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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한국 하늘 위의 반세기, 싱가포르항공이 그려온 '최초' 여정 살펴보니

산업 일반

1975년 8월의 한여름, 김포국제공항 활주로 위로 하얀 동체가 천천히 속도를 높이며 미끄러져 나갔다. 기체 옆에는 노란색과 파란색 줄무늬가 길게 그려져 있었고, 꼬리에는 크리스 플라워 문양이 반짝였다. 바로 싱가포르항공의 한국 첫 취항이자, 새로운 하늘길의 시작이었다.당시 한국은 고속 경제성장과 함께 해외 진출 붐이 일던 시기였다. 국제선 노선은 한정적이었고, 특히 동남아시아와 한국을 직접 연결하는 항로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외항사의 취항은 단순한 교통편 개설이 아니라 ‘국제화의 상징’이었다. 한국과의 직항 개설은 단순한 노선 확장이 아닌, 양국 간 인적·물적 교류를 촉진하는 새로운 길을 여는 사건이었다. 김포에서 인천으로 이후 부산까지 확장된 하늘길1970년대 중반 김포국제공항 활주로에 처음 도착한 보잉 707은 방콕·홍콩·대만을 경유하며 주 3회 서울과 싱가포르를 연결했다. 1984년 서울-싱가포르 직항편이 개설되자 비행 시간은 크게 단축됐다. 하늘길이 짧아진 만큼 교류는 한층 활발해졌다. 1995년에는 서울-싱가포르 노선을 매일 운항하며 양국을 잇는 일상적인 하늘길이 열렸고, 2010년에는 하루 세 차례로 확대됐다. 2012년부터는 현재와 같은 하루 네 차례 운항이 시작되었으며, 현재는 인천–싱가포르 노선 주 28회, 부산–싱가포르 노선 주 4회 운항으로 확대돼 양국을 잇는 대표적인 하늘길로 자리잡고 있다.2001년에는 인천국제공항 개항과 함께 허브를 김포에서 인천으로 이전하며 한국 노선망의 기반을 갖췄다. 또한 2019년에는 A350-900MH와 B787-10 드림라이너를 도입했다. 해당 기종들은 현재까지 인천-싱가포르 노선을 운항하고 있다. 같은 해 10월에는 인천국제공항 제1 터미널에 실버크리스 라운지의 문을 열었다. 2011년 연말 성수기에 부정기편으로 부산–싱가포르 운항을 시작한 싱가포르항공은 2019년 10월부터 해당 노선을 본격 운영하면서 부산에 정식 취항해 경상 지역 여행객들에게 편리한 하늘길을 제공했다. 이후 2020년 3월 팬데믹으로 운항이 중단됐다가 약 3년 만에 재개됐으며, 현재는 주 4회 총 154석 규모의 보잉 737-8 항공기가 투입되고 있다. 최근 싱가포르항공은 부산 노선의 수요 증가에 대응해 2026년 1월 25일부터 부산–싱가포르 노선 운항을 기존 주 4회에서 주 7회로 확대할 계획을 발표했다. 싱가포르항공은 코로나19 이후 위기 상황 속에서도 철저히 준비하고 발 빠르게 대응해 2021년 11월 한국과 싱가포르 양국 간 자가격리 없는 여행안전권역(VTL, Vaccinated Travel Lane) 합의 체결과 함께 인천-싱가포르 노선에서 가장 먼저 운항을 재개한 항공사로 자리매김했다. 싱가포르항공의 한국 노선은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최신 서비스와 설비를 가장 먼저 경험할 수 있는 무대였다. 미쉐린 3스타 셰프 임정식과의 협업은 그 상징적인 사례다. 건강하면서도 다양한 입맛을 고려한 한식 메뉴는 한식을 처음 맛보는 외국인 승객에게는 새로운 감동을, 고향의 맛을 그리워하는 국내 고객에게는 친숙함을 전했다.또 ‘World Gourmet Cuisine’ 프로그램으로 유럽·아시아·오세아니아의 미식을 기내로 옮겨왔으며, ‘북더쿡’(Book the Cook) 사전 예약 서비스를 통해 랍스터 테르미도르, 시그니처 싱가포르 락사 등 다양한 메뉴를 선택할 수 있다. 와인 선정에도 까다로움을 더했다. 세계적 와인 권위자 3인이 매년 1000종 이상의 와인을 기내 환경에서 시음·선정하며, 2024년 12월부터는 루이 로드레 크리스탈 2015 빈티지를 항공사 최초로 서비스하고 있다.좌석과 시설 역시 세계적 수준이다. 프리미엄 이코노미 클래스는 38인치 간격과 19.5인치 너비의 좌석, USB 포트·전원 공급 장치·조절 가능한 독서등을 갖췄다. A380 스위트 클래스에서는 독립형 객실과 전용 침대, 뱅앤올룹슨 헤드폰, 32인치 HD 모니터, 라리크 어메니티가 제공되며, 동반객을 위한 더블 베드 옵션도 마련됐다. 업계 최초로 전 클래스에 무제한 무료 와이파이를 도입해 크리스플라이어 회원이면 누구나 전 노선에서 기내 인터넷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여기에 시그니처 바틱 플로라 향을 담은 뜨거운 타올 서비스가 더해져 비행의 시작부터 환영받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37개국 125개 도시 항로 운영 싱가포르항공은 현재 37개국 125개 도시를 오가며 동남아시아부터 유럽, 미주까지 세심하게 짜인 글로벌 네트워크를 운영하고 있다. 또 싱가포르항공은 지난 2021년 ‘2050년 탄소 순배출 제로’를 목표로 선언하고 이를 실천 중이기도 하다. 특히 싱가포르항공은 지속가능성 목표와 고객 니즈를 만족시키기 위해 현대적이고 효율적으로 기체를 운영하고 있다. 기체 평균 기령은 약 7년으로 업계 평균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으며, 연료 효율이 뛰어난 에어버스 A350-900·A320neo 패밀리, 보잉 777-9·787·737-8 맥스를 운영한다. 인천공항 주기장에서 은빛 동체가 햇빛을 반사하며 대기하는 B787-10 드림라이너 역시 그 주인공 중 하나다. 기존보다 연료 효율이 30% 높아, 짧은 구간에서도 긴 여정에서도 탄소 배출을 줄인다.

2025.08.24 16:00

4분 소요
푸틴의 유혹, 트럼프의 동조, 서방의 불안 [특파원 리포트]

국제 이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8월 15일(현지시간) 알래스카 회담을 통해 외교적 고립을 벗고 화려하게 복귀했다. 전임 미국 대통령들로부터 ‘살인범’으로 낙인찍히며 제재와 고립 속에 몰렸던 인물이, 이번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레드카펫 환대와 갈채 속에서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한때 외교적 ‘이단아’였던 푸틴은 순식간에 유럽 안보의 핵심 플레이어로 부상했고, 모스크바 관영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러시아는 여전히 초강대국’이라는 이미지를 부각했다.푸틴이 손에 넣은 건 전장에서의 성과가 아니라 외교 무대에서의 정치적 상징이었다. 이는 단순한 회담 참석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그는 국제 정상회의에서 배제되고 서방 지도자들의 악수조차 받지 못하는 처지였지만, 이번에는 미국 대통령과 나란히 서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러시아 내부에서는 이를 ‘대국의 귀환’으로 선전하며 민심 결집에 활용하고 있다.이 화려한 복귀의 배경에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선택이 결정적으로 깔려 있다. 이번 알래스카 회담은 푸틴에게 승리를 안겼지만, 동시에 트럼프의 외교적 시험대이기도 했다. 푸틴은 여전히 전쟁과 외교를 병행하며 힘을 얻었지만, 트럼프는 흔들렸다. 그의 선택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운명과 서방의 단결이 갈린다. 지금까지의 행보만 놓고 보면, 트럼프는 푸틴의 언어와 유혹에 지나치게 쉽게 끌려가고 있다.푸틴의 유혹에 끌려간 트럼프 8월 18일 워싱턴DC에서 열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유럽(EU) 정상들과의 후속 회담에서 트럼프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에게 속삭였다. “푸틴이 나를 위해 거래하려는 것 같아. 미친 얘기 같지만….”전쟁을 끝내기 위해 강력한 제재나 압박을 요구해야 할 미국 대통령이 오히려 푸틴의 언사에 기대를 거는 모습이었다.실제 트럼프는 이미 제재를 포기했고, 휴전도 평화협상의 조건에서 뺐다. 유럽 정상들과 만나는 중에도 푸틴과 직접 통화하며 “러시아와 상의 없이 우크라이나 문제를 결정하지 않겠다”고 안심을 줬다. 이는 미국이 전쟁 종식의 주도권을 쥘 기회를 스스로 내던진 것이나 다름없다. 반면 푸틴은 알래스카 회담을 국내 정치용 무대로 삼았다. 트럼프의 환대를 대대적으로 중계하며 러시아 국민에게 “우리는 고립되지 않았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은 것이다. 실제 여론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의 70%는 전장에서의 성과를 믿고 있지만, 동시에 60%는 평화를 원한다. 어느 쪽이든 전쟁만 끝내면 푸틴은 이를 ‘무엇이든 승리’로 포장할 수 있다.그러나 이 같은 선전 효과는 미국의 방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푸틴은 전장에서 얻지 못한 영토까지 협상장에서 요구하고 있으며, 트럼프는 이를 저지할 의지가 없다.영토 문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넘기긴 했지만, 그 사이 유럽의 단결은 흔들리고 젤렌스키 대통령은 고립의 위기에 몰리고 있다.푸틴이 외부적으로는 이런 ‘승리의 그림’을 연출하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상황이 결코 녹록지 않다. 러시아 경제는 침체로 빠져들고 있다. 올해 7개월 동안 재정적자는 이미 연간 목표를 초과했고, 정부 지출의 5% 이상이 계약군 유지비로 투입되고 있다. 민간 산업은 노동력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전선 역시 3년째 돌파구 없이 교착 상태다. 이처럼 안팎의 압박이 커지는 가운데 푸틴은 외부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실제로 회담에서 그는 경제적 이익까지 챙겨냈다는 평가가 나온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트럼프가 푸틴에게 ▲알래스카 천연자원 개발 기회 ▲베링해 협력 ▲러시아 항공기 산업 제재 해제 ▲우크라이나 점령지 희토류 광물 접근권까지 제시했다고 보도했다.푸틴의 목표는 분명하다. 냉전 이후 구축된 안보 질서를 무너뜨리고, 우크라이나를 정치적으로 무력화시키는 동시에 러시아의 경제 재건을 함께 이루는 것이다. 그는 전장에서 이를 달성하지 못했지만, 트럼프의 태도는 그 길을 열어주고 있다. 유럽, 위기 속 단결 재확인했지만… 푸틴은 늘 미국과 유럽 간의 균열을 최대한 활용해 우크라이나 문제를 ‘서방 내부의 갈등’으로 전환시키려 했다. 미국 대통령이 강력한 제재와 압박을 포기하는 순간, 유럽의 결속은 흔들리며 각국의 이해관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독일은 에너지 안보와 경제적 피해를 우려해 대러 제재 강화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고, 프랑스는 자국 주도의 외교적 중재 역할을 노리며 미국과 보조를 맞추는 데 신중하다. 동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의 위협을 직접 마주하고 있어 강경 노선을 주장하지만, 서유럽과의 시각 차이가 벌어지며 균열이 생긴다. 이처럼 유럽 각국이 서로 다른 계산법에 매달리는 순간, 푸틴은 전장에서 직접 얻지 못한 전략적 우위를 협상장에서 확보하게 된다. 다시 말해 트럼프의 소극적 태도는 단순한 외교적 선택을 넘어, 서방의 단일 대응 구조 자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 구조적약점으로 작용한다.현재까지 서방의 모습은 균열보다는 오히려 결속 강화에 가까웠다. 독일·프랑스·영국 등 주요국은 워싱턴 회담에서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명문화하려 했고, 동유럽국가는 러시아의 위협을 강조하며 지원 확대를 요구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EU 내부에서도 논쟁은 있지만, 공통된 메시지는 ‘우크라이나 지원을 줄이지 않는다’는 것이다.트럼프가 푸틴에 지나치게 유화적이라는 비판은 존재하지만, 그럴수록 유럽은 단합을 재확인하며 러시아에 맞서는 연합 전선을 다지고 있다. 하지만 협상이 원활하게 흘러가지 않고 장기화될 경우 각국의 이해에 따라 ‘연대 강화’라는 기조가 언제든 시험대에 오를 수 있다.알래스카 회담은 푸틴에게 외교 무대의 화려한 복귀를 안겼다. 전장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그는 트럼프의 방조와 환대를 발판 삼아 협상장에서 승리를 연출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미국의 신뢰는 흔들리고, 유럽은 불안 속에 놓여 있다. 푸틴이 전쟁을 이어가면서도 국제 무대에서 존재감을 키우는 동안, 트럼프는 서방의 단일대응이라는 가장 중요한 자산을 흔들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번 회담은 ‘푸틴의 유혹과 트럼프의 방조’가 맞물려 국제 질서의 균형을 시험대에 올려놓은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2025.08.24 15:00

4분 소요
68년 동성제약, 경영권 분쟁·법정관리·상장폐지 위기 ‘삼중고’

산업 일반

복통약(지사제) ‘정로환’으로 잘 알려진 동성제약이 1957년 창사 이래 최대 위기에 몰렸다. 창업주 일가 간의 경영권 분쟁과 재무 위기,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 돌입에 이어 상장폐지 위기까지 겹치며 창립 68년 만에 존폐 기로에 섰다. 한때 국내 대표적 중견 제약사로 자리 잡았던 회사는 이제 회생계획안 인가와 임시 주주총회 결과에 따라 생존 여부가 결정될 운명에 놓였다.오너 일가 내홍과 경영권 분쟁동성제약의 내홍은 창업주 고(故) 이선규 회장의 아들 이양구 전 회장과 조카인 나원균 현 대표 간의 갈등에서 비롯됐다. 이 전 회장은 2024년 10월 대표직에서 물러나며 경영권을 나 대표에게 넘겼지만, 이후 회사 재무 악화와 경영 판단을 두고 갈등이 불거졌다.특히 이 전 회장이 올해 4월 자신이 보유한 14.12%의 지분을 마케팅업체 브랜드리팩터링에 시가보다 낮은 가격에 매각하면서 분쟁이 본격화됐다. 이 과정에서 기존 주식 양도 계약을 무시하고 제3자에게 매각한 ‘이중 매매’ 의혹까지 제기됐다. 그러나 이 회장 측은 “현 경영진이 불리한 조건으로 전환사채(CB)를 발행해 경영을 어렵게 했다”며 사실상 경영 복귀를 선언했다.나 대표 측은 “전 경영진의 무리한 자금 계약이 경영 악화의 원인”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는 “사전 협의 없는 매각”이라며 이 전 회장을 횡령·배임 혐의로 고소했고 유상증자와 교환사채(EB) 발행으로 경영권 방어에 나섰으나, 이 전 회장 측의 가처분 신청으로 경영권 확보는 불투명한 상황이다.동성제약은 오랜 기간의 영업 적자와 재무구조 악화로 인해 유동성 위기를 겪어왔다. 지난 2018년 이후 8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며 경영이 악화된 상태다. 회사는 2023년 잠시 흑자 전환에 성공했으나 2024년 65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하며 다시 적자 전환했다.동성제약은 수년간 이어진 영업 적자와 재무 악화 속에 결국 2025년 5월 약 1억원 규모의 어음 결제 불이행으로 1차 부도를 맞았다. 회사는 이튿날 서울회생법원에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했고, 법원은 포괄적 금지명령을 내렸다.하지만 자산이 묶이면서 부도는 연쇄적으로 이어졌다. 현재까지 누적 15건, 약 46억원 규모의 어음 부도가 발생하며 회사 신뢰도는 크게 흔들렸다. 법원은 지난 6월 23일 회생절차 개시를 인가하고, 나 대표와 외부 인사 김인수씨를 공동관리인으로 선임했다. 회사는 오는 10월 13일까지 회생계획안을 제출해야 한다.경영권 분쟁과 법정관리 상황은 상장 적격성에도 직격탄을 날렸다. 한국거래소는 횡령·배임 혐의와 불성실 공시를 문제 삼아 동성제약을 상장적격성 실질심사 대상에 올렸고, 최근 기업심사위원회는 개선 기간을 2026년 5월 13일까지로 부여했다. 이 기간 지배구조 개선과 재무구조 정상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상장폐지로 이어질 수 있다. 거래소는 이미 회사에 대해 벌점 8.5점과 과태료 8500만원을 부과했다. 관리종목 지정은 물론, 개선 실패 시 퇴출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아울러 동성제약의 핵심 신약 ‘포노젠’과 화장품 사업부 분사 권한이 포함된 이 전 회장의 지분 매각 계약도 최근 논란이 됐다. 이 전 회장은 지난 4월 보유 중이던 동성제약 지분 368만주(14.12%) 전량을 소연코퍼레이션에 매각하는 주식양수도 계약을 체결했다. 거래가는 주당 3256원, 총 120억원 규모다. 체결 7일 만에 소연코퍼레이션은 매수인 지위를 브랜드리팩터링에 승계했다.해당 계약에는 이 전 회장이나 지정한 제3자가 포노젠 사업과 화장품 사업을 동성제약에서 분리해 직접 인수할 수 있는 조항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포노젠은 동성제약이 수년간 투자해 온 광역학치료(PDT) 기반 항암 신약 후보물질로, 임상 2상 진입을 앞둔 핵심 성장 동력이다. 일각에서는 만약 포노젠이 외부로 유출될 경우 기업과 주주 가치 모두 심각한 훼손을 입을 것이란 지적이 제기됐다. 동성제약의 장기 성장 기반이 사실상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법정관리·상폐위기…핵심 자산 사유화 논란도 그러나 이 전 회장 측은 경영권을 다시 가져오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 전 회장은 오는 9월 12일 열리는 임시 주주총회를 통해 이사회 진입을 노리고 있다. 임시주총 안건에는 이 전 회장을 사외이사로 선임하는 내용이 상정돼 있다. 임시주총은 지난 7월 서울북부지방법원이 브랜드리팩터링 등의 요구를 인용한 데 따른 것이다.양측의 공방이 지속되는 가운데, 동성제약 최대주주인 브랜드리팩터링은 주주 가치 보호를 위해 거래재개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입장을 최근 밝혔다.브랜드리팩터링은 임시주총에서 거래정지의 주된 이유인 현 경영진을 전원 사임시킨다는 방침이다. 주주 가치 보호를 최우선에 두고 임시주총에 상정한 안건 모두 원안대로 통과시켜 거래정지 해소와 경영 정상화를 앞당긴다는 계획이다.브랜드리팩터링 관계자는 “실제 회생절차 과정에서 감자(자본감소) 등을 활용해 경영권을 방어한 사례도 존재한다”면서 “순자산 약 600억원 규모의 상장사가 1억원 어음 부도를 이유로 회생을 신청한 것은 이례적인 사례이며, 현 경영진이 회생 절차를 이끄는 ‘관제인’으로 남아 있어 공정성과 투명성을 담보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동성제약의 향방은 ▲오는 10월 제출할 회생계획안 실현가능성 ▲70% 이상을 보유한 소액주주 표심 ▲내년 5월까지 주어진 상장 유지 개선 기간 등의 변수에 달려 있다. 핵심 자산 이전 여부와 경영 정상화 방안, 주주총회 결과 등이 맞물려 회사의 생존이 결정될 전망이다.업계 관계자는 “동성제약 사례는 오너 일가의 경영권 다툼이 어떻게 기업 가치 훼손과 시장 신뢰 상실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라며 “향후 소액주주와 채권단의 선택, 그리고 법원이 어떤 판단을 내리느냐가 회사의 명운을 가를 것”이라고 진단했다.

2025.08.24 14:00

4분 소요
제약·바이오 자회사, R&D·IPO 성과로 성장 엔진 구축 박차

산업 일반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가 자회사를 통해 신약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신약 개발은 막대한 비용과 긴 시간이 필요한 고위험 사업이지만, 자회사를 통해 빠른 의사 결정과 민첩한 임상 설계가 가능해지면서 성과가 가시화되고 있다는 평가다. 외부 투자·파트너십을 적극 활용하고, 기업공개(IPO)로 자본시장까지 돌파하는 등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내며 글로벌 경쟁력 확보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이다.제일약품의 신약 개발 전문 자회사인 온코닉테라퓨틱스는 자체 개발한 신약 파이프라인을 통해 성과를 창출하며 주목받고 있다. 온코닉테라퓨틱스는 2024년 12월 코스닥 상장 예비심사를 통과하고 상장 절차를 진행했다. 회사는 주요 파이프라인인 위식도역류질환 치료제 ‘자큐보정’의 성공적인 시장 안착과 해외 진출, 그리고 차세대 항암 신약 ‘네수파립’의 개발을 통해 제일약품의 캐시카우(현금창출원)이자 미래 성장 동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특히 자큐보정은 국산 37호 신약으로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를 받았다. 2023년 10월 첫 출시 이후 6개월 만에 누적 처방액 100억원을 돌파, 국내 시장에서 빠르게 안착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온코닉테라퓨틱스는 올해 처음으로 반기 흑자를 냈다. 올해 상반기 매출액은 별도기준 186억원을 기록했다. 앞서 회사가 제시한 연매출 전망치(가이던스) 249억원의 70% 이상을 달성했다.마일스톤(단계별 기술료) 수익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최근 중국 파트너사 리브존제약으로부터 개발 마일스톤 500만달러(약 70억원)를 받을 예정이라고 공시했다. 이는 회사의 역대 개발 마일스톤 중 단일 규모로는 최대 수준이다. 자큐보정은 중국·인도·멕시코를 포함한 중남미 19개국 등 총 26개국에 기술 수출 계약을 체결하며 글로벌 시장 진출을 확대하고 있다.동국제약의 자회사인 동국생명과학의 성과도 두드러졌다. 동국제약의 조영제 사업을 물적분할해 2017년 설립된 동국생명과학은 올해 2월 코스닥 시장 입성에 성공했다. 동국생명과학은 상장 이후 올해 상반기 사상 최대 실적을 경신하며 매출액 699억원, 영업이익 63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각각 3.4%, 6.0% 증가한 수치로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경신했다. 당기순이익은 51억원으로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회사의 실적 성장은 조영제 및 의료기기(MEMD) 사업 부문의 고른 매출 확대와 수익성 중심의 자사 제품 전략에 힘입은 결과다. 동국생명과학은 국내 조영제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나아가 기존 조영제 사업의 성장 한계를 극복하고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신약 개발 및 사업 영역 확장에 힘쓰고 있다. 특히, 세계 최초 철분 기반 자기공명영상(MRI) 조영제 개발을 위해 인벤테라와 협력하고 있으며, 루닛 등 인공지능(AI) 의료 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영상 진단 솔루션 사업을 강화하고 있다.자회사 성과, 모회사 성장동력 ‘기대’유한양행의 자회사인 이뮨온시아는 면역항암제 개발 전문 기업으로서, 코스닥 상장 및 파이프라인 개발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뮨온시아는 2025년 5월 코스닥 시장에 상장했다. 상장 첫날 공모가 대비 108.33% 상승한 7500원에 거래를 마감하며 성공적인 데뷔를 알렸다.이뮨온시아는 상장을 통해 연구개발(R&D) 및 글로벌 진출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고, 유한양행의 연결 실적에 반영되던 영업손실 부담을 줄일 것으로 예상된다.특히 유한양행은 폐암 치료제 ‘렉라자’(성분명 레이저티닙)의 성공 경험을 바탕으로 이뮨온시아의 신약 개발 및 상용화 과정에서도 시너지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까지 국산 항암제 중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받은 혁신신약은 렉라자가 유일하다.이뮨온시아는 T세포와 대식세포를 타깃으로 하는 면역항암제 개발 전문 기업이다. 주요 파이프라인인 IMC-001는 PDL1 항체 기반 면역항암제로, NK/T세포 림프종을 대상으로 한 임상 2상에서 79%의 객관적반응률(ORR)과 58%의 완전 반응률(CR)을 기록하며 효능과 안전성을 입증했다. 2029년 국내 상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또 IMC-002는 CD47 항체기반 면역항암제로, 2021년 중국 3D메디슨에 약 4억7000만달러(약 6580억원) 규모로 기술이전됐다.지난 6월 코스닥에 상장한 GC지놈의 활약도 기대된다. 2013년 GC녹십자의 자회사로 설립된 GC지놈은 임상 유전체분석 선도 기업으로 ▲건강검진 검사 ▲산전·신생아 검사 ▲암 정밀진단 검사 ▲유전희귀질환 정밀진단 검사 300종 이상의 다양한 유전자 검사 서비스를 900개 이상의 병·의원에 제공하고 있다.대표 제품으로 다중암 조기진단 ‘아이캔서치’와 국내 1위 산전검사 ‘G-NIPT’가 있다. 이번 상장을 통해 확보한 공모자금을 ▲암종 확대 및 암 전주기 확장을 위한 연구개발 ▲글로벌 시장 다변화에 활용할 계획이다.업계는 국내 제약사가 자회사를 통한 신약 개발 전략을 택하는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본다. ▲전문 분야 집중을 통한 R&D 효율성 ▲모회사와 분리된 책임경영 구조 ▲외부 자본 및 글로벌 제약사와의 파트너십 확대다.또한 IPO나 기술수출 등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고 이를 다시 연구개발에 투자하는 선순환 구조가 가능하다. 모회사 입장에서는 자회사 성과가 곧 신성장동력으로 연결되는 구조다.다만 신약 개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마주치는 ▲품질관리(CMC) ▲생산 확장 ▲기전 고유 리스크 등은 여전히 높은 진입 장벽이다. 이에 자회사 IPO는 상장 자체가 목적이 돼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업계 관계자는 “자회사를 통한 민첩한 개발 전략은 글로벌 시장에서 분명 장점이지만, 성공을 위해서는 임상 데이터의 신뢰성과 생산·규제 대응 역량이 뒷받침돼야 한다”며 “‘품질 있는 속도’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2025.08.2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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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험의 바다에서 기회의 바다로...북극항로 개척 위한 준비물은 [북극항로를 뚫어라]④

산업 일반

북극항로 개척이 '작은 이벤트'에서 '큰 프로젝트'로 격상되고 있다. 정부는 연내 전담 조직을 꾸리고, 내년에는 상선 시범 운항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대선 기간 내내 북극항로의 필요성을 강조해온 이재명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꿈의 항로'는 곧장 국정과제 전면에 올라섰다. 이 때문에 북극항로는 올해 다시금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한때 탐험의 영역이던 북극항로가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준비해야 할 것은 산더미다. 여러 준비물들 가운데 신형철 극지연구소 소장이 가장 먼저 주문한 것은 '구체적인 설계도'다. 그는 북극항로 개척의 경우 막대한 시간과 돈이 투입되는 만큼, 정권이 바뀌더라도 이를 오랫동안 끌고 갈 수 있는 구체적인 설계가 필요하다고 진단했다.신 소장은 지난 2002년 극지연구소에 입소한 이래 극지생물해양연구부장, 국제협력실장, 정책협력부장 등을 거쳐 지난 2023년 12월 제8대 극지연구소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활발한 과학 외교 활동으로 대한민국 극지 활동의 저변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빠르고 예측 어려운 해빙신 소장은 북극항로의 과거와 현재 두 가지로 설명했다. 과거가 탐험의 영역이었다면 현재는 협력과 경쟁이 공존하는 영역이라고 전했다. 최근 들어 연일 언급되는 북극항로의 개념은 19세기에도 있었다. 다만, 당시는 신 소장의 설명대로 탐험의 영역이었다. 아문센 같은 탐험가가 북동·북서항로를 주파했지만, ‘화물을 나르는 길’로 인식된 건 비교적 최근이다. 북극 바다가 녹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위성관측이 본격화된 1979년 이후 해빙 면적은 하향 추세를 한 번도 뒤집지 못했고, 2012년에 저점을 찍었다. 이후에도 북극은 매년 빠른 속도로 녹고 있다.신형철 소장은 “1979년 이후 북극 바다를 덮고 있는 해빙 추세를 보면 쭉 내리막"이라며 "북극의 해빙은 예측 모델이 내다본 것보다 항상 더 빨리 녹아왔다. 예측 모델은 최대한 보수적으로 전망했지만, 현실은 그보다 늘 앞서갔다. 이는 수치로도 확인된다”고 말했다.물론 해빙 속도가 빨라진다고 해서 당장 상업 운항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상업 운항 가능성은 높아졌지만, 안정적인 상업성이 언제 확보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해빙은 해마다 속도와 분포가 달라지고, 두께와 위치도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이다.신 소장은 북극항로의 상업화 시점에 대해 “북극은 매일 상황이 바뀐다. 오늘 얼음이 얇아졌다가도 내일은 다시 두꺼워지고, 분포도 계속 달라진다”며 “위성 관측, 쇄빙선 실측, 컴퓨터 모델링을 모두 동원할 경우 어느정도 예측이 가능하지만, 그마저도 변수와 불확실성이 많아 단정적인 연도를 말하기는 어렵다”고 답했다.다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항로는 있다. 북동항로(NSR)다. 러시아 연안을 따라가는 이 항로는 해역이 비교적 넓고 기존 운항·항만 인프라가 축적돼 있다. 반면, 캐나다 연안을 지나는 북서항로(NWP)는 수로가 좁고 해빙 변동성이 커 운항이 까다롭다. 이 때문에 북동항로가 당장 상업 운항에 유리하다는 것이 신 소장의 설명이다.그는 “지금 우리가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러시아를 활용해 북동항로를 공략하는 것”이라며 “북서항로는 해역이 좁고 불규칙한 데다 캐나다가 ‘내수’(內水)라고 주장해 무해통항 적용이 까다롭다. 쉽게 말하자면, 상업성이 낮다”고 말했다. 이어 “북서항로가 항로상 최단 거리라는 장점이 있지만, 이를 활용하기란 당장은 먼 이야기”라고 말했다. 한국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북극항로를 노리는 경쟁자도 많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가 대표적이다. 이들 중 가장 큰 경쟁자는 중국이다. 한국과의 차이는 체제다. 중국은 북극항로 개척에 있어 국영기업이 움직인다. 중국의 경우 정책 기조가 확립되면 자금·조직·선박이 일사불란하게 투입되고, 리스크도 국가가 흡수한다. 반면 한국은 민간 중심 구조다. 이 때문에 단기 성과에 매몰되기 쉽고, 부처·지자체·산업계 각각의 과제가 흩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 때문에 신 소장은 첫 준비물로 ‘구체적인 설계도’와 지속 가능한 ‘컨트롤타워’를 꼽는다.신 소장은 “한국은 중국과 체제 자체가 다르기에, 중국처럼 북극항로 개척에 뛰어들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이 때문에 이해관계자별로 필요한 것을 나열하는 게 아니라 2050년까지 지속할 수 있는 구체적인 북극항로 개척 설계도를 만들고, 이를 묶어 관리할 수 있는 컨트롤타워를 마련해야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게 장기적인 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인력과 제도 보완도 과제로 지목됐다. 그는 얼음 해역을 실제로 운항할 숙련 항해 인력의 확보를 선결 과제로 꼽았다. 아울러 러시아가 국내법을 정비하며 영향력을 강화하는 상황을 감안해, 국제법적 정당성을 갖춘 외교·법제 대응을 병행해야 한다고 했다.그는 “우선 북극 항로의 얼음길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실력 있는 항해사를 적극적으로 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다음은 대외·법제 대응”이라며 “러시아가 북동항로를 무상으로 내줄 생각은 없어 보인다. 최근 러시아는 자국 국내법을 정비하며 영향력을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이 부분은 한국 정부가 외교적으로 잘 풀어나가야한다”고 덧붙였다.끝으로 그는 북극항로 시대에 맞는 준비를 갖추되, 한국이 가진 ‘무기’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다양한 특수선 건조 경험으로 축적된 한국 조선의 엔지니어링 역량과 정책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산업 문화, 국제사회에서의 신뢰받는 이미지가 그것이다. 이 강점들을 하나의 설계도에 투입해 실행할 때, 북극항로에서 한국의 실질적 존재감이 커질 것이라는 설명이다.신 소장은 “한국은 뛰어난 과학 역량과 공학 기술도 가지고 있다. 또 여러 돌발 상황에 기민한 대응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런 나라가 어디 있나. 한국은 절대 만만치 않다”며 “북극항로 개척은 전 세계 북극 과학의 완성판 중 하나다. 이 때문에 북극항로 개척은 한국의 활동 반경과 국제무대에서의 발언권·존재감을 넓히는 전략 중 일부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2025.08.24 11:00

4분 소요
미·중·러도 눈독…‘新성장엔진’ 북극항로, 기대·우려 엇갈린 시선 [북극항로를 뚫어라]③

산업 일반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북극항로가 대안 항로를 넘어 해양 산업의 신(新) 성장축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이에 미국과 중국, 러시아 등 주요국들도 앞다퉈 항로 선점 경쟁에 나섰다. 한국 역시 북극항로를 ‘미래 먹거리’로 점찍고 서둘러 항로 개척에 뛰어드는 모습이다. 다만 일부에서는 항로 개척에 있어 ▲경제성 ▲안정성 ▲운항 인프라 등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은 만큼 낙관적으로만 볼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북극항로는 지구온난화로 북극의 얼음이 녹으면서 새롭게 열리는 바닷길이다. 러시아 북부 해안을 따라 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연결되는 최단 해상 루트로, 최근 기후변화로 연중 운항 가능성이 커지는 상황이다. 현재 7월에서 10월까지 1년에 4개월 정도 운항할 수 있는데 이르면 2030년경 연중 일반 항해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북극항로가 새로운 ‘해상 실크로드’로 주목받는 이유는 유럽과 아시아 간 운송 시간과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부산항에서 네덜란드 로테르담항까지 갈 때 기존 수에즈 운하를 경유하면 2만㎞ 정도를 이동해야 한다. 북극항로를 이용하면 약 1만3000~1만5000㎞로 거리가 30∼40%가량 짧아진다. 운송 시간은 10일 이상, 운송 비용은 25%까지 줄어들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북극항로는 글로벌 자원 확보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전망이다. 극지연구소는 북극해에 약 900억배럴의 석유가 매장됐다고 추정한다. 지구 전체 석유의 약 13%에 달하는 양이다. 북극해는 천연가스와 희토류, 구리 등 핵심 광물 자원도 풍부한 지역이다. 북극으로 모여드는 주요국…韓도 서둘러 참전세계 각국은 일찌감치 북극항로의 잠재 가치를 눈여겨 보고 북극항로 진출에 나섰다. 글로벌 지정학 경제 분석 기업 ‘GIS리포트’에 따르면 2010년대 연간 500만톤 수준이었던 북극항로 무역량은 2015년부터 급증해 지난 2022년 연간 최고치인 약 3400만톤을 기록했다. 러시아 정부의 ‘북극해철도’ 계획까지 진행되면 오는 2035년엔 총무역량이 2억4000만톤에 달할 것으로 관측된다. 러시아는 북극항로 개척에 가장 적극적인 나라다. 러시아 정부는 북극항로 개발을 국가 최우선 발전 과제로 설정하고 정책적 지원을 집중하고 있다. 지난 2013년 ‘2030 북극항로 국가 개발 계획’을 발표한 러시아 정부는 지난 5월 ‘2050 비전’ 항목을 추가한 ‘북극 개발 전략 2035’ 개정안을 마련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러시아는 오는 2035년까지 ▲액화천연가스(LNG) 기지 ▲해저 송유관 ▲항만·공항 확충 등에 약 39조원을 투입한다. 오는 2030년까지는 대형 상선을 호송할 수 있는 ‘리더급’ 원자력 쇄빙선도 완성할 계획이다.중국은 지난 2013년부터 러시아와 북극 개발 협력을 시작했다. 지난 2018년에는 중국 주도의 광역 경제권 구상인 ‘일대일로’ 사업을 북극과 연계한 ‘빙상 실크로드’를 국가 전략으로 제시하고, 북극해 이용에 관한 기본 방침을 담은 ‘북극정책백서’를 공개했다.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그린란드 매입 시도와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 등 북극항로 개발에 열을 올리는 모습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형 쇄빙선 40척 발주를 통해 러시아를 넘어 북극항로 주도권을 쥐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지난해 미국은 러시아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캐나다·핀란드와 ‘쇄빙선 협력 협정’을 맺고 조선산업 협력 강화에 나섰다.한국도 이재명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꾸준히 북극항로 개척을 강조하면서 북극항로에 대한 관심이 커진 상태다. 대통령 직속 국정기획위원회가 지난 13일 발표한 ‘국정운영 5개년 계획(안)’에는 이 대통령의 부산 핵심 공약이었던 북극항로도 123대 국정과제 가운데 56번째로 자리했다. 전재수 해양수산부 장관은 지난달 열린 취임식에서 “15세기 콜럼버스가 신세계를 열고 문명을 바꿨듯 북극항로는 대한민국의 내일을 바꾸는 새로운 항로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전 장관은 지난 8월 10일 “2030년 북극항로 활성화에 대비해 정부 기관과 해운 기업, 조선 인프라 등을 부산·울산·경남에 집적화하고 동남권 투자공사 등도 유치해 서울·수도권에 이은 성장 엔진으로 만들겠다”고 전했다. “북극항로, 한계 분명…종합 물류기업 육성해야”북극항로가 장밋빛 미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북극항로는 1년 중 유빙이 녹는 시기만 오갈 수 있고, 일반 선박보다 30~50% 비싼 쇄빙선이 필요하다. 중간 기항지가 없어 운항 도중에 환적(換積·화물 운송 도중 목적지가 아닌 항구에서 다른 선박에 화물을 옮겨 싣는 일)이 불가능한 것도 단점이다.환경 오염 문제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현재 북극 지역은 세계 평균보다 3~4배 빠른 속도로 온난화가 진행 중이다. MSC, CMA CGM, 등 주요 해운사는 환경 보호를 이유로 북극항로를 이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한종길 성결대 글로벌물류학부 교수는 “북극항로 이용 시 이동 거리는 단축될 수 있지만 쇄빙선 운항이 필요해 사용료와 도선료·보험료·선박 건조비 등을 고려하면 비용은 생각보다 크게 줄지 않는다”며 “미국·중국·러시아 등 해외 주요국이 북극항로를 두고 패권 다툼을 벌이는 건 경제적 이점보다는 지정학적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구교훈 한국국제물류사협회장은 “북극항로 개발은 여러 장단점을 다각도로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구 회장은 “북극항로는 물류비용 절감과 위험 분산이 가능할 뿐 아니라 쇄빙선 수주 증가로 조선업계에도 기회가 될 수 있다”면서도 “북극항로를 둘러싼 미국·중국·러시아의 지정학적 갈등과 정밀 기기나 전자제품, 고부가가치 화물 등 온도에 민감한 물품은 운송이 어렵다는 점 등은 한계”라고 언급했다.그는 “우리나라는 유라시아 대륙의 끝에 위치해 북극항로의 기점이 될 수 있다”며 “북극항로 시대 준비도 중요하지만 북극항로에만 집중하기보다는 DHL처럼 항만뿐 아니라 항공·철도·도로 등을 아우르는 종합 물류기업 육성을 위해 과감하게 투자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2025.08.2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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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담벼락 낙서'와 '숭례문 화재'...훼손과 처벌, 그 이후 이야기 [백세희의 컬처&로(LAW)]

전문가 칼럼

지난 7월 25일, 불법 영상 공유사이트를 홍보할 목적으로 미성년자를 시켜 경복궁 담벼락에 낙서를 했던 강 씨에 대한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강 씨는 2023년 12월 미성년자에게 10만원을 대가로 ▲서울 종로구 경복궁 영추문 ▲국립고궁박물관 쪽문 ▲서울경찰청 동문 담벼락 등에 자신이 운영하는 불법 음란물 사이트명을 낙서하도록 지시해 문화재보호법 위반 등의 유죄를 선고받았다. 사건이 일어난 그 겨울, 몇몇 기자들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실형을 선고받을지, 받는다면 몇 년 정도의 형을 받을지 등 주로 처벌의 정도에 대한 것들이었다. 2008년 숭례문 방화사건의 경우에 미루어, 길어봤자 징역 5년을 넘지는 않을 것 같다는 비공식적인 답변을 했던 것 같다. 과거 숭례문 방화범은 징역 10년의 실형이 확정됐다. 숭례문은 불에 활활 타 전소됐는데 징역 10년이 나왔다. 그러니 강 씨의 경우 5년 이상의 실형이 나오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담벼락을 완전히 파괴한 것도 아니니 말이다.하지만 낙서의 주범 강 씨는 필자의 예상을 뒤엎고 항소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문화유산 파괴의 정도를 주로 고려했던 예측과 달리, 재판부는 범행의 동기와 범행 후 수사 및 재판에 임하는 태도까지 모두 반영해 중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경복궁이라는 상징적 문화재를 더럽힌 점에서 상당한 사회적 충격을 줬다”며 “불법 사이트 이용자를 통해 범죄수익을 올리기 위한 범죄였다는 점에서 범행 동기와 행태에 비난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했다. 나아가 재판부는 “피고인은 수사 중 도주하기도 했고, 법정에 이르기까지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내는 등 범행 후 정황도 매우 좋지 않다”고도 했다. 이어 “모방 범죄가 바로 다음 날 발생하기도 했다”며 “담벼락 복구는 상당 예산과 인원을 들여 이뤄졌으나 완전한 복구가 어렵고 1억3000만원이 넘는 복구 비용이 들었다”고도 설시했다.훼손한 자에 대한 처벌, 그 다음은?강 씨를 비롯한 가담자들은 훼손에 따른 처벌을 받는 중이다. 이제 복구의 문제가 남았다. 경복궁 담벼락은 돌담이므로 스프레이 락커가 울퉁불퉁한 표면에 스며들어 돌을 깎아내지 않고 화학적인 방법으로만 낙서를 지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결국 물리적·화학적 방법이 모두 동원돼야 한다.다만 다양한 영역의 예술가들이 나설 필요는 적어 보인다. 화강암 위의 페인트를 지우는 작업이 고되기는 하지만, 그 자체에 고도의 예술성까지 요구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점이 바로 과거 전소된 숭례문 복원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숭례문 사건의 경우 복원에 여러 무형문화재(현재 용어는 ‘무형유산’이다)의 개입이 필수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사고가 또 터지고 만다. 어떤 사고였는지 살펴보자.숭례문 복원을 둘러싼 민·형사 판결들벌써 17년 전 일이지만 아직도 시뻘건 불꽃을 내뿜으며 타오르던 국보 제1호 숭례문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필자 역시 2008년 2월 10일 밤 9시쯤부터 시작된 생중계 뉴스 영상을 보며 눈시울을 붉힌 기억이 있다. 특별히 문화유산 사랑이 남달랐던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숭례문 방화사건은 당시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줬다. 아쉽게도 숭례문의 복원 작업에서 실망스러운 뉴스는 계속 됐다.문화재청은 2009년 12월 공사에 참여할 장인으로 홍 모 단청장을 선정해 2012년 8월 본격적인 복원 공사에 돌입했다. 숭례문 복원은 기와, 단청 등 여러 부분의 장인들이 작업 영역을 나누어 진행했다. 문제는 단청 복구공사에서 발생했다. 중요무형문화재 단청장 홍 모 씨가 전통기법과 도구만을 사용하기로 한 약정을 깨고 사용이 금지된 화학접착제(아크릴 에멀전)과 화학 안료(지당)을 몰래 사용한 것이다. 홍 씨는 값싼 화학 재료를 섞어 사용하고 이 사실을 모르는 건설회사 측에 전통 재료를 사용한 것으로 계산한 비용을 청구해 실제 비용과의 차액 수억 원을 빼돌렸다. 2015년 5월 구속된 홍 씨는 2016년 6월 서울고등법원에서의 2심 재판에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사기)’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고, 이 판결은 그대로 확정되었다. 2017년 8월 30일 문화재청은 무형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홍 씨의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자격을 박탈했다. 여기까지가 숭례문의 복원을 둘러싼 형사적 판단이다.민사소송은 복구공사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흘러 개시된다. 2013년경 단청공사가 마무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숭례문 곳곳에 하자가 발생했다. 복구된 지 3개월 만에 색칠된 단청이 벗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정부는 감사원의 감사 과정 등을 거친 후 2017년 3월 홍 단청장과 제자인 한 모 씨를 상대로 11억8000여만원의 배상을 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무려 5년 5개월여의 긴 재판 끝에 2022년 8월 10일 판결이 나왔다. 1심 법원은 피고들의 책임을 80%가량 인정한 9억4500여만원을 손해배상액으로 선고했다.왜 정부가 주장한 금액의 80%만 인정된 것일까? 피고들이 ‘단청 박락은 화학 안료 등의 사용으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단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전문 기관의 감정 결과 화학 안료의 사용이 하자의 유일하고 직접적인 원인이라고는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점이 고려됐기 때문이다. 국가가 홍 단청장의 경험이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빠른 공사 완성을 요구했던 정황도 고려됐다. 하자 발생에는 국가의 과실도 20% 존재한다는 뜻이다. 단순 교통사고의 과실 비율에도 이런저런 말이 많은데, 국보 제1호의 복원을 둘러싼 법원의 과실 비율 결정에 양 당사자가 쉽게 수긍할 리 만무하다. 과실 비율에 대한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홍 씨 측도 국가도 1심의 과실 비율 결정에 불복할 가능성이 상당했고, 결국 재판은 항소심으로 이어졌다. 2023년 7월 14일 항소심 법원은 손해배상액을 8억2700여만원으로 더 줄여 판결했다. 홍 씨 측이 전통 재료를 사용하면 하자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 문화재청에 공사 기한 연장과 화학 재료 사용을 건의했는데도 문화재청이 이를 배제하고 전통기법에 따른 공사를 강행한 점을 고려해 1심보다 손해배상금을 1억원가량 줄인 것이다. 처벌 이후의 적절한 복구에 대한 관심 필요강렬한 이미지로 남아있는 숭례문 전소 장면과 비교해, 앞서 소개한 복구와 관련한 사기와 손해배상 사건은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 충격적인 사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한 번 사그라지면 다시 쉽게 불타오르지 않는 것 같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조금이라도 원형에 가까운 회복을 위해서는 적절한 복원이 이뤄지고 있는지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스프레이 세례를 받았던 경복궁 담벼락은 어떻게 되었을까? 올봄에 전체의 80% 정도 복구됐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었으니, 지금은 아마도 복원을 완료했을 것 같다. 경복궁 담벼락은 옛 모습을 되찾았지만,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문화유산의 복원이 꾸준히 이뤄지고 있을 것이다. ‘수리중’ 팻말이 걸려있는 바람에 제대로 구경하지 못해 아쉬운 관람객이 있다면, 문화유산의 복원은 결코 간단하게 진행되는 건 아니라는 걸 떠올려보자. 조금은 덜 속상할 수도 있다.백세희 법률사무소 아트앤 대표변호사

2025.08.2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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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항로를 여는 힘...韓 조선업계가 가진 무기 [북극항로를 뚫어라]②

산업 일반

기후 변화로 북극 해빙 면적이 축소되면서 상업 운항 가능성이 확대되고 있다. 국제 해운업계는 수에즈 운하를 경유하지 않고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할 수 있는 북극항로에 주목한다. 그러나 여전히 두꺼운 얼음은 항로 개방의 가장 큰 제약이다. 이를 돌파할 수 있는 수단이 바로 ‘아이스 클래스’(ice class)와 ‘쇄빙선’이다. 한국 조선업계는 이 분야에서 유의미한 실적을 보유하고 있어 극지 운항 선박 시장에서 존재감을 더 키워갈 것으로 보인다.빙해 항해의 관문 아이스 클래스북극항로 운항에 앞서 선박은 반드시 아이스 클래스 등급을 받아야 한다. 아이스 클래스는 국제선급연합(IACS)이나 러시아선급(RMRS) 등 선급 기관이 빙해 항해 능력을 인증하는 체계다. 두께 1~2m의 빙판을 깨며 항해할 수 있는 구조·추진 성능을 갖췄는지가 주된 기준이다.IACS가 제정한 극지 항해 등급(Polar Class)은 PC1부터 PC7까지 나눠져 있다. 숫자가 작을수록 더 강력한 내빙 성능을 뜻한다. PC1은 연중 수년간 녹지 않은 빙하 항해가 가능한 최고 등급이다. PC7은 여름철 해빙기에 녹아 없어지는 빙하를 운항할 수 있다. 러시아 북극 연안 항로에 주로 투입되는 액화천연가스(LNG)선은 RMRS의 아크틱 클래스7(Arctic Class 7·Arc7)등급을 충족해야 한다. 아크틱 클래스는 러시아 해운·조선 분야에서 쓰이는 아이스 클래스 등급 체계다. Arc7은 약 2.1m 두께의 평탄한 빙하를 돌파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한다. 이 때문에 국제 해운업계는 추후 북극항로 상업 운항이 본격화되면 아이스 클래스 선박 확보 경쟁이 심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일반 선박은 진입이 불가능하고, 낮은 등급의 선박은 운항 가능 계절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선사 입장에서는 아이스 클래스 선박을 얼마나 빨리 확보하느냐가 시장 지배력과 직결된다. 이 때문에 발주처는 검증된 경험을 가진 조선소를 우선 고려할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한국 조선업계의 레퍼런스(참고자료)가 강점으로 작용한다.업계 관계자는 “북극항로의 운항이 본격화될 경우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부분이 아이스 클래스”라며 “해운사는 배의 출항부터 정박까지 안전한 선박을 투입해야 하는데, 북극항로처럼 특수한 지역의 경우 빙해 등급 선박과 저온 대응 장비를 갖춘 선박을 투입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말했다. 韓의 풍부한 건조 경험빙해 선박 건조의 핵심은 크게 세 가지 축으로 나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선체 보강이다. 선수부와 흘수선 주변을 두꺼운 강재로 설계하고, 충격이 집중되는 구간에는 하중을 분산할 수 있는 보강 구조를 더해야 한다.추진 체계도 빼놓을 수 없다. 좁은 빙도를 돌파하려면 방향 전환과 후진이 자유로워야 하는데, 이를 위해 아지팟(Azipod)과 같은 회전식 전기 추진기가 널리 활용된다. 재료와 극저온 대응도 필수다. 이를 위해 추진축을 보호하는 별도의 구조, 얼음 부착을 줄이는 항빙(抗氷) 도료 등이 모두 요구된다.세 요소를 충족해야만 비로소 선급으로부터 아이스 클래스 인증을 받을 수 있다. 까다로운 조건 속 한국은 상업 운항이 가능한 빙해 선박을 건조해본 경험을 가진 몇 안되는 국가다. 대표 사례가 러시아 야말(Yamal) LNG 프로젝트다. 한화오션(옛 대우조선해양)은 2017~2019년 사이 Arc7 등급 쇄빙 LNG선 15척을 순차 인도했다. 해당 선박들은 ‘더블 액팅’(Double Acting) 개념이 적용됐다. 더블 액팅은 앞으로는 일반 선박처럼, 뒤로는 쇄빙선처럼 움직일 수 있게 설계된 특수 개념이다. 평상시(얼음이 없는 바다)에는 선박의 뾰족한 선수(船首)로 항해하다가, 두꺼운 얼음을 만났을 때는 방향을 바꿔 선미(船尾)를 앞으로 돌려 후진 상태로 얼음을 깨면서 전진하는 것이 특징이다.이를 통해 선박들은 최대 2.1m 두께의 얼음을 깨며 항해할 수 있다. 여름철에는 북극항로 동쪽을 통해 아시아로, 겨울철에는 서쪽으로 유럽에 화물을 공급하는 데 활용됐다. 야말 프로젝트는 세계 최초로 대규모 쇄빙 LNG선단을 상업 운항에 투입한 사례로, 한국 조선업계의 빙해선박 건조 역량을 국제 시장에 각인시킨 사례로 평가받는다.삼성중공업은 러시아 즈베즈다 조선소와 협력해 Arc7 쇄빙 LNG선과 쇄빙 셔틀탱커 프로젝트에 기술 파트너로 참여했다. 일부 선체 블록과 핵심 구조물을 공급하며 빙해 선박 설계·생산 경험을 축적했다.전문가들은 한국 조선업계가 북극항로 시대에 확실한 경쟁 우위를 확보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북극항로가 본격 개방되면 LNG선뿐 아니라 쇄빙 셔틀탱커, 벌크선 등 다양한 선박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 때문에 한국 조선업계는 북극항로 시대에 맞춰 중요한 무기를 쥐고 있다고 설명한다.김현수 인하공전 수송기계학부 조선기계공학과 교수는 “북극항로 운항이 본격화 될 경우 관련 선박 건조는 늘어날 것”이라며 “쇄빙선 분야에서 야말 프로젝트처럼 대형 사업을 수행한 국가는 전 세계적으로 많지 않다”고 말했다.이어 “이를 미뤄 봤을 때 한국은 이 분야에서 분명한 경쟁 우위를 갖고 있다. 쇄빙선은 얼음을 깨고 나아가야 하기에 기술적 과제와 구조적 난제가 많지만, 한국은 이러한 애로사항에 모두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을 보유한 나라”라고 평가했다.

2025.08.2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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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항공사와 국민 사이, 정부는 누구 편인가? [이근면의 시사라떼]

전문가 칼럼

상품의 영역이 사전, 사후 서비스와 리워드 프로그램까지 확장되고 경쟁력의 요소로 작동하는 시대이다. 항공사 선택에는 여러 요인 중 가격 외 서비스가 매우 중요하다. 나 역시 모 항공사의 아주 고마운 서비스에 감동한 기억이 있다. 방콕에서 귀국편 시간을 착각해 탑승을 못하게 된 적이 있는데 해당 항공사는 공항 내외의 안내 및, 재입국 출국 조치 그리고 숙박부터 익일 항공편 수배까지 넘치는 호의로 내 마음을 녹였다. 그 이후에 광저우행 항공편에서 기내에 맡겼던 상의 주머니에서 작은 불만의 보답으로 씹던 껌을 발견하고 경악했던 일이 있었다(참고로 나는 껌은 씹지 않는다). 천당과 지옥 같은 서비스를 체험했다. 나는 빠르게 변심하여 K사의 충성고객으로 바뀌었다. 항공사 선택권이 있기에 취할 수 있는 판단이었다. 헌데 작금은 K항공과 A항공의 합병이 사실상 성사되면서 한국 항공업계는 단일 초대형 국적항공사 체제로 재편된다. 정부와 재계는 ‘국가 경쟁력 강화’라 설명하지만 이번 합병을 통해 정부는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기업의 이해인가, 아니면 소비자와 국민의 권익인가.초대형 국적사 출범…소비자 피해 예고된다 세계 주요국의 사례는 경고음을 울린다. 유나이티드-컨티넨탈(2010), 델타-노스웨스트(2008), 아메리칸-US에어(2013)가 차례로 합병되며 빅3 체제가 고착되었다. 합병 기업들은 서비스 확대와 글로벌 경쟁력을 약속했지만 결과는 ▲수하물 유료화 ▲좌석 선택 유료화 ▲기내식 축소 ▲마일리지 가치 하락으로 이어졌다. 미국회계감사원(GAO)에 따르면 합병 이후 5년간 국제선 운임이 평균 15% 상승했다. 중소도시 노선은 대거 사라졌고 소비자는 사실상 선택권을 잃었다.유럽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루프트한자가 스위스항공·오스트리아항공·브뤼셀항공 등을 흡수하면서 초대형 항공그룹이 완성됐다. 그러나 장거리 노선 요금은 10~20% 인상되었고, 저가항공과의 가격 격차는 오히려 커졌다. EU 집행위가 뒤늦게 경쟁사 슬롯 강제할당 등 사후 조치를 도입했지만 이미 피해는 누적된 상태였다. 일본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대응했다. JAL 파산 이후 ANA-JAL 양강 체제로 정비되었으나 일본 정부는 지방노선 유지의무를 강력히 법제화하고 운수권·슬롯 배분에도 적극 개입했다. 이로써 지방 공항 접근성과 공익노선이 일정 부분 유지될 수 있었다.이 모든 해외 사례가 주는 핵심 교훈은 단 하나다. 독과점의 후유증은 시간이 흐를수록 소비자 피해로 전환된다. 이제 한국도 동일한 길을 걷고 있다. 합병 초기에는 마일리지 통합, 환승 네트워크 확대 등이 강조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가격 인상 ▲서비스 유료화 확대 ▲지방노선 축소 ▲마일리지 가치 하락 ▲선택권 제한이 순차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독과점은 기업이 가격과 서비스를 독점 조정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한다. 소비자는 ‘서서히 끓는 물’ 속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피해를 막기 위해 정부의 사전적·구조적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다.첫째, 공정거래위원회와 국토교통부가 공동으로 가격·서비스 감시기구를 설치하고 즉각 시정 명령권을 행사해야 한다. 둘째, 지방노선 유지의무를 법제화해 지역 간 교통격차 확대를 차단해야 한다. 셋째, 마일리지 소비자 보호법을 제정해 마일리지 가치 하락과 소멸을 방지해야 한다.이 합병은 단순한 산업재편이 아니다. 국민 이동권과 소비자 선택권을 놓고 정부의 정책 역량이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정책은 타이밍이라고 한다. 지금의 선택이 10년 후 국민의 권익을 결정할 것이다.물론 경쟁력과 독과점은 동전의 양면이지만 독과점 체제 속에서도 소비자 권익을 방어하는 가장 확실한 해법은 ‘대안적 경쟁자’를 육성하는 것이다. 정부가 진정으로 국민 편에 서고자 한다면 지금부터라도 선택권을 확보하는 시스템 구축에 착수해야 한다. ‘대안적 경쟁자’가 해법…하늘의 문 더 활짝 열어야 무엇보다 외국 항공사의 국내 진입을 적극 확대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오픈스카이 협정 체결국은 20개국 수준에 불과하다. 미국은 100여 개국과 협정을 맺고 있다. 한국도 제3국 자유화 협정을 확대하고 인천공항 슬롯을 외항사에 적극 개방해야 한다. 이를 통해 국적 항공사 외에도 실질적인 경쟁 구조가 유지될 수 있다.국내 저비용항공사(LCC) 육성도 필수다. 대한항공-아시아나 통합은 LCC 계열사까지 흡수할 가능성이 높다. 정부는 독립적 LCC가 자생력을 가질 수 있도록 슬롯 우선 배정, 지방공항 활성화, 재정지원 등의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항공 외 대체 교통수단 확대도 병행돼야 한다. ▲수도권~지방 간 고속철도망 확충 ▲초고속철도 도입 ▲고속버스 국제노선 개발 등으로 항공 독과점 의존도를 줄일 필요가 있다.여기에 더하여 관광 산업에 미치는 영향 또한 세심히 살펴야 한다. 여행 수지만 맞추어도 경제 성장율이 거의 1% 오른다고 한다. 그야말로 굴뚝 없는 공장이 수출기업이 되는 또 하나의 길이다. 국내외 항공 노선과 좌석 선점은 관광산업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요소이다. 독과점 사업으로 인한 가격, 서비스, 끼워팔기와 같은 악습이 공정하게 개선되도록 정책당국은 히든카드를 마련해 외국 관광객 증대와 국민의 여행 욕구에 적합한 길을 찾아야 한다. 소비자단체의 역할도 더 커져야 한다. 항공소비자권익감시단을 활성화하고 집단소송제 도입을 검토해 마일리지 정책 변경 등 소비자 피해에 적극 대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부는 공공요금 비교 플랫폼을 구축해 소비자 스스로 가격·서비스 정보를 실시간 확인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K사와 A사의 합병은 기정사실화 되었지만 소비자 재앙이 될지 정상적 재편이 될지는 정부 정책에 달려 있다. 정부가 실질적 경쟁 기반 확대에 나선다면 독과점의 폐해를 상당 부분 차단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결국 미국과 유럽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게 될 것이다. 항공사도 외국 항공사를 불러들이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정부가 지켜야 할 것은 국적항공사의 시장 독점이 아니라 국민의 선택권이다.

2025.08.2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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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북극항로, 찾아온 부산의 시간 [북극항로를 뚫어라]①

산업 일반

한국의 북극항로 개척 시계가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중심에는 부산이 있다. 이재명 대통령의 핵심 공약 중 하나였던 해양수산부(이하 해수부) 부산 이전과 부산항 중심의 북극항로 개척 사업 등이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의 123대 국정과제에 공식 포함되면서다.정부는 해수부 부산 이전의 명분으로 북극항로를 내세우고 있다. 단순히 주소지를 옮기는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해상 루트를 국가 전략 차원에서 관리하기 위해서는 현장에 컨트롤타워가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이에 대한 움직임도 빠르다. 해양수산부는 최근 부산 이전 임시 청사 자리를 부산 동구에 있는 IM빌딩(본관 사용)과 협성타워(별관 사용)로 결정했다. 김성범 해수부 이전 추진기획단장(차장)은 “북극항로 시대를 선도하고 한국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창출하기 위해 해수부를 신속히 부산 이전을 추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태동하는 북극항로북극항로는 크게 두 갈래가 있다. 러시아 북부 해안을 따라 베링해협에서 바렌츠해까지 이어지는 북동항로(NSR·Northern Sea Route), 그리고 캐나다 북부 군도를 통과해 알래스카에서 그린란드, 북대서양으로 빠져나가는 북서항로(NWP·Northwest Passage)다. 두 항로 모두 얼음이 녹아야 열리기 때문에 오랫동안 ‘꿈의 항로’로 불렸다. 하지만 최근 기후 변화로 개방 기간이 늘면서 국제 해운업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북극항로의 매력은 '시간은 곧 돈'이라는 해운업의 공식에서 비롯된다. 우리나라에서 수에즈운하를 거쳐 유럽 최대 항구인 네덜란드 로테르담까지 연결되는 기존 항로는 2만km였으나, 베링해와 북극해를 거쳐 러시아 무르만스크까지 이어지는 북극항로를 이용하면 거리가 1만3000km로 35%나 단축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산하 국제교통포럼(ITF)은 이 구간에서 항해 기간이 32일에서 18일로 무려 2주 이상 줄어든다고 분석했다.또 대형 컨테이너선은 하루에만 연료비와 선원 인건비 등으로 수억 원이 소요된다. 조선업계 추산에 따르면 하루 운항 비용은 8만~12만 달러(약 1억~1억5000만원)에 달한다. 따라서 항해 시간이 2주 이상 단축될 경우 선박 한 척당 100만 달러(약 13억원)가 넘는 비용 절감 효과가 발생하는 셈이다. 여기에 선박 회전율이 높아지면서 연간 운항 횟수를 늘릴 수 있다는 점도 북극항로의 경제적 가치를 끌어올리는 요인이다.여러 이점 덕에 해운업계의 경쟁은 더욱 심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대표적인 사례가 '아이스 클래스'(ice class) 획득 경쟁이다. 아이스 클래스는 선박이 빙해역을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능력을 국제 선급이 인증한 등급을 말한다. 선체 구조와 추진 장치를 얼음 충격에 견딜 수 있도록 보강한 배만이 북극항로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업계 관계자는 “북극항로 운항이 본격화 될 경우 비용 절감 효과는 천문학적”이라며 “다만, 각 배에는 선급이 존재하는데 아이스 클래스 등급을 받아야만 자유롭게 항해가 가능하다. 따라서 아이스 클래스 등급을 가진 배를 쟁취하기 위한 경쟁은 더욱 심화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왜 부산인가북극항로의 경제성이 부각되면서, 정부도 빠르게 거점 마련에 돌입했다. 대표적인 지역이 부산이다. 부산은 세계 정상급 ‘환적항만’을 갖춘 도시다. 환적항만은 바다의 환승역으로 통한다. 초대형 모선이 실어온 컨테이너를 내려놓으면, 이 화물이 다시 소형 피더선(허브항만으로 모아주는 작은 배)에 옮겨져 최종 목적지로 향하기 때문이다. 단일 국가의 수출입 화물만으로는 초대형선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글로벌 선사들은 주요 거점 항만을 허브로 삼아 환적 네트워크를 짠다. 부산항은 아시아 물류 환적의 핵심 축으로 평가받는다. 지난해 부산항은 2440만TEU(1TEU는 6m 길이 컨테이너 1개)를 처리해 역대 최대를 찍었다. 이 가운데 환적이 1350만TEU다. 절반이 넘는 물량이 ‘바다의 환승’을 위해 부산을 거쳤다는 뜻이다. 한국 자체 수출입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지만, 일본·중국·러시아 등 동북아 지역 화물이 부산을 경유하며 국제 해운망이 형성된 덕분이다. 지리적 장점도 갖췄다. 중국 주요 항만과 일본 규슈·간사이 지역 항만에서 부산까지는 짧게는 하루, 길어야 이틀 항해면 도달 가능하다. 이는 북극항로와 동북아시아 환적 네트워크가 맞물릴 때 부산이 자연스럽게 거점이 될 수 있는 배경으로 꼽힌다. 부산항을 통하는 선사 대상 서비스 밀집도 역시 강점이다. 부산시 및 부산항만공사(BPA)에 따르면 지난 2023년 부산항 기항 국제 정기노선은 주당 287개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전 세계 주요 선사들이 몰려드는 만큼, 항만 내에는 급유·수리·선용품·정보통신(IT) 등 다양한 지원 서비스 기업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있다.벙커링(급유) 인프라가 대표적이다. 액화천연가스(LNG) 추진선에 대한 동시 벙커링·하역 실증이 이미 완료돼, 메탄올·암모니아 등 차세대 친환경 연료 공급 체계로 확장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선박 수리 및 컨테이너 정비 기능이 영도·신항 일대에 집중돼 있다. 아울러 항만 IT·디지털 서비스도 결합됐다. 부산항만공사의 체인포털(ChainPortal)은 세계은행과 국제항만협회가 선정한 항만 디지털화 우수 사례로 꼽힌다. 블록체인 기반의 해당 시스템은 실시간 터미널 정보 공유(IIS), 트럭 예약 시스템(VBS), 그룹 주문·컨테이너 자동 할당(TSS) 기능을 통해 트럭 대기시간을 약 15% 줄이고, 연간 4200만 달러에 달하는 성과를 창출한 것으로 평가된다.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부산은 이미 세계 5위의 물류 거점 항구다. 북극 항로가 개척되면 물류 운송 기간은 지금보다 최대 3분의 1로 줄어든다”며 “한국은 전체 수출 물량의 99%를 바다로 실어 나르는데, 그 물꼬가 트이면 부산은 아시아 최고의 항구로 도약할 수 있다. 지금은 상하이와 싱가포르가 물류 중심지로 꼽히지만, 북극항로 시대가 열리면 동북아에서 부산만큼 최적의 입지를 가진 곳은 없다”고 평가했다.

2025.08.2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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