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일반
한국 기업 글로벌 경쟁력 ‘70점’ 반드시 보완해야 할 ‘아킬레스건’은? [CEO 110인 긴급진단]①
- 글로벌 경쟁 더 이상 시장 규모 문제 아냐
세계 경제 변화 속 어떤 위치 서 있는지가 경쟁력 좌우
[이코노미스트 원태영 기자] 세계 경제의 질서가 전례 없는 속도로 재편되고 있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의 심화 ▲글로벌 공급망(GVC)의 블록화 ▲인공지능(AI)이 촉발한 산업 생태계의 근본적인 재구조화 ▲예측 불가능한 지정학적 리스크까지. 기업 경영을 둘러싼 외부 환경의 변동성이 극심해지면서 과거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성장의 공식들이 일제히 유효기간을 다하고 있다.
과거 한국 기업의 글로벌 전략을 관통하는 핵심 질문은 단순했다. “해외 시장에 진출했는가, 얼마나 팔았는가”라는 양적 팽창에 집중했다. 하지만 오늘날 글로벌 시장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훨씬 더 정교하고 날카롭다. “당신의 기업은 지금 세계 경제의 어느 위치에 서 있는가.” 즉, 점유율 확대를 넘어선 ‘글로벌 포지셔닝’(Global Positioning)이 기업의 생존과 직결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110인의 리더가 진단한 한국 경제의 '현주소'
[이코노미스트]는 이 같은 거대한 패러다임 변화에 대응해 국내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CEO) 110명을 대상으로 글로벌 대응 역량을 심층 조사했다. 이번 기획은 개별 기업의 성공적인 해외 진출 사례를 나열하는 단편적인 접근에서 벗어나 한국 기업이 점유한 세계 경제적 좌표를 구조적으로 진단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CEO 설문 결과와 글로벌 사례 분석을 통해 도출된 새로운 경쟁력의 척도는 네 가지 핵심 축으로 요약된다. ▲글로벌 노출도 ▲전략적 민첩성 ▲거시 환경 통합 ▲시장·문화 감응도 등이다.
이제 기업의 경쟁력은 단순히 국경을 넘는 능력만으로 평가받지 않는다. ▲복합 위기 속에서 글로벌 공급망의 혈맥을 얼마나 장악하고 있는지 ▲산업의 새로운 규칙을 제정할 만큼의 영향력을 확보했는지 ▲변화하는 소비자 가치관을 실시간으로 전략에 반영할 수 있는지가 성패를 가른다.
그간 한국 기업의 글로벌 역량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시도는 드물었다. 이번 진단은 한국 기업이 직면한 ‘글로벌 좌표’를 구조화해 분석함으로써, 우리 기업들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K-산업’이 과거의 성공 신화를 뒤로하고 재편되는 세계 경제 질서 속에서 새로운 ‘골든 포지션’을 선점할 수 있을지 그 구체적인 해법을 모색해 본다.
전 세계적으로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고 공급망 재편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우리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차지하는 객관적인 위치를 보여주는 지표가 나왔다. 110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글로벌 포지셔닝 지수’(GPI) 분석 결과에 따르면, 우리 기업의 평균 점수는 100점 만점에 70.5점으로 나타났다. 이는 글로벌 시장에서 생존을 넘어 경쟁력을 확보한 수준이나, 상위권 도약을 위한 과제 역시 존재함을 명확히 보여준다.
GPI는 ▲글로벌 노출도(25%) ▲전략적 민첩성(30%) ▲거시 환경 통합(20%) ▲시장·문화 감응도(25%)라는 네 가지 기둥 위에 세워진 지표다. 이번 조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전략적 민첩성’(평균 20.9점)이 기업들의 핵심 강점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는 변화하는 트렌드에 빠르게 반응하고 현지 시장의 요구를 수용하는 데는 능숙하다는 의미다.
반면 ‘거시 환경 통합’ 점수는 평균 12.4점으로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났다. 지정학적 리스크나 글로벌 규제 변화와 같은 거대 담론을 개별 기업의 경영 전략과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역량은 여전히 보완해야 할 ‘아킬레스건’으로 지목됐다.
글로벌 포지셔닝 지수 분석 결과, 평균 70.5점
이번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기업들은 전략적 역량과 글로벌 노출 정도에 따라 네 가지 유형으로 뚜렷하게 나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글로벌 설계자는 GPI 75점 이상의 리딩 그룹으로 110개 기업 가운데 20개 기업이 이 유형에 속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글로벌 노출도(22.3점)와 전략적 민첩성(24.6점)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글로벌 설계자 그룹은 명실상부한 글로벌 리더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차세대 글로벌 유형으로는 59개 기업이 속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은 우리 산업의 ‘두터운 허리’를 자처한다. 잠재력은 충분하지만 거시 환경 통합(12.0점) 등 일부 영역의 보완이 시급한 ‘추격자’ 단계다.
내수 강자 유형은 국내 시장 지배력은 탄탄하지만 글로벌 확장성이 부족한 22개 기업이 포함됐다. 글로벌 노출도 점수가 13.5점에 불과해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기 위한 전략적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위험 노출형에는 9개 기업이 속한 것으로 조사됐다. 전략적 민첩성에서 7.8점을, 글로벌 노출도에서 8.4점을 받았으며 거시 환경 통합은 4.7점, 시장·문화 감응도에서는 5.4점을 기록했다. 4개 지표 모두에서 최하위권에 머물러 외부 충격에 매우 취약한 상태로 조사됐다.
글로벌 노출도(X축)와 전략적 대응력(Y축)을 시각화한 매트릭스를 보면, 대다수 기업이 우상향을 목표로 분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GPI 60점 이상인 기업이 전체의 72%에 달해, 전반적인 체급은 상향 평준화된 모습이다.
하지만 ‘전략 강점형’과 ‘노출 강화형’에 머물러 있는 기업들이 ‘글로벌 선도형’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단순한 민첩성을 넘어선 ‘체계적인 글로벌 연결성’ 확보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거시 환경 통합 보완 시급해
이번 조사 결과는 우리 기업들이 ‘글로벌 설계자’로 거듭나기 위한 명확한 나침반을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는 거시 환경 모니터링의 고도화다. 단순히 정보를 수집하는 수준을 넘어, 글로벌 변수가 비즈니스에 미칠 영향을 시나리오별로 수립해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두 번째는 글로벌 네트워크 확장이다. 파트너십을 통해 글로벌 노출도를 인위적으로라도 끌어올려야 시장 장악력을 높일 수 있다. 세 번째는 데이터 기반의 의사결정 체계 구축이다. 우리의 강점인 민첩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경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실시간 데이터에 기반한 빠르고 정확한 판단이 필수적이다.
네 번째는 현지화 전략을 강화하는 것이다. 현지 소비자의 인사이트를 통합해 맞춤형 가치를 제공할 때, 비로소 시장 점유율을 넘어선 시장 선도권을 확보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 기업들은 훌륭한 엔진(전략적 민첩성)을 가졌지만, 항로를 파악하는 레이더(거시 환경 통합)의 보완이 필요한 상황이다. 70.5점이라는 점수는 안주하기엔 낮고, 실망하기엔 높은 점수다. ‘차세대 글로벌’의 틀을 깨고 ‘글로벌 설계자’의 반열에 오르기 위한 정교한 체질 개선이 절실한 시점이다.
글로벌 경제라는 거대한 체스판 위에서 우리 기업들이 단순한 ‘말’에 머무를 것인지, 판을 흔드는 ‘설계자’가 될 것인지 결정할 골든타임이 지나가고 있다. 이번 GPI 유형 분석이 그 정교한 전략 수립의 첫걸음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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