간은 데이터의 부재를 전제로 전략을 세워야 한다. 단기간의 대규모 범용 데이터 확보를 기대하기보다, 적은 데이터로도 성과를 낼 수 있는 특정 공정부터 집중해야 한다. 소규모 공정들을 하나씩 자동화해 나가는 접근이 ‘완성된 범용 지능’을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현실적이다.
둘째, 제조업의 다양성을 장애물이 아닌 본질적 특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공정과 장비의 차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 다양성 위에서 피지컬 AI를 발전시켜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축적된 데이터를 결합해 하드웨어에 종속되지 않는 기반 모델(Foundation Model)을 구축하되, 그 출발점은 개별 공정에 최적화된 적용이어야 한다.
다행히 한국 제조업은 수십 년간 성숙한 자동화 생태계를 구축해 왔다. 대기업의 자동화 조직, 수백 개의 SI(System Integration) 업체, 특화 장비 제조사들이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아직 피지컬 AI가 학계의 전유물에 머물러 있지만, 이를 소규모 데이터로도 활용 가능한 도구로 만들어 기존 생태계가 빠르게 흡수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다양성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다.
중견 SI 업체가 적은 데이터로도 유연 물체 핸들링 솔루션을 만들 수 있다면 고난도 자동화를 중소 고객사에도 제공할 수 있다. 대기업이 새로운 제품을 내놓을 때마다 몇 주씩 걸리던 로봇 재설정을 며칠 내로 단축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경쟁력이다.
결국 한국 제조업은 ‘피지컬 AI의 민주화’를 통해 기존 생태계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려야 한다. 한국의 탄탄한 제조업 현장 전문가들이 피지컬 AI를 도구로서 쉽게 다룰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인공지능 전환(AX)가 시작될 것이다.
필자는 미국 칼텍(Caltech) 학사, MIT CSAIL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로봇과 AI 분야에서 ICML Outstanding Paper, T-RO Best Paper Finalist 등을 수상하며 연구 성과를 인정받았다. NASA JPL, 도요타 연구소(TRI), 보스턴 다이내믹스 AI 인스티튜트(Boston Dynamics AI Institute) 등 유수의 기관과 협업했다. 현재 제조업 자동화 피지컬 AI 기업인 ‘카본식스’를 공동 창업하여 최고기술책임자(CTO)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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