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위기의 한국 도시정책, 정치가 만든 성장신화와 그늘[김현아의 시티라이프]
- [도시를 바꾸는 정치와 정치인, 그리고 시민]①
‘더 빨리 더 많이’…아직도 개발 중심의 정책 유지
산업화 흐름에 따라 도시도 유연하게 변화해야

[김현아 가천대 사회정책대학원 초빙교수·정책평가연구원 연구위원·전 국회의원] 오늘날 도시의 모습은 정치와 깊은 관련이 있다. 도시를 관통하는 도로의 위치, 하늘을 채우는 빌딩의 높이와 배치, 시민들이 숨 쉬는 공원과 공공시설의 형태, 심지어는 도시의 복지수준까지 모두 정치적 결정의 산물이다. 이처럼 정치권력과 정책은 도시의 공간 구조를 바꾸고 시민들의 삶의 방식을 형성해 왔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급속한 발전을 경험한 국가에서는 개발 중심의 정책 결정이 도시의 흥망성쇠를 좌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정치와 도시 간의 밀착 관계는 긍정적 성과만 낳은 것은 아니다. 크고 작은 부작용과 한계 역시 적지 않았다. 인구감소와 저성장 시대를 맞이한 지금 고도성장과 개발중심의 도시계획을 가능하게 했던 정책과 정치의 변화가 가장 절실하다. 마침 우리는 도시정책과 정치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조기 대선(2025년)과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2026년)를 앞두고 있다.
한국의 도시계획은 오랫동안 성장과 개발의 신화를 구축해 왔다. 인구와 경제가 폭발적으로 팽창하던 시기에는 새로운 신도시 건설과 대규모 인프라 투자가 도시경제와 시민 삶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졌다. 인구는 정점을 찍고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합계출산율은 세계 최저 수준이다. 지방도시나 농어촌만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도시 정책은 여전히 과거의 성장 논리에 갇혀 있다. 인구가 줄어드는데도 곳곳에서 신규 택지 개발과 거대 쇼핑몰을 유치하고, 랜드마크 건설 계획이 추진된다.
도시 복지분야도 마찬가지다. 보여주기식 성과에 급급해 미래를 담보로 잡는 포퓰리즘 정책이 곳곳에서 도시의 미래를 갉아먹고 있다. 단기 성과에 집착한 프로젝트로 인해 전국 각지에는 애물단지가 된 시설들이 적지 않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대형 체육관이나 문화회관은 텅 비어 운영비만 축내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공항, 철도 등 SOC 투자도 지역 표심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남발되면서 실제 수요와 무관한 ‘하얀 코끼리’(white elephant)들이 양산됐다. 하얀 코끼리란 겉은 화려하지만 활용 가치가 적고 관리 비용이 많이 들어 처치 곤란한 대상을 일컫는 말이다. 경제 분야에서는 투자 규모에 비해 유지·운영에 비용이 많이 들어 수익을 내기 어려운 사업이나 프로젝트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다.
도시계획은 원래 도시의 장기적 비전과 공공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청사진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시장(市長)이나 정치인의 임기 내 성과를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선거철마다 대형 개발 공약이 쏟아지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임자의 도시 프로젝트가 백지화돼 예산과 시간이 낭비된다. 정권에 따라 춤을 추니 일관된 장기 전략은 실종되고,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들의 몫이 된다.
예컨대 서울의 뉴타운 개발 사업이나 문재인 정부의 전국적 도시재생사업추진은 초기에는 표심을 얻는 데 활용됐지만, 정권 교체를 거치며 계획이 뒤엉켜 주민들과 참여자들에게 혼란과 손실을 안겼다. 도시정책이 정치 논리에 휘둘릴 때 도시는 거대한 실험장이 돼버리고, 지속가능한 발전은 더 멀어질 뿐이다.

성장에서 공존으로: 도시정책의 새로운 패러다임
이제는 도시를 바라보는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꿀 때다. 더 이상 숫자로 표현되는 성장 지표가 아닌, 시민들의 삶과 도시공동체를 중심으로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아이부터 장애인, 노인까지 보행자가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는 거리 ▲젊은 세대가 주거 부담 없이 정착할 수 있는 주택 ▲아이를 낳고 키우기 좋은 공동체가 있는 도시 ▲모두에게 개방된 녹지와 여가 공간이 충분한 도시를 만드는 것이 목표가 돼야 한다.
개발과 보존이 서로 상반된 목표가 아니라 역사와 문화유산을 존중하는 개발이 도시 정책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시민 참여의 폭과 방법도 변화가 필요하다. 도시를 가장 잘 아는 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다. 전문가와 공무원, 정치인뿐만 아니라 주민들이 좀 더 도시를 위한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도시 거버넌스 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속도조절이 필요하다.
고도성장시대의 빠른 의사결정 방식을 그대로 유지한 채 시민 참여만을 확대한다면, 오히려 갈등이 커질 수 있다. 도시 문제는 복잡하고 정답이 없기 때문에,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지혜와 경험을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 근본적인 속도조절 없이, 형식적인 시민 공청회나 목소리 큰 일부만을 대변하는 협의체, 형식적인 주민참여예산과 같은 절차만 늘린다면 문제해결에 다가갈 수 없다.
최근 벌어지는 잦은 산불과 도심의 싱크홀 사태는 4~5년 단위 임기 계산을 뛰어넘는 초당적 장기 플랜과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의 정책에는 내일이 보이지 않는다. 정책과 정치인을 선택하는 주민들 역시 미래를 위한 고민보다는 당장의 이익에 흔들린다. 정치인이 먼저 바뀌어야 할까, 시민의 선택이 먼저 바뀌어야 할까. 어쩌면 도시의 미래는 이 물음의 답에 달려있는지도 모른다.
역사를 돌아보면 도시의 흥망은 늘 변화에 대응하는 방식에서 나뉘었다. 산업화 흐름에 발맞춰 도시를 유연하게 재편한 곳은 번영을 이어갔지만, 과거의 방식에 안주한 도시는 쇠퇴를 면치 못했다. 한국의 도시들도 예외가 아니다. ‘더 빨리 더 많이’를 강조하며 고도성장기를 견인했던 개발 중심의 정책은 당시에는 효과적이었으나 이제는 더 이상 만능 해법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직면한 인구 구조 변화와 기후위기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근본적인 정책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방향을 바꾼다면, 충분히 다른 미래를 만들 수 있다. 과거에는 정책이나 제도가 미흡해도 정치력이 뒷받침된다면 해결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제도나 정책적으로 가능한 일조차 정치적 대립과 갈등 때문에 추진되지 못하는 일이 많아졌다. 오늘날 정치는 힘을 잃고 무력해진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도대체 망가진 정치를 어떻게 회복시켜야 하는가, 정치를 살리는 시민의 선택은 어떤 것인가, 도시를 살릴 정치인을 어떻게 가려낼 수 있을까.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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