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항로 개척이 '작은 이벤트'에서 '큰 프로젝트'로 격상되고 있다. 정부는 연내 전담 조직을 꾸리고, 내년에는 상선 시범 운항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대선 기간 내내 북극항로의 필요성을 강조해온 이재명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꿈의 항로'는 곧장 국정과제 전면에 올라섰다. 이 때문에 북극항로는 올해 다시금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한때 탐험의 영역이던 북극항로가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준비해야 할 것은 산더미다. 여러 준비물들 가운데 신형철 극지연구소 소장이 가장 먼저 주문한 것은 '구체적인 설계도'다. 그는 북극항로 개척의 경우 막대한 시간과 돈이 투입되는 만큼, 정권이 바뀌더라도 이를 오랫동안 끌고 갈 수 있는 구체적인 설계가 필요하다고 진단했다.신 소장은 지난 2002년 극지연구소에 입소한 이래 극지생물해양연구부장, 국제협력실장, 정책협력부장 등을 거쳐 지난 2023년 12월 제8대 극지연구소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활발한 과학 외교 활동으로 대한민국 극지 활동의 저변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빠르고 예측 어려운 해빙신 소장은 북극항로의 과거와 현재 두 가지로 설명했다. 과거가 탐험의 영역이었다면 현재는 협력과 경쟁이 공존하는 영역이라고 전했다. 최근 들어 연일 언급되는 북극항로의 개념은 19세기에도 있었다. 다만, 당시는 신 소장의 설명대로 탐험의 영역이었다. 아문센 같은 탐험가가 북동·북서항로를 주파했지만, ‘화물을 나르는 길’로 인식된 건 비교적 최근이다. 북극 바다가 녹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위성관측이 본격화된 1979년 이후 해빙 면적은 하향 추세를 한 번도 뒤집지 못했고, 2012년에 저점을 찍었다. 이후에도 북극은 매년 빠른 속도로 녹고 있다.신형철 소장은 “1979년 이후 북극 바다를 덮고 있는 해빙 추세를 보면 쭉 내리막"이라며 "북극의 해빙은 예측 모델이 내다본 것보다 항상 더 빨리 녹아왔다. 예측 모델은 최대한 보수적으로 전망했지만, 현실은 그보다 늘 앞서갔다. 이는 수치로도 확인된다”고 말했다.물론 해빙 속도가 빨라진다고 해서 당장 상업 운항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상업 운항 가능성은 높아졌지만, 안정적인 상업성이 언제 확보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해빙은 해마다 속도와 분포가 달라지고, 두께와 위치도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이다.신 소장은 북극항로의 상업화 시점에 대해 “북극은 매일 상황이 바뀐다. 오늘 얼음이 얇아졌다가도 내일은 다시 두꺼워지고, 분포도 계속 달라진다”며 “위성 관측, 쇄빙선 실측, 컴퓨터 모델링을 모두 동원할 경우 어느정도 예측이 가능하지만, 그마저도 변수와 불확실성이 많아 단정적인 연도를 말하기는 어렵다”고 답했다.다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항로는 있다. 북동항로(NSR)다. 러시아 연안을 따라가는 이 항로는 해역이 비교적 넓고 기존 운항·항만 인프라가 축적돼 있다. 반면, 캐나다 연안을 지나는 북서항로(NWP)는 수로가 좁고 해빙 변동성이 커 운항이 까다롭다. 이 때문에 북동항로가 당장 상업 운항에 유리하다는 것이 신 소장의 설명이다.그는 “지금 우리가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러시아를 활용해 북동항로를 공략하는 것”이라며 “북서항로는 해역이 좁고 불규칙한 데다 캐나다가 ‘내수’(內水)라고 주장해 무해통항 적용이 까다롭다. 쉽게 말하자면, 상업성이 낮다”고 말했다. 이어 “북서항로가 항로상 최단 거리라는 장점이 있지만, 이를 활용하기란 당장은 먼 이야기”라고 말했다.
한국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북극항로를 노리는 경쟁자도 많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가 대표적이다. 이들 중 가장 큰 경쟁자는 중국이다. 한국과의 차이는 체제다. 중국은 북극항로 개척에 있어 국영기업이 움직인다. 중국의 경우 정책 기조가 확립되면 자금·조직·선박이 일사불란하게 투입되고, 리스크도 국가가 흡수한다. 반면 한국은 민간 중심 구조다. 이 때문에 단기 성과에 매몰되기 쉽고, 부처·지자체·산업계 각각의 과제가 흩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 때문에 신 소장은 첫 준비물로 ‘구체적인 설계도’와 지속 가능한 ‘컨트롤타워’를 꼽는다.신 소장은 “한국은 중국과 체제 자체가 다르기에, 중국처럼 북극항로 개척에 뛰어들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이 때문에 이해관계자별로 필요한 것을 나열하는 게 아니라 2050년까지 지속할 수 있는 구체적인 북극항로 개척 설계도를 만들고, 이를 묶어 관리할 수 있는 컨트롤타워를 마련해야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게 장기적인 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인력과 제도 보완도 과제로 지목됐다. 그는 얼음 해역을 실제로 운항할 숙련 항해 인력의 확보를 선결 과제로 꼽았다. 아울러 러시아가 국내법을 정비하며 영향력을 강화하는 상황을 감안해, 국제법적 정당성을 갖춘 외교·법제 대응을 병행해야 한다고 했다.그는 “우선 북극 항로의 얼음길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실력 있는 항해사를 적극적으로 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다음은 대외·법제 대응”이라며 “러시아가 북동항로를 무상으로 내줄 생각은 없어 보인다. 최근 러시아는 자국 국내법을 정비하며 영향력을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이 부분은 한국 정부가 외교적으로 잘 풀어나가야한다”고 덧붙였다.끝으로 그는 북극항로 시대에 맞는 준비를 갖추되, 한국이 가진 ‘무기’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다양한 특수선 건조 경험으로 축적된 한국 조선의 엔지니어링 역량과 정책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산업 문화, 국제사회에서의 신뢰받는 이미지가 그것이다. 이 강점들을 하나의 설계도에 투입해 실행할 때, 북극항로에서 한국의 실질적 존재감이 커질 것이라는 설명이다.신 소장은 “한국은 뛰어난 과학 역량과 공학 기술도 가지고 있다. 또 여러 돌발 상황에 기민한 대응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런 나라가 어디 있나. 한국은 절대 만만치 않다”며 “북극항로 개척은 전 세계 북극 과학의 완성판 중 하나다. 이 때문에 북극항로 개척은 한국의 활동 반경과 국제무대에서의 발언권·존재감을 넓히는 전략 중 일부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